프레데릭 레이턴의 타오르는 6월, "액자 값보다 쌌던 그림이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였던 프레데릭 레이턴(Lord Frederick Leighton, 1830-1896)은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사였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언어를 마스터했고, 음악과 미술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키가 큰 미남에 인품과 사교성까지 훌륭했지요. 20대 중반에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어 부를 쌓았고, 34세에는 왕립 예술원의 준회원이 되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완벽해 보였던 레이턴에게 딱 하나 없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는 '일과 결혼한 사람'이 꽤 많았는데, 레이턴 역시 일 중독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51세가 되어서야 레이턴은 평생 사랑할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동료 화가의 화실에서 모델 일을 하던 22세의 여성을 만난 후, 레이턴은 즉시 그녀를 자신의 전속 모델로 고용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도로시 딘(Dorothy Dene, 1859-1899)'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자기 집 바로 옆에 그녀와 가족이 살 집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레이턴은 딘이 배우로서 성공하는 데 결혼이 걸림돌이 될까 배려한 것입니다. 레이턴은 평생 딘을 후원했고, 거액의 유산을 남길 만큼 그녀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바로 이 도로시 딘이 <타오르는 6월 Flaming June>의 모델입니다.
![]() |
<타오르는 6월> 1895년, 120.6cm x 120.6cm,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 |
작품 속 아름다운 여인이 대리석 의자 위에서 잠들어 있고, 뒤쪽 테라스 너머로는 해질녘의 햇살이 바다 위를 비추고 있습니다. 해질녘의 빛을 받아 투명한 오렌지색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은 더욱 붉게 타오르는 듯합니다. 여인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홍조와 상기된 귀 때문에 사실은 잠든 척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여인의 독특한 포즈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무덤에 조각한 <밤>에서 영감을 받아 여러 번의 스케치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스케치 중 네 점은 누드였고 한 점만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여인의 포즈와 평온한 배경은 지중해의 따뜻한 오후를 연상시키며, 여름의 나른함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독성이 매우 강한 협죽도(Oleander)가 보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더 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협죽도는 잠과 죽음 사이의 연약한 경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 |
협죽도(Oleander) |
이 작품은 1895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레이턴은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아 영국 화가 최초로 세습 남작 작위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고전주의적인 화풍은 모더니즘의 물결에 밀려 인기가 시들해졌고 그의 이름도 잊혀 갔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타오르는 6월>의 작품 가격이 액자 값보다 저렴해지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는 단돈 50파운드(현재 가치 약 100만 원)에도 팔리지 않다가, 결국 미술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미술이 재평가받으면서, 이 작품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명작의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다시 조명받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레이턴이 죽은 후 딘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레이턴 사망 3년 후, 딘도 병에 걸려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이턴 사후 딘이 다른 화가의 모델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가 레이턴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집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