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낭만주의의 거장 프리드리히 "자연의 숭고함과 인간의 뒷모습을 추구"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는 무한한 자연 앞에 서 있는 인간, 특히 그 뒷모습을 즐겨 묘사했습니다. 그는 회화를 통해 창조주의 메시지를 암시하며, 감상자에게 장엄하고 신비한 자연을 통한 경외감과 숭고함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습니다.
"너의 내면이 지닌 목소리에 정확히 귀 기울여라.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진정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유일하고 진실한 원천은 우리의 심장, 순수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감정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샘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은 그림은 단지 인위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
프리드리히의 생애
- 1774년 9월 5일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출생
- 1794년 코펜하겐과 드레스덴에서 미술 공부
- 1801년 화가 필리프 오토 룽게와 친분을 맺음
- 1802년 뤼겐 섬의 풍경에 매료됨
- 1807년 소묘를 넘어 유화 작업에 집중
- 1808년 <산속의 십자가>와 <바닷가의 수도사> 완성
- 1818년 크리스티아네 카롤리네 봄머와 결혼
- 1819년 첫 딸 엠마 출생
- 1824년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부임
- 1840년 5월 7일 드레스덴에서 사망
프리드리히는 당시 스웨덴령이었던 발트해의 항구도시 그라이프스발트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세에는 발트해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려던 형이 익사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그는 성인이 되어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목에 남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평생 턱수염을 길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엄격한 개신교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시인이자 목사인 코제가르텐(Gotthard Ludwig Kosegarten)으로부터 '자연이 곧 신의 계시'라는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794년, 프리드리히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던 코펜하겐의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폐허나 고대 신전 등을 수없이 소묘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옮기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익혔고, 이는 훗날 풍경화를 자유자재로 재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798년 드레스덴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의 아카데믹한 화풍에 실망하고 기존 미술계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대신 그는 늘 혼자 독일의 산악지대를 여행하며 자연을 스케치했습니다. 그에게 자연과의 만남은 온 세상에 존재하는 창조주를 느끼고 생명력과 교감하는 은밀하고 고독한 행위였습니다.
1810년 프로이센의 빌헬름 황태자가 베를린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 <바닷가의 수도사>와 <떡갈나무 숲 속의 수도원>을 구입하면서 그의 예술은 결정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1820년대부터는 훗날 러시아의 니콜라우스 1세가 된 대공이 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1818년, 44세의 나이에 결혼한 후 그의 그림은 한결 밝아지는 변화를 보였습니다. 그림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여인은 대부분 그의 젊은 아내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작품의 내면세계를 극도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친구들조차 기이하게 느꼈던 그의 화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이젤과 책상, 의자 하나뿐이었고, 심지어 그림을 그릴 때 외에는 물감 상자나 헝겊조차 옆방으로 치워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외적인 대상이 그림의 내면세계를 방해한다고 믿었으며, 그의 화실은 수도자의 명상실과도 같았습니다.
당시 독일의 대문호 괴테 역시 그의 그림에 매료되어 1810년 화실을 직접 방문했고,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 감명받아 직접 그림을 배울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그림은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며 어두운 색조와 체념적인 분위기를 띠게 되었고, 점차 대중에게서 외면당했습니다. 1820년대 중반 이후 질병으로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1835년 뇌졸중으로 사지가 마비되었고, 1840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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