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4월, 파리에서 한 화가가 친구에게 편지를 씁니다. 색 판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당신이라면 이보다 더 나은 것은 꿈꿀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것을 꿈꾸고, 동판 위의 색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했고, 그때 이미 인상파 화가로 파리에 자리를 잡은 뒤였습니다.
이 글은 그 문장에서 출발합니다. 카사트를 설명할 때 사람들은 보통 그를 어느 무리에 넣을지부터 정합니다. 인상파에 속한 미국인, 여성 화가, 누군가의 제자. 그런데 그의 생애를 연도순으로 따라가 보면 이상하게 되풀이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스스로 고르는 장면입니다. 이 글은 그 선택들을 차례로 따라갑니다.
• 한 줄 정의: 살롱에 일곱 해에 걸쳐 작품을 건 뒤 인상파 독립전으로 건너갔고, 마흔 중반에 색채 판화 연작에 매달린 미국 화가
• 생몰: 1844년 미국 앨러게니시티(Allegheny City) 출생 ~ 1926년 프랑스 르메닐테리뷔(Le Mesnil-Théribus) 사망
• 국적·활동지: 미국 국적, 파리와 그 근교에서 활동
• 활동 분야: 회화, 파스텔, 색채 판화
• 대표작: 〈오페라 극장에서〉, 〈푸른 안락의자에 앉은 소녀〉, 〈아이의 목욕〉, 〈보트 타기〉, 색채 판화 열 점 연작
필라델피아에서 파리로
메리 카사트는 184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니시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피츠버그 노스사이드로 편입된 동네입니다. 열여섯 무렵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에 들어가 석고상을 그리는 반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그 학교를 떠난 이유는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스물한 살 무렵, 미국에는 유럽 거장들의 그림이 없다는 사실에 답답해했다는 것입니다. 배울 실물이 없다는 불만이었습니다. 이 서술은 대학 도서관이 정리한 전기에 실려 있고, 미술관의 1차 기록으로 대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그렇게 전해진 이야기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분명합니다. 입학하고 다섯 해쯤 뒤에 그는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확인되는 첫 번째 선택입니다.
파리를 거처로 삼은 연도는 기관마다 갈립니다.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은 1873년까지는 파리가 그의 집이 되어 있었다고 적고,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The Art Institute of Chicago)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도서관은 1874년으로 적습니다. 한 해 차이지만 두 최상위 기관이 서로 다른 값을 내놓고 있으니, 여기서는 갈린 채로 두겠습니다. 1870년대 초에 그는 파리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파리 국립미술학교는 여성에게 정식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은 1897년의 일입니다. 카사트가 파리에 자리를 잡던 무렵보다 스무 해 넘게 뒤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가 아니라 개인 화가에게 배우고 루브르에서 모사하며 공부했습니다. 그와 별개로 보스턴 미술관은 그가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보수적인 방식과 그들이 여는 전시에도 싫증을 냈다고 설명합니다. 두 가지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제도의 문이 닫혀 있었다는 것과 그가 그 문 안쪽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함께 성립합니다.
살롱 화가였던 시절
카사트의 그림이 처음 공개된 곳은 인상파 전시가 아니라 파리 살롱입니다. 1868년에 처음 걸렸고, 이어 1870년, 1872년, 1873년, 1874년, 1875년, 1876년 살롱에 걸렸습니다. 일곱 해입니다. 그가 인상파 독립전에 작품을 낸 것은 1879년, 1880년, 1881년, 1886년 네 번입니다.
순서를 그대로 보면 이렇습니다. 살롱이 먼저였고, 횟수도 살롱이 더 많습니다. 처음부터 제도 밖에 서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868년부터 1876년까지 아홉 해 사이에 그는 일곱 해에 걸쳐 살롱에 작품을 걸었습니다. 매번 낸 것이 다 걸린 것은 아닙니다. 1875년에는 낸 작품 가운데 일부가 거절당했습니다. 1869년과 1871년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선택입니다. 나가는 쪽이 아니라 통과하는 쪽을 먼저 골랐습니다.
비어 있는 두 해 가운데 1871년은 사정이 남아 있습니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1871년 7월에 쓴 편지에 그는 작업실을 정리했고 여섯 주 동안 붓을 잡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유럽으로 돌아갈 길이 보이기 전에는 다시 잡지 않겠다는 말도 함께 있습니다. 그해 가을 피츠버그의 가톨릭 주교가 이탈리아 파르마에 있는 코레조(Correggio)의 그림을 두 점 모사해 달라고 위촉하면서 여비를 대 주었고, 그는 그 돈으로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위촉한 사람의 직함을 주교로 적는 자료와 대주교로 적는 자료가 갈립니다. 1869년이 왜 비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파리에서 살롱이 어떤 자리였는지, 심사가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거부했는지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생애를 다룬 글에서 따로 자세히 다뤘습니다. 카사트가 아홉 해에 걸쳐 거듭 상대한 것이 바로 그 심사대입니다.
그가 이 자리를 떠난 경위를 본인의 말로 확인해 주는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앞 절에 적은 보스턴 미술관의 진술, 곧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방식과 그들이 여는 전시에 싫증을 냈다는 문장 하나입니다. 어느 해에 마음을 굳혔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초대를 받아들이다
1877년 살롱에서 그의 작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에드가 드가(Edgar Degas)가 그에게 인상파 무리와 함께 작품을 내보자고 청했습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와 보스턴 미술관의 해설에 그 순서가 적혀 있습니다. 그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실제로 작품을 건 것은 1879년 전시입니다. 여기에 두 해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달력을 펴 보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상파가 파리에서 연 독립전은 모두 여덟 번입니다. 1874년, 1876년, 1877년, 1879년, 1880년, 1881년, 1882년, 1886년입니다. 1877년 전시는 그해 4월에 이미 끝났고, 1878년에는 전시가 아예 열리지 않았습니다. 곧 1877년의 초대 다음에 열린 독립전이 1879년의 네 번째 전시였고, 그는 그 전시에 처음 작품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에 그린 그림이 지금 보스턴에 있습니다. 1878년작 〈오페라 극장에서〉입니다. 보스턴 미술관이 지금 쓰는 공식 제목은 In the Loge이고, At the Opera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프랑세 극장에서, 스케치는 처음 출품할 때 붙인 제목입니다. 이 그림은 미국에 전시된 그의 첫 인상주의 회화이기도 합니다. 1878년 보스턴에서 걸렸을 때 한 평자는 이 그림이 눈길을 붙든다고 했고, 대다수 남성의 힘을 넘어섰다고 썼습니다. 한 해 앞선 1877년에는 그의 부모와 여동생 리디아가 파리로 건너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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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트, 〈오페라 극장에서〉, 1878년, 캔버스에 유채, 81.3 × 66.0 cm이다. 보스턴 미술관 소장, 10.35. 검은 옷의 여인은 오페라글라스로 화면 왼쪽 어딘가를 보고, 왼쪽 위 건너편 칸막이석의 남자는 같은 도구로 이 여인을 본다. 두 시선이 어긋나는 각도를 보라. |
보스턴 미술관은 이 화면의 구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여인은 건너편을 봅니다. 왼쪽 위의 남자는 그 여인을 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다 보는 사람은 그림 앞에 선 관람자입니다. 관람자가 그 원을 닫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설은 대비도 명시합니다. 르누아르나 드가가 그린 극장의 여인들이 금박 액자 안에 전시된 것처럼 보이는 데 비해, 카사트의 여인은 눈에 띄게 더 능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극장을 다룬 그림에서 여자는 대개 보이는 쪽이었습니다. 카사트는 보는 쪽에 여자를 앉혔습니다. 이것이 그가 고른 자리입니다.
동판 위의 색
1890년 봄, 파리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일본 판화를 모은 전시가 열렸습니다. 회기는 4월 25일부터 5월 22일까지입니다. 이 날짜는 그해 파리에 붙은 전시 포스터와 미술학교가 펴낸 전시 도록의 표제에 그대로 인쇄돼 있고, 두 인쇄물 모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디지털로 공개돼 있습니다. 도록에 번호를 붙여 실은 항목은 725번까지입니다. 서문을 쓴 사람은 이 전시를 꾸린 화상 지크프리트 빙(Siegfried Bing)입니다.
그런데 카사트가 그 편지를 쓴 것은 4월 15일입니다. 공식 개막 열흘 전의 이 편지에는 이미 색채 동판에 대한 열의가 적혀 있습니다. 색 판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당신이라면 이보다 더 나은 것은 꿈꿀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것을 꿈꾸고, 동판 위의 색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전시를 4월 15일에 문을 연 것으로 적는 영어권 자료가 있습니다. 그 날짜를 따르면 편지를 쓴 날과 개막일이 같은 날이 됩니다. 그러나 1890년에 인쇄된 포스터와 도록이 적어 둔 회기는 4월 25일부터입니다. 걸린 점수를 760점으로 적는 자료도 있는데, 도록 안에서 그 숫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때 찍힌 두 물건을 따르겠습니다.
이 글이 중심에 두는 문장이 이것입니다. 앞 절들에서 그가 고른 것들은 모두 남이 만들어 둔 자리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떠날지, 살롱에 낼지, 초대에 응할지. 그런데 이 편지는 다릅니다. 여기서 그는 자기 의지를 직접 적고 있습니다. 게다가 공식 개막일보다 앞선 날짜입니다. 무엇을 미리 보았는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이 글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그가 그 전에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1844년생이니 그때 그는 마흔다섯 해를 넘긴 나이였고, 이미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로 자리를 잡은 뒤였습니다. 그 사람이 색채 판화 하나에 매달리겠다고 쓴 것입니다. 판화 자체는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879년 무렵부터 이미 동판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거기에 색을 올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였습니다. 카사트가 첫 문장을 색 판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당신이라면으로 시작한 것을 보면, 모리조 역시 그 방향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카사트가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인상파 안에서 각자의 길을 걷던 화가였고, 이 편지는 그 둘 사이에 오간 실무 대화에 가깝습니다. 모리조가 인상파 안에서 무엇을 그렸는지는 그의 〈요람〉을 다룬 글에서 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1890년 4월 카사트가 모리조에게 보낸 것으로, 서한집 『카사트와 그의 주변: 서한 선집(Cassatt and her Circle: Selected Letters)』에 실려 있습니다.
편지에 적은 말을 그는 곧바로 실행합니다. 1890년에서 1891년 사이에 색채 판화 열 점을 만들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이 연작을 온전한 한 벌로 갖고 있어서, 열 점이 무엇인지가 흐트러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오후의 차 모임, 여인의 목욕, 머리 손질, 승합마차 안에서, 어머니의 어루만짐, 램프, 목욕, 가봉, 편지, 어머니의 입맞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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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트, 〈여인의 목욕〉, 1890~1891년, 드라이포인트와 애쿼틴트로 동판 세 장에서 색을 찍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6.2.2. 줄무늬 치마와 바닥의 잎무늬와 세면대의 나뭇결이 저마다 다른 무늬인데 모두 같은 평면 위에 놓인다. 아래 여백에 연필로 쓴 인쇄 기록과 서명이 남아 있다. |
기법을 한 줄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흔히 드라이포인트와 애쿼틴트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메트로폴리탄의 기재를 열 점 전부 읽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소프트그라운드 에칭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은 열 점 가운데 셋입니다. 어머니의 어루만짐, 램프, 목욕입니다. 나머지 일곱 점에는 그 표기가 없습니다. 동판 수도 같지 않습니다. 대부분 세 장에서 찍었지만 어머니의 입맞춤 한 점만 두 장입니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이 연작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은 드라이포인트나 소프트그라운드로 긋고, 색은 애쿼틴트로 미리 처리해 둔 판면 위에 따로 섞은 물감을 직접 올렸다는 것입니다.
찍은 부수는 스물다섯 부입니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가 가진 〈여인의 목욕〉 한 장에는 작가와 르루아 씨가 인쇄, 메리 카사트, 25부라는 글씨가 직접 적혀 있습니다. 미술관이 나중에 정리한 기록이 아니라 종이 위에 남은 글씨이니, 근거로서는 가장 단단한 축에 듭니다. 그가 인쇄기 앞에 직접 서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작업은 판화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그 일본 판화 전시 이후 카사트의 회화가 달라졌다고 봅니다. 색은 그대로 풍부하되 구성이 크게 단순해졌고 양식화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1893년에 그린 〈아이의 목욕〉을 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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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트, 〈아이의 목욕〉,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01.3 × 67.3 cm이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소장, 1910.2. 시점이 두 사람보다 높은 곳에 있어 바닥과 대야를 내려다보게 된다. 벽지와 실내복과 깔개가 서로 다른 무늬인데도 화면이 깊이 없이 평평하게 읽히는 것을 보라. |
두 사람 다 관람자를 보지 않습니다. 시선은 물에 담긴 발로 모여 있고, 화면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혀 있습니다. 벽지의 꽃무늬, 실내복의 줄무늬, 깔개의 기하 무늬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는데도 그림은 얕은 상자처럼 납작합니다. 판화 열 점에서 익힌 것이 회화로 넘어온 자리입니다.
그림을 사게 만든 사람
이 무렵 그는 다른 큰일도 맡고 있었습니다. 1892년에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벽화 의뢰를 받아들였고, 그 작품은 이듬해 박람회 여성관에 걸렸습니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는 이 의뢰를 전례가 없는 일로 적어 두었습니다. 다만 무엇을 기준으로 전례가 없다는 것인지까지는 밝혀 두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그가 그 큰 벽을 맡았다는 사실까지만 적겠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자기 그림을 그리는 일과 나란히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인 수집가들에게 무엇을 사야 하는지 조언하는 일입니다. 학술지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옛 거장에 대한 깊은 안목과 수집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관심을 주로 헨리 오즈번 해블마이어(Henry Osborne Havemeyer)와 그의 아내 루이진 엘더 해블마이어(Louisine Elder Havemeyer) 부부에게 조언하는 방식으로 썼습니다.
이 일은 그 무렵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1873년 봄, 열여덟 살이던 루이진 엘더가 가족과 함께 파리로 건너와 세 해를 머뭅니다. 그 시기에 그는 카사트를 소개받았고, 카사트의 권유로 생애 첫 미술품을 샀습니다. 드가의 파스텔 한 점이었습니다. 루이진이 해블마이어와 결혼하는 것은 1883년이고 카사트가 부부의 조언자가 되는 것은 그 뒤이지만, 권하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관계는 그보다 열 해 앞서 시작돼 있었습니다. 그 첫 구입이 정확히 몇 년의 일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목은 양쪽으로 어긋나기 쉽습니다. 해블마이어 컬렉션이 통째로 그의 공로였다는 식으로 부풀릴 수도 없고, 곁에서 거들기만 했다는 식으로 줄일 수도 없습니다. 전부 그가 만들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핵심 구입에서 그의 조언은 문서로 확인됩니다. 마네의 〈뱃놀이〉처럼 그가 권해서 그 부부에게 들어갔다고 적히는 작품이 있고, 쿠르베도 그가 사들이기를 권한 화가로 꼽힙니다. 다만 그 컬렉션 전체에서 어느 작품이 그의 조언을 거쳐 왔는지까지 낱낱이 정리해 둔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의 자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양이 아니라 밀도입니다. 해블마이어라는 이름을 달고 메트로폴리탄에 들어온 유럽 회화는 126점인데, 그 안에 드가가 서른세 점,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가 스물한 점, 마네가 아홉 점 들어 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미술관 한 곳이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어떻게 갖추게 되었는지가 이 백여 점에 압축돼 있습니다.
그의 개입이 문서로 또렷하게 남은 사례는 따로 있습니다. 1906년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가 엘 그레코(El Greco)의 〈성모 승천〉을 사들일 때, 카사트는 그 미술관 회장 찰스 L. 허친슨(Charles L. Hutchinson)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기회를 알렸습니다. 미술관이 자기 소장품 해설에 그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두고 편지를 썼는지가 모두 특정되는 사례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작업과 나란히 수집가와 미술관의 구입에도 조언했습니다. 그 결정들은 그의 서명이 붙지 않은 채 미국에 남았습니다. 참고로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가 카사트 본인의 그림을 처음 사들인 것은 1910년이고, 그 첫 작품이 앞 절에서 본 〈아이의 목욕〉입니다.
1915년, 그가 작품을 건 자리
1915년 뉴욕의 크뇌들러 화랑(Knoedler Gallery)에서 전시가 하나 열립니다. 이 전시를 조직한 사람은 루이진 해블마이어입니다. 그때 그는 이름난 수집가인 동시에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였고, 이 전시는 참정권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전시의 정식 명칭은 옛 거장과 현대 화가의 대표작 대여전(Loan Exhibition of Masterpieces by Old and Modern Painters)입니다. 1915년 4월 6일에 초대객을 위한 사전 관람이 있었고, 7일부터 24일까지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입장료 수익은 그해 참정권 운동을 돕는 데 쓰였습니다. 이 사항들은 전시 도록에 적혀 있습니다.
카사트는 그 자리에 자기 작품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전시가 열리기 한 해 전인 1914년 5월, 그는 해블마이어에게 편지를 써서 전시가 열린다면 여성 참정권을 위한 전시이기를 바란다고 적었습니다. 그 뒤에는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을 빌려 오는 일을 주선하는 편지를 쓰며 전시 구성에 조언했습니다. 곧 그는 이 전시의 목적을 명시적으로 지지했고 준비에도 관여했습니다. 명분 아래 자기 그림이 걸리는 것을 받아들인 정도가 아닙니다.
그가 몇 점을 냈는지는 숫자가 갈립니다. 열여덟 점으로 적는 서지 기록이 있고, 후대의 연구는 전시장 사진을 근거로 스물아홉 점으로 재구성합니다. 어느 쪽도 1차 기록으로 대조하지 못했으므로 여기서는 하나로 정하지 않겠습니다.
이 전시에는 그의 작품과 드가의 작품이 옛 거장들의 그림과 함께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배치에 기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드가를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이 전시가 증명해 주리라는 기대입니다. 학술지에 그렇게 정리돼 있습니다.
그가 왜 그런 기대를 품었는지도 같은 연구가 설명합니다. 드가의 제자라는 규정이 오랫동안 카사트의 평판을 높이는 동시에 깎아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 규정은 그를 인상파의 중심 가까이에 놓아 주었고, 동시에 그가 한 것을 남에게서 배운 것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다만 이 연구가 판정한 것은 그 규정이 어떤 작용을 해 왔는가이지, 두 사람이 실제로 사제 관계였는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거기까지는 이 자료가 말하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마흔 해 가까이 그림을 그린 뒤에도 자기 이름에 붙은 설명을 신경 쓰고 있었고, 그것을 반박할 자리로 고른 곳이 참정권 운동을 돕는 전시였습니다. 두 가지가 한자리에서 만난 것은 우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작품을 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
1911년 그는 양쪽 눈에 백내장이 생겼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그 뒤로 남은 생애 동안 거의 보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같은 해 4월에는 동생 가드너가 세상을 떠났고, 그 뒤 두 해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두 서술은 모두 대학 도서관이 정리한 전기에서 온 것이고, 미술관의 1차 기록으로 대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놓은 것이 언제인지는 적어 두지 않겠습니다. 흔히 도는 연도가 있지만 기관 기록에서 확인하지 못했고, 2년 동안 그리지 못했다는 문장이 곧 영영 그리지 않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기록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으면 거기서 멈추는 편이 맞습니다.
대신 이 시기에 그가 한 일 하나는 소장 기록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1893년에서 1894년 사이에 그린 〈보트 타기〉는 스무 해 넘게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팔지 않고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나빠진 뒤인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그는 이 그림을 미국을 도는 전시에 빌려줍니다. 여섯 명의 미국 여성 화가를 묶은 순회전으로, 이름은 Six American Women이었습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림이 그의 손을 떠난 것은 1918년이 지나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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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트, 〈보트 타기〉, 1893~1894년, 캔버스에 유채, 90.0 × 117.3 cm이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1963.10.94. 노를 젓는 사람의 검푸른 등이 화면 앞을 크게 가로막아 관람자를 배 안에 앉힌다. 그 너머에서 아이만이 이쪽을 보고 있다. 노란 뱃전이 그리는 곡선을 따라가 보라. |
스무 해 넘게 팔지 않고 갖고 있던 그림을, 그는 미국 여성 화가들을 한자리에 모은 순회전에 내주었습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뒤의 일입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그 행동까지입니다. 메리 카사트는 1926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는 판단
카사트를 소개하는 문장은 대개 한 가지로 수렴합니다. 인상파 독립전에 출품한 유일한 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서술은 정확합니다. 보스턴 미술관과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와 학술지가 각자 독립적으로 같은 말을 합니다. 다만 범위를 붙여야 뜻이 정확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상파가 파리에서 연 독립전에 작품을 낸 미국인이라는 뜻이지, 미국에 인상주의 화가가 그 사람뿐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앞에 살롱의 일곱 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 문장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글이 따라온 것은 그 이름표가 아니라 그 앞뒤의 선택들이었습니다.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륙을 건넌 일, 살롱에 일곱 해에 걸쳐 작품을 건 일, 거절당한 뒤 온 초대를 받아들이고 다음에 열린 독립전에 선 일, 마흔 중반에 색채 판화에 매달리겠다고 편지에 적은 일, 남의 미술관 벽에 무엇이 걸릴지를 고른 일, 참정권을 돕는 전시에 작품을 건 일,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뒤에 스무 해 넘게 간직한 그림을 순회전에 내준 일입니다.
한 화가를 그가 속한 무리로 읽는 방식에는 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인상파라는 이름 하나로 그의 작업 전체가 설명되는 것 같고, 누구의 제자라는 말 하나로 그의 화면이 어디서 왔는지가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는 1890년 4월의 편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인상파 화가로 자리를 잡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굳이 동판과 산과 인쇄기 앞으로 갔는지, 무리의 이름표는 답하지 못합니다. 답은 그가 스스로 적은 문장 안에 있습니다. 동판 위의 색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장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되는 2026년에 그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으는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가 9월 6일 문을 열었고 2027년 1월 3일까지 회화와 종이 작업 70점을 겁니다. 미술관은 188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다룬다고 공식 일정에 밝혔습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은 〈메리 카사트, 독립적인 사람〉을 10월 6일에 열어 2027년 1월 31일까지 이어 갑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아직 열리기 전입니다.
그렇다고 두 읽기가 서로 겨루는 것은 아닙니다. 층이 다를 뿐입니다. 이미 인상파 화가로 자리를 잡은 사람이 동판 앞으로 갔다는 문장이 힘을 갖는 것은 그 이름표가 먼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표가 답하지 못하는 것이 1890년 4월의 편지라면, 선택들만으로 답하지 못하는 것은 그 선택이 왜 하필 그때 가능했는가입니다. 살롱에 일곱 해를 걸어 온 이력이 없었다면 드가의 초대는 오지 않았을 것이고, 인상파의 이름이 없었다면 그가 고른 것들은 지금 셀 수 있는 형태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리는 그가 설 수 있었던 날짜의 범위를 만들었고, 선택은 그 범위 안에서 그가 쓴 날짜입니다. 앞의 읽기는 그를 한 문장에 넣어 주고, 뒤의 읽기는 그 문장이 왜 늘 조금 모자라게 느껴지는지를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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