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에 가로가 4미터를 훌쩍 넘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습니다. 어두운 아치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노란 상의를 입은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고, 그 뒤와 옆으로 창과 총을 든 사람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는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혼자 밝게 떠 있습니다. 〈야경〉입니다.
이 그림 앞에서 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화면은 렘브란트 판 레인이 1642년에 그려서 넘긴 화면과 같지 않습니다. 네 변이 잘려 나갔고, 칼자국이 났고, 산이 뿌려졌고, 적어도 스물다섯 번 손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유리로 둘러친 방 안에서 조사와 수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시간을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언제 무엇이 이 화면에 더해지고 빠져나갔는지를 짚고 나면, 미술관에서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 제목: 〈야경〉은 통칭입니다. 공식 제목은 「프란스 반닝크 코크 대위와 빌럼 판 라위턴뷔르흐 중위가 이끄는 암스테르담 제2구 민병대」에 해당하는 긴 이름입니다
•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 1606년 레이던 출생 ~ 1669년 암스테르담 사망
• 연도: 1642년. 화면에 「Rembrandt f 1642」라는 서명과 연도가 함께 있습니다
• 재질: 캔버스에 유채
• 소장: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 1808년부터 암스테르담시가 미술관에 대여하는 형식입니다
• 주제: 암스테르담 제2구 화승총 민병대의 집단초상입니다
• 상태: 2019년부터 대규모 조사가 진행 중이고, 2024년 11월부터 니스를 걷어내는 수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
| 렘브란트 판 레인, 〈프란스 반닝크 코크 대위와 빌럼 판 라위턴뷔르흐 중위가 이끄는 암스테르담 제2구 민병대, 통칭 야경〉, 1642년, 캔버스에 유채, 379.5 × 453.5cm,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 SK-C-5. 빛이 모이는 자리는 셋이다. 검은 옷 대위가 앞으로 내민 왼손, 그 옆의 노란 상의, 그리고 화면 왼쪽의 소녀. 창과 미늘창의 긴 사선이 오른쪽 위를 그물처럼 덮는다. |
클로베니르스도일런의 큰 방
이 그림은 전시장에 걸리려고 그려진 것이 아닙니다. 주문한 곳은 클로베니르스도일런, 암스테르담의 화승총 민병대 본부였습니다. 걸릴 자리는 그 건물의 큰 회의실이었고, 돈을 낸 사람들은 화면 안에 서 있는 바로 그 민병들이었습니다.
대금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이 그림으로 받은 돈은 1,600길더였고, 민병 한 사람이 낸 몫은 약 100길더였습니다. 다만 모두가 똑같이 낸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액수가 달랐습니다. 누구의 얼굴이 앞으로 나오고 누구의 얼굴이 어깨 너머로 반쯤 가려지는가가 돈의 문제이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가장 이른 문헌 기록은 1653년에 만들어진 목록의 한 줄로, 반닝크 코크 대위와 판 라위턴뷔르흐 중위를 렘브란트가 1642년에 그렸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 어두운 아치 위쪽을 보시면 잎을 엮은 화환에 둘러싸인 방패꼴 판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맨 위에는 사람 얼굴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고, 판 위에는 필기체로 이름들이 세로로 여러 줄 적혀 있습니다. 배율을 올려 보면 켐프와 엥엘런이라는 두 상사의 이름, 바렌트 하르만선, 케이서, 레이데커르스 같은 단편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이 판에 적힌 인명은 모두 열여덟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판이 주변의 벽보다 평평하고 불투명하게 칠해져 있다는 점입니다. 재질감이 달라서, 벽에 걸린 물건이라기보다 화면 위에 따로 얹힌 것처럼 읽힙니다.
소장 미술관은 이 그림을 두고, 집단초상화에서 인물들이 자세를 잡고 서 있는 대신 실제로 무언가를 하고 있게 그린 첫 사례라고 설명합니다. 대위가 중위에게 행진을 시작하라고 말하는 참이고, 나머지는 대열을 잡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술관이 내놓은 평가입니다. 같은 화가가 몇 해 뒤에 그린 〈직물조합 이사들〉은 이와 정반대로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다만 화면만 놓고 보아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됩니다. 붉은 옷을 입고 총열 끝을 손으로 다루는 남자, 입을 벌린 채 위를 올려다보는 남자, 오른쪽 끝에서 북을 치는 사람이 한 화면에 함께 있습니다. 중위의 머리 바로 뒤에서는 누군가 머스킷을 수평으로 들고 있는데, 총구가 중위의 모자 챙 옆을 스치듯 지나갑니다.
1715년에 잘려 나간 왼쪽
그림은 73년 동안 그 회의실에 걸려 있다가 자리를 옮깁니다. 1715년 5월 23일, 암스테르담 시의 결의가 내려집니다. 클로베니르스도일런 홀에 걸린 렘브란트의 큰 그림을 청소한 다음 시청의 전쟁회의실에 걸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결의문 자체에는 자른다는 말이 없습니다. 청소하고 옮겨 걸라는 지시뿐입니다.
그런데 그림은 잘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새로 걸 자리에 비해 그림이 너무 컸기 때문에 크기를 줄인 것입니다. 잘려 나간 폭은 지금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습니다.
| 왼쪽 | 64.4cm |
| 위 | 23.3cm |
| 아래 | 11.3cm |
| 오른쪽 | 7cm |
네 변이 고르게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왼쪽 한 변에서만 64.4센티미터가 사라졌고, 이것은 다른 세 변을 합친 것보다 큽니다. 어른 팔뚝 길이를 넘는 폭이 화면 왼쪽에서 통째로 없어진 셈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지금 치수에 위 숫자들을 더하면 잘리기 전 크기가 나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장 미술관은 2021년에 잘려 나간 부분을 되살려 붙인 재구성본을 공개하면서 그 크기를 세로 393.1센티미터, 가로 507.4센티미터로 적었습니다. 같은 자료가 지금 남아 있는 화면을 세로 379.5센티미터, 가로 436센티미터로 잡는데, 소장 기록에 적힌 현재 치수는 세로 379.5센티미터, 가로 453.5센티미터입니다. 가로가 17.5센티미터 어긋납니다. 그리고 위에 적은 절단 폭을 현재 치수에 그냥 더하면 세로가 재구성본보다 21센티미터 커집니다. 같은 기준으로 잰 수치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잘라 낸 천 조각들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절단이 일어난 해도 자료에 따라 조금 다르게 적힙니다. 소장 미술관은 1715년으로 못박아 쓰고, 사본을 소장한 런던의 미술관은 아마도 1715년일 것이라고 씁니다.
사본에만 남은 사람들
그러면 잘려 나간 왼쪽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원작의 다섯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그림 한 점 덕분입니다.
![]() |
| 헤릿 룬덴스로 귀속, 〈반닝크 코크 대위의 중대, 통칭 야경〉, 1642년 이후, 패널에 유채, 66.5 × 85.5cm(소장 기관과 대여 기관의 표기가 66.5 × 85.5cm과 66.8 × 85.4cm으로 갈린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NG289,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 대여 SK-C-1453. 왼쪽에 난간이 있고 그 뒤로 얼굴이 여럿 더 있다. 아치는 곡선이 끝까지 보이고 바닥도 더 넓다. 그래서 두 주역이 한가운데가 아니라 오른쪽에 서 있다. |
헤릿 룬덴스라는 화가가 그린 것으로 귀속되는 모사본이 있습니다. 패널에 그린 유화이고 크기는 가로세로 1미터가 채 되지 않습니다. 반닝크 코크 대위가 주문한 것으로 전하며, 제작 시기는 1642년 이후로 봅니다. 원작이 잘리기 전의 화면을 옮겨 놓은 그림이어서, 지금은 원작에 없는 것들이 이 작은 화면에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본을 열어 왼쪽 끝을 보면 어두운 색의 난간이 가로로 놓여 있고, 그 뒤로 얼굴이 넷 남짓 더 있습니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민 작은 얼굴도 하나 보입니다. 금장식이 달린 투구를 쓴 남자가 반신으로 서 있고, 그 앞을 투구 쓴 작은 인물이 달려 지나갑니다. 사본을 소장한 미술관은 잘려 나간 맨 왼쪽에 남자 둘과 아이 하나가 있었다고 적습니다. 화면 앞쪽 바닥에는 쇠로 된 받침대가 놓여 있고, 바닥 자체가 원작보다 넓습니다.
위쪽도 다릅니다. 사본에서는 배경 아치의 곡선이 끝까지 다 보입니다. 원작에서는 그 곡선이 위로 올라가다가 화면 가장자리에서 그대로 끊깁니다. 밝기를 올려서 보면 아치가 캔버스 밖으로 이어지다 잘린 것이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 차이가 만드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사본에서 대위와 중위 두 사람은 화면 한가운데가 아니라 오른쪽에 치우쳐 서 있습니다. 왼쪽에 넓은 공간이 있고, 두 사람은 그 공간을 향해 걸어 나오는 중입니다. 그런데 왼쪽을 64.4센티미터 잘라 내자 두 사람이 거의 정중앙으로 옮겨 왔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그림의 구도, 주인공 둘이 한가운데 딱 자리 잡은 안정된 구도는 1642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715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2021년에 소장 미술관은 이 사본을 출발점으로 삼아 없어진 부분을 다시 만들어 보였습니다. 인공 신경망에 렘브란트의 기법과 색 쓰는 방식을 학습시킨 뒤, 사라진 네 변을 컴퓨터가 다시 그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화면을 판에 인쇄해 원작 둘레에 임시로 붙여 두었고, 관람객은 300년 만에 처음으로 잘리기 전의 구도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그려진 부분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왼쪽의 빈자리가 얼마나 넓었는지를 눈으로 가늠하게 해 주는 장치였습니다.
야경이라는 이름
이 그림에는 원래 제목이 없었습니다. 지금 쓰이는 공식 제목도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대위와 중위의 이름이 통째로 들어간 긴 설명문에 가깝습니다. 〈야경〉은 그 긴 이름을 대신해 부르는 통칭입니다.
이 통칭이 문서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1797년입니다. 18세기 말부터 그렇게 불렸다는 것이 소장 미술관의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이 그려지고 150년이 넘게 지난 뒤에, 그리고 그림이 잘리고도 80년 남짓 더 지난 뒤에 붙은 이름입니다.
왜 〈야경〉이 되었을까요. 이 그림이 밤 장면이 아닌데 니스가 검게 변하는 바람에 밤으로 오해받았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확인해 보면 이 설명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장 미술관은 화면의 색조가 어둡다는 것과, 그 어두움 때문에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가 별명을 낳았다는 것까지만 말합니다. 니스를 원인으로 지목한 문장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걷어내고 있는 니스는 20세기에 바른 층이고, 이름은 그보다 훨씬 이른 1797년 문서에 이미 있습니다. 시간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 그림이 왜 〈야경〉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그 이름이 1797년 문서에서 처음 쓰였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덧붙이자면 소장 미술관은 이 장면 자체를 밤의 순찰이 아니라 낮의 행진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그것은 미술관의 판정이고, 이름의 유래와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의 손상과 스물다섯 번의 수복
그림이 겪은 일은 절단만이 아닙니다. 1808년에 이 그림은 트리펜하위스로 옮겨졌고, 그 해부터 암스테르담시가 미술관에 대여하는 형식으로 지금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세 차례 화면에 직접적인 손상이 났습니다.
1911년에 칼로 화면이 훼손됐습니다. 1939년 9월에는 다른 소장품 3만 점과 함께 미술관 밖으로 옮겨져 해안 가까운 벙커에 숨겨졌고, 마스트리흐트의 신트피터르스베르흐 동굴로 옮겨진 것은 1942년입니다. 1975년에도 칼이 화면에 닿아 캔버스에 열두 군데 자국이 났습니다. 그리고 1990년 4월 6일 아침, 화면에 농축된 황산이 뿌려졌습니다.
그때마다 손질이 뒤따랐습니다. 이 그림이 받은 손질은 지금까지 적어도 스물다섯 번으로 집계됩니다. 1975년에서 1976년으로 이어진 수복도 그중 하나였고, 그때 표면에 바른 니스가 지금 제거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즉 이 화면에는 렘브란트가 올린 층 위에 여러 세대의 보존가가 올린 층이 겹쳐 있고,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그 맨 위층을 통과한 빛입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조사
2019년 7월 8일, 이 그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특이한 점은 장소입니다. 작업을 창고나 수복실로 들고 들어가지 않고, 전시실 안에 유리로 둘러친 방을 짓고 그 안에서 진행합니다. 관람객은 조사와 수복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그림을 봅니다.
소장 미술관은 다섯 해에 걸친 연구를 거쳐 복원이 시작됐다고 적습니다. 2024년 11월 12일, 보존가 여덟 명이 니스를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용제를 머금은 특수한 티슈를 표면에 아주 짧은 시간 대어 니스를 녹여 빨아들인 다음, 현미경 아래에서 면봉으로 더 오래된 잔재를 하나씩 제거합니다. 걷어내는 니스는 렘브란트가 바른 것이 아니라 1970년대와 1990년대에 올린 층입니다. 언제 끝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조사가 밝힌 것 가운데 화면과 직접 이어지는 것을 셋만 짚겠습니다.
첫째, 물감층 아래에 밑그림이 있습니다. 2021년 말에 확인됐습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에 갈색을 띤 석영 바탕을 바른 뒤, 백악이 많이 섞인 베이지색 물감으로 거칠게 스케치를 했습니다. 이런 물감으로 준비된 렘브란트의 다른 그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밑그림과 완성된 화면을 견주어 보면 그가 그리는 도중에 마음을 바꾼 자리들이 드러납니다. 투구의 깃털이 조정됐고, 다리 위치가 옮겨졌고, 창의 위치가 수정됐습니다. 이 화면은 처음부터 이대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고쳐 가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 1990년에 뿌려진 산이 무엇을 남겼는지가 2026년에 다시 측정됐습니다. 산이 흘러내린 자국과 방울이 이룬 무늬는 세로 약 79센티미터, 가로 약 52센티미터 범위에 걸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황산납이 확인됐고, 납비누라고 부르는 물질이 넓게 생겨 있다는 것도 확인됐습니다. 여기서 나온 전망이 중요합니다. 니스를 다 걷어내고 나면 물감층 손상의 일부가 눈에 보이게 될 것으로 보고 있고, 약해진 표면을 부분적으로 굳히는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수복이 화면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상태를 드러내고 그것을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셋째, 붉은색이 어떻게 칠해졌는지가 2026년에 지도로 그려졌습니다. 렘브란트가 쓴 붉은 안료 가운데 레이크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반투명해서 아래 색이 비쳐 보이는 안료인데, 전통적으로는 다른 색 위에 얇게 덧발라 쓰지만 불투명한 안료와 섞어서 색과 투명도를 조절하기도 합니다. 렘브란트는 두 가지를 다 썼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화면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반사광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자리에 어느 방식이 쓰였는지 가려낼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대위의 붉은 어깨띠처럼 붉은색이 강하게 남은 자리에서 그 붉은색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제는 물감을 떼어 내지 않고도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같은 계열의 장비가 무엇을 밝혀냈는지는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여인〉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얇게 칠해진 개
조사 이야기가 길어지면 그림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니 화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른쪽 아래, 큰 북을 치는 사람 앞을 보시면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 |
| 화면 오른쪽 아래, 북을 향해 고개를 든 개다. 물감이 얇아 붓질 사이로 캔버스 올이 그대로 비친다. 목에 징이 박힌 목걸이가 있다. 앞쪽 인물들의 두껍고 촘촘한 붓질과 견주어 보라. |
확대해서 보면 이 개가 어떻게 칠해졌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색은 거의 황토와 갈색 한 가지뿐이고, 붓질이 성깁니다. 물감이 워낙 얇아서 그 사이로 캔버스의 올이 그대로 비쳐 보입니다. 짜임의 격자무늬가 개의 몸통 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목에는 징이 박힌 목걸이가 있고,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린 자세입니다.
같은 화면에서 대위의 흰 주름 깃을 보시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그쪽은 짧은 붓질을 여러 겹 쌓아 물감이 두껍게 올라와 있습니다. 돈을 낸 사람들의 얼굴과 옷에는 물감이 쌓여 있고, 개와 배경은 바탕이 비칠 만큼 얇습니다.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그림에서 화가의 손이 오래 머문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개에 대해서는 2025년 9월에 새로운 사실이 발표됐습니다. 렘브란트가 이 개를 아드리안 판 더 베너라는 화가가 1619년에 그린 드로잉에 근거해 그렸다는 것입니다. 그 드로잉은 같은 미술관이 백 년 넘게 소장해 온 것인데, 〈야경〉과의 연결은 최근에야 알려졌습니다. 머리와 목걸이와 자세가 너무 닮아서 참조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사팀의 설명이고, 물감층 아래를 훑는 촬영에서 드러난 밑그림 단계의 개는 그 드로잉의 자세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이 개는 그 자리에서 본 개가 아니라 종이에서 옮겨 온 형태입니다. 거의 400년 동안 사람들이 들여다본 그림에서 이런 사실이 지금도 새로 나온다는 것이, 이 화면에 아직 읽히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렘브란트 야경 보는 법
여기까지 따라오셨다면 이 그림 앞에서 볼 것이 몇 가지 정해집니다. 순서대로 짚어 보겠습니다.
먼저 빛이 모이는 세 자리를 찾습니다. 화면 전체는 어둡고, 밝은 자리는 셋뿐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대위가 앞으로 내민 왼손, 그 옆 중위의 노란 상의, 그리고 화면 왼쪽의 소녀입니다. 이 셋을 잇는 선이 화면을 읽는 뼈대가 됩니다.
다음은 대위의 손과 그 그림자입니다. 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한 채 손가락을 펴고 앞으로 나와 있고, 손목에는 흰 레이스가 둘려 있습니다. 그 손에서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중위의 밝은 상의 위에 손 모양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선으로 걸쳐 있는 것이 보입니다. 손과 그림자가 한 화면 안에 함께 있는 셈이고, 그림자가 손보다 아래로 어긋나 있어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깁니다. 손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
| 화면 왼쪽, 빛을 받은 소녀다. 허리춤에 흰 새가 거꾸로 매달려 있고 그 발톱이 가슴 높이에서 위로 펼쳐져 있다. 머리띠와 귀에 진주가 있고, 몸 앞을 머스킷 총열이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
셋째는 소녀입니다. 소장 미술관은 이 소녀를 부대의 마스코트라고 설명합니다. 확대해서 보면 허리춤에 흰 새가 거꾸로 매달려 있고, 그 발톱이 가슴 높이에서 위로 펼쳐져 있습니다. 머리에는 진주가 박힌 좁은 머리띠를 둘렀고 귀에도 작은 진주가 하나 있습니다. 몸 앞으로는 머스킷 총열이 사선으로 지나갑니다. 이 발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두고는 여러 설명이 오가지만,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새가 거기 매달려 있다는 사실까지입니다.
넷째는 오른쪽 위의 명판과 오른쪽 아래의 개입니다. 명판에는 열여덟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개는 캔버스 올이 비칠 만큼 얇게 칠해져 있습니다. 같은 화면 안에서 가장 공들인 자리와 가장 빠르게 지나간 자리를 나란히 보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화면 왼쪽 끝을 봅니다. 지금 그 자리는 그림의 가장자리입니다. 그러나 1715년까지 거기에는 난간이 있었고, 난간 뒤에 선 사람들이 있었고, 그 앞을 달려 지나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64.4센티미터를 머릿속에서 화면 왼쪽에 붙여 보시면, 두 주역이 한가운데 서 있는 지금의 구도가 원래의 구도가 아니라는 것이 보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화면에서 두 사람은 오른쪽에 있었고, 왼쪽의 빈 공간을 향해 걸어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지금 이 그림은 유리방 안에 있고, 표면에서 니스가 한 겹씩 걷히는 중입니다. 니스가 다 걷히면 화면은 지금과 또 달라질 것이고, 1990년에 산이 지나간 자리는 오히려 더 잘 보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300년 동안 이 그림에 일어난 일들이 여전히 진행 중인 셈입니다. 그러니 〈야경〉 앞에 서실 때 던질 질문은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이 그림의 어느 시점인가, 이 질문이 함께 갑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렘브란트 판 레인의 생애와 작품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