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어느 날, 프랑스 황후 외제니가 퐁텐블로 숲의 작업실로 찾아왔습니다. 화가에게 레지옹 도뇌르 십자 훈장을 직접 걸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성 화가가 이 훈장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화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였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림이 순회 전시를 돌면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100년쯤 지난 1978년, 한 비평가는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 〈니베르네의 쟁기질〉을 두고 완전히 잊혀서 좀처럼 끌려 나오는 일이 없다고 썼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한 줄 정의: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물화가이자,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최초의 여성 화가
• 생몰: 1822년 3월 16일 보르도 출생, 1899년 5월 25일 토메리 사망
• 국적·활동지: 프랑스, 파리와 퐁텐블로 숲 인근
• 활동 분야: 동물을 주제로 한 사실주의 회화와 조각
• 대표작: 〈니베르네의 쟁기질〉(1849, 오르세 미술관), 〈말 시장〉(1852~185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로자 보뇌르 생애, 글자를 동물 그림으로 배운 아이
로자 보뇌르가 평생 동물을 그린 첫 번째 이유는 동물이 그녀에게 문자였기 때문입니다.
| 에두아르 뒤뷔프가 그린 로자 보뇌르의 초상. 곁의 황소는 보뇌르가 직접 그려 넣었다고 전합니다. |
어머니 소피는 피아노 교사였고, 어린 로자는 글자를 좀처럼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알파벳 하나마다 그 글자로 시작하는 동물을 그리게 하는 방식으로 읽기를 가르쳤습니다. 로자는 그렇게 글을 뗐습니다. 어머니는 로자가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아버지 오스카 레몽 보뇌르는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고, 생시몽주의라는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가정 환경이 무엇을 결정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남매가 모두 화가나 조각가가 되었고, 그중 동생 이지도르는 동물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열네 살부터 로자는 루브르에서 명화를 모사하며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다른 화가와 갈라 놓은 것은 그다음 선택입니다. 그녀는 파리의 도살장과 국립수의학교를 드나들며 동물의 해부학과 골학, 즉 뼈의 구조를 공부했습니다. 비교해부학자였던 조프루아 생틸레르 부자와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동물화가가 화실에서 동물을 예쁘게 그리던 시대에, 그녀는 뼈부터 봤습니다.
이 훈련의 결과는 화면에서 바로 확인됩니다. 〈니베르네의 쟁기질〉에서 소들이 흙을 밀고 나올 때, 앞다리가 땅을 짚는 각도와 어깨 근육이 솟는 위치가 무게를 견디는 실제 자세와 맞습니다. 짐승이 힘을 쓰는 순간의 몸입니다.
| 로자 보뇌르, 〈니베르네의 쟁기질〉, 1849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앞다리가 땅을 짚는 각도가 무게를 견디는 실제 자세와 맞는다. |
로자 보뇌르의 남장 허가증은 무엇이었나
경찰이 발급한 6개월짜리 갱신 허가였고, 서류에 적힌 공식 사유는 건강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규제 대상이었고, 예외를 인정받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1857년에 갱신된 그녀의 허가 문서가 실제로 남아 있습니다. 문서상의 이유는 건강이지만, 그녀가 실제로 바지가 필요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가축 시장과 도살장에서 동물을 관찰하려면 긴 치마로는 곤란했고, 여성의 옷차림으로 그런 장소에 서 있으면 관찰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 대목은 종종 과장되어 전해집니다. 바지를 입을 때마다 매번 경찰서에 가야 했다는 식의 서술이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일정 기간 유효한 허가를 갱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다만 갱신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시대의 조건을 보여 줍니다. 직업에 필요한 복장을 입기 위해 관청의 승인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화가였습니다.
어떻게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화가가 되었는가
순서를 바로잡고 시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흔히 〈니베르네의 쟁기질〉로 상을 받았다고 적히지만, 상이 먼저였습니다.
1848년 살롱에서 그는 1등급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그해 살롱은 입선 심사 없이 시상 심사만 있었고, 그는 회화 여섯 점과 조각 두 점을 냈습니다. 미술관 자료들은 그중 캉탈 품종의 소를 그린 그림을 수상작으로 적지만, 본인은 훗날 출품작 전체에 대해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수상 직후에 프랑스 정부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 주문으로 그린 것이 이듬해 살롱에 걸린 〈니베르네의 쟁기질〉입니다.
그림의 제목에 대해서도 본인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국가가 지정한 것은 주제뿐이었고 제목은 나중에 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물일곱 살 화가가 국가 주문을 받은 경위가 이렇습니다. 먼저 상을 받았고, 그 상이 주문을 불렀습니다.
대작 한 점의 성공과, 그 성공을 복제 판화로 확장한 유통 구조가 겹쳤기 때문입니다.
| 로자 보뇌르, 〈말 시장〉, 1852~185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가로 5미터가 넘는 대작이다. |
〈말 시장〉은 1853년 파리 살롱에 걸리자마자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가로가 5미터를 넘는 화면에 말들이 밀려 나오는데, 개별 말의 해부학적 정확성과 무리 전체의 운동감이 동시에 살아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름을 따라가면 말들이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과 마부가 고삐에 끌려 몸이 젖혀지는 순간이 번갈아 나옵니다. 정지된 그림인데 소리가 들리는 화면입니다.
1854년에 영국 화상 에르네스트 갬바트가 이 그림을 4만 프랑에 사들여 영국으로 가져갑니다. 이때부터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림은 영국과 미국을 순회하며 전시되었고, 빅토리아 여왕도 이 작품을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갬바트는 이 그림을 판화로 복제해 대량으로 팔았습니다.
| 〈니베르네의 쟁기질〉을 옮긴 복제 판화. 원작이 미술관에 걸려 있는 동안 이런 판화가 가정의 거실에 걸렸다. |
여기서 그녀의 성공 구조가 완성됩니다. 원작 한 점이 미술관에 걸려 있는 동안 복제 판화가 영어권 가정의 거실에 걸렸습니다. 화가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이 수입으로 1859년 퐁텐블로 숲 인근의 성을 사서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고, 그 집은 지금 그녀를 기리는 박물관입니다.
사생활에서도 그녀는 당대의 규범과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나탈리 미카스와 40년 넘게 함께 살았고, 미카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미국 화가 애나 클럼키가 곁에 있었습니다. 클럼키는 그녀의 유일한 상속인이 되었습니다.
| 애나 클럼키가 그린 로자 보뇌르, 1898년. 클럼키는 그녀의 유일한 상속인이 되었다. |
로자 보뇌르는 왜 잊혔는가
한 가지를 먼저 구분해 두겠습니다. 그를 제도와 싸운 사람으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동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 위에 서 있고, 구도와 빛을 다루는 방식은 당대 아카데미의 문법을 따릅니다. 그는 회화의 서열 자체를 뒤엎은 것이 아니라, 그 서열이 여성에게 닫아 놓은 문을 실용적으로 우회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서열 안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그의 작업이 저항의 이야기로만 남고 그림은 뒤로 밀립니다.
그녀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정상에 있던 장르가 강등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후반부터 파리 미술계의 중심축이 이동합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 살롱 바깥에서 새로운 회화를 밀어붙였고, 20세기에 들어서면 미술사의 서술 자체가 양식의 혁신을 축으로 재편됩니다. 이 서술 안에서 동물화는 이야기의 중심이 될 자리가 없었습니다. 잘 그린 소와 말은 혁신의 증거로 계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요인은 더 얄궂습니다. 그녀의 강점이던 것이 감점 요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복제 판화로 널리 퍼진 대중적 인기, 화상과의 성공적인 상업 관계, 살롱과 황실의 인정. 이것들은 당대에 성취의 증거였지만, 20세기 비평이 세운 기준에서는 대중 취향에 영합했다는 혐의로 읽히기 쉬웠습니다. 아방가르드가 미술사의 주인공이 되면 살롱의 승자는 배경이 됩니다.
망각의 규모는 비평의 언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978년에 한 비평가는 그녀의 대표작 〈니베르네의 쟁기질〉을 두고 완전히 잊혔고 좀처럼 끌려 나오는 일이 없다고 썼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여든 해가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제 판단은 이렇습니다. 보뇌르의 사례는 한 화가가 얼마나 훌륭했는가와 미술사가 그를 어디에 배치하는가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그림 실력은 20세기 내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한 것은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최근 그녀가 다시 조명받는 것도 새로운 작품이 발견되어서가 아니라, 장르와 성공을 보는 관점이 다시 한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로자 보뇌르의 그림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대표작 두 점이 각각 파리와 뉴욕에 있습니다. 〈니베르네의 쟁기질〉은 오르세 미술관, 〈말 시장〉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입니다. 퐁텐블로 숲 인근 토메리에 있던 그녀의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시 여부와 개관 정보는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Q.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최초의 여성인가요?
A. 훈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 화가입니다. 1865년에 외제니 황후가 직접 작업실을 찾아와 십자 훈장을 수여했고, 1894년에는 한 등급 위인 오피시에로 승급했습니다.
Q. 동물화는 당시에 낮은 장르로 취급받지 않았나요?
A. 아카데미의 전통적인 서열에서는 역사화가 가장 높고 정물이나 동물이 낮은 편에 속했습니다. 보뇌르가 특별한 것은 그 낮은 자리에 있던 장르로 큰 상업적 성공과 국가적 인정을 동시에 받아냈다는 점입니다. 다만 20세기에 미술사 서술이 재편되면서 이 장르 자체가 다시 뒤로 밀려났습니다.
말년에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미국 서부였습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가 들어왔고, 예순일곱의 그는 공연장을 찾아가 들소와 야생마와 라코타 수족 공연자들을 그렸습니다. 윌리엄 코디는 그해 9월 퐁텐블로 숲 가까이 있던 그의 집까지 찾아왔고, 그는 말 위에 앉은 코디의 초상을 남겼습니다.
그가 미국에 건너갔다고 적은 글이 더러 있는데,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확인되는 해외 여행은 오베르뉴와 피레네, 독일의 엠스, 그리고 1856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정도입니다. 미국 서부는 그가 간 곳이 아니라 파리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젊은 날 말 시장으로 걸어 들어가던 사람이 노년에는 공연장으로 갔습니다. 자료를 얻는 첫 번째 자리가 언제나 살아 있는 대상이 있는 곳이었다는 점은 끝까지 같았습니다.
로자 보뇌르 말 시장 앞에서
1865년 작업실로 찾아온 황후와 1978년의 그 비평 사이에는 113년이 있습니다. 같은 화가를 두고 한쪽에서는 국가가 훈장을 걸어 주었고 다른 쪽에서는 아무도 꺼내 보지 않았습니다. 〈말 시장〉 앞에 서실 기회가 있다면 말들의 앞다리가 땅을 짚는 각도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도살장에서 뼈를 익힌 사람의 눈이 거기 있습니다. 그 눈은 유행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도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