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마드리드, 왕립 산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의 졸업 구술시험장입니다. 미술이론 구술시험이었고 그날의 주제에 라파엘로가 들어 있었습니다. 달리가 훗날 회고한 바로는, 스물두 살의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심사위원 세 명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 교수보다 무한히 더 똑똑하며, 그러므로 이들에게 시험받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이 주제를 그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그대로 퇴학당했습니다.
이 학생이 살바도르 달리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습관 하나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권위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무대 위로 밀어 올리는 것. 그런데 이 화려한 자기과시 뒤에는 훨씬 조용하고 훨씬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달리는 자신을 「두 명의 달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라가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형에서 시작해 한 시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만든 그림을 보는 방법까지 하나로 이어집니다.
| 살바도르 달리, 1965년 사진. 촬영 로저 히긴스, 뉴욕 월드텔레그램 앤드 선 사진 아카이브(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달리의 그림이 아니라 인물 사진이다. |
• 한 줄 정의: 편집증적 비평법으로 무의식의 이미지를 그린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그림 밖에서도 스스로를 하나의 볼거리로 연출한 예술가
• 생몰: 1904년 5월 11일 ~ 1989년 1월 23일(스페인 피게레스에서 태어나 피게레스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마드리드와 파리를 거쳐 1940~1948년 미국에 머물렀고, 이후 고향 피게레스로 돌아왔습니다
• 활동 분야: 초현실주의 회화, 판화, 조각, 영화, 무대미술, 상업 디자인
• 대표작: 〈기억의 지속〉(1931), 〈나르시스의 변형〉(1937),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1951), 〈최후의 만찬의 성찬〉(1955)
달리 생애, 태어나기 전 죽은 형과 마드리드의 두 친구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아침,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소도시 피게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는 엄격한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펠리파 도메네크 페레스(Felipa Domènech Ferrés)는 그런 아버지와 달리 아들의 기이한 행동을 대체로 받아 주는 편이었습니다. 가족은 학기 중에는 피게레스에서, 방학이면 해안 마을 카다케스의 별장에서 지냈습니다. 이 카다케스의 바다와 바위 지형은 훗날 그의 그림 곳곳에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가 물려받은 것은 풍경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물려받았습니다. 달리에게는 그와 같은 이름을 쓴 형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형이었고, 달리는 그 형이 죽은 지 아홉 달 열흘 만에 태어났습니다. 달리 자신이 훗날 자서전에 쓴 바에 따르면, 부모는 그를 데리고 형의 무덤에 가곤 했고 그가 형의 환생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나의 인격의 심층 구조는 언제나 이원적이다. 나는 이두체적이며 이중적이다. 두 명의 달리가 있다.」 1963년에는 이 형을 정면으로 다룬 그림 〈죽은 형의 초상〉을 그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본이 아니라 어떤 그림자를 뒤따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감각, 이것이 그의 예술 전체에 흐르는 첫 번째 밑그림입니다.
1922년 그는 마드리드의 왕립 산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며 명문 기숙사인 학생관(Residencia de Estudiantes)에 들어갑니다. 이듬해인 1923년, 훗날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를 만납니다. 로르카는 스물다섯 살, 달리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은 이들보다 먼저 이 기숙사에 들어와 있었고, 뒤늦게 합류한 쪽은 달리였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보낸 이 몇 해가 로르카의 시와 부뉴엘·달리의 영화 작업 양쪽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남겼다고 훗날 평가받습니다.
학교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26년의 퇴학이 학교와 처음 부딪힌 일은 아니었습니다. 1923년에 그는 교수 임용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1년 정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학이 끝나 돌아온 뒤인 1926년, 졸업을 앞둔 구술시험에서 그는 심사위원들이 자신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며 시험을 거부했고, 그대로 영구 퇴학당합니다. 도입에서 본 그 장면입니다. 학교는 그를 내보냈지만, 그는 이 사건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확신을 증명한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같은 시기 파리 화단의 중심에 이미 서 있던 또 한 명의 스페인 화가가 파블로 피카소였습니다. 두 사람은 세대도 화풍도 달랐지만, 스페인 출신 화가가 파리 화단의 중심에 서던 흐름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달리와 로르카, 건넨 고백과 택한 침묵
1925년 부활절, 로르카는 카다케스의 달리 가족 별장에 머뭅니다. 이 방문 이후 로르카는 달리에게 바치는 시 〈오다 아 살바도르 달리(Oda a Salvador Dalí)〉를 쓰기 시작해 조금씩 보여 주었고, 1926년 잡지 〈레비스타 데 옥시덴테〉에 전문이 실립니다. 달리는 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묘사한 대목 중 상당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훗날 인정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갈린 지점은 1927년 여름 카다케스입니다. 로르카가 먼저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에 달리가 선을 그었다는 것은 동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달리 자신이 훗날 회고한 내용이고, 그 회고를 마리오 에르난데스(Mario Hernández)와 이언 깁슨(Ian Gibson) 같은 연구자들이 정리해 전합니다. 그는 이 관계를 두고 「플라토닉으로 남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깁슨 역시 두 사람이 성적 관계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확립된 바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이듬해인 1928년, 달리가 로르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너는 기독교적 폭풍이고, 나의 이교주의를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1925년부터 1936년까지 이어지는데, 남아 있는 것은 달리가 로르카에게 보낸 마흔 통가량과 로르카가 달리에게 보낸 일곱 통입니다. 그 서두는 흔히 「친애하는 살바도르, 친애하는 로르키토」였습니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살바도르 달리의 초상〉, 1927년. 달리의 작품이 아니라 로르카가 달리를 그린 드로잉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점에 있던 해다. |
같은 1928년, 달리는 로르카의 새 시집 〈집시 로만세로〉를 두고 「낡은 시」이며 「상투적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비판합니다. 부뉴엘의 영향을 받은 발언으로 짐작되며, 관계는 여기서부터 눈에 띄게 식습니다. 1929년 8월에는 카다케스로 갈라(Gala, 본명 옐레나 이바노브나 디아코노바)가 찾아옵니다. 당시 시인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의 아내였던 갈라는 딸과 함께, 화가 르네 마그리트 부부·부뉴엘·화상 카미유 고망스와 동행했습니다. 이 여름 산책에서 달리는 갈라에게 깊이 끌렸고, 두 사람의 관계는 1982년 갈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집니다.
1930년, 뉴욕 여행에서 돌아온 로르카가 다시 만나자고 제안하지만 달리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갈라 역시 로르카를 명시적으로 밀어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두 사람이 그대로 영영 갈라선 것은 아니어서, 1935년 로르카의 〈도냐 로시타〉 무렵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직후 로르카는 프랑코파 세력에 의해 총살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달리의 반응으로 흔히 전해지는 것이 짧은 감탄사 「올레(¡Olé!)」입니다. 이 말만 떼어 놓고 보면 냉담함의 증거처럼 읽히지만, 여러 전기 기록은 그 이후 달리가 오랫동안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렸고 자신이 무언가 했더라면 로르카를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붙들려 있었다고 전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86년, 달리는 이 관계를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이언 깁슨의 해석에 반박하며 일간지 〈엘 파이스〉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것이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에로틱하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사석의 고백이 아니라 지면을 통해 내놓은 말이었습니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사진, 1936년 7월 마드리드. 달리의 작품이 아닙니다. 이 사진이 찍히고 한 달여 뒤 로르카는 총살당합니다. |
달리의 편집증적 비평법, 무의식을 그리는 방법
1929년, 달리는 부뉴엘과 함께 만든 단편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파리에서 공개합니다. 면도날이 눈동자를 가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그룹의 눈길을 끌었고, 같은 해 11월 파리의 고에망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는데, 전시 도록의 서문을 쓴 사람이 브르통이었습니다. 달리를 파리에 데려온 사람은 같은 카탈루냐 출신 화가 호안 미로(Joan Miró)였습니다. 미로가 그를 초현실주의 그룹에 소개했고, 같은 해 달리는 이 그룹에 정식으로 합류합니다. 20세기 초 파리 화단이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거쳐 초현실주의로 넘어가는 흐름은 서양 미술사 개관에서 더 넓게 짚었습니다.
달리가 그룹 안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편집증적 비평법(método paranoico-crítico)입니다. 쉽게 풀면, 스스로 통제된 망상 상태에 들어가 하나의 형상 안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다른 형상을 읽어 내고, 그 이중 이미지를 화면 위에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옮기는 방법입니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다가 문득 떠오른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 적는 자동기술법에 기댔다면, 달리는 반대로 지극히 사실적이고 정밀한 손으로 비합리적인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꿈처럼 흐릿하지 않고, 오히려 사진보다 또렷합니다. 다만 그 안에 있는 것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조합일 뿐입니다.
이 방법이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로 나타난 작품이 1931년의 〈기억의 지속〉입니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회중시계 몇 개가 황량한 해안 풍경 위에 걸쳐 있습니다. 달리는 훗날 자서전에서, 어느 날 저녁 식탁에 물러진 채 놓여 있던 카망베르 치즈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다가 이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의 회고이므로 사실 여부를 다른 자료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무엇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왜곡해 담아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입니다. 이 그림을 실제로 보면 대개 놀랍니다. 세로 24.1센티미터, 가로 33센티미터. 공책만 한 크기입니다. 널리 복제되면서 커다란 그림처럼 상상하기 쉽지만, 녹아내리는 시계도 해안 풍경도 손바닥 몇 개만 한 화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작은 그림은 1932년 뉴욕의 화상 줄리앙 레비(Julien Levy)에게 250달러에 팔렸고, 지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습니다.
시계가 시간의 정확성을 상징한다면 그것이 녹아내리는 이 그림을 두고, 후대에는 상대성이론 이후 과학이 뒤흔든 시간 관념을 프로이트가 열어젖힌 무의식의 논리로 옮겨 놓은 장면이라고 읽어 오기도 했습니다. 다만 달리 자신이 밝힌 착상은 카망베르 쪽입니다.
달리는 왜 초현실주의에서 쫓겨났는가
1934년 2월, 브르통은 달리를 초현실주의 그룹의 내부 「재판」에 세웁니다. 죄목은 「히틀러 파시즘의 예찬」이었습니다. 달리가 히틀러를 소재로 삼은 그림과 발언들이 그룹 내 좌파 성향 회원들의 반발을 샀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나는 사실에서도 의도에서도 히틀러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라면 의식의 검열 없이 무의식에 떠오르는 어떤 소재든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브르통 자신이 세운 규칙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날 그는 완전한 추방은 면했습니다.
이 사건을 둘러싼 해석은 지금도 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달리의 파시즘 예찬을 실제 정치적 성향의 표현으로 보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소재의 자유를 둘러싼 다툼으로 읽습니다. 1934년의 재판은 첫 시도였을 뿐이고, 달리가 그룹에서 최종적으로 밀려난 것은 1939년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뒤 브르통은 달리의 이름 철자를 재배열한 「아비다 돌라스(Avida Dollars)」라는 별명을 붙여 그를 조롱합니다. 프랑스어로 「돈에 굶주린」이라는 뜻의 발음과 같게 만든 말장난으로, 달리가 상업적 작업에 지나치게 열중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달리는 이 모욕적인 별명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스스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는 「내가 곧 초현실주의다」라고 맞받아쳤습니다.
달리와 갈라, 미국과 성화로 돌아온 화가
1929년 카다케스에서 만난 갈라는 이후 달리의 연인이자 뮤즈, 그리고 사업 전반을 총괄하는 매니저가 됩니다. 그림에 서명할 때 자신의 이름 뒤에 갈라의 이름을 함께 적을 정도로, 달리는 갈라를 자신의 창작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두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가 1948년까지 머뭅니다. 이 시기 달리의 화풍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초기의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이미지 대신, 르네상스 거장들의 정밀한 기법과 종교적 소재로 방향을 틉니다. 1938년 런던에서는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를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평소 초현실주의자들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달리가 보여 준 〈나르시스의 변형〉(1937)을 보고는 예외적으로 그의 기술적 재능을 인정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후기 양식의 정점이 1951년의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극단적으로 높은 각도에서 내려다본 이 그림은 못이나 상처 같은 사실적 디테일을 모두 지우고, 대신 기하학적 구도와 극적인 빛으로 화면을 채웠습니다. 1955년의 〈최후의 만찬의 성찬〉 역시 같은 방향의 작업입니다. 젊은 시절 가톨릭 교육에 반발했던 화가가 만년에는 종교적 도상으로 되돌아온 셈이며, 이 변화 역시 그가 말한 이중성의 또 다른 얼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달리, 피게레스로 돌아와 자신의 무덤을 짓다
1948년, 달리와 갈라는 카다케스 인근의 어촌 포르트리가트로 돌아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마지막 대작으로 극장미술관 건립에 몰두합니다. 이 미술관은 피게레스 시내에 있던 옛 시립극장의 폐허 위에 세워졌는데, 그 극장은 다름 아닌 그가 어린 시절 단체전에 작품을 냈던 장소였습니다. 1974년 9월 28일, 극장미술관은 문을 엽니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설계되었고, 달리는 완공까지 전 과정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말년의 달리에게는 논란도 따라붙습니다. 그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체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여러 차례 드러냈고, 이는 스페인 내전으로 로르카를 잃은 예술가라는 사실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비판적으로 회자됩니다. 상업 광고와 대량 복제판 서명 논란까지 겹치며, 그의 만년은 순수예술과 상업주의 사이 어디쯤에 걸쳐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82년 갈라가 세상을 떠나자 달리는 크게 낙담했고, 1984년에는 거주하던 푸볼 성에서 화재로 크게 다쳐 이후 극장미술관 옆 갈라테아 탑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1989년 1월 23일, 그는 피게레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이 글에는 살바도르 달리 본인의 그림이 한 점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1989년에 세상을 떠나 저작재산권 보호 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갈라·살바도르 달리 재단이 저작권을 관리합니다). 위 세 도판은 달리의 작품이 아니라 ①달리를 찍은 보도사진(미국 의회도서관 표시는 「출판에 알려진 제한 없음」입니다) ②로르카가 달리를 그린 드로잉(로르카는 1936년 사망, 저작권 만료) ③로르카의 마지막 사진입니다. 달리의 작품 실물은 피게레스 달리 극장미술관을 비롯한 소장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갈라·살바도르 달리 재단 컬렉션은 다른 작가의 작품까지 포함해 4,000점 이상입니다).
주요 작품
- 〈기억의 지속〉(1931) ·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린, 달리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 〈나르시스의 변형〉(1937) · 프로이트가 직접 보고 예외적으로 호평했다고 전해지는 이중 이미지 작품.
- 〈안달루시아의 개〉(1929) · 부뉴엘과 공동 연출한 단편영화.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1951) · 극단적으로 높은 시점에서 내려다본 십자가 처형 장면. 후기 종교화의 대표작.
- 〈최후의 만찬의 성찬〉(1955) · 기하학적 구도로 재구성한 최후의 만찬.
다시, 두 명의 달리
1926년 시험장에서 심사위원들을 향해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말했던 젊은이는, 60년이 흐른 뒤에야 그 관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에로틱하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고 적습니다. 그것도 사석이 아니라 신문 지면에서였습니다. 평생 무대를 골라 온 사람이 마지막 고백의 무대로도 지면을 골랐던 셈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늘 확신에 찬 쇼맨이었지만, 태어나기 전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는 평생 자신을 하나가 아니라 둘로 여겼습니다. 그 이중성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되었고, 사랑을 거부하는 방식이 되었고, 만년에는 스스로 지은 극장미술관 무대 아래 묻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지하묘에 누워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죽은 도시, 피게레스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