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생애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자신의 작품 <회화의 예술>에 담긴 역사, 상징,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회화의 예술 The Art of Painting>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1666년에서 1668년 사이에 그린 유화입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크고 정교하며, 그 자신이 생애 마지막까지 팔지 않고 간직했던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단순한 작업실 풍경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과 화가의 자의식, 그리고 역사에 남는 예술의 가치를 깊이 있게 담아낸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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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예술> 1666-68년경, 120x100cm,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
그림 속 장면 – 화가와 역사의 여신
그림 속에는 이젤 앞에 앉은 화가와 그의 앞에 푸른색 옷을 입은 여성 모델이 서 있습니다. 이 여성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Clio)’로 분장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월계관, 손에는 트럼펫과 두꺼운 책을 들고 있습니다.
- 월계관과 트럼펫은 명성을,
- 책은 기록되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 상징들 때문에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이 회화라는 예술이 어떻게 인간의 명성을 역사 속에 영원히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베르메르의 진지한 사유라고 해석합니다.
즉, 그림 속 화가는 단지 모델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시간과 죽음을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메르가 끝까지 간직했던 유일한 그림
베르메르는 생전에 그린 대부분의 그림을 판매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은 절대 팔지 않고 자신의 집에 끝까지 간직했습니다. 그만큼 이 그림은 베르메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역할과 예술의 숭고함을 담은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뒤,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는 심각한 빚에 시달렸음에도 이 그림만은 팔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이 그림이 자신의 어머니 소유인 것처럼 꾸며, 파산 재산 목록에서 빼돌리려 시도했을 정도입니다. 작품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가문에서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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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숨겨진 서명 부분 확대 |
숨겨진 서명 – 지도 속 작은 흔적
베르메르는 이 그림의 서명을 일반적인 위치가 아닌, 배경에 걸린 네덜란드 지도 위, 여성 모델의 목 바로 뒤쪽에 작게 남겼습니다. 이런 배치는 매우 이례적이며, 여러 해석을 낳습니다.
- 화가 자신이 그리는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상징
- 네덜란드의 역사와 자기 예술의 연관성 암시
- 자신의 존재를 조용히 작품 속에 남기고자 했던 은밀한 자화상 같은 흔적
관람객이 쉽게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진 이 서명은, 오히려 베르메르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자화상인가? – 그림 속 화가에 담긴 의문
이 작품 속 화가는 관람객에게 등을 돌린 채 그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화가가 베르메이르 자신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등을 돌린 모습은 화가의 익명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관람객이 화가의 시선을 따라 모델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줍니다. 화면 속 화가는 말없이 작업에 몰두하는 이상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베르메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을 그림 속에 녹여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히틀러가 탐낸 그림
이 그림은 20세기에 극적인 역사를 겪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이 그림을 매우 탐냈고, 자신만의 '퓌러 박물관'에 전시할 계획으로 직접 사들였습니다. 1940년, 오스트리아 귀족 가문 소유였던 이 작품은 나치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의 문화재 환수팀(모뉴먼츠 맨)의 활약 덕분에 그림은 무사히 회수되어, 현재는 빈 미술사 박물관에 안전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연은 이 작품이 단지 미학적으로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전쟁과 문화재 수호의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은 상징적인 작품임을 보여줍니다.
공간과 기술 – 빛과 원근법의 극치
베르메르는 이 작품에서 실내 공간 구성, 자연광 표현, 질감 묘사에 있어 극치의 기술력을 보여줍니다.
- 왼쪽의 육중한 태피스트리 커튼은 마치 연극 무대의 막을 열어젖히는 듯한 효과를 주며,
- 바닥의 흑백 타일, 샹들리에, 지도 등은 사진처럼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 특히 완벽한 원근법은 관람객이 그림 속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일부 학자들은 베르메르가 이처럼 완벽한 사실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초기 카메라의 원리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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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 말 없는 예술의 선언
<회화의 예술>은 단순히 그림 속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베르메르가 남긴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선언문이며, 시간을 초월해 예술이 인간의 역사에 어떻게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 작품은 예술과 명성, 역사와 기억, 창작자와 관람자 사이의 깊은 대화를 조용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르메르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나는 한 여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를 그리고 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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