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에서 세 사냥꾼이 개들을 데리고 언덕을 넘어옵니다. 어깨는 처져 있고 손에 든 사냥감은 초라합니다. 그들 앞으로 마을이 펼쳐지고, 얼어붙은 연못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탑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멀리 뾰족한 산이 보입니다. 화면 전체가 회녹색 한 가지 색조로 덮여 있습니다.
| 대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 1565년, 빈 미술사박물관. 화면 전체가 회녹색 한 가지 색조에 잠겨 있고, 사냥꾼들이 든 사냥감은 여우 한 마리뿐이다. |
빈 미술사박물관은 〈눈 속의 사냥꾼〉을 유럽 회화의 첫 겨울 풍경이자 가장 두드러진 겨울 풍경으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적습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다니는 「농민 화가」라는 별명은, 확인해 보면 그의 생애와 잘 맞지 않습니다.
• 한 줄 정의: 풍경과 군중을 한 화면에 담아 인간사의 구조를 보여 준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 본명: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빈에 남은 1559년 이후 그림의 서명은 h 없는 BRVEGEL이고, 작은아들 얀은 BRVEGHEL로 서명했습니다
• 생몰: 1525~1530년경 출생(출생지 미상) ~ 1569년 브뤼셀 사망
• 국적·활동지: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다 1563년 브뤼셀로 이주
• 활동 분야: 유화, 판화 밑그림
• 대표작: 〈네덜란드 속담〉, 〈아이들의 놀이〉, 〈죽음의 승리〉, 〈바벨탑〉, 〈눈 속의 사냥꾼〉, 〈농민의 결혼식〉
브뤼헐이라는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은 출발
브뤼헐의 출생 연도는 1525년에서 1530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출생지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브레다 부근이라는 설과 브뤼헐이라는 이름의 마을이라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이름이 지명에서 왔는지 아니면 지명이 나중에 갖다 붙여진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기록은 1550년 무렵부터입니다. 1550년대 초 그는 메헬렌에서 화가이자 미술상 클로드 도리시를 위해 제단화의 날개를 그렸고, 1551년 안트베르펜의 성 루가 길드에 화가로 등록됩니다.
판 만더르는 그가 피터르 코케 판 알스트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적었습니다. 브뤼헐은 1563년 코케의 딸 마이켄과 결혼합니다.
16세기 유럽 미술의 전체 지형 안에서 그가 어디쯤 서 있는지는 서양 미술사 개관과 함께 보면 잡히기 쉽습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아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1604년에 나온 카럴 판 만더르의 화가 전기에서 옵니다. 그가 죽고 35년 뒤에 쓰인 책입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일화, 이를테면 친구와 함께 농민 복장을 하고 마을 잔치에 끼어들어 관찰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 오늘날까지 반복됩니다. 다만 후대의 전기에 실린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합니다.
브뤼헐이 알프스에서 가져온 눈
길드에 등록한 뒤 그는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1553년 무렵 로마에 있었고, 그곳에서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와 함께 작업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여행이 그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를 두고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당시 북유럽 화가가 이탈리아에 가면 고대 조각과 라파엘로·미켈란젤로의 인체를 배우고 오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브뤼헐의 화면에는 이상화된 인체가 전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하게 받아들인 것은 인체보다 풍경이었습니다. 그의 인물들은 이상적인 비례를 갖지 않고, 대체로 뭉툭하고 얼굴 표정도 단순합니다.
대신 그가 가져온 것은 알프스였습니다. 산맥을 지나며 그는 풍경을 그렸고, 지금 진작으로 인정되는 산악 풍경 드로잉도 남아 있습니다. 그 산들이 이후 그의 그림 배경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눈 속의 사냥꾼〉의 뒤편에 솟은 뾰족한 봉우리들이 그것입니다. 플랑드르는 평지인데, 그의 겨울 풍경에는 알프스가 서 있습니다. 그는 본 것을 옮긴 것이 아니라 조립했습니다. 가까이는 플랑드르 마을, 멀리는 알프스, 그 사이에 강과 얼음이 놓입니다.
그의 풍경화는 사람이 서서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앞쪽의 나무 몇 그루와 저 멀리의 산이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또렷합니다.
| 대 피터르 브뤼헐 도안, 〈큰 알프스 풍경〉. 이탈리아를 오가며 남긴 산 드로잉이 뒷날 그의 배경이 된다. 평지인 플랑드르 그림에 알프스가 서 있는 이유다. |
판화 공방에서 일한 브뤼헐
초기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판화 도안 제작이었습니다. 그는 판화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코크와 오랫동안 함께 일합니다. 코크의 출판소는 당시 네덜란드 출판의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에 있었습니다.
브뤼헐이 한 일은 판화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도안을 조각공이 동판에 새기고 인쇄해 유럽 각지에 팔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는 우화, 일곱 가지 큰 죄, 미덕의 연작 같은 것들을 만듭니다.
| 도안 대 피터르 브뤼헐, 판각 피터르 판 데르 헤이던,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킨다〉, 1557년. 브뤼헐이 그린 밑그림을 다른 사람이 동판에 새겨 유럽 각지로 팔았다. |
여기서 그의 이름이 처음 알려집니다. 그런데 알려진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그의 도안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화풍으로 받아들여졌고, 판 만더르에 따르면 동시대 시인 람프소니우스는 그를 「새로 온 히에로니무스 보스」라고 불렀습니다. 보스는 약 40년 전인 1516년에 죽은 화가로, 기괴한 괴물과 지옥 장면으로 이미 유럽에서 상품성이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실제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킨다〉 판화는 브뤼헐이 그린 도안인데 보스의 이름이 새겨져 나갔습니다.
이 사실이 뒤에 오해를 낳습니다. 브뤼헐을 보스의 아류로 보는 시각입니다. 브뤼헐 자신도 한동안 보스풍 이미지에 대한 시장 수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죄와 어리석음이라는 도덕적 주제도 공유했습니다. 차이는 그가 보스식 상상력을 속담과 마을, 일상의 인간 행동이라는 자기 언어로 바꿔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날짜가 적힌 그의 유화 가운데 이른 것으로는 1557년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샌디에이고 팀켄 미술관)가 있습니다. 빈에 남은 1559년 이후 그림의 서명은 h 없이 BRVEGEL로 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속담〉이 그 시기 유화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한 마을을 무대로 백 가지가 넘는 속담이 동시에 연기되고 있습니다. 벽에 머리를 박는 사람, 돼지 앞에 장미를 뿌리는 사람, 지붕을 파이로 덮은 집. 각각이 당대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관용구입니다. 그림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목록입니다. 1560년의 〈아이들의 놀이〉도 같은 구조로, 팔십 가지가 넘는 놀이가 한 화면에서 동시에 벌어집니다.
| 대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베를린 회화관. 백 가지가 넘는 관용구가 한 화면에서 동시에 연기되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목록이다. |
농민이 아니었던 브뤼헐
브뤼헐이 농민의 잔치와 결혼식과 춤을 그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농민이었거나 농민 편에 서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실제 위치를 보여 주는 사실들을 늘어놓으면 이렇습니다.
- 그는 네덜란드의 이름난 인문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지도책 『세계의 무대』를 펴낸 지도 제작자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와 출판업자 크리스토프 플랑탱을 그런 친구로 꼽습니다. 오르텔리우스는 그가 죽은 뒤 그를 기리는 글을 남겼습니다.
- 같은 미술관은 그의 후원자가 농민이 아니라 주로 학자와 부유한 사업가, 감식안 있는 수집가였다고 설명합니다. 달의 연작을 가졌던 안트베르펜의 상인 니클라스 용헬링크는 그의 그림을 열여섯 점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1563년 그는 브뤼셀로 이주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농민 그림은 무엇인가. 관찰이고, 때로는 거리를 둔 시선입니다. 〈농민의 결혼식〉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데 몰두해 있고, 신부는 뒤쪽 초록색 벽걸이 앞에 조용히 앉아 있고, 정작 신랑은 잔치상에 보이지 않습니다.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에서는 여섯 명이 줄줄이 웅덩이로 넘어집니다. 성경의 비유를 그대로 옮긴 그림인데, 그 비유가 겨눈 대상은 농민이 아니라 눈먼 지도자입니다.
| 대 피터르 브뤼헐,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여섯 사람의 몸이 넘어지는 동작의 단계별로 배치돼 있다. |
브뤼헐의 후기작 가운데에는 눈 내린 플랑드르 마을에 군인들이 들이닥치는 〈베들레헴의 영아 학살〉 같은 그림도 있습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에 있는 판본은 큰아들 소 피터르 브뤼헐 또는 그의 공방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술관은 이 장면이 성경 속 학살을 당대의 징벌 원정처럼 지금의 일로 옮겨 놓았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그가 정치적으로 어느 편이었는지는 문서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판 만더르는 그가 죽기 전 아내에게 너무 날카롭고 풍자적인 드로잉 일부를 태우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가 어떤 정밀함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하다면 얀 반 에이크를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브뤼헐은 그 전통 위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브뤼헐의 달의 연작과 1569년
달의 연작에는 1565년 서명이 있고, 곧이어 안트베르펜 문서에 상인 니클라스 용헬링크가 가진 그림으로 나옵니다. 한 해를 두 달씩 묶어 여섯 시기로 나눈, 이른바 계절 연작입니다. 여섯 점이었다는 추정이 많지만 열두 점이었다는 설도 있고, 현재 다섯 점이 남아 있습니다. 〈눈 속의 사냥꾼〉이 그 가운데 한 점입니다.
이 연작이 중요한 이유는 주제가 인간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중세의 기도서에는 달마다 하는 일을 그린 달력 그림이 있었습니다. 1월에는 잔치, 6월에는 건초 베기 하는 식입니다. 브뤼헐은 그 전통을 가져오되 화면을 완전히 바꿉니다.
- 사람이 작아집니다. 화면의 대부분을 땅과 하늘이 차지합니다.
- 계절이 색으로 표현됩니다. 겨울은 회녹색, 늦여름은 황금빛으로 화면 전체가 한 가지 색조에 잠깁니다.
- 노동이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지 않고 그 리듬 안에서 움직입니다.
〈눈 속의 사냥꾼〉을 다시 봅니다. 사냥꾼들은 성과가 거의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얼음 위에서 놉니다. 왼쪽 여관 앞에서는 사람들이 불을 피우는데, 자세히 보면 간판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영웅적인 순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대신 화면은 언덕 위 사냥꾼들의 발치에서 골짜기 너머 먼 산까지 한 번에 펼쳐집니다.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한 계절 전체가 화면에 들어와 있습니다.
| 대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1563년, 빈 미술사박물관(로테르담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에 더 작은 판본이 하나 더 있다). 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층과 축이 맞지 않아 불안정해 보인다. |
브뤼헐은 1569년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마흔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대략 스무 해에 못 미칩니다.
작은아들 얀은 아버지가 죽기 한 해 전인 1568년에 태어났습니다. 큰아들 소 피터르는 아버지의 그림을 복제하고 변주했고, 작은아들 얀도 화가로 따로 이름을 얻습니다. 판 만더르가 전하기로는 큰아들은 화가 질리스 판 코닝크슬로에게 그림을 배웠고, 작은아들 얀은 세밀화가였던 외할머니 마이컨 페르휠스트에게 수채를 배운 뒤 피터르 후트킨트에게 유화를 배웠습니다. 미술사에서 브뤼헐이라는 이름이 여럿인 이유, 그리고 진작과 복제본을 가리는 일이 까다로운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대 브뤼헐 주요 작품
- 〈네덜란드 속담〉(베를린) · 백 가지가 넘는 속담이 한 마을에서 동시에 연기됩니다.
- 〈아이들의 놀이〉(1560, 빈) · 팔십 가지가 넘는 놀이의 목록.
- 〈죽음의 승리〉(1562~1563, 프라도) · 해골 군대가 산 자를 몰아가는 화면.
- 〈바벨탑〉(1563, 빈) · 고대와 로마네스크 건축 요소를 섞어 그린 탑. 완성되지 않은 채 층과 축이 어긋나 불안정해 보입니다.
- 〈눈 속의 사냥꾼〉(1565, 빈) · 달의 연작 가운데 한 점. 서양 회화의 대표적 겨울 풍경.
- 〈농민의 결혼식〉(1567~1568년경, 빈) · 헛간에서 벌어지는 잔치. 신부는 초록색 벽걸이 앞에 앉아 있고, 신랑은 잔치상에 보이지 않습니다.
-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나폴리) · 여섯 사람이 줄지어 넘어지는 순간을 단계별로 그린 화면.
-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브뤼셀 왕립미술관, 귀속 재조사 중) · 쟁기꾼과 목동, 돛을 편 큰 배가 화면을 채우고, 제목의 사건은 화면 오른쪽 아래 물가 한구석에 물 위로 솟은 두 다리로만 작게 놓입니다.
| 대 피터르 브뤼헐, 〈아이들의 놀이〉, 1560년, 빈 미술사박물관. 팔십 가지가 넘는 놀이가 한 화면에 늘어서 있다. |
| 대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1563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끌려간다. |
| 대 피터르 브뤼헐, 〈농민의 결혼식〉, 1567~1568년경, 빈 미술사박물관. 신부는 뒤쪽 초록색 벽걸이 앞, 종이 관 아래에 앉아 있다. 신랑은 잔치상에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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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피터르 브뤼헐(?),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캔버스에 유채, 73.5×112cm,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Inv. 4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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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브뤼헐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Q. 왜 「농민 브뤼헐」이라고 부릅니까?
농민의 잔치와 결혼식을 여러 점 그렸고, 1604년 판 만더르의 화가 전기에도 그가 농민 복장으로 잔치에 끼어들었다는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오르텔리우스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의 후원자를 주로 학자와 부유한 사업가, 수집가로 설명합니다. 별명과 실제 위치가 어긋나는 사례입니다.
Q. 보스의 모방자였다는 말은 맞습니까?
초기 판화 도안이 보스풍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중 한 점은 보스의 이름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보스풍 수요를 활용하면서도 그 상상력을 속담과 마을, 일상의 인간 행동이라는 자기 언어로 바꿔 놓았습니다.
Q. 브뤼헐이 여러 명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아들이 모두 화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 소 피터르는 아버지의 작품을 복제하고 변주했고, 작은아들 얀도 화가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대 브뤼헐이라 구분해 부릅니다.
Q. 〈눈 속의 사냥꾼〉은 무엇을 그린 그림입니까?
한 해의 흐름을 나누어 그린 연작 가운데 겨울에 해당하는 그림입니다. 중세 기도서의 달력 그림 전통을 이어받되, 사람을 작게 두고 계절 전체를 화면에 담았습니다.
Q.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브뤼헐이 그린 그림입니까?
소장처인 브뤼셀 왕립미술관은 작가 이름에 물음표를 붙여 두고 이 그림을 다시 조사하고 있습니다. 2013년 발표된 한 연구는 이 그림을 잃어버린 원작을 옮긴 오래된 그림으로 보았고, 미술관은 새 조사 결과를 2028년 가을 브뤼헐 전시에서 공개하겠다고 알렸습니다. 이카로스 이야기를 전하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8권 217~220행에는 낚시꾼과 목동, 쟁기꾼이 하늘을 나는 다이달로스 부자를 보고 신이라고 믿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Q. 그의 그림은 어디에 가장 많습니까?
빈 미술사박물관이 열두 점 안팎으로 가장 많은 유화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의 그림을 일찍부터 모은 결과입니다.
브뤼헐의 눈밭 그림이 보여 주는 것
언덕을 넘어오는 세 사냥꾼에게 돌아갑니다. 그들이 잡은 것은 여우 한 마리뿐입니다. 그들 앞의 마을은 그들이 무엇을 잡았든 상관없이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음 위에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습니다.
브뤼헐의 그림은 이렇게 짜여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크게 그리는 대신, 여러 사람의 일을 한꺼번에 보이는 자리에 관객을 세웁니다. 그 자리에서 보면 사냥의 성패는 작은 일이 됩니다. 겨울이 오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하며, 그 전체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계속됩니다. 농민 화가라는 이름표보다 이쪽이 그를 더 가깝게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