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파리, 우산을 든 한 쌍이 화면 오른쪽에서 걸어옵니다. 남자의 어깨가 화면 밖으로 잘려 나가 있고, 화면 한가운데에는 가로등 기둥 하나가 세로로 서서 그림을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눕니다. 젖은 포석은 회색이고 하늘도 회색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각자의 방향으로 걷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귀스타브 카유보트입니다. 그는 인상주의 전시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동료들의 그림을 사 주었고 전시 비용도 그가 댔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표적인 도시 그림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인상주의 화면과 상당히 다릅니다. 붓자국이 흩어져 있지도 않고 색이 부서져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로 잰 듯 단단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 상당수는 가족과 개인 소장에 오래 머물렀고, 거대한 인상주의 컬렉션을 남긴 후원자로서의 명성이 화가 카유보트를 오랫동안 가렸습니다.
• 한 줄 정의: 인상주의 전시를 재정으로 떠받치면서 정작 자기 화면은 기하학적 정밀함으로 채운 화가
• 본명: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 생몰: 1848년 8월 19일 파리 출생 ~ 1894년 2월 21일 프티젠빌리에에서 사망(향년 45세)
• 국적·활동지: 프랑스. 파리, 예르, 프티젠빌리에
• 활동 분야: 유화, 파스텔. 그 밖에 요트 설계, 원예, 우표 수집
• 대표작: 마루 깎는 사람들, 유럽 다리,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 발코니, 목욕하는 남자
법학도에서 화가로
카유보트는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군에 침구를 납품하는 사업과 부동산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해 학위를 받았고 변호사 자격도 얻습니다. 그림은 그 뒤의 일이었습니다.
1870년의 전쟁에 참가한 뒤 그는 레옹 보나의 화실에 들어가고, 1873년에는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도 합격합니다. 학교 생활은 짧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보나에게 받은 아카데믹한 소묘 훈련의 흔적은 그의 정밀한 소묘와 원근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8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큰 재산을 물려받습니다. 이 사실이 그의 생애 전체를 규정합니다. 그는 그림을 팔 필요가 없는 화가였습니다. 팔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시장의 평가를 받을 기회가 적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자화상〉. 그림을 팔 필요가 없던 화가의 얼굴이다. |
마루 깎는 사람들
1875년 그는 〈마루 깎는 사람들〉을 살롱에 냅니다.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세 남자가 웃통을 벗고 무릎을 꿇은 채 마루의 낡은 칠을 대패로 벗겨 내는 장면입니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마루 깎는 사람들〉, 1875년, 오르세 미술관. 대패가 지나간 자리와 아직 남은 자리가 바닥에 결로 나뉘어 있다. |
낙선의 이유로 흔히 주제의 저속함이 거론됩니다. 당시 살롱에서 노동을 그리는 것 자체는 낯설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체로 농촌 노동이었습니다. 밀레의 농부처럼 대지와 결부된 노동에는 시적인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카유보트가 그린 것은 파리 부르주아 아파트 실내를 손보는 도시 노동이었습니다. 반쯤 벗은 남자들의 등이 실내의 광택 나는 바닥과 함께 놓입니다.
그림 자체를 보면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 바닥이 화면의 주인공입니다. 대패가 지나간 자리와 아직 남은 자리가 결을 이루며 화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 시점이 높습니다. 서 있는 사람이 무릎 꿇은 사람을 내려다보는 각도입니다. 관객이 이 집의 주인 자리에 서게 된다는 읽기가 많습니다.
- 노동이 미화되지도 고발되지도 않습니다. 표정은 거의 보이지 않고, 몸의 자세와 도구만 정확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듬해인 1876년, 그는 이 그림을 제2회 인상주의 전시에 냅니다. 살롱에서 거절당한 그림이 인상주의 쪽에서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 전시로 그는 인상주의 그룹의 일원이 되고, 이후 전시의 조직과 재정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비 오는 날의 기하학
1877년의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은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입니다. 무대는 오늘날 더블린 광장으로 불리는 파리 8구의 교차로, 당시 튀랭 거리와 모스크바 거리가 만나던 곳입니다. 도시 개조 과정에서 새 건물과 도로가 들어선 지역이었습니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 1877년, 캔버스에 유채, 212.2×276.2cm, 시카고 미술관. 가운데 가로등이 화면을 크게 둘로 가르고, 오른쪽 남자의 어깨는 화면 밖으로 잘려 나갑니다. |
이 그림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가로등이 화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눕니다. 세로선 하나가 그림을 두 개의 세계로 가릅니다.
- 원근이 과장되어 있습니다. 앞쪽 인물은 크고 뒤쪽 인물은 급격히 작아집니다. 넓은 각도로 찍은 사진에서 나타나는 왜곡과 닮았습니다.
- 인물들이 서로를 보지 않습니다. 우산 아래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걷고, 시선이 겹치는 곳이 없습니다.
- 화면 오른쪽이 잘려 있습니다. 남자의 어깨가 프레임 밖으로 나갑니다. 지나가다 마주친 한순간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입니다.
사진과의 관련은 자주 지적됩니다. 화면의 잘림과 원근이 사진의 시각과 닮은 것은 사실입니다. 2015년 시카고 미술관의 조사는 사진보다는 카메라 루시다 같은 광학 도구를 썼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그가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직접 증거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 글에서는 정황으로만 적어 둡니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 다리〉,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25×181cm, 제네바 프티팔레 미술관. 철교의 격자와 난간의 사선이 인물보다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무엇을 포착했는가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넓은 대로, 균일한 건물, 젖은 포석.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스쳐 갑니다. 같은 시기 르누아르가 그린 몽마르트르의 무도회가 사람들이 뒤섞여 웃는 장면이라면, 카유보트의 파리는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는 도시입니다. 같은 시기 같은 도시를 두 화가가 정반대로 그린 셈입니다.
인상주의 전체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자리가 궁금하다면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개관을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그는 왜 동료들의 그림을 샀나
카유보트가 미술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그림보다 그의 지갑 때문이었던 시기가 길었습니다. 그가 한 일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 여러 차례 인상주의 전시를 조직하고 비용을 지원했으며, 특히 1877년 제3회 전시에서는 핵심 재정 후원자였습니다.
- 동료 화가들의 그림을 샀습니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세잔, 시슬레의 작품이 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 모네가 집세를 내지 못할 때 대신 내주는 식의 직접 지원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하나 짚어야 합니다. 그의 구입을 자선으로만 보는 시각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팔리지 않아 곤란한 그림을 사 주었지만, 동시에 자기가 좋다고 판단한 그림을 골랐습니다. 그가 모은 것들이 오늘날 인상주의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 안목을 증명합니다.
또 하나, 그의 구입은 그룹의 전시 자체를 가능하게 만든 조건이었습니다. 인상주의 전시는 여덟 번 열렸고 그는 그 가운데 다섯 번 출품했습니다. 초기 전시는 상업적으로 부진했고, 1879년 제4회는 이익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군가 비용을 감당해야 이어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다만 이 역할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후원자였고, 이 이중의 위치가 그의 그림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것을 오히려 방해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가 다시 화가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였습니다.
요트와 정원, 그리고 이른 죽음
1880년대 들어 그는 파리에서 점차 물러납니다. 1881년 센강 변 프티젠빌리에에 부지를 사들이고, 1880년대 후반에는 그곳에 사실상 정착합니다. 이 시기의 그는 화가라기보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트를 설계하고 직접 경주에 나갔습니다. 취미 수준이 아니라 설계자로 이름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정원을 가꾸었고, 온실에서 식물을 길렀습니다. 지베르니에 사는 모네와 원예를 주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카유보트의 집은 파리 근교 프티젠빌리에에 있었습니다. 동생 마르시알과 함께 모은 우표 수집품은 뒷날 중요한 컬렉션으로 평가받습니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오렌지 나무〉, 1878년, 휴스턴 미술관. 정원을 직접 가꾸던 사람이 그린 정원이다. |
화가로서는 이 시기에 정원과 강, 요트와 실내를 그렸습니다. 초기의 극단적인 원근은 누그러지고 붓질은 조금 느슨해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화면은 동료들보다 단단합니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아르장퇴유의 요트〉. 그린 사람이 요트를 직접 설계하고 경주에 나갔다. |
1894년 2월 21일, 그는 프티젠빌리에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정원에서 일하던 중이었다고 전해지고, 나이는 마흔다섯이었습니다. 사인은 폐울혈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언이 프랑스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유증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유언장은 죽기 직전이 아니라 1876년 11월, 동생 르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직후 스물여덟 살의 그가 써 둔 것이었습니다. 인상주의가 아직 조롱받던 때입니다. 그는 자신이 모은 인상주의 회화와 파스텔 예순일곱 점을 국가에 기증하되, 그것을 창고에 두지 말고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었다가 종국에는 루브르로 보낼 것을 조건으로 걸었습니다. 유언 집행은 르누아르가 맡았고, 동생 마르시알이 함께 그 뜻을 이었습니다.
국가는 처음에는 유증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유언의 조건이었습니다. 작품을 창고에 두지 말고 걸라는 것이었는데, 뤽상부르 미술관은 이미 비좁아 전부를 걸 자리가 없었습니다. 동생 마르시알과 유언 집행인 르누아르, 미술관 행정 사이의 긴 협상 끝에 마흔 점(인상주의 작품 서른여덟 점과 밀레의 소묘 두 점)만 받되 모두 전시한다는 타협이 1896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897년 뤽상부르 미술관에 이 작품들을 위한 전시실이 새로 열렸고, 보수적인 미술계의 항의도 그 과정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나머지 그림은 1904년과 1908년에 다시 제안되었지만 두 번 모두 거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국가로 들어간 작품들은 프랑스 공공 컬렉션에서 인상주의가 공식적으로 자리를 얻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인상주의 작품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이 유증에서 왔습니다.
이 대목이 그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그는 살아서 동료를 도왔고, 죽어서 그들을 미술관에 넣었습니다.
주요 작품
- 마루 깎는 사람들(1875, 오르세) · 살롱 낙선 후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 도시 노동을 정면으로 다룬 초기 대표작.
- 유럽 다리(1876) · 철교의 격자 구조와 지나가는 사람들. 근대 도시의 금속성이 화면을 지배합니다.
-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1877, 시카고) · 가로등이 화면을 가르는 대형작. 그의 대표 이미지.
- 발코니(1880) · 높은 층에서 내려다본 대로. 급격한 부감 시점.
- 목욕하는 남자(1884) · 남성의 몸을 일상적 자세로 그린 드문 예.
- 프티젠빌리에의 정원과 요트 연작(1880년대) · 만년의 주제.
| 귀스타브 카유보트, 〈발코니〉, 1880년. 시점이 사람 눈높이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꺾여 있다. |
| 귀스타브 카유보트, 〈목욕하는 남자〉, 1884년, 보스턴 미술관. 남성의 몸을 신화나 영웅의 자세가 아니라 일상의 동작으로 그렸다. |
이 글의 도판은 모두 위키미디어 커먼즈의 퍼블릭 도메인 파일입니다. 캡션에 재질이나 치수, 소장품 번호가 없는 작품은 소장기관 기록을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카유보트는 인상주의 화가입니까?
인상주의 전시에 여러 차례 참가했고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므로 인상주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화면의 성격은 다릅니다. 붓자국을 남겨 빛의 진동을 표현하는 대신 윤곽을 또렷하게 유지했고, 원근과 구도를 엄격하게 설계했습니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경계에 있는 화가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Q. 그는 그림을 팔았습니까?
판매에 기댈 필요가 없어 시장에 나온 작품이 드물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판매의 압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상당수가 오래 가족의 손에 남아 있었고, 이것이 그의 재평가가 늦어진 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1964년 시카고 미술관이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을 사들인 뒤 화가로서의 재평가가 빨라졌습니다.
Q. 유증은 왜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유언이 작품을 모두 전시하라고 요구했는데 뤽상부르 미술관에 그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협상 끝에 마흔 점(인상주의 작품 서른여덟 점과 밀레 소묘 두 점)을 받되 모두 전시하는 것으로 타협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때 들어온 작품들이 프랑스 공공 컬렉션에서 인상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Q. 〈비 오는 날〉의 원근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까운 인물과 먼 인물의 크기 차이를 실제보다 크게 그렸기 때문입니다. 넓은 각도로 본 장면과 비슷한 효과가 나며, 화면 중앙의 가로등이 그 왜곡을 더 두드러지게 만듭니다. 사진의 시각과 관련지어 설명되는 경우가 많으나 직접 증거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Q. 요트 설계도 실제로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프티젠빌리에 시기에 요트를 설계하고 경주에 참가했으며, 이 분야에서도 이름을 남겼습니다. 정원 가꾸기와 우표 수집도 취미 이상의 수준이었습니다.
다시 비 오는 거리에서
우산을 든 두 사람이 걸어오는 그 거리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카유보트가 그린 파리는 새로 지어진 도시였고, 그 새로움은 넓고 반듯한 만큼 서늘했습니다.
그 서늘함을 그린 화가가 정작 사람에게는 가장 따뜻했다는 것이 이 생애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사 주었고, 전시 비용을 댔고, 그것을 나라에 남기도록 스물여덟 살에 이미 유언해 두었습니다. 오늘 오르세에서 인상주의 방을 지나갈 때 벽에 걸린 그림 여러 점이 한때 그의 집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