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생애와 작품, 델프트의 스핑크스가 되기까지
· 한 줄 정의: 평생 델프트를 기반으로 살며 빛과 정적을 그리다, 죽은 뒤 거의 잊혔던 화가
· 본명: 요하네스 레이니르손 베르메르(Johannes Reyniersz. Vermeer), 별명 '델프트의 스핑크스'
· 생몰: 1632년 10월 31일 세례 ~ 1675년 12월 15일
· 국적·활동지: 네덜란드 델프트 출생·평생 활동
· 활동 분야: 유화, 미술상 겸업
· 현존 작품: 귀속 기준에 따라 34~37점(2026년 7월 기준) · 생애 총 제작량은 40~50점 추정
1663년 8월 11일, 델프트를 여행하던 프랑스의 수집가 발타사르 드 몽코니가 베르메르의 작업실을 찾아갔습니다. 화가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작업실 안에는 완성된 그림이 단 한 점도 없었습니다.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화가가 아니라 어느 빵집이었습니다. 그 빵집 주인이 베르메르의 그림 한 점을 가지고 있었고, 값으로 치렀다는 금액을 듣고 드 몽코니는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여겼습니다.
그의 집은 원래 여관이었다
베르메르는 1632년 10월 31일 델프트의 개혁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 레이니르 얀손은 1631년부터 여관 주인이자 미술상을 겸했습니다. 처음에는 폴더르스흐라흐트의 '나는 여우'라는 여관을 운영했고, 1641년에는 가족과 함께 마르크트 광장 모퉁이의 더 큰 여관 '메헬런'으로 옮겼습니다.
베르메르는 그림 그리는 법을 누구에게 배웠는지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초기작이 당시 초상화나 풍경화보다 격이 높게 여겨지던 대형 역사화였다는 점에서, 그런 장르를 가르칠 수 있는 화가 밑에서 수학했으리라 추정될 뿐입니다. 훗날 장모가 되는 집안과 먼 친척이었던 위트레흐트의 화가 아브라함 블로마르트, 또는 그의 결혼식 증인이자 중개인이었던 레오나르트 브라머르가 후보로 거론되지만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델프트가 통째로 흔들린 해
1654년 10월 12일 오전 열 시 십오 분, 델프트 도심 북동쪽의 화약 창고가 폭발했습니다. 이 창고에는 9만 파운드의 화약이 보관돼 있었고, 폭발음은 전승에 따르면 멀리 텍설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사망자는 500명이 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수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시가지의 약 3분의 1이 파괴됐고 페르베르스데이크 동쪽 지역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델프트의 천둥'이라 불리는 이 참사입니다.
희생자 중에는 화가 카럴 파브리티우스도 있었습니다. 그의 작업실이 있던 되런스트라트는 이 재난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거리였습니다. 파브리티우스는 폭발 일곱 시간 뒤 중상을 입은 채 잔해에서 구조됐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후 숨졌습니다.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베르메르의 초기 화풍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료 화가는, 베르메르가 스물두 살 때 도시 전체를 뒤흔든 참사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혼을 위해 개종해야 했다
1653년 4월 20일, 베르메르는 스히플라위던에서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했습니다. 베르메르는 개혁교회 집안에서 자랐지만 정식 신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카타리나와 결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모 마리아 튄스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화가 레오나르트 브라머르의 중재를 거쳐 결국 승낙했습니다.
그해 12월 베르메르는 성 루가 길드에 가입했고, 이후 1662~1663년과 1670~1671년 두 차례에 걸쳐 길드의 이사(호프트만)를 맡았습니다. 1660년 무렵부터는 장모의 집인 오우더 랑언데이크로 들어가 살았는데, 이 집은 방이 열한 개나 되는 큰 저택으로 가톨릭 비밀 예배당과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베르메르는 이 집 이층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빈 작업실에서 손님이 본 것
1663년 8월 11일 드 몽코니가 방문했을 때 베르메르가 완성작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제작 속도가 느렸는지, 완성되는 대로 팔려 나갔는지까지는 이 기록이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를 소개받은 빵집 주인은 아마도 헨드릭 판 뷔텐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판 뷔텐이 그 그림에 지불했다는 값, '600리브르'를 드 몽코니는 자신의 기록에 터무니없다고 적었습니다.
이 빵집 주인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베르메르가 죽은 뒤, 판 뷔텐은 그동안 밀린 빵값 600길더 이상의 담보로 미망인 카타리나에게서 그림 두 점을 받았습니다. 학자들은 이 두 점이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와 '기타 연주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림 값을 정확한 액수로 셈해 빵값과 맞바꿀 만큼, 베르메르의 그림은 그의 생전에도 이미 구체적인 화폐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습니다.
그림이 한 사람에게 쏠린 이유
베르메르는 극도로 정밀하게 그렸고, 그 때문에 한 해에 두세 점밖에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34점에서 37점이 그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그중 3점은 학계 의견이 갈립니다), 생애 전체로는 마흔에서 쉰 점 정도를 그렸으리라 추정됩니다. 미술사가 존 마이클 몬티아스는 법정 기록과 공증 문서를 해독해 베르메르의 삶에 관한 많은 세부를 밝혀냈는데, 그에 따르면 베르메르는 대부분 특정 후원자의 의뢰를 받아 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후원자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 델프트의 수집가 피터르 클라스존 판 라위번입니다. 그는 1657년 베르메르에게 200길더를 빌려주었고, 베르메르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사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판 라위번의 사위 야코프 디시위스는 1695년 죽을 때 무려 21점의 베르메르 작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마흔에서 쉰 점을 그린 화가의 작품 절반 가까이가, 한 집안의 소장품으로 쌓여 있었던 셈입니다.
사적인 실내로 방향을 바꾸다
베르메르의 초기작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나 〈다이아나와 님프들〉처럼 큰 화폭의 종교화·신화화였습니다. 그런데 1656년 무렵을 기점으로 그가 다루는 소재가 크게 바뀝니다. 이후 그림은 거의 대부분 조용하고 사적인 실내 장면, 일상의 한순간을 하고 있다가 화가에게 '들킨' 듯한 인물들로 채워집니다. 현존작 가운데 열여섯 점에는 젊은 여성이 등장하고, 그중 여섯 점에서는 그 여성이 편지나 시를 읽거나 쓰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우거나 주사위·카드놀이를 하는 장면은 그의 그림에서 자취를 감췄고, 대신 술을 따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는 깊이감을 강조하기 위해 의자나 커튼 같은 소품을 화면 앞쪽에 배치하는 '레푸수아르' 기법을 즐겨 썼고, 값비싼 안료인 울트라마린과 납주석황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실내 장면이 아닌 것은 〈델프트 풍경〉과 〈골목길〉 두 점뿐인데, 이 역시 그의 대표작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그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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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리츠하위스(헤이그, 소장번호 92) · 제작 약 1660~1661년 · 캔버스에 유채 · 96.5×115.7cm아그래 |
렌즈를 썼는가, 눈만 썼는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빈틈없는 공간감을 두고, 그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으리라는 추정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물감 층 아래 밑그림 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렌즈를 통해서만 나올 법한 부드러운 초점 흐림 효과가 몇몇 그림에 있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됩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 최소 열세 점에서는 못이나 핀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중심 소실점의 흔적이 발견되며, 여기서 분필 묻힌 실을 이용해 원근선을 그었으리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당시 기술로 그 정도 정밀도를 낼 렌즈를 만들 수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어두운 방 안에서 안료와 빛을 그만큼 정확히 다룰 수 있었겠느냐는 반론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베르메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썼다거나 소유했다는 당대의 문서 기록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논쟁은 지금도 학계의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열려 있습니다.
일곱 나라로 흩어진 그림들
베르메르는 밑그림이나 준비 스케치를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정밀하게 계산된 화면을 그렸으면서도, 그 계산의 흔적인 종이 위 습작은 남기지 않은 셈입니다. 오늘날 그의 것으로 인정받는 30여 점은 네덜란드,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미국 이렇게 일곱 나라에 흩어져 있습니다. 한 도시에서 태어나 한 도시를 떠난 적 없는 화가의 그림들이, 그가 죽고 여러 세기에 걸쳐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희소한 그림들이기에, 도난과 진위 논쟁도 유독 극적입니다. 1971년 9월 23일, 마리오 로이만스라는 인물이 브뤼셀 예술궁전(현 BOZAR)에 걸려 있던 베르메르의 〈연애편지〉를 리놀륨 칼로 액자에서 그대로 오려내 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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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크스미술관(암스테르담, 소장번호 SK-A-1595) · 제작 약 1669~1670년 · 캔버스에 유채 · 44×38.5cm |
이 그림은 당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에서 대여돼 순회 전시 중이었습니다. 진위 논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022년 워싱턴 내셔널갤러리는 기술 조사 끝에 자신들이 소장한 〈플루트를 든 소녀〉가 베르메르의 작품이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레이크스미술관은 여전히 베르메르의 진작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서른 몇 점뿐인 화가의 작품 목록조차, 이렇게 지금도 완전히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루 반 만에 무너지다
1672년은 네덜란드에서 '재난의 해'로 불립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뮌스터 주교의 동시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졌고, 미술 시장은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학교와 상점이 문을 닫았습니다. 베르메르 부부를 도와주던 장모 마리아 튄스의 수입도 줄었는데, 그녀가 소유한 스호온호번 인근의 땅이 네덜란드 방어선의 일부로 일부러 물에 잠겼기 때문입니다. 그림 판매에만 의존하던 베르메르는 이 시기에 거의 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675년 12월, 그는 무너졌습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하루 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듬해 1676년 4월 30일, 사망 약 넉 달 반 뒤에 미망인 카타리나가 고등법원에 낸 채무 양도 청원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경제적 압박 아래 그가 급격히 쇠약해졌다는 것이 카타리나 자신의 서술입니다. "그 결과, 그리고 자녀들의 부담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방편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극심한 광란과 쇠약에 빠져 하루, 혹은 하루 반 만에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남긴 열한 명의 자녀 중 열 명이 아직 미성년자였습니다.
200년 뒤 스핑크스가 되다
베르메르가 죽은 뒤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혔습니다. 남긴 작품 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바꾼 것은 1866년, 프랑스의 급진 공화주의 비평가 테오필 토레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 체제에 반대하다 1850년대에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빌럼 뷔르거'라는 네덜란드풍 필명을 썼습니다.
그가 베르메르에게 매혹된 계기는 1842년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에서 본 〈델프트 풍경〉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체계적으로 베르메르의 흩어진 작품을 추적했고, 1860년대에 직접 몇 점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토레뷔르거는 베르메르를 무명의, 저평가된 천재로 소개하며 '델프트의 스핑크스'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 적어 붙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1869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컬렉션은 23년이 지난 1892년에야 파리 오텔 드루오에서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59점의 회화로 이뤄진 이 경매에는 베르메르의 작품 여러 점이 포함돼 있었고, 이 경매를 계기로 베르메르의 그림은 비로소 국제 미술 시장에 확고한 자리를 얻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되살린 화가가, 그 사람이 죽고도 20여 년이 지나서야 완전히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뒤늦은 명성에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1937년, 네덜란드 화가 한 판 메이헤런이 그린 위작 〈엠마오의 저녁 식사〉가 베르메르 최고의 걸작으로 환영받으며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에 당당히 걸렸습니다. 1945년 판 메이헤런 자신이 위조 사실을 자백하면서 미술계는 충격에 빠졌고, 다른 '거장의 그림'들도 줄줄이 진위를 의심받았습니다. 진짜 베르메르는 죽고 200년 가까이 잊혔다가 뒤늦게 스핑크스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가짜 베르메르는 그려진 지 몇 년 만에 그 스핑크스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던 것입니다.
토레뷔르거가 붙여 준 이름값은 이후 더 멀리까지 번졌습니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베르메르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겼고, 1921년 파리에서 열린 네덜란드 거장전에 걸린 〈델프트 풍경〉을 보러 갔습니다. 당시 이미 중병을 앓던 프루스트에게 이 관람은 거의 목숨을 건 외출이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을 자신의 소설 속 한 장면, 작가가 베르메르의 그림 앞에서 쓰러져 죽는 장면으로 남겼습니다.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평생 델프트를 벗어나지 않았던 화가가, 죽고 250년 가까이 지나 파리의 병약한 소설가를 그림 앞으로 불러낸 셈입니다.
확인한 자료
이 글의 사실 관계는 아래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원 학술 연구나 공증 문서 자체가 아니라 이를 요약한 2차·3차 자료를 경유해 확인한 항목은 그 층위를 밝혀 둡니다.
- 토레뷔르거의 재발견 경위·1892년 경매: Vermeer Centrum Delft 공식 블로그. 이 블로그가 요약하는 몬티아스(J.M. Montias)의 공증 문서 연구 원본은 열람하지 않았습니다(2차 자료 경유).
- 빵집 일화·미망인의 청원서·반 라위번 후원·소재 전환·소묘 부재·분산 소장·도난·진위논쟁: 네덜란드어 위키백과 "Johannes Vermeer" 항목. 백과사전이라는 3차 자료이며, 이 항목이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 1676년 미망인 청원서 대목만 1차 사료 직접 인용에 해당합니다.
- 델프트 화약창고 폭발(1654): 네덜란드어 위키백과 "Delftse donderslag" 항목(3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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