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왜 어색한 옆모습으로 그렸을까?
현대인들에게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The Duke and Duchess of Urbino>은 낯설게 느껴지는 이중 초상화(doppio ritratto)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20?-1492)는 우르비노의 궁정화가는 아니었지만, 페데리코 공작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궁정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는 1472년경 공작의 의뢰를 받아 이 독특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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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1472년경, 각 47x33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이 작품은 두 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두 폭으로 구성된 미술 작품을 '딥티크(diptych)'라 부릅니다. 지금은 향수 브랜드로 익숙한 이름이지만, 원래는 미술 용어였지요.
이 그림은 화려한 금장 액자에 담겨 있으며, 중간에 접을 수 있는 경첩이 달려 있습니다. 그림을 접었을 때 보이는 뒷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피치 미술관은 이 작품을 벽에 거는 대신, 관람객이 앞뒷면을 모두 감상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투명한 함에 넣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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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앞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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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뒷면) |
앞면의 그림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1422-1482)와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1446-1472)가 그려져 있습니다. 남편은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진홍색 옷을 입고 있으며, 아내는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고귀한 신분을 드러냅니다. 그림 속 배경은 공작이 다스리던 영지의 풍경으로, 인물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작게 그려져 공작 부부의 존재감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옆모습만 그린 것은 고대 로마 시대 주화에 새겨진 황제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당시 관례대로라면 남편인 페데리코가 더 영예로운 자리인 오른쪽을 차지하며 오른쪽을 바라봐야 했지만, 그림에서는 반대로 왼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페데리코가 왼쪽을 바라보는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그는 용맹한 용병대장이었지만, 한 전투에서 창에 찔려 오른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그는 남은 왼쪽 눈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칼로 콧대를 베어냈다고 전해집니다. 화가는 그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왼쪽 얼굴을 그린 것입니다.
22세의 페데리코는 전쟁과 기근으로 파산 직전이었던 우르비노 공국을 물려받아 부흥시켰지만, 잔혹한 전쟁의 흔적은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화가는 페데리코의 얼굴에 난 사마귀나 점까지 그려 넣어 사실감을 더했습니다.
페데리코는 첫 번째 아내가 사망하자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의 바티스타와 결혼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둘 사이에 딸만 여섯을 낳은 후 마침내 아들을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그림은 페데리코가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의뢰한 작품입니다. 바티스타의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표현된 것은 당시 귀부인의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작부인의 이마가 상당히 넓은 편인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넓은 이마가 미의 기준이어서 여성들은 이마의 잔머리를 밀거나 심지어 불로 지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초상화 속 여성들은 대부분 머리카락을 눈이 찢어질 정도로 위로 바짝 당겨 묶어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뒷면의 그림, '공작 부부의 개선식'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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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의 뒷면 (개선식) |
뒷면에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고대 로마의 개선 장군처럼 마차를 타고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장면에는 각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왼쪽의 공작은 갑옷을 입고 백마가 끄는 마차에 타고 있는데, 승리의 여신이 그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한 네 여인은 각각 정의, 꿋꿋함, 신중함, 절제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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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공작의 개선식 |
오른편의 부인은 순결을 상징하는 유니콘이 끄는 마차를 타고 기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한 여인들은 순결, 겸손, 믿음을 상징하며, 한 여인이 들고 있는 펠리컨은 자식이 굶주릴 때 제 가슴살을 뜯어 먹인다는 전설 때문에 모성애와 희생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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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스포르차의 개선식 |
이렇듯 남편은 통치자로서의 공적인 미덕을, 아내는 부인으로서의 사적인 미덕을 상징하며 서로를 보완합니다. 실제로 페데리코는 아내와 정치, 행정 문제를 상의했고, 그가 전쟁에 나갔을 때에는 아내가 우르비노를 대신 통치했다고 합니다. 바티스타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게도 인문학 교육을 시켰던 스포르차 가문의 방침 덕분이었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져 공작 부부에 대한 찬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페데리코가 지닌 덕망과 그의 아내가 지닌 영예를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아내가 죽은 후, 페데리코는 '스투디올로(Studiolo)'라는 개인 서재를 짓고 인문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말이 개인 서재이지, 사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로 그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집한 고대 필사본들로 가득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역시 <회화의 원근법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공작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리하여 페데리코의 통치 아래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시기 최고의 인문학 중심지 중 하나로 번성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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