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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전기, 아이콘을 보던 소년에서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로

글 · 다시채 | 2026년 8월 6일

피츠버그의 소년, 아이콘과 함께 자라다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노동자 동네에서 카르파토루신(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르파티아산맥 일대에 살던 동슬라브계 소수민족입니다) 이민자 부부의 막내아들로 앤드루 워홀라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성에서 마지막 철자 하나를 지우고 앤디 워홀(Andy Warhol)로 불렸습니다. 어릴 적 그는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Julia Warhola)를 따라 비잔틴 가톨릭(로마 교황권 아래 있으면서 동방정교회의 전례와 아이콘 전통을 따르는 가톨릭의 한 갈래입니다) 성당에 다니며, 제단 앞 아이콘 스크린에 걸린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얼굴을 몇 시간씩 들여다보는 아이였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육십 년 뒤, 그는 생애 마지막 대작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을 백여 점 가까이 되풀이해 그렸습니다. 상업 삽화가로 경력을 시작한 그가 팝아트의 얼굴이 될 수 있었던 이유와, 하필 생애 마지막 순간에 같은 얼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그린 이유는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그는 평생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일을 미술로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반복의 감각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났는지를 따라갑니다.

앤디 워홀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팝아트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 20세기 미국 미술가
· 생몰: 1928년 8월 6일 피츠버그 출생, 1987년 2월 22일 뉴욕 사망
· 국적·활동지: 미국(카르파토루신계 이민 2세), 뉴욕 중심 활동
· 활동 분야: 팝아트 화가·판화가·영화 제작·출판인
· 대표작: 《캠벨 수프 캔》(1962), 《마릴린 딥티크》(1962), 《브릴로 박스》(1964), 《최후의 만찬》 연작(1984~1986)

형성기, 병상의 그림과 성당의 얼굴들

앤디 워홀의 부모는 지금의 슬로바키아 북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 미코바(Miková) 출신의 카르파토루신계 이민자였습니다.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1889~1942)는 1914년에, 어머니 줄리아 자바츠키 워홀라는 1921년에 각각 미국으로 건너와 피츠버그에 정착했습니다. 아버지는 건설과 광산 노동으로 세 아들을 키웠고, 앤디는 그 막내였습니다. 아버지는 1942년, 공사 현장에서 오염된 물을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덟 살 무렵 앤디는 시드넘무도병(연쇄상구균 감염 후유증으로 팔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신경계 질환입니다)을 앓아 여러 달을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이 시기 어머니 줄리아는 자신이 지녔던 그림 솜씨로 아들에게 처음 그리는 법을 가르쳤고, 아홉 살에는 카메라도 사 주었습니다. 병상에 누운 채 라디오를 듣고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모으던 이 시절의 습관은, 훗날 그가 평생 몰두하게 될 유명인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같은 시기 그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워홀 가족이 다니던 성 요한 크리소스톰 비잔틴 가톨릭 성당에는 제단 앞을 가로막는 이 층 높이의 아이콘 스크린이 있었고, 그 위에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얼굴이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 앤디는 어머니와 함께 한 주에 여러 차례 이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며 그 얼굴들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2019년 앤디 워홀 미술관이 기획해 이후 브루클린 미술관으로 순회한 회고전 'Revelation'은 이 성장 배경을 그의 예술 세계와 연결해 종합적으로 조명한 첫 전시였는데, 이 전시가 짚었듯 그는 유명해진 뒤에도 주변 사람들이 종교에서 멀어지는 동안 미사 참례 같은 일부 가톨릭 관행을 계속 지켰습니다.

비잔틴 가톨릭 성당의 아이콘 스크린. 성인과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성화들이 금색 틀에 담겨 여러 줄로 나란히 걸려 있다.

비잔틴 가톨릭 성당의 아이콘 스크린. 같은 얼굴들이 줄지어 걸린 이 구조가 어린 워홀이 몇 시간씩 들여다보던 화면이다. 다만 사진은 워홀이 다니던 피츠버그 성당이 아니라 같은 이름을 쓰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 비잔틴 가톨릭 성당이다. 촬영 Nheyob,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1945년 워홀은 카네기공과대학(현 카네기멜런대학교)에 진학해 회화디자인을 전공했고, 이 시기 잉크로 그린 그림을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에 눌러 찍어 살짝 번진 듯한 효과를 내는 블롯라인 기법을 익혔습니다. 1949년 졸업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곧 잡지 글래머(Glamour)로부터 삽화 의뢰를 받았는데, 인쇄된 지면에는 편집자의 실수로 성의 마지막 글자 a가 빠진 채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이 실렸습니다. 그는 이 단순해진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생애의 전환점, 1968년 6월의 총성

1968년 6월 3일 오후, 워홀은 새로 옮긴 유니언스퀘어웨스트 33번지의 스튜디오에 있었습니다. 한때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총알은 그의 위와 간, 비장, 식도, 양쪽 폐를 관통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한때 사망 판정을 받았을 만큼 위중했던 그는 다섯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살아남았습니다. 솔라나스는 자신이 워홀에게 건넨 희곡 원고를 그가 잃어버렸다고 여겨 격분했으며, 훗날 경찰에게 그가 "내 삶을 너무 많이 통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 사건은 워홀의 몸과 삶 모두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남은 평생 수술용 코르셋을 착용해야 했고, 그해 말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에 맞은 뒤로는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총격 이전까지 낯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던 그의 작업실은 이후 출입 통제가 훨씬 엄격해졌고, 워홀 자신도 이전보다 신중하고 사업가에 가까운 태도로 작업을 대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어법은 언제, 왜 바뀌었는가

상업 삽화가에서 팝아트의 얼굴이 되기까지, 워홀이 그림을 만드는 방식은 뚜렷이 다른 네 시기를 거쳤습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기(1949~1960). 이 시기 내내 워홀은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업 일러스트레이터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특히 구두 회사 아이 밀러(I. Miller)의 광고 삽화로 이름을 알려, 업계지 여성복 일보로부터 '신발업계의 레오나르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그는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뚜렷이 구분하던 업계 관행 안에서 일하는, 이미 성공한 광고 삽화가였습니다.

손그림에서 실크스크린으로(1961~1962). 1961년 무렵 워홀은 만화 캐릭터를 확대해 그린 회화로 순수미술 시장에 발을 들였고, 이어 1962년 캠벨 수프 캔 서른두 점을 그렸습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이 서른두 점은 실크스크린 인쇄가 아니라 합성수지 물감으로 하나하나 손으로 그린 그림이며, 캔 바닥의 꽃문양까지 도장으로 직접 찍어 완성했습니다. 1962년 7월 9일 로스앤젤레스 페루스 갤러리에서 열린 이 작품들의 첫 개인전 이후, 같은 해 워홀은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판에 뚫린 구멍으로 잉크를 밀어내 이미지를 찍어 내는 인쇄 기법입니다)으로 캔버스에 옮기는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전혀 다른 국면으로 들어섭니다. 1962년 8월 5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세상을 떠나자, 워홀은 영화 나이아가라(1953)의 홍보 사진 한 장을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쉰 번 반복해 찍어 낸 《마릴린 딥티크》를 완성했습니다. 왼쪽 스물다섯 개는 화려한 색으로, 오른쪽 스물다섯 개는 흑백으로 찍혀 있는데, 이 좌우의 대비를 그녀의 삶과 죽음의 대비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80년 런던 테이트가 사들여 지금도 그곳에 있습니다.

팩토리와 슈퍼스타기(1963~1968). 1963년 워홀은 뉴욕 이스트 47번가 231번지에 작업실을 열었고, 사진가 빌리 네임(Billy Name)이 벽 전체를 은색 페인트와 은박지로 뒤덮으면서 이곳은 실버 팩토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판화가 제라드 말랑가(Gerard Malanga)가 실크스크린 작업을 도맡은 주요 조수로 합류했고, 이곳을 거쳐 간 이디 세즈윅 같은 인물들은 워홀 자신이 '슈퍼스타'라 부른 독특한 사교계를 이루었습니다. 1963년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워홀은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내가 무엇을 하든 기계처럼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조수들의 손을 빌려 같은 이미지를 몇 번이고 찍어 내던 이 시기 그의 작업 방식을 정확히 요약합니다. 실제로 그는 1964년 한 해에만 재클린 케네디의 초상을 삼백 점 넘게 찍어 냈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미술을 넘어 영화와 음악으로도 활동을 넓혔는데, 1965년 12월 그리니치빌리지의 한 공연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발견한 뒤 이들의 매니저를 자처했고, 1967년 발매된 데뷔 음반에는 껍질을 벗기면 분홍빛 과육이 드러나는 스티커 형태의 노란 바나나 그림을 표지로 그려 넣었습니다.

총격 이후, 비즈니스 아트기(1968~1987). 1968년 총격 이후 워홀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미술계에 자리 잡았습니다. 1969년 그는 언론인 존 윌콕과 함께 잡지 인터뷰(Interview)를 창간했고, 1970년대에는 유명 인사와 부유층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그리는 작업으로 안정적인 수입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훗날 이런 태도를 '비즈니스 아트'라는 말로 직접 설명했는데, 돈을 버는 일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1982년 화상 브루노 비쇼프베르거의 소개로 만난 젊은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는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백여 점의 공동 작업을 남겼습니다. 워홀이 상업 이미지를 먼저 그려 넣으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자신의 그림을 더하는 방식이었는데, 바스키아는 이 협업을 계기로 워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스크린 인쇄를 처음 시도했고, 워홀은 반대로 오랜만에 붓을 직접 들어 손으로 그리는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1985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열린 두 사람의 합동 전시는 혹평 속에 끝났고, 공동 작업도 사실상 여기서 멈췄습니다.

시기특징
상업 일러스트레이터기(1949~1960)아이 밀러 구두 광고로 이름을 알린 성공한 상업 삽화가
손그림에서 실크스크린으로(1961~1962)손으로 그린 캠벨 수프 캔에서, 먼로 사망 직후 사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전환
팩토리와 슈퍼스타기(1963~1968)조수를 조직해 이미지를 반복 생산, 영화·음악으로 활동을 넓히다 총격으로 마감
총격 이후 비즈니스 아트기(1968~1987)인터뷰 잡지 창간, 초상화 의뢰 작업, 바스키아와의 협업, 최후의 만찬 연작

동시대인과의 관계망

워홀의 협업자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된 관계는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였습니다. 그녀는 1952년 피츠버그의 집을 떠나 뉴욕의 아들 집으로 옮겨 와 이후 거의 이십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병상에서 아들에게 처음 그림을 가르쳤던 그녀는, 뉴욕에서도 특유의 곱슬곱슬한 손글씨로 아들의 광고 삽화와 앨범 표지, 책 그림에 글자를 얹는 협업자가 되었습니다. 1959년 워홀이 실내 디자이너 수지 프랭크퍼트와 함께 만든 장난스러운 요리책 와일드 라즈베리에서도 조리법을 손으로 옮겨 적은 것은 줄리아였습니다. 그녀는 1971년 피츠버그를 방문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 남편 곁에 묻혔습니다.

같은 시기 그의 작업실을 거쳐 간 인물들도 그의 작업 방식 자체를 이루는 부분이었습니다. 실크스크린을 도맡은 조수 제라드 말랑가, 공간을 은빛으로 채운 사진가 빌리 네임, 그리고 그가 후원한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모두 워홀이 혼자 만드는 화가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을 조직해 이미지를 반복 생산하는 방식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당대 평가와 후대 재평가

생전의 워홀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1960년대 초 일부 평론가들은 수프 캔이나 유명인 얼굴을 그대로 옮겨 찍는 그의 작업을 진지한 미술이 아니라 값싼 재주로 여겼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페루스 갤러리의 첫 전시 당시 이웃 화랑이 진짜 수프 캔을 진열창에 늘어놓고 '진품, 개당 29센트'라는 팻말을 붙였던 일화는 그 분위기를 잘 보여 줍니다. 상업미술 출신이라는 이력도 그가 순수미술계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는 데 오랫동안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워홀은 20세기 후반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반복과 복제, 유명인 이미지를 다루는 그의 방법은 대량생산과 이미지 소비 사회를 다루는 언어로 재평가받았습니다. 2019년 앤디 워홀 미술관이 기획해 이후 브루클린 미술관으로 순회한 회고전 'Revelation'은 또 다른 방향의 재평가를 보여 줍니다. 생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신앙심과 종교적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그의 예술 세계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조명한 것입니다. 반세기 넘게 다뤄진 인물에게서도, 그를 보는 눈은 이렇게 계속 갱신되고 있습니다.

주요 작품

앤디 워홀의 대표작
  • 《캠벨 수프 캔》(1962): 서른두 점을 손으로 그린 팝아트 초기의 대표작으로, 로스앤젤레스 페루스 갤러리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 《마릴린 딥티크》(1962): 실크스크린으로 쉰 번 반복해 찍은 마릴린 먼로의 얼굴로, 런던 테이트에 있습니다.
  • 《브릴로 박스》(1964): 세제 상자를 나무로 재현한 조각으로, 상품과 미술의 경계를 물었습니다.
  • 《최후의 만찬》 연작(1984~1986):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원작을 백여 점 가까이 되풀이한 생애 마지막 대작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앤디 워홀 작품은 워홀이 직접 그렸나요, 조수가 그렸나요?

워홀은 1962년 이후 상당수 작품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했고, 스크린을 캔버스에 찍어 내는 손작업은 제라드 말랑가를 비롯한 조수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만 이미지를 고르고 색과 구성을 정하는 것은 워홀 자신이었으며, 그는 이런 방식 자체를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말로 직접 설명했습니다. 그가 다시 손으로 직접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4년 이후 장미셸 바스키아와의 협업과 맞물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Q. 앤디 워홀 미술관은 어디에 있나요?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은 1994년 5월 문을 연, 미국에서 한 사람의 작품만을 다루는 미술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입니다. 워홀 재단이 기증한 삼천여 점의 작품과 필름, 개인 소장품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벽돌로 지은 여러 층의 사각형 건물. 정면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 촬영 Barry Wise,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2.0.

긴 식탁 앞에 예수와 열두 제자가 한 줄로 앉아 있는 벽화. 가운데 예수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세 명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1495~1498).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워홀이 생애 마지막에 백 점 넘게 되풀이해 그린 원작이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예순 살에 가까워진 워홀은 1985년과 1986년에 걸쳐 백 점이 넘는 《최후의 만찬》 변주를 그렸습니다. 1987년 1월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맞은편 건물에서 그 가운데 스물두 점이 걸린 전시가 열렸고, 이는 워홀 자신에게도 화상 알렉산더 이올라스에게도 생애 마지막 전시가 되었습니다. 워홀은 그해 2월 22일 담낭 수술 후유증으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상에서 어머니를 따라 성당의 아이콘을 오래 들여다보던 여덟 살 소년이, 육십 년 가까이 지나 그 성당의 다른 얼굴 같은 그림을 백여 점이나 되풀이해 마주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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