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피츠베크 〈책벌레〉 해설, 원래 이름은 〈사서〉였다
· 화가: 카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1808~1885)
· 제작: 1850년경
· 원래 제목: 사서(Der Bibliothekar), 화가 자신의 판매 대장 기록 기준
· 재료: 캔버스에 유채
· 크기: 49.5×26.8cm
· 현 소장처: 게오르크 셰퍼 미술관, 슈바인푸르트, 독일
사다리 꼭대기에 선 노인이 두꺼운 책을 코끝에 바싹 붙이고 있습니다. 오른손이 그 책을 들고, 왼손은 또 다른 책을 펼쳐 들었고, 왼팔 겨드랑이 사이에는 세 번째 책이 끼워져 있습니다. 발밑으로는 사다리가 대각선으로 뻗어 내려가지만 바닥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 그림은 흔히 〈책벌레〉로 불립니다. 그런데 정작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은 판매 대장에 이 그림의 이름을 '사서'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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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슈피츠베크, 〈책벌레〉, 1850년경, 캔버스에 유채, 49.5 × 26.8cm, 슈바인푸르트 게오르크 셰퍼 미술관. 노인의 머리 위 명판에 새겨진 글자가 METAPHYSIK입니다. 책을 든 두 손과 겨드랑이에 낀 한 권을 함께 세어 보십시오. |
몸 전체가 독서 기구입니다
화면은 가로보다 세로가 거의 두 배 가까이 깁니다. 이 좁고 긴 비율 자체가 서가의 높이를 실감하게 만듭니다. 노인은 화면 위쪽 3분의 1 지점, 사다리 발판 위에 서 있습니다. 왼쪽 서가에는 오래된 책들이 색이 바랜 채 빼곡히 꽂혀 있고, 오른쪽 서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쪽으로는 녹청빛이 도는 천장이 살짝 보이는데, 소용돌이 무늬의 흔적이 있어 장식적인 천장화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노인의 자세를 하나씩 짚어 보면 볼수록 정교합니다. 오른손은 두꺼운 책을 펼쳐 얼굴 바로 앞까지 끌어당겼습니다. 눈이 나쁜 사람이 글자를 읽으려고 취하는 자세 그대로입니다. 왼손에는 더 작은 책자를 펼쳐 들었고, 왼팔 겨드랑이 사이에는 붉은 갈색 표지의 세 번째 책이 끼워져 있습니다.
흰 크라바트를 맨 목, 검은 코트, 무릎 아래로 이어지는 반바지 차림은 격식을 차린 사람의 옷차림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나온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갖춰 입고 이 서가에 올라온 것입니다. 오른쪽 서가를 가까이 보면 두 번째 칸에서 책 몇 권이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아예 자리를 비운 틈이 보입니다. 정갈하게 정돈된 서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계속 꺼내 보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서재라는 뜻입니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짙은 초록색 천구의 하나가 나무 받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표면에 흰 점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어, 이것이 지구본이 아니라 천구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다리는 이 천구의 옆을 지나 화면 아래로 대각선을 그리며 내려가지만, 정작 바닥이 어디인지는 그림 안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노인이 얼마나 높이 올라와 있는지, 서가가 얼마나 큰 공간인지는 끝내 가늠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필 '형이상학' 칸 앞입니다
노인의 머리 위쪽, 화면 왼쪽 서가 끝에는 금박 장식 액자에 담긴 검은 명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 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글자는 "METAPHYSIK", 형이상학입니다. 이 서가가 임의의 책장이 아니라 주제별로 분류된 서가라는 뜻이고, 노인은 그 중에서도 하필 형이상학 칸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분류 방식은 상상이 아닙니다. 주제별로 서가를 나누는 이 체계는 1737년 괴팅겐 대학 도서관이 도입한 실제 분류법과 같은 계통입니다. 슈피츠베크가 그린 것은 막연히 '오래된 도서관'이 아니라, 이렇게 사전을 찾듯 지식을 나누어 정리하는, 계몽주의 이후 유럽 대학 도서관의 질서 안에 있는 공간입니다. 그 질서 정연한 공간 한복판에서, 정작 사람은 세 권의 책을 몸에 매단 채 균형을 잃기 직전의 자세로 서 있습니다. 정돈된 지식 체계와 그것에 파묻힌 한 개인의 무질서한 열정이 한 화면에 공존합니다.
구도 자체도 이 대비를 뒷받침합니다. 화면은 두 개의 대각선으로 짜여 있습니다. 하나는 오른쪽 위,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천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서가와 노인의 몸을 지나 왼쪽 아래 천구의 언저리까지 이어지는 대각선입니다. 다른 하나는 왼쪽 위의 '형이상학' 명판에서 시작해 사다리의 기울기를 따라 오른쪽 아래, 바닥이 보이지 않는 흐릿한 허공으로 빠져나가는 대각선입니다. 빛의 대각선과 사다리의 대각선이 노인의 몸에서 교차하고, 그 교차점에 형이상학과 물질, 지식과 신체의 오래된 대립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서가에 꽂힌 책등의 표현 방식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정물 세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슈피츠베크가 평생 네덜란드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스스로를 훈련시켰다는 사실과 겹쳐 보면, 이 책등 하나하나의 질감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래 훈련된 손의 결과입니다.
미술사가 옌스 크리스티안 옌젠은 이 인물을 두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그림은 완전히 제자리를 찾은 애서가를 그린 것인가, 기울어 가는 삶을 위해 형이상학에서 진리를 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좁은 행복을 찾아낸 자족적인 무지렁이를 보고 있어서 우리가 웃음짓게 되는 것인가. 슈피츠베크는 이 질문에 답을 정해 두지 않았습니다. 노인의 표정에는 조롱도 존경도 아닌, 완전한 몰입만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사서였습니다
지금 이 그림은 거의 예외 없이 〈책벌레〉로 불립니다. 그런데 슈피츠베크 자신이 남긴 판매 대장에는 다른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는 1850년경 그린 이 그림을 대장 102번 항목에 '사서(Der Bibliothekar)'라는 제목으로 기록했습니다.
'책벌레'와 '사서'는 같은 인물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책벌레'는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을 다소 놀리듯 부르는 통속적인 표현이고, '사서'는 그 서가를 관리하고 지식을 다루는 직함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그림을 보며 먼저 떠올리는 인상, 즉 우스꽝스러운 책벌레라는 인상은 화가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후대에 굳어진 통칭입니다. 화가가 원래 본 것은 조롱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 하나의 소명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름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책벌레'로 바뀌었는지는 특정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방향 자체는 우연이 아닙니다. 슈피츠베크는 이 시기 화가로서 '포인텐빌트(Pointenbild)', 즉 뚜렷한 웃음의 지점 하나를 가진 그림을 전문 장르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을 사들인 사람들은 귀족이나 왕실이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새로 구매력을 갖게 된 시민 계층이었습니다. 이들이 응접실에 걸고 싶어 한 것은 근엄한 직업인의 초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볍게 비추어 볼 수 있는 우스운 '유형'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화가의 가장 잘 팔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유형으로 소개됩니다. 〈가난한 시인〉은 '그림 같은 가난의 묘사'로, 이 그림은 '책벌레 학자의 묘사'로 불립니다. '사서'가 하나의 구체적 직함이라면, '책벌레'는 그 직함을 시장이 원하는 유형으로 바꿔 부른 이름입니다. 화가 자신은 판매 대장에 직함을 적어 두었지만, 정작 이 그림을 사고 걸어 둘 시민 계층에게 팔린 것은 직함이 아니라 유형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그림이 왜 세 번 존재하는가
슈피츠베크는 이 구도를 한 번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화가의 작품 목록(카탈로그 레조네)에 따르면 최소 세 점의 정식 버전이 존재하고, 비슷한 소재를 다룬 그림이 다섯 점 더 있습니다.
| 제작연도 | 목록번호 | 이후 행방 |
|---|---|---|
| 1845년경 | WVZ 540 | 1860년 판매, 현재 개인 소장 |
| 1850년경 | WVZ 539 | 1852년 빈의 이그나츠 쿠란다에게 판매, 현재 게오르크 셰퍼 미술관(슈바인푸르트) |
| 1851년경 | WVZ 541 | 뉴욕 화상 헤르만 샤우스에게 위탁, 이후 밀워키로 건너가 현재 그로만 박물관(밀워키) 위탁 전시 |
세 버전 모두 크기와 구도가 거의 같습니다. 오늘날 가장 널리 복제되고 알려진 것은 게오르크 셰퍼 미술관의 두 번째 버전이며, 이 글이 다루는 것도 이 버전입니다. 여기에 더해 같은 작품 목록에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그림이 다섯 점 더(WVZ 534~538)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식 버전 세 점을 포함하면 슈피츠베크는 이 사다리 위 인물이라는 소재로 최소 여덟 점을 그린 셈입니다.
이 반복에는 개인적 애착만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도 있습니다. 위 표에서 보듯 세 버전은 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도시의 구매자에게 각각 넘어갔습니다. 1850년 버전은 1852년 빈의 이그나츠 쿠란다에게, 1851년 버전은 뉴욕의 화상 헤르만 샤우스를 거쳐 이후 밀워키까지 건너갔습니다. 뮌헨 미술협회 회원으로서 시민 계층을 상대로 한 그림 시장의 생리를 잘 알던 슈피츠베크에게, 뮌헨에서 이미 통한다고 확인된 도상은 다른 도시의 화상들에게도 팔릴 만한 검증된 상품이었을 것입니다. 사진 복제 기술이 없던 시대, 이미 인기를 증명한 구도를 다시 그리는 것은 매번 새로운 소재로 승부하는 것보다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합니다. 이 세 버전의 순서와 행방에 대해 독일어권 자료와 영어권 자료가 서로 다르게 서술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독일어 자료는 위 표의 순서(1845→1850→1851)를 구체적인 목록번호와 함께 제시하지만, 일부 영어 자료는 여기에 더해 1884년의 '최종 버전'을 언급합니다. 이 1884년 버전의 근거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글은 목록번호가 제시된 독일어 자료 쪽을 따랐습니다.
약사에서 화가가 되기까지
슈피츠베크의 아버지 지몬 슈피츠베크는 세 아들의 진로를 미리 나누어 정해 두었습니다. 맏아들이 가업을 잇고, 둘째 카를은 약사가, 막내 에두아르트는 의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카를 슈피츠베크는 1830년부터 1832년까지 뮌헨 대학에서 약학·식물학·화학을 공부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약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화가가 되겠다는 뜻은 이때까지 그의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진로가 바뀐 것은 이듬해입니다. 1833년, 병을 앓은 뒤 페이센베르크의 바트 줄츠에서 요양하던 그는 그림에 전업으로 매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마침 이 무렵 어머니 쪽 집안(부유한 청과물 도매상이었던 외조부의 재산)에서 유산의 몫을 받아, 경제적으로 약사직을 그만둘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화업에 전념한 뒤에도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습니다. 1839년 달마티아, 1850년 베네치아를 거쳐, 1851년에는 풍경화가 에두아르트 슐라이히와 함께 파리와 런던(제1회 만국박람회 참관)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트베르펜에 들렀습니다. 파리에서 접한 바르비종 화파의 그림은 그의 화풍에 실제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후 그의 풍경화에서 빛을 다루는 방식이 한층 밝고 개방적으로 바뀌었고, 직접 야외에서 관찰하며 그리는 바르비종파의 태도가 정밀한 관찰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웃음의 지점을 훈련한 손
카를 슈피츠베크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 화가였습니다. 네덜란드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스스로를 훈련시켰고, 1844년부터 1852년까지는 뮌헨의 풍자 주간지 〈플리겐데 블레터(Fliegende Blätter)〉에 삽화를 연재하며 사람의 자세와 표정에서 웃음의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감각을 벼렸습니다. 이 잡지에서 8년 가까이 반복한 훈련이, 앞서 본 '포인텐빌트' 즉 유형화된 웃음의 그림이라는 그의 전문 장르를 만든 실제 작업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헌책방을 즐겨 드나들며 오래된 책을 직접 사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했습니다. 헌책방 주인을 그린 〈고서상(Der Antiquar)〉, 〈고서상과 두 소녀〉 같은 작품이 이 취향의 결과입니다. 사서를 그린 이 그림도 이런 개인적 애서가 취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다만 같은 소재를 다룬 〈가난한 시인〉은 이미 다른 글에서 다룬 적이 있어, 이 글에서는 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침묵은 그 시대의 것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50년 전후는 비더마이어라 불리는 시기의 끝자락입니다. 비더마이어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1848년 혁명 전까지, 독일어권에서 이어진 예술과 생활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이름 자체가 한 풍자 잡지에 등장한, 순박하고 정치에 무관심한 인물 유형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잡지는 다름 아닌 앞서 살펴본 뮌헨의 풍자 주간지 〈플리겐데 블레터(Fliegende Blätter)〉, 슈피츠베크가 8년 가까이 삽화를 연재했던 바로 그 잡지였습니다. 1850년 법률가 루트비히 아이히로트와 의사 아돌프 쿠스마울이 이 잡지에 '고틀리프 비더마이어'라는 가상의 삼류 시인을 내세워 발표한 풍자시에서 이 명칭이 나왔습니다. 시대의 이름을 낳은 잡지와, 그 시대를 그린 화가가 같은 지면에서 만난 셈입니다.
메테르니히 체제 아래의 검열과 정치적 억압은 공적인 논의를 봉쇄했습니다. 혁명적 이상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일의 시민 계층은 정원과 거실, 서재 같은 사적 공간으로 물러났습니다. 이 그림 속 노인이 세상과 등지고 책 속으로 파고든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택했던 삶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시대적 도피의 우화로만 읽으면 정작 화면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을 놓칩니다. 이 노인은 세상에서 물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는 명판이 붙은, 괴팅겐식 분류 체계의 한 칸 앞에 정확히 서 있습니다. 지식이 항목별로 나뉘어 정리된 이 근대적 분류망 앞에서, 그의 몸은 오히려 그 항목 하나에 붙들려 있습니다. 손에 든 책, 겨드랑이에 낀 책, 발밑의 사다리, 이 모두가 지식이 아니라 물성으로만 취급됩니다. 그는 형이상학을 사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는 항목이 붙은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그림의 진짜 긴장은 세상과 개인의 대립이 아니라, 거대한 분류망과 그 안에 낀 한 신체 사이의 대립입니다. 도서관은 지식을 정돈했지만, 정작 그 정돈된 칸 앞에 선 사람의 자세는 균형을 잃기 직전입니다. 체계가 완성될수록 그 체계를 붙들고 있는 손은 더 위태로워진다는 것, 이 그림이 실제로 그려 보인 것은 그런 물질적 강박에 가깝습니다.
미술사에서 슈피츠베크는 비더마이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힙니다. 왕실과 교회를 위한 대형 역사화·종교화가 아카데미 미술의 정점이던 시대에, 그는 반대로 좁은 서가와 골목, 정원 같은 작은 공간을 그렸습니다. 세로 26.8cm 남짓한 이 작은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여러 미술관에 나뉘어 소장된 것 자체가, 공적 담론이 봉쇄된 시대에 시민 계층이 어디로 물러났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확인한 자료
이 글의 사실 관계는 아래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원 카탈로그·단행본을 직접 열람하지 못하고 위키백과를 경유해 확인한 항목은 그 층위를 밝혀 둡니다.
- 제목 변경(사서→책벌레)·목록번호(WVZ539~541)·형이상학 서가 분류·구도 분석: 독일어 위키백과 "Der Bücherwurm" 항목. 이 항목이 인용하는 Wichmann 카탈로그 레조네(2002)·Jensen(2007) 원본은 열람하지 않았고, 위키백과의 인용을 경유해 확인했습니다.
- 시장·독자층·포인텐빌트 장르: 독일어 위키백과 "Carl Spitzweg" 항목, 위와 동일하게 경유 인용입니다.
- 영어권 자료와의 버전 순서 불일치(1884년 버전 서술): 영문 위키백과 "The Bookworm (Spitzweg)" 항목, 교차검증 목적으로만 사용
- 도판: Wikimedia Commons, File:Carl Spitzweg - "The Bookworm".jpg, 퍼블릭 도메인(PD-old-100-expired) 원본을 직접 확대해 관찰
- 생애(약사 수학·요양 후 전업 결심·유산·1851년 파리·런던·안트베르펜 여행): 독일어 위키백과 "Carl Spitzweg" 항목과 영문 위키백과 "Carl Spitzweg" 항목을 대조해 확인, 두 항목이 일치하는 부분만 반영했습니다.
- 바르비종 화파 영향(관찰력): Kunstmuseum Winterthur 디지털 컬렉션 해설
- 비더마이어라는 이름의 유래(플리겐데 블레터·아이히로트·쿠스마울): 영문 위키백과 "Biedermeier"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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