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해설, 이미 돛대를 잃은 배를 다시 세운 이유
·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 제작: 1839년(1839년 왕립 아카데미 출품)
· 재료: 캔버스에 유채
· 크기: 90.7×121.6cm
· 소장: 내셔널갤러리, 런던(NG524)
1838년 9월, 한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기함을 지켜낸 전함 테메레르는 예인선에 끌려 템스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배에는 이미 돛대도 삭구도 깃발도 없었습니다. 팔 남짓한 나무 껍데기였을 뿐입니다.
윌리엄 터너는 이듬해, 그 벌거벗은 배에 세 개의 돛대와 삭구를 다시 그려 넣고 흰색과 금색으로 물들여 왕립 아카데미에 내놓았습니다. 사실과 다르게 그린 지점은 돛대만이 아닙니다. 배의 색, 예인선의 숫자, 굴뚝의 위치, 노을이 지는 방향과 시간까지, 확인 가능한 것만 다섯 군데가 넘습니다.
그림 속 테메레르에는 아직 돛대가 서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는 테메레르가 있습니다. 세 개의 돛대가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고, 돛은 모두 접혀 있지만 삭구는 온전합니다. 선체는 실제 도색이었던 검정과 노랑이 아니라 흰색과 금색으로 처리되어, 물 위를 미끄러지는 유령처럼 보입니다[1]. 그 앞에서 작고 붉은 갈색을 띤 예인선이 배를 끌고 있는데, 검은 굴뚝에서 나온 짙은 주황빛 연기가 대각선으로 피어올라 테메레르의 돛대 사이를 관통하며 흘러갑니다.
화면 오른쪽 3분의 1은 노을이 차지합니다. 흰 원반 같은 해가 낮게 걸려 있고, 그 위로 구리빛과 다홍빛 구름이 두껍게 덧칠되어 있습니다. 왼쪽 위 하늘에는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 물 위에는 어두운 부표 하나가 떠 있어, 화려한 노을을 물가로 끌어내리는 닻처럼 작동합니다.
배 위 어디에도 깃발은 없습니다. 대신 예인선의 돛대 꼭대기에 작고 흰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테메레르가 더는 해군의 재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터너는 깃발의 부재로 말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1839년, 캔버스에 유채, 90.7 × 121.6cm, 런던 내셔널갤러리, NG524. 예인선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대각선으로 올라가 테메레르의 돛대 사이를 지나갑니다. 굴뚝이 돛대보다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해 두십시오. |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나
테메레르는 1798년 채텀 조선소에서 만들어진 98문 전열함입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기함 빅토리호 바로 뒤에서 싸우며 프랑스 배 두 척을 나포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대형 전함처럼 배는 항구에 계류된 채 보급선 신세가 되었고, 1838년에는 이미 마흔 살, 목재 값만 남은 낡은 배였습니다.
그해 6월 해군성은 매각을 명령했고, 재사용 가능한 돛대와 삭구는 매각 전 규정에 따라 전부 뽑혀 나갔습니다. 배는 로더하이드의 해체업자 존 비트슨에게 낙찰됐고, 돛대도 동력도 없는 빈 선체를 옮기기 위해 증기 예인선 삼손호와 런던호가 동원됐습니다. 견인은 1838년 9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고, 배는 9월 6일 오후 3시 무렵 부두에 닿았습니다.
이 마지막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기록한 사람이 있습니다. 해체업자의 동생인 건축가 윌리엄 비트슨이 도착 직후 그린 그림에는 돛대도 삭구도 깃발도 선수상도 없는, 다루기 힘든 나무 껍데기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터너가 실제로 이 예인 장면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는 보통 8월과 9월에 유럽을 여행하며 새 소재를 찾고 있었고, 당시 신문 보도도 짧은 두 줄에 그쳤습니다. 대신 그는 그해 9월 말쯤 신문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상상으로 이 장면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캔버스에 대한 X선 조사는 지금 예인선의 돛대·삭구·굴뚝이 있는 자리에, 그보다 훨씬 큰 규모로 그려진 범선의 돛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터너가 이미 다른 범선을 그려 두었던 캔버스를 재사용했음을 시사합니다.
색과 구도가 거짓을 진실처럼 만드는 방법
실제 테메레르에 칠해져 있던 색은 검정과 노랑, 당시 해군 전열함의 표준 도색이었습니다. 터너는 이 색을 완전히 지우고 흰색과 금색만 남겼습니다. 그 결과 배는 물리적 무게를 가진 목조 구조물이 아니라, 빛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예인선은 어둡고 다부지게, 대비되는 색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낡은 배가 밝고 새 기계가 어둡다는, 통념과 정반대의 배치입니다.
이 대비는 단지 색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연기의 방향이 두 배의 관계를 결정짓습니다. 짙은 주황빛 연기는 굴뚝에서 대각선으로 피어올라 테메레르의 돛대와 삭구 사이를 지나갑니다. 낡은 배의 몸 전체가, 새 기계가 뿜어내는 연기에 휘감기는 구도입니다.
이 구도는 우연이 아니라 설계입니다. 당대 증기선은 대체로 보일러를 배 가운데 놓고 그 위에 굴뚝을, 돛대는 그보다 앞쪽에 세웠습니다. 카탈로그는 이 배치를 표준으로 봅니다. 터너는 1830년에서 1832년 사이 센강에서 일하는 증기 예인선을 직접 관찰한 적이 있는 화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직접 본 증기선의 구조와 당대의 모든 설계 관행을 함께 거스르고, 굴뚝을 돛대보다 앞에 놓아 연기가 뒤로 흘러 테메레르의 돛대를 관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선택이 왜 필요했는지는, 그가 놓치지 않았을 실제 결과를 따져 보면 드러납니다. 굴뚝이 원래 자리, 즉 돛대 뒤에 있었다면 연기는 짧고 격렬하게 뿜어져 나와 테메레르의 돛대에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한 장면이 됐을 것입니다. 실제로 1845년 판화가 제임스 윌모어가 이 그림을 판화로 옮기며 굴뚝과 돛대의 위치를 '바로잡았을' 때, 정확히 그런 그림이 나왔습니다. 뒤로 길게 흐르며 돛대를 휘감던 터너의 연기 기둥이, 윌모어의 판에서는 돛대를 태울 듯한 짧고 사나운 분출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터너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있다가 나중에 알고는 분노의 발작을 일으켰다고 전해집니다.
즉 굴뚝을 앞으로 옮기는 조작은 그림에 극적 효과 하나를 더하는 장식이 아니라, 이 그림이 애도인지 화재인지를 가르는 선택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그렸다면 연기는 낡은 배를 위협하는 폭력적 이미지가 됐을 것이고, 조작된 연기는 대신 배를 뒤에서 조용히 휘감아 떠나보내는 수의 같은 이미지가 됩니다. 당대에도 이 의도를 알아챈 사람이 있었습니다. 화가이자 저술가 R.C. 레슬리는 이 장면을 두고, 연기와 그을음, 철과 증기가 "해군의 모든 일에서 전면에 나서리라는" 터너의 "강렬하고 거의 예언적인 발상"이라고 평했습니다. 굴뚝의 위치는 착오가 아니라, 낡은 배를 태우지 않으면서도 새 시대가 이미 전면에 나섰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입니다[2].
굴뚝과 노을까지 손댄 이유
조작은 굴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해체업자가 실제로 빌린 예인선은 삼손호와 런던호, 두 척이었습니다. 두 번째 배는 견인 도중 배 뒤쪽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하며 강 굽이를 도는 것을 도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터너의 그림에는 예인선이 한 척만 뚜렷하게 그려져 있고, 두 번째 배는 먼 배경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노을의 방향은 더 노골적으로 틀렸습니다. 테메레르는 시어니스에서 로더하이드로, 즉 템스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가는 배라면 해는 뱃머리 쪽, 즉 서쪽에서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림 속 해는 배의 진행 방향과 반대쪽에서 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배가 부두에 닿은 시각은 오후 3시 무렵이었습니다. 실제 견인·계류 시각과도 맞지 않는 노을 설정인 셈입니다.
이 오류는 1877년 미술평론가 제임스 대포른이 처음 지적하면서 알려졌습니다. 그는 템스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가 등 뒤로 노을을 볼 수는 없다고 정확히 짚었고, 이후 타임즈 지면에서 나침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대포른 자신도 그 논쟁 끝에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터너의 마음속에는 나침반의 정확한 방위 따위는 자리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 항목 | 실제 있었던 일 | 그림 속 모습 |
|---|---|---|
| 돛대와 삭구 | 매각 전 전부 제거된 빈 선체 | 세 돛대와 삭구가 온전함 |
| 선체 색 | 해군 표준 검정과 노랑 | 흰색과 금색 |
| 예인선 수 | 삼손호, 런던호 두 척 | 한 척만 뚜렷하게 표현 |
| 굴뚝 위치 | 당대 증기선 표준대로 돛대 뒤 | 돛대 앞(연기가 돛대를 관통) |
| 노을과 시간 | 오후 3시경 도착, 노을 전 | 서쪽으로 가는 배 뒤로 동쪽 노을 |
터너 연구자들도 100년 가까이 틀렸습니다
테메레르가 실제로 돛대 없이 끌려갔다는 사실은 오래 묻혀 있었습니다. 1878년, 테메레르에서 복무한 아버지를 둔 아마추어 해군사학자 에드워드 리긴스가 내셔널갤러리 관장에게 편지를 보내, 배가 시어니스를 떠날 때 이미 돛대가 없었다고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46년과 1959년 내셔널갤러리의 공식 카탈로그를 쓴 마틴 데이비스는 리긴스의 편지를 인용하면서도, 근거 없이 "여행을 위해 임시 돛대를 달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덧붙였습니다. 1977년과 1984년 마틴 버틀린과 에벌린 졸의 터너 도록은 이 추측을 더 단정적으로 다듬어, 테메레르가 마지막 항해를 위해 "다시 돛대를 달았다"고 서술했습니다. 여러 미술사 저작이 이 설명을 그대로 따라 썼습니다.
이 통설을 뒤집은 것은 1988년 미술사가 에릭 셰인즈였습니다. 그는 리긴스의 편지와 비트슨의 현장 스케치를 다시 검토한 뒤, 재정비설을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해체하기 직전의 차를 다시 도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이라고 말입니다. 전문 연구자들조차 백 년 가까이 그림 속 이미지를 실제 사실로 착각했다는 점은, 터너가 만든 허구가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를 거꾸로 증명합니다.
당대는 이 거짓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1839년 왕립 아카데미에 이 그림이 걸렸을 때, 터너는 토마스 캠벨의 시 〈영국의 뱃사람들이여〉에서 따온 두 행을 함께 붙였습니다. "전투와 바람에 맞섰던 그 깃발은, 더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배에 깃발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시구로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새커리는 프레이저스 매거진에 예인선을 "작고 앙심 깊고 악마 같은 증기선"이라 부르며, 그것이 "더럽고 붉게 타오르는 사악한 연기"를 내뿜는 동안, 뒤에서는 "차가운 잿빛 달"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죽음이 쓰인 듯한 그 용감한 늙은 배가 느리고 슬프게 따라간다고 적었습니다. 모닝크로니클은 이 장면을 보는 일이 마치 인간의 죽음을 보는 것처럼 깊이 감동시킨다고 했고, 스펙테이터는 터너의 다른 어떤 1839년 출품작에도 붙이지 않았던 찬사, 즉 "그 시적 상징이 이해 가능하다"는 평가를 남겼습니다[3].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은 훗날 터너의 그림에서 "가장 깊이 진홍빛으로 물든 노을 하늘"이 종종 죽음을 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앞서 본 방위 오류는 1877년 대포른의 지적 뒤 타임즈 지면 논쟁을 낳았지만, 그 논쟁도 이 작품의 평판 자체를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을 다섯 군데나 바꾼 그림이, 사실을 그대로 옮긴 어떤 기록화보다 더 강한 진실로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터너는 정말 증기선을 미워했을까
새커리가 예인선을 '앙심 깊고 악마 같다'고 부른 뒤로, 이 그림은 오랫동안 낡은 범선에 대한 향수와 증기 기관에 대한 반감을 담은 그림으로 읽혀 왔습니다. 하지만 터너 자신이 정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터너는 1820년대부터 증기선을 직접 타고 다니며 그림으로 남긴 화가였습니다. 1832년 작품 〈스타파〉에서는 자신이 실제로 승선했던 증기선을 그렸고, 1830년에서 1832년 사이에는 센강을 오가는 증기 예인선을 스케치에 담기도 했습니다. 증기선의 구조를 몰라서 굴뚝 위치를 뒤바꾼 것이 아니라는 근거는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그 구조를 잘 아는 화가였습니다.
| 윌리엄 터너, 〈스타파, 핑갈의 동굴〉, 1831~32년, 캔버스에 유채, 90.8 × 121.3cm, 뉴헤이븐 예일 영국미술센터, B1978.43.14. 터너가 실제로 타고 다녔던 증기선입니다. 굴뚝의 위치와 연기가 흐르는 방향을 앞의 그림과 견주어 보십시오. |
내셔널갤러리의 큐레이터 주디 에저턴은 이 그림을 다시 살피며 흥미로운 지점을 짚었습니다. 노을은 테메레르만이 아니라 예인선까지 똑같이 물들이고 있으며, 이는 언젠가 이 예인선 역시 새로운 무언가에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암시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면 속 대비는 뚜렷하지만, 그 대비를 낡은 것은 아름답고 새것은 추하다는 식의 단순한 도식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과 해석은 여기서 갈립니다. 터너가 다섯 군데의 사실을 고쳐 낡은 배에 위엄을 돌려준 것은 확인 가능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새 시대 자체를 단순한 적으로 그렸는지는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지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굴뚝의 위치 하나만 보아도 이 그림의 태도는 이중적입니다. 연기가 돛대를 휘감게 만든 것은 낡은 배를 태우지 않으려는 배려이자 동시에 새 시대가 이미 전면에 나섰음을 알리는 신호였고, 노을이 예인선까지 똑같이 물들이는 것은 그 예인선 역시 언젠가 대체될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다섯 군데의 조작은 결국 하나의 태도, 곧 사라지는 것과 도래하는 것을 같은 빛 아래 두고 어느 쪽도 완전한 승자로 두지 않으려는 태도로 수렴합니다.
확인한 자료
이 글의 사실 관계는 아래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 [1] 내셔널갤러리 런던 공식 소장품 페이지: 돛대·색·굴뚝 위치·노을 방향 등 조작 지점의 1차 확인 출처
- [2] Judy Egerton, "The Fighting Temeraire", National Gallery Catalogues(2000): X선 조사, 재정비설 반박(리긴스·셰인즈), 굴뚝 조작의 의도성과 R.C. 레슬리의 당대 평, 윌모어 판화 수정 경위, 터너와 증기선의 관계까지 학술 카탈로그 원문으로 확인
- [3] W.M. Thackeray, "A Second Lecture on the Fine Arts", Fraser's Magazine, 1839년 6월호(Egerton 카탈로그에 전문 인용됨): 당대 평론가 반응의 1차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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