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반 레인 생애와 작품, 그가 직접 남긴 편지는 일곱 통뿐이다
1654년 7월 23일, 암스테르담 개혁교회 당회에 한 여자가 불려 나왔습니다. 당회록은 그녀의 이름을 헨드리키어 야허르스로 적었습니다. 그리고 처분을 적었습니다. 엄중히 견책하고, 회개를 권면하며, 주의 성찬상에서 배제한다. 같은 문장 안에 화가 렘브란트의 이름도 있습니다. 다만 소환된 사람으로는 없습니다.
이 장면이 렘브란트의 생애를 읽는 방식 하나를 알려 줍니다. 그를 자세히 기록한 문서는 대체로 그를 처리한 쪽이 남긴 것입니다. 법원과 교회와 공증인이 쓴 문서는 길고 정확합니다. 반면 그 자신의 문장이 남은 자리는 훨씬 좁습니다. 이 글은 남아 있는 문서를 하나씩 열어 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 한 줄 정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초상화와 역사화, 판화를 함께 다룬 화가
• 생몰: 1606년 ~ 1669년
• 국적·활동지: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에서 활동
• 활동 분야: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 초상화, 역사화, 자화상, 에칭
• 대표작: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야경〉, 〈유대인 신부〉, 자화상 연작
| 렘브란트 판 레인, 〈자화상〉, 1628년경, 패널에 유채, 22.6 × 18.7cm,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 SK-A-4691. 두 눈이 그늘에 잠겨 있고 빛은 뺨과 목에만 닿습니다. 곱슬머리는 붓대 끝으로 젖은 물감을 긁어낸 자국입니다. |
스물셋의 그를 본 사람이 남긴 가장 이른 호평
렘브란트를 두고 남아 있는 호의적인 동시대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축에 드는 것은 어느 관료의 원고입니다. 오라녀 공의 비서였던 콘스탄테인 하위헌스가 1629년에서 1631년 사이에 쓴 자전적 원고입니다. 그는 레이던에서 두 젊은 화가를 만났습니다. 렘브란트와 얀 리번스였습니다.
하위헌스는 두 사람의 스승들을 먼저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스승에게 빚진 것이 없고 모두 제 소질에 빚졌다.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혼자 내버려졌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림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면, 지금 이른 그 높이에 똑같이 올랐으리라 확신한다. 남이 그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당시 렘브란트는 스물세 살 무렵이었습니다. 1606년 7월 15일 레이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하르먼 헤리츠존은 방앗간을 했고, 어머니는 네일트헨 판자위트브록이었습니다. 형제는 적어도 열 명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가운데 막내였고, 전체로는 아홉째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틴어학교를 일곱 해 다닌 뒤 1620년에 레이던대학교에 이름을 올렸지만 곧 그만두었습니다. 무엇을 공부하려 했는지는 등록 기록만으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후 레이던에서 야코프 이사크스존 판 스와넨뷔르흐에게 세 해 동안 그림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1624년에서 1625년 무렵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가 피터르 라스트만 곁에서 반년 남짓을 보냈습니다.
하위헌스가 이 원고에서 언급한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하나가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는 유다〉입니다. 화면 한가운데 바닥에 은전이 흩어져 있습니다. 유다는 그 옆에서 두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등을 돌린 검은 인물이 앞쪽을 막아섭니다. 관객은 그 어깨 너머로 장면을 넘겨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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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브란트 판 레인,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는 유다〉, 1629년, 패널에 유채, 개인 소장. 소장품 번호와 치수는 소장기관 기록을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은전이 화면에서 가장 밝은 작은 점들입니다. |
결혼은 등록부에 남았고, 날짜는 두 개가 돈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의 결혼은 1634년 6월 22일입니다. 프리슬란트의 신트 안나파로키 혼인등록부에 적혀 있습니다. 문장은 짧습니다. 6월 22일,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렘브란트 헤르먼스존 판 레인과 현재 프라네커르에 거주하는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가 혼인으로 맺어지다.
그런데 이 결혼의 날짜를 7월 7일로 적은 자료도 돕니다. 두 날짜는 다른 사건이 아닙니다. 당시 프리슬란트는 옛 역법인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문서를 모아 둔 데이터베이스는 이 혼인의 표제를 22 June | 7 July 1634 로 적어 두 날짜를 나란히 병기합니다.
사스키아는 이때 스무 살이었습니다. 미술상 헨드릭 판 아윌렌뷔르흐의 친척이었고,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 미술상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결혼 이듬해에 렘브란트는 아내를 목가극의 인물처럼 차려입혀 그렸습니다. 한 손은 꽃이 달린 지팡이를 짚고, 다른 팔에는 꽃다발을 안았습니다. 머리에는 베일과 잎사귀 장식을 얹었습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아르카디아 복장의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 1635년, 캔버스에 유채, 123.5 × 97.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NG4930. 왼팔에 안은 꽃다발과 오른손이 짚은 지팡이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두 손이 각각 다른 물건을 들고 있어 인물이 잠시 멈춰 선 것처럼 보입니다. |
아내의 유언에 붙은 조항 하나가 남은 삶을 정했다
1642년 6월 5일 아침 아홉 시 무렵, 사스키아는 병상에서 공증인을 불렀습니다. 그해 6월 19일에 그녀의 매장이 기록됩니다. 결혼한 지 여덟 해 만이었습니다. 사망일을 6월 14일로 적은 자료가 많지만, 이번에 확인한 문서군에서는 그 날짜의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에 렘브란트는 〈야경〉을 완성했습니다. 이 그림의 화면과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야경〉 해석을 다룬 글에서 따로 정리했습니다.
매장 기록은 두 곳에 남았는데, 두 곳이 주소를 다르게 적었습니다. 한쪽은 브레스트라트에서 왔다고만 적고 8길더를 붙였습니다. 다른 쪽은 브레스트라트, 성 안토니스 수문 건너 두 번째 집이라고 적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사람을 두고 남은 기록이 이만큼 다릅니다.
유언장에는 조항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상속인은 아들 티투스입니다. 그런데 남편의 권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은 재혼할 때까지, 혹은 재혼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유언자가 남기는 모든 재산의 완전한 점유와 용익권을 계속 보유한다.
문장을 뒤집으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그가 다시 결혼하는 순간 아내가 남긴 재산에 대한 권리가 끝납니다. 유언에는 또 한 줄이 있습니다. 이 재산은 어느 때에도 고아관리소에 신고하거나 등재하지 않는다. 재산 관리에서 관청을 빼겠다는 뜻입니다.
렘브란트는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함께 산 헨드리키어 스토펄스와도 혼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조항이 그 선택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문서는 이유를 적지 않았습니다. 한편 이런 조항 자체가 당시 유언에서 흔한 형식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항의 존재보다 그것이 실제로 작동한 방식이 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34세의 자화상〉, 1640년, 캔버스에 유채, 91 × 7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NG672. 팔을 얹은 돌 난간과 그 위에 적힌 서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앞의 1628년 자화상과 달리 두 눈이 완전히 빛 속에 있습니다. |
교회는 그를 부르지 않고 그 여자를 불렀다
1654년 6월 25일, 암스테르담 개혁교회 당회록에 한 줄이 올라갑니다. 브레스트라트에 거주하는 헨드리키어 야허르스가 화가 렘브란트와 간음에 빠졌으므로, 여드레 뒤 출석하도록 소환한다. 그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7월 2일에 다시 불렀고, 7월 16일에 또 불렀습니다.
7월 23일에 그녀가 나왔습니다. 당회록은 이렇게 적습니다. 헨드리키어 야허르스가 당회에 출석하여 화가 렘브란트와 간음을 범했음을 시인하였다. 이에 엄중히 견책하고, 회개를 권면하며, 주의 성찬상에서 배제한다. 그해 10월 30일에 두 사람의 딸 코르넬리아가 세례를 받습니다. 소환되던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기록에서 눈에 걸리는 것은 처분의 대상입니다. 문장 안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한 달 사이에 네 번 이름이 오른 사람은 하나입니다. 이 문서들을 모아 정리한 연구서의 주석은 이렇게 적습니다. 렘브란트가 당회에 불려 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고, 그때 그가 교회 회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다만 이 대목은 그 주석이 앞선 연구자의 견해를 옮긴 것이지 당회록에 적힌 문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문서로 확인되는 것과 연구가 전하는 것을 나눠 두는 편이 낫습니다.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이렇습니다. 1654년의 이 사건에서 거듭 불려 나오고 처분을 받은 사람은 그녀입니다. 이 문서를 근거로 그의 성격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담이 한쪽으로 몰렸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해에 렘브란트는 물에 들어서는 여인을 그렸습니다.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이 그림의 제목에 물음표를 달아 둡니다. 모델이 헨드리키어인지 확정하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시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 1654년, 나무에 유채, 61.8 × 47cm, 런던 내셔널갤러리, NG54. 걷어 올린 흰 속옷을 가까이 보시기 바랍니다. 물감을 넓게 밀어 편 붓 자국이 그대로 옷 주름이 되어 있습니다. |
신청서에 적힌 파산의 이유
1656년 7월 14일, 헤이그의 고등법원에 신청서가 들어갑니다. 재산을 채권자에게 넘기고 보호를 받는 절차였습니다. 신청서에 적힌 사유는 이렇습니다. 청원인은 사업에서 입은 손실과 해상에서의 피해와 손실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여, 채권자들에게 변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채권자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시장을 지낸 코르넬리스 비천에게 4,180길더, 이사크 판 헤르츠베이크에게 4,000길더, 다니엘 프란선에게 3,150길더 등입니다. 절차의 날짜와 금액, 저택의 매각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파산 절차를 따로 다룬 글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파산 뒤 그림 판매는 아들 티투스와 헨드리키어가 맡았고, 1660년 12월 15일 자 계약서에 렘브란트는 지분이 없는 사람으로 적혔습니다.
여기서 짚을 것은 문장 자체입니다. 해상에서의 피해와 손실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실제 배와 화물의 손해일 수도 있고, 당시 신청서의 관용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표현이 렘브란트 명의로 제출된 신청서에 기재된 사유라는 점입니다. 다만 이 신청서는 그의 친필이 아닙니다.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대리인 N. Geltsack 입니다.
같은 해에 그는 외과의사 조합의 주문을 받아 해부학 강의 장면을 그렸습니다. 파산 절차가 진행되던 해에도 공적인 주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그림은 1723년 화재로 대부분이 타 버렸고 가운데 부분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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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브란트 판 레인, 〈얀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잔편, 1656년, 캔버스에 유채, 100 × 134cm, 암스테르담 미술관, SA 7394. 화면 위쪽 윤곽이 울퉁불퉁한 것은 불에 탄 자리를 잘라 낸 흔적입니다. 집도하는 의사의 몸은 사라지고 뇌를 가르는 두 손만 남았습니다. |
목록에 남은 살림, 목록에 없는 숫자
파산 절차에 따라 재산목록이 작성됩니다. 1656년 7월 25일과 26일 이틀입니다. 표제는 이렇습니다.
성 안토니스 수문 옆 브레스트라트에 거주하던 렘브란트 판 레인의 재산에서 발견된 회화 및 가구와 가재도구 목록.
작성자들은 방을 하나씩 돌았습니다.
첫 방은 현관홀입니다. 아드리안 브라우어르의 그림 넉 점이 먼저 적힙니다. 과자 굽는 사람, 놀이꾼들, 화가의 작업실, 그리고 상이 잘 차려진 주방 그림입니다. 그다음이 석고입니다. 석고 두상 하나, 벌거벗은 아이 둘, 잠든 아이 하나. 이어서 낡은 신발 한 짝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렘브란트 자신의 작은 풍경 둘과 서 있는 작은 인물상 하나, 마지막으로 얀 리번스의 그림 한 점입니다.
리번스의 그림은 원문에 카르스나흐트로 적혔습니다. 이 낱말은 촛불이 밝혀진 밤 장면으로도 읽히고 성탄 밤으로도 읽힙니다. 지금도 어느 쪽인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목록 한 줄이 이만큼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목록을 두고 널리 도는 숫자가 있습니다. 모두 363점이었다는 숫자, 그의 순자산이 4만 길더였다는 숫자입니다. 이번에 원문을 열어 확인한 범위에서는 두 숫자의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목록에 실제로 남은 것은 물건의 이름이고, 숫자는 목록이 아니라 이야기 쪽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금액이 적힌 문서는 따로 있습니다. 1656년 11월 1일 자 파산재산관리소 원장입니다. 공매 감독관이 그해에 처분한 대금을 기록한 줄에 렘브란트의 이름이 있습니다. 1,322길더 15스타위버입니다.
목록에는 그가 사고팔던 판화도 있었습니다. 그의 판화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 하나가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를 새긴 큰 화면입니다. 화면 왼쪽은 가는 선으로 그린 밝은 무리이고, 오른쪽은 거의 검은 덩어리입니다. 성서를 다룬 그의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지심과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에서 더 자세히 다뤘습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1648년경, 에칭과 드라이포인트와 뷔랭, 일본 종이, 28.2 × 39.5cm,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 RP-P-OB-601. 화면을 세로로 반 갈라 보시기 바랍니다. 왼쪽은 선으로 그려졌고 오른쪽은 선이 뭉개져 검은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
그가 직접 쓴 편지는 일곱 통뿐이다
렘브란트 관련 문서를 모아 놓은 데이터베이스에는 지금까지 1,100건이 넘게 올라와 있습니다. 세례와 혼인과 매장 기록, 공증 계약서, 법원 문서, 경매 광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중 그가 직접 쓴 편지로 등재된 것은 일곱 통입니다. 이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것을 센 숫자이니, 앞으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일곱 통은 모두 같은 사람에게 갔습니다. 앞에서 그를 칭찬한 하위헌스입니다. 1639년 2월 13일 자 편지에서 렘브란트는 대금 이야기를 합니다. 앞서 인도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각기 600 카롤루스 길더밖에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더 높은 값을 치르도록 설득되지 않으신다면, 저는 각 600길더로 만족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건을 하나 붙입니다. 흑단 액자 두 개와 나무 상자에 제가 쓴 실비 도합 44길더는 지급되도록 조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당신께 순종하고 애정 어린 종, 렘브란트.
여기서 이 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렘브란트는 대체로 그를 다룬 기록에서 재구성된 사람입니다. 유언과 당회록과 신청서와 재산목록은 길고 정확합니다. 그 자신의 목소리가 남은 자리는 액자 두 개와 상자 값을 따지는 편지입니다. 문서의 양과 목소리의 양이 이만큼 어긋납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자화상〉, 1659년, 캔버스에 유채, 84.5 × 66cm,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오브아트, 1937.1.72. 얼굴 왼쪽 배경에 서명과 연도가 눈높이로 적혀 있습니다. 이마와 눈가의 물감이 얇게 발린 배경과 달리 두껍게 얹혀 있습니다. |
매장은 기록됐고 무덤은 기록되지 않았다
1669년 10월 8일의 기록은 세 곳에 남아 있습니다. 서교회의 사망자 등록부, 묘지 구획 기록, 그리고 매장부입니다. 세 곳이 같은 날짜를 적었습니다. 그중 묘지 구획 기록이 가장 자세합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8일,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 로저흐라흐트, 미로정원 맞은편, 상여꾼 열여섯 명, 자녀 두 명을 남김, 20길더.
남은 두 아이는 헨드리키어와의 딸 코르넬리아와, 아들 티투스가 남긴 딸 티티아였습니다. 헨드리키어는 1663년에, 티투스는 1668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앞에서 본 사스키아의 매장에는 8길더가 적혀 있었습니다. 스물일곱 해 뒤 그의 매장에는 두 장부가 각각 15길더와 20길더를 적었습니다. 다만 세 숫자가 같은 항목을 세는지는 문서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장부의 종류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짚어야 합니다. 첫째, 이 문서들이 확정하는 것은 매장일입니다. 사망일을 10월 4일로 적은 자료가 널리 돌지만, 이번에 확인한 문서군에서는 그 날짜의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둘째, 무덤의 자리입니다. 문서를 정리한 연구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렘브란트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묘지 구획 기록에도 표시돼 있지 않고 사망자 등록부에도 특정돼 있지 않다.
같은 해에 그는 자기 얼굴을 다시 그렸습니다. 1640년의 자화상에는 팔을 얹을 난간이 있었고 그 위에 서명이 있었습니다. 1669년의 화면에는 난간도 소품도 없습니다. 배경은 비어 있고, 두 손은 화면 아래 끝으로 내려가 거의 잘려 나갑니다. 남은 것은 얼굴입니다. 자화상 연작 전체의 흐름은 자화상을 시간순으로 읽은 글과 사도 바울풍의 자화상에서 이어 보실 수 있습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63세의 자화상〉, 1669년, 캔버스에 유채, 86 × 70.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NG221. 배경에 아무것도 없고 두 손이 화면 아래 끝에 걸쳐 있습니다. 이마와 코의 물감이 덩어리로 뭉쳐 있어 얼굴 표면이 울퉁불퉁합니다. |
자주 묻는 질문
Q. 렘브란트 작품은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나요?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과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대표작이 나뉘어 있습니다. 레이크스미술관에는 〈야경〉과 〈유대인 신부〉가 있고, 마우리츠하위스에는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있습니다. 런던에는 1640년과 1669년의 자화상이 있습니다. 전시 여부는 바뀌므로 방문 전에 각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Q.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사이에는 아이가 몇 명 있었나요?
네 아이가 태어났고 그중 티투스만 자랐습니다. 1635년의 룸바르투스, 1638년과 1640년에 각각 태어난 두 코르넬리아는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아이의 매장 기록이 암스테르담 문서보관소에 남아 있습니다. 1641년에 태어난 티투스는 아버지보다 한 해 먼저인 1668년에 매장됐습니다.
문서를 순서대로 놓으면 한 방향이 보입니다. 재혼을 제약하는 조항, 동거인에 대한 견책, 파산 신청, 재산의 처분. 기관이 그를 다루는 강도는 해가 갈수록 세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세상이 그를 버렸다는 이야기로 옮기면 사실과 어긋납니다. 파산 절차가 돌아가던 1656년에도 그는 조합의 주문을 받아 서명을 남겼고, 그 뒤에도 시청과 조합의 큰 화면을 맡았습니다. 직물조합 이사들은 파산 이후인 1662년 작품입니다.
그러니 이 문서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생각보다 좁습니다. 남은 기록으로 그의 심경이나 신념을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런던 내셔널갤러리도 말년 자화상을 두고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죽음 앞의 정직함으로 읽어 온 해석이 오래됐지만, 그의 동기는 더 단순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의 어려운 문제에 붙들린 직업인의 관심이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 그림에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만년의 한 화면에서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여자는 그 손 아래에 자기 손을 겹칩니다. 두 손은 서로를 잡지 않습니다. 그저 겹쳐 있습니다. 소매의 금빛 물감은 화면에서 실제로 솟아 있어서, 각도를 바꾸면 빛이 다르게 걸립니다. 문서가 답하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은 이렇게 답합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이삭과 레베카로 분한 부부의 초상〉, 1665년경에서 166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1.5 × 166.5cm,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 SK-C-216. 겹친 두 손을 먼저 보시고 남자의 소매로 시선을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물감이 두껍게 쌓여 소매의 무늬가 화면 밖으로 도드라져 있습니다. |
렘브란트를 만나는 가장 짧은 길은 자화상 두 점을 나란히 놓는 것입니다. 1628년의 얼굴은 두 눈이 그늘에 잠겨 있습니다. 1669년의 얼굴은 배경도 소품도 없이 정면을 향합니다. 사이에 놓인 마흔 해가 그 두 화면 안에 있습니다. 본문의 소장처 정보는 2026년 8월 기준이며 이후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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