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해석, 실제와 다르게 그린 도시와 프루스트의 노란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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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 5월 16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한 경매의 목록 31번에는 이런 한 줄이 적혀 있다. 「원근으로 그린 델프트 시, 남쪽에서 본 것, 델프트의 J. 판 데르 메이르 작. 200」. 목록 속 판 데르 메이르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이고, 200은 휠던 단위의 낙찰가다. 같은 목록의 〈우유 따르는 하녀〉는 175휠던, 〈금 다는 여인〉은 155휠던이었고, 200휠던보다 높은 값은 없었다.

그 그림이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의 〈델프트 풍경〉이다. 강 건너편으로 성벽과 두 성문, 교회 탑이 늘어서 있고 그 위를 구름 낀 하늘이 덮는다. 도시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보이는 이 화면은 얼마나 실제 델프트인가. 어떤 곳은 측량 기록과 거의 맞고, 어떤 곳은 분명히 다르다.

작품 한눈에 보기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1660~1661년경,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소장. 서명은 왼쪽 아래 배 위에 IVM을 한 글자로 엮어 넣었다.

확인한 것은 셋이다. 첫째, 성문과 교회 탑, 강가 집들의 박공 줄은 실제 델프트와 맞는다. 둘째, 두 문 사이 다리와 로테르담 문의 높이, 지붕선, 왼쪽의 긴 건물 하나는 실제와 다르다. 셋째, 이 그림은 원작의 행방이 잊힌 동안에도 모사로 이름이 이어졌고, 1822년 국가가 사들였으며, 약 100년 뒤 프루스트의 소설 속 한 장면이 되었다.

물 건너편으로 붉은 지붕의 집들과 시계탑이 달린 성문, 쌍탑 성문이 늘어서고 그 위를 구름 낀 넓은 하늘이 덮은 도시 풍경. 앞쪽 분홍빛 모래 강변에 사람들과 배가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1660~1661년경, 캔버스에 유채, 96.5 × 115.7 cm,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inv. 92. 하늘이 화면의 위쪽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도시는 화면 가운데의 가는 띠 안에 들어가 있다.

델프트 풍경 그림 속 장소

그림의 앞쪽 물은 콜크(Kolk)라는 항구다. 도시 남쪽 가장자리에 있던 삼각형 항구로, 보는 사람 뒤 오른쪽으로는 스히(Schie) 운하가 로테르담 쪽으로 이어진다. 화가가 도시를 어느 방향에서 봤는지는 기록마다 표현이 조금 다르다. 1696년 경매 목록과 1995년 워싱턴 국립미술관(NGA)·마우리츠하위스 공동 전시 도록은 남쪽이라고 적고, 마우리츠하위스의 작품 해설 본문은 남동쪽이라고 적는다.

강 건너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 건물이 차례로 이름을 얻는다. 왼쪽은 낮고 긴 성벽이다. 그 위로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다가, 원뿔 지붕을 인 어두운 탑 하나가 솟는다. 1982년 휠록과 칼덴바흐의 논문은 이 탑을 「앵무새(De Papegaey)」라는 이름의 양조장 건물로 보았다. 그 바로 뒤로 첨탑 여럿을 단 흐린 탑이 보인다. 같은 논문과 NGA 도록은 이것을 구교회(Oude Kerk) 탑으로 비정한다.

왼쪽에 시계와 종루를 얹은 성문, 가운데 아치 다리와 햇빛 받은 교회 탑, 오른쪽에 원뿔 지붕 두 개를 얹은 성문이 물가에 늘어서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부분(스히담 문에서 로테르담 문까지), 1660~1661년경, 캔버스에 유채,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inv. 92. 건물 윤곽을 따라 흰 선이 그어져 있다.

화면 가운데의 큰 문이 스히담 문(Schiedamse Poort)이다. 계단식 박공 한가운데에 둥근 시계가 걸려 있고 지붕 위에는 종루가 얹혀 있다. 그 왼쪽 옆에 작은 케털 문이 있고, 뒤 왼쪽의 긴 붉은 지붕은 무기고다. 오른쪽으로 더 가면 아치 다리 너머로 원뿔 지붕 두 개를 쓴 로테르담 문(Rotterdamse Poort)이 나온다. 여기서 「문」은 물을 막는 수문이 아니라 성벽에 낸 성문이다.

두 문 사이, 나무 너머로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밝은 탑이 신교회(Nieuwe Kerk) 탑이다. 신교회에는 국부 빌럼 판 오라녀의 묘가 있다. 케털 거리(Kethelstraat) 집들의 정면도 휠록과 칼덴바흐는 실제와 거의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보고했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햇빛을 받아 밝은 노란빛으로 빛나는 고딕 탑. 탑의 창 같은 열린 부분 안이 비어 있고 앞에는 짙푸른 나무와 파란 지붕 건물이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부분(신교회 탑), 1660~1661년경, 캔버스에 유채,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inv. 92. 탑의 열린 칸 안에 종이 보이지 않는다.

신교회 탑을 확대하면 빈 곳이 보인다. 탑의 열린 칸 안에 종이 없다. 마우리츠하위스는 종 주조공 헤모니가 1660년 5월부터 1661년 사이에 이 탑에 종을 달았고, 그 기간이 이 풍경을 그리던 때와 겹친다고 설명한다. 다만 공사가 끝난 때를 영문 해설은 가을로, 네덜란드어 해설은 늦여름으로 적어 종만으로 제작 시점을 좁히기는 어렵다. 제작 시기를 1660~1661년경으로 두는 이유다.

계절과 시각은 화면에서 읽을 수 있다. 소장처는 나무에 잎이 무성하니 늦봄이나 여름이고, 해가 동쪽에 있으니 오전이라고 본다. NGA 도록과 1982년 논문은 머리 위 짙은 구름이 앞쪽과 건너편 기슭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본다. 화면에서 햇빛이 분명하게 닿은 곳은 그 뒤의 신교회 탑과 오른쪽 안쪽의 집들이다. 앞쪽 모래 강변에는 사람 몇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왼쪽에는 말이 끄는 객선(트렉스하위트, trekschuit)이 정박해 있다.

분홍빛 모래 강변 왼쪽에 붉은 선체의 객선이 매여 있고 그 앞에 검은 옷과 흰 두건 차림의 사람 다섯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파란 옷자락의 두 여인이 나란히 서 있고 한 사람이 바구니를 들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부분(앞쪽 강변), 1660~1661년경, 캔버스에 유채,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inv. 92. 오른쪽 두 여인은 파란 옷자락을 하고 있고, 모래는 분홍빛을 띤다.

화가는 어디에 서 있었을까. NGA 도록과 1982년 논문은 두 문을 마주 보는 항구 건너편 집의 2층이라면 이 장면이 보였을 것이라고 본다. 델프트 공과대학의 베버가 시점을 투영 계산으로 되짚어 이 가설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NGA 도록이 직접 밝히듯 화가가 그 집에서 그렸다는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장에서 그렸는지 작업실에서 마무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실제와 다르게 그린 곳

그렇다고 이 그림이 측량도는 아니다. 마우리츠하위스 해설이 다른 점을 짚는다. 실제 건물들은 훨씬 어수선했고 하늘을 가르는 지붕선은 더 뾰족했다.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는 두 문 사이의 다리가 더 곧고 길며, 로테르담 문과 부속 건물들은 물 위에 더 낮게 앉아 있다. 다리 너머로 유일하게 트여 보였을 곳은 나무로 가려졌다. 신교회 탑도 실제로는 조금 더 오른쪽에 있었는데 화가가 가운데 쪽으로 옮겼다고 소장처는 적는다.

물가에 원뿔 지붕 두 개를 얹은 성문과 파란 지붕의 큰 건물이 있고, 그 앞에 둥근 선체의 큰 배가 매여 있다. 배의 선체에 작고 흰 물감 점이 많이 찍혀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부분(로테르담 문과 청어잡이 배), 1660~1661년경, 캔버스에 유채,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inv. 92. 쌍탑은 그늘 속에 있고, 그 앞 배의 검은 선체에 둥글고 흰 점이 흩어져 있다.

로테르담 문을 보면 그 변형이 화면에서 확인된다. 원뿔 지붕을 쓴 두 탑이 거의 나란히 납작하게 서 있다. NGA 도록은 이 문의 옆벽을 따라 원근선을 이으면 화면 왼쪽 바깥 먼 곳에서야 만난다고 지적한다. 깊이를 눌러 쌍탑을 정면에 가깝게 펼친 셈이다. 화면 왼쪽의 긴 수평 건물은 더 나아간다. 휠록과 칼덴바흐는 같은 시기 델프트에서 이에 맞는 건물을 찾지 못했다며 상상으로 지은 건물이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연구자의 판단이지만 대응 건물이 없다는 근거가 붙어 있다.

흑백 사진으로 찍은 소묘. 물 건너편 왼쪽에 작은 아치 문과 시계탑 성문이 있고, 가운데 돌다리 너머 오른쪽에 원뿔 지붕 두 개를 얹은 성문과 높은 건물이 서 있다. 물 위에 배와 작은 보트가 떠 있다
아브라함 라데마커르, 〈로테르담 문과 케털 문〉, 제작연도 미상(화가 생몰 1676/77~1735년), 소묘, 소장처 미상. 사진 G.Th. Delemarre, 네덜란드 문화유산청(RCE) 1965년 촬영, CC BY-SA 4.0. 로테르담 문 쪽 건물이 더 높이 솟아 있다.

NGA 도록은 실제 모습을 가늠하려고 17세기 말의 대형 조감 지도, 1649년 평면도와 함께 라데마커르의 소묘를 비교 자료로 놓았다. 베르메르보다 한 세대 뒤의 소묘라 그대로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나란히 보면 차이가 보인다. 소묘에서는 로테르담 문 쪽 건물이 지붕 장식과 굴뚝을 여럿 세운 채 높게 서 있고, 지붕선이 더 들쭉날쭉하다. 베르메르의 화면에서는 같은 건물이 낮고 단단한 덩어리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는 도중에 바꾼 흔적도 있다. X선과 적외선 조사에 따르면 로테르담 문의 쌍탑은 처음에 햇빛 속에 있었다가 그늘로 바뀌었고, 물에 비친 쌍탑의 반영은 화면 아래쪽 끝까지 길게 늘어났다. 무기고 지붕도 처음에는 햇빛을 받는 입체로 그려졌다. 오른쪽의 청어잡이 배 두 척은 처음에 조금 작게 그렸다가 키웠고, 로테르담 문 위의 노란 지붕은 연어색으로 칠한 위에 노랑을 덧칠했다. 지금 화면에서 앞쪽 건물들이 그늘에 잠기고 그 뒤 도시가 밝게 떠 보이는 대비는, 적어도 그 일부가 이렇게 칠을 고쳐 가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물감의 표면도 고르지 않다. NGA 도록에 실린 분석에 따르면 돌 정면과 지붕은 굵은 알갱이와 모래를 섞은 연백으로 밑칠했고, 왼쪽 계단식 박공의 노란 물감에서도 모래 알갱이가 나왔다. 마우리츠하위스는 오른쪽의 샛노란 지붕을 따로 짚어, 밑칠에 굵은 연백 알갱이를 써서 거친 표면을 암시했다고 설명한다. 신교회 탑의 가장 밝은 면에는 연석황이라는 노란 안료를 물감으로 조각하듯 두껍게 올렸다. 건물 윤곽을 따라 그은 흰 선도 있는데 스히담 문 위에서 가장 뚜렷하다. NGA 도록은 같은 흰 선이 〈작은 거리〉와 〈우유 따르는 하녀〉에도 나온다고 적는다.

청어잡이 배의 검은 선체에 찍힌 둥글고 흰 점들은 해석이 갈리는 자리다. 소장처는 이것을 물의 반짝임이 선체에 비친 것으로 설명한다. NGA 도록은 이 흐린 점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렌즈로 바깥 풍경을 어두운 상자 안에 비추는 장치)의 초점 흐린 상과 닮아 사용설의 근거가 되어 왔다고 소개하고, 곧바로 반론을 붙인다. 이런 흐린 빛 번짐은 배가 강한 햇빛 속에 있을 때에만 생기는데, 그림 속 배는 그늘에 있다는 것이다. 이 장치를 썼다는 문서는 없다.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그늘 속 선체의 빛 점이고, 렌즈 상이라는 설명은 그 그늘과 어긋난다.

정리하면 이 그림에서 실제와 일치하는 것은 측량의 결과라기보다 골라 낸 부분이다. 문과 탑, 강가 집들의 박공 간격은 실제와 맞고, 다리와 로테르담 문의 높이, 지붕선, 왼쪽 건물 하나는 실제와 다르다. 왜 그렇게 바꿨는지 화가가 남긴 말은 없다. 화면 구성을 위한 선택이라는 설명은 연구자의 해석이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정확함이 한 화면에 같이 있다는 사실이다.

200휠던에서 국가 소장품으로

1696년 이전 이 그림의 주인은 델프트의 판 라위번 집안이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장처 이력도 이 부분에는 물음표를 붙인다. 1696년 디시우스 경매 뒤 원작의 행방은 한동안 잊혔지만 그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화가 세 사람이 이 그림을 수채로 모사했고, 1814년 암스테르담에서는 「유명한 델프트의 판 데르 메이르 그림」을 옮겨 그린 모사본이 전시되었다. 1816년 판 에인던과 판 데르 빌리헌은 이 그림이 크게 칭찬받는다고 쓰면서 「지금 어디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원작은 하를럼의 콥스 가문이 가지고 있었고, 1822년 5월 22일 암스테르담의 스틴스트라 경매에 112번으로 나왔다. NGA 도록이 옮겨 적은 그 경매도록의 설명은 이 그림을 「이 거장의 가장 으뜸가고 가장 이름난 그림」이라고 불렀다. 마우리츠하위스 관장 스텐흐라흐트는 4월 27일 「특이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진열관에 덜 맞는다」며 반대했고, 레이크스뮈세윔(Rijksmuseum) 관장 아포스톨은 5월 2일 꼭 사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정은 그 위에서 내려졌다. 장관이 국왕 빌럼 1세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고 국왕은 곧바로 승인했다. 국가는 그 자금으로 2,900휠던에 그림을 샀다. 국왕이 사서 기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구입이었다. 국왕은 이 그림을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뮈세윔이 아니라 헤이그의 국왕 진열관에 두라고 명했다. 이유는 기록에 없다. NGA 도록의 저자는 신교회 후진에 오라녀 가문 사람들이 묻혀 있었으니 이 주제가 국왕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가졌으리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추정한다.

1696년의 200휠던과 1822년의 2,900휠던 사이에는 126년이 있어 숫자만으로 견줄 수 없다. 반대했던 스텐흐라흐트는 1826~1830년의 마우리츠하위스 도록에서 이 그림을 칭찬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 그림의 복제 도판이 처음 실린 것도 그 도록이었다.

1822년에서 60여 년 뒤 이 그림을 두고 글을 남긴 화가 중에 빈센트 반 고흐가 있다. 1885년 11월 누넌에서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헤이그에 있는 델프트의 판 데르 메이르가 빨강·초록·회색·갈색·파랑·검정·노랑·흰색의 강한 색조를 지닌 채 색을 멋지게 간직하고 있다고 썼다. 편지 원문에는 그림 제목이 없다. 이것을 〈델프트 풍경〉으로 보는 것은 편지 편집자의 주석과 마우리츠하위스의 판단이다.

프루스트와 작은 노란 벽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그림을 적어도 두 번 봤다. 1902년 10월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에서, 그리고 1921년 봄 파리 죄드폼(Jeu de Paume)에서 열린 네덜란드 회화전에서다. 그 무렵 장루이 보두아예가 잡지 『로피니옹(L’Opinion)』에 베르메르 연구를 실었고, 프루스트는 그 글을 읽고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헤이그 미술관에서 〈델프트 풍경〉을 본 뒤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 날짜(1921년 5월 1일)는 편자의 추정이고,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문장이 1902년 헤이그 방문의 느낌을 돌아본 말이라고 설명한다.

보두아예는 1923년 1월 9일 자크 리비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날을 회고했다. 자기 글의 「작은 노란 벽면」 대목이 프루스트의 눈을 붙잡았고, 함께 죄드폼에 간 아침 프루스트는 몹시 아팠고, 원형 소파에 여러 번 돌아와 앉았다는 것이다. 동행자의 증언으로, 프루스트 전기에 인용되어 전한다. 그리고 보두아예는 그 원형 소파를 이렇게 불렀다. 베르고트가 죽으며 굴러떨어지는 소파.

베르고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다섯째 권 『갇힌 여인』에 나오는 작가이고, 이 권은 프루스트 사후 1923년에 나왔다. 그는 〈델프트 풍경〉 속 작은 노란 벽면이 따로 떼어 보면 중국의 귀한 미술품 같다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감자 몇 알을 먹고 전시장으로 간다. 그리고 그림 앞에서 처음으로 알아본다. 「파란 옷의 작은 사람들, 모래가 분홍색이라는 것, 그리고 마침내 아주 작은 노란 벽면의 값진 물감」을.

베르고트가 처음 알아본 것 가운데 둘은 지금 도판에서 바로 찾을 수 있다. 앞쪽 강변의 두 여인은 파란 옷자락을 하고 있고, 그들이 선 모래는 분홍빛이다. 셋째인 노란 벽은 사정이 다르다. 프루스트는 그 벽의 위치를 밝히지 않았고, 여러 견해가 있을 뿐 한 곳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소설 속 베르고트는 그 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렇게 썼어야 했다. 내 마지막 책들은 너무 메말랐다. 색을 여러 겹 칠해서 문장 자체를 이 작은 노란 벽면처럼 값지게 만들었어야 했다」고 말하고, 「차양이 달린 작은 노란 벽면」을 되뇌다 원형 소파 위로 쓰러진다.

앞 절의 기술 조사를 떠올리면 이 대목이 다르게 읽힌다. 로테르담 문 위 노란 지붕은 연어색 위에 노랑을 덧칠한 자리였고, 소장처가 짚은 오른쪽 샛노란 지붕은 밑칠에 굵은 알갱이를 넣은 자리였다. 베르고트의 「여러 겹의 색」은 소설의 문장이지만 화면에도 덧칠한 노랑이 있다. 그 칠의 층은 프루스트가 죽은 뒤의 조사에서 보고되었으니, 두 사실은 나란히 놓는 데서 멈춘다.

또 하나의 델프트, 〈작은 거리〉

남아 있는 베르메르의 그림은 기관에 따라 35~37점으로 헤아리는데, 레이크스뮈세윔에 따르면 그 가운데 도시 풍경은 〈델프트 풍경〉과 〈작은 거리〉 두 점뿐이다. 이 미술관이 가진 〈작은 거리〉는 장소를 두고 오래 논쟁이 이어진 그림이다.

붉은 벽돌의 계단식 박공 집 정면. 아래층 오른쪽 문간에 흰 두건을 쓴 여인이 앉아 바느질을 하고, 가운데 왼쪽에 아치형 문과 열린 통로가 나란히 있으며 통로 안쪽에서 한 여인이 몸을 굽히고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작은 거리〉(델프트의 집들 풍경), 1658년경, 캔버스에 유채, 54.3 × 44 cm, 레이크스뮈세윔, 암스테르담, SK-A-2860. 1921년 데터딩 기증. 가운데 왼쪽에 아치문과 열린 통로 두 개가 붙어 있고, 왼쪽 아래 흰 벽에 서명이 있다.

2015년 레이크스뮈세윔은 이 거리가 델프트 플라밍스트라트(Vlamingstraat) 40~42번지라고 발표했다. 근거는 1667년의 부두세 대장이다. 집과 통로의 폭이 약 15센티미터 정밀도로 적힌 장부다. 이 장부에서 지금의 40~42번지 자리에는 폭 약 6.30미터의 집 두 채가 있었고, 그 사이에 폭 약 1.20미터의 통로 두 개가 바로 붙어 있었다. 미술관은 베르메르 시대의 델프트 어디에도 이런 배치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림의 가운데 왼쪽을 보면 아치문 하나와 안뜰로 열린 통로 하나가 나란히 붙어 있다. 화면의 이 두 입구는 장부가 적은 나란한 두 통로와 겹쳐 볼 수 있다.

오른쪽 집에는 베르메르의 고모, 곧 아버지의 이복누이인 아리안트헌 클라스가 1645년 무렵부터 1670년 죽을 때까지 자녀들과 살았다. 고모가 소 내장을 팔아 다섯 자녀를 키워서 집 옆 통로는 내장 골목(Penspoort)이라 불렸다. 베르메르의 어머니와 누이도 같은 운하 비스듬히 건너편에 살았다. 지금 그 자리의 집들은 19세기 말 것이고 오른쪽 통로 문만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반론도 있다. 필립 스테드먼은 부두세 대장과 19세기 지적도가 40번지에서 약 1.25미터 어긋난다며 다른 운하의 다른 건물을 주장했고, 벤저민 빈스톡은 베르메르의 장모 마리아 틴스의 집이라고, 헤이디 더 마러는 실제 장소와 상관없이 선을 짜 맞춘 구성이라고 보았다. 2018년 흐레이선하우트는 그 1.25미터가 통로 하나를 앞집과 뒷집이 함께 썼기 때문에 생긴 차이라고 반박했다. 소장처는 지금도 40~42번지를 채택하고 있다. 1696년 경매 목록에서 이 그림은 32번 또는 33번으로 나오는데, 어느 쪽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작은 거리〉는 통로 폭까지 장부와 맞춰 볼 만큼 가까이 다가갔고, 〈델프트 풍경〉은 물 건너에서 도시 전체를 한 줄로 정리했다. 베르메르의 생애 전체는 베르메르의 생애와 작품에서, 같은 화가의 다른 그림은 〈회화의 기술〉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글에서도 이어 볼 수 있다.

델프트 풍경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델프트 풍경〉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소장이다. 다만 2026년 10월 9일부터 2027년 1월 10일까지는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국립미술관의 마우리츠하위스 소장품전에 대여되어 그곳에 걸린다. 그 기간에 헤이그를 찾는다면 이 그림은 볼 수 없다.

베르메르는 어디서 이 풍경을 그렸나

기록에 없다. 콜크 항구 건너편 집의 2층이라는 가설을 투영 계산이 뒷받침하지만 문서 증거는 없다.

프루스트가 말한 작은 노란 벽은 어디인가

정해져 있지 않다. 프루스트는 「차양이 달린 작은 노란 벽면」이라고만 썼고, 로테르담 문 왼쪽 첨탑 옆 노란 지붕이라는 견해 등 여러 의견이 있다.

그림 속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나

신교회 탑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 서 있지만 그림 속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1872년 첨탑이 불에 탄 뒤 조금 더 높은 신고딕 양식 첨탑으로 바뀌었고, 탑의 기단 크기만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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