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 로마의 법정에서 한 열여덟 살 화가가 손가락에 끈을 감은 채 진술했습니다. 시빌레라고 부르던 그 도구는 끈을 조여 손가락 마디를 눌렀고, 재판정은 그것을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절차로 여겼습니다. 화가에게 손은 생계였습니다.
이 장면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다루는 많은 글의 첫머리에 놓입니다. 그리고 대개 그다음에 그녀가 그린 유디트가 칼을 든 장면이 이어집니다. 재판이 그림을 설명한다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따라가면 반드시 지나치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1612년 재판에서 그녀는 자기는 쓰지 못하고 조금 읽을 수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 한 줄 정의: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한 화가이자,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가 받아들인 최초의 여성
• 생몰: 1593년 로마 출생, 1654년 8월 나폴리 기록 이후 행적이 끊김(사망 연도 미상)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런던
• 활동 분야: 카라바조 계열 명암 대비를 출발점으로 삼은 바로크 서사화
• 대표작: 〈수산나와 장로들〉(1610),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우피치 소장본), 〈기울기의 알레고리〉(카사 부오나로티 천장화),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영국 왕실 컬렉션)
1612년 재판으로 그림을 설명해도 되는가
부분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재판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기록도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그림 전체를 풀이하면 40년이 넘는 활동 대부분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습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산나와 장로들〉, 1610년, 캔버스에 유채, 폼메르스펠덴 바이센슈타인 성. 열일곱 살 무렵의 작품으로 재판보다 앞섭니다. |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동료 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가 그녀를 강간했고, 아버지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법정에서 이 사안은 피해자가 입은 상해가 아니라 가문의 명예가 훼손된 문제로 다루어졌습니다. 재판은 일곱 달을 끌었고, 타시는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추방되었지만 그 처분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고, 이듬해 봄 판결이 무효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문을 받는 중에 그녀가 타시를 향해 한 말이 조서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내게 준 반지이고 이것이 당신의 약속입니다. 결혼을 약속했던 상대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타시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기록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1970년대 이후 그녀를 다시 읽은 여성주의 연구들은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장면을 재판 경험과 연결해 읽었고, 그 독해가 대중적으로 굳어졌습니다. 반면 그 연결을 경계하는 연구자들도 꾸준히 있었습니다. 반론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유디트와 수산나는 당시 로마와 피렌체의 수집가들이 실제로 많이 주문하던 인기 주제였고, 그녀는 시장을 정확히 읽는 직업 화가였습니다. 둘째, 남성 화가가 같은 장면을 그리면 양식의 성취로 읽히고 여성 화가가 그리면 개인사의 표출로 읽히는 비대칭이 발생합니다.
저는 두 독해가 배타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산나와 장로들〉은 재판이 있기 전, 그녀가 열일곱 살 무렵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목욕하는 여자를 훔쳐보는 남자들이라는 주제를 당대 화가들은 대체로 관능적인 장면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 속 수산나는 몸을 비틀어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어 시야를 막습니다. 불쾌해하는 몸입니다. 이 화면이 사건 이전에 나왔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화면만큼은 사건의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글을 쓰지 못하던 화가가 어떻게 갈릴레오의 편지 상대가 되었는가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린 시절이 아니라 결혼해서 피렌체로 옮긴 뒤, 이미 직업 화가로 활동하던 성인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계급의 다른 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재판 때의 진술대로라면 쓰지 못하고 읽기도 조금 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피렌체로 간 뒤에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말 타는 법도 함께 익혔습니다. 이 두 사실은 붙여 놓고 보면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문해와 승마는 그 도시의 궁정과 학자 사회에 드나드는 데 필요한 기술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뒤늦게 익혔습니다.
피렌체에서 그녀가 만난 사람 중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었습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린 그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물려받은 그의 조카손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일 조바네입니다. 그는 집안을 기리는 저택을 꾸미면서 천장화 한 칸을 그녀에게 맡겼고, 참여한 다른 화가들보다 세 배 많은 보수를 지급했습니다. 그녀는 임신 5개월의 몸으로 그 천장을 그렸습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기울기의 알레고리〉, 1615~1617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천장. 원래 나체로 그렸으나 1684년 집안의 후손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가 화가 볼테라노에게 맡겨 몸을 덮는 천을 덧그리게 했다. |
이 사람의 인맥을 통해 그녀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도 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확실히 남아 있는 것은 1635년의 편지 한 통인데, 오랜 친분을 짐작하게 하는 다정한 어조입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페르디난도 2세 대공에게 보낸 그림에 아직 제대로 된 답례를 받지 못했다며 중재를 부탁하고, 예전에 갈릴레오가 코시모 2세 쪽에 힘써 준 일을 상기시킵니다. 우피치의 〈유디트〉 대금을 그의 도움으로 받았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녀는 자기가 작품을 보낸 유럽의 군주들에게서 선물과 정중한 서한을 받았고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대금을 못 받은 사람이 자기 신용을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1616년에는 피렌체의 미술 아카데미가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아카데미가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인 첫 사례였습니다. 글을 배운 지 몇 해 되지 않은 사람이 도달한 자리였습니다.
훨씬 뒤인 1649년, 나폴리에서 그녀는 시칠리아의 수집가 안토니오 루포와 그림값을 두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인물 여덟에 개 두 마리, 풍경과 물까지 들어가는 큰 그림이었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씁니다. 저와 거래하시면 손해 보지 않으실 것이며, 한 여자의 영혼 안에서 카이사르의 기백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이 문장은 오늘날 그녀를 상징하는 말처럼 인용되지만, 원래 자리는 값을 깎으려는 고객 앞이었습니다. 자기 값을 지키려고 쓴 문장입니다.
어법은 언제, 왜 바뀌었는가
그녀의 화면은 활동 도시가 바뀔 때마다 달라졌습니다. 후원자와 경쟁자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하녀가 상체를 누르고 유디트는 팔을 뻗어 거리를 둔 채 칼에 체중을 싣는다. |
로마, 아버지의 공방(1612년까지). 출발점은 아버지 오라치오였고, 그 너머에는 카라바조가 있었습니다. 배경을 어둠으로 지우고 인물에만 빛을 던지는 방식, 성서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고 길에서 볼 법한 몸으로 그리는 방식을 그녀는 이 시기에 익혔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어법 안에서 시작했지만, 그녀의 화면에서는 점차 몸의 무게와 인물 사이의 물리적 긴장이 강해집니다.
|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8~1599년경, 로마 바르베리니 궁 국립고전미술관. 같은 장면인데 유디트는 몸을 뒤로 빼고 하녀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합니다. |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류트 연주자〉, 1612~1620년경,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아버지 쪽 화면은 윤곽이 매끄럽고 빛이 부드럽게 번집니다. |
피렌체(1612~1620). 메디치 궁정이 고객이 되면서 화면이 커지고 색이 화려해집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변화는 로마로 돌아온 직후인 1620년 무렵 완성한 우피치의 유디트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역학입니다. 하녀가 홀로페르네스의 상체를 온몸으로 눌러 고정하고, 유디트는 팔을 뻗어 거리를 두면서 칼에 체중을 싣습니다. 두 여자가 분업하는 구도이고, 소매가 밀려 올라간 팔뚝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다른 화가들의 화면에서 유디트가 대개 혼자 서서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베네치아(1620년대 후반 무렵). 남은 편지 몇 통으로 짐작하는 짧은 체류기인데, 이 무렵 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고 옷감의 질감이 전면에 나옵니다. 베네치아 회화의 색채 전통을 흡수한 결과입니다. 어둠 속에서 인물을 끌어내던 방식이 이때부터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아하수에로 앞의 에스더〉, 1626/27~1630년 무렵,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옷감의 질감과 색이 화면 앞으로 나옵니다. |
나폴리와 런던(1630~1654). 나폴리에서 그녀는 조수를 두고 대형 주문을 처리하는 공방을 운영합니다. 공방과 지역 화가들과의 협업 관행은 이 시기 작품의 귀속을 지금도 복잡하게 만드는 배경입니다. 1638년에는 찰스 1세의 궁정이 있는 런던으로 건너가 아버지와 다시 함께 일했고, 아버지는 이듬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영국 왕실 컬렉션에 있는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이 이 무렵의 그림입니다. 회화라는 개념을 인격화한 그림에서 화가 자신이 그 인격이 되어 붓을 든 화면입니다. 남성 화가는 이 주제를 이렇게 그릴 수 없었습니다. 회화의 알레고리가 여성 형상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 영국 왕실 컬렉션. 회화라는 개념을 인격화한 자리에 화가 자신이 들어갔다. |
당대 평가와 후대 평가는 왜 갈리는가
생전에 그녀는 유럽 여러 궁정에 그림을 보내는 국제적인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사후에는 거의 잊혔고, 1916년 로베르토 롱기의 논문이 그녀를 다시 불러냈습니다. 1947년 안나 반티의 소설이 이름을 넓혔고, 1970년대 여성주의 미술사가 본격적으로 재조명했습니다. 이 간극이 그녀를 둘러싼 해석을 지금도 흔들고 있습니다.
망각의 경로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초기에는 아버지와 양식이 가까웠고, 후기에는 공방 협업이 많아 여러 작품의 귀속이 오랫동안 흔들렸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나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분류되었다가 그녀에게 돌아온 그림도 있습니다. 이름이 지워지면 화가도 지워집니다.
재발견의 방식에도 대가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여성주의 미술사의 재조명으로 관심이 크게 넓어졌고, 대중적 수용에서는 재판과 유디트가 특히 강하게 묶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동시에 그녀는 사건의 인물로 고정되었습니다. 오늘날 대중적 소개에서도 재판에서 시작해 유디트로 끝나는 구성이 흔합니다.
제 판단은 이렇습니다. 재판을 빼고 이 화가를 말할 수는 없지만, 재판을 원인으로 두고 작품을 결과로 두는 순서는 사실관계와 맞지 않습니다. 그녀의 가장 이른 대표작은 사건 이전에 나왔고, 그녀가 획득한 문해와 인맥과 아카데미 회원 자격은 사건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직업 활동의 산물입니다. 사건은 그 생애의 한 대목이지 그 생애의 설명이 아닙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대표작이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습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같은 주제의 이른 판본이 있습니다. 영국 왕실 컬렉션에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아하수에로 앞의 에스더〉가 있습니다. 소장처와 전시 여부는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2026년 10월 21일부터 2027년 4월 4일까지는 피렌체 인노첸티 미술관에서 그녀의 피렌체 시기를 다룬 전시가 열립니다.
Q. 아버지 오라치오의 작품과 구별할 수 있나요?
A. 상당수는 구별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공방에서 출발했고 초기작일수록 손이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라치오는 매끄러운 윤곽과 밝고 서늘한 색을, 아르테미시아는 무거운 명암과 인물의 체중이 느껴지는 자세를 선호한다고 봅니다. 다만 나폴리 시기처럼 조수가 함께 그린 작품은 지금도 귀속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Q. 사망 연도가 자료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망을 기록한 문서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654년 8월 나폴리에서 밀린 세금을 낸 기록이 지금까지 확인된 마지막 흔적이고, 그 뒤로는 자취가 끊깁니다. 1656년 나폴리를 휩쓴 역병 때 사망했으리라는 추정이 있지만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 그 손으로
1612년 법정에서 끈에 감겨 있던 그 손은 이후 40여 년 동안 붓을 들었고, 뒤늦게 글자를 익혔으며, 갈릴레오에게 편지를 썼고, 값을 깎으려는 고객에게 카이사르를 들먹였습니다. 그림 앞에 서실 기회가 있다면 유디트의 팔뚝에 들어간 힘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무엇을 당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