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화면에 적힌 세 줄에는 물음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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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에 가로로 아주 긴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습니다. 폴 고갱(Paul Gauguin)이 타히티에서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제목은 문장 세 개이고 물음표가 세 개입니다. 그런데 그 물음표는 그림에 없습니다.

화면 왼쪽 위 모서리는 노란 색면이고, 그 위에 진한 청회색 필기체로 세 줄이 적혀 있습니다. 고해상 도판을 열어 확대해 읽으면 글자는 이렇습니다.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 물음표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글이 따라가는 것은 그 빈자리 자체가 아니라 그다음에 벌어진 일입니다. 고갱은 이 그림을 끝낸 뒤로 여러 해 동안, 이것이 무슨 그림인지를 편지로 거듭 설명했습니다. 화가는 왜 자기 그림 한 점을 두고 그토록 오래 말해야 했는가. 이 글의 질문은 그것입니다.

작품 한눈에 보기
• 제목: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출생 ~ 1903년 사망. 프랑스 화가입니다
• 연도 표기: 미술관 표기는 1897~1898년입니다. 화면 오른쪽 위 서명 아래의 연도를 미술관 기록은 1897로 적습니다
• 재질: 캔버스에 유채. 고갱 자신은 부대자루 천에 그렸다고 적었고, 미술관은 거칠고 무거운 삼베라고 적습니다
• 소장: 보스턴 미술관. 현재 전시 중입니다
• 화면의 글씨: 왼쪽 위에 세 줄, 오른쪽 위에 서명. 세 줄에는 물음표가 없습니다
가로로 아주 긴 화면에 벌거벗은 사람들과 옷 입은 사람들이 냇가에 흩어져 앉거나 서 있고, 오른쪽 끝에는 흰 천 위에 잠든 아기, 가운데에는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선 노란 몸의 인물, 왼쪽에는 두 손을 얼굴에 댄 노파와 흰 새가 있으며, 왼쪽 뒤로 두 팔을 벌린 청백색 입상이 서 있고 위쪽 두 모서리만 노란 색면인 유화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년, 캔버스에 유채, 139.1 × 374.6 cm이다. 보스턴 미술관 소장, 36.270. 위쪽 두 모서리만 노랗다. 왼쪽 노란 자리에 세 줄이, 오른쪽 노란 자리에 서명이 적혀 있다. 먼저 그 두 모서리부터 보라.

물음표 없는 세 줄

화면 왼쪽 위 노란 모서리에 적힌 세 줄에는 문장부호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음표가 없고, 마침표도 쉼표도 없습니다. 프랑스어에서 의문문을 만들 때 붙이는 하이픈도 없습니다. 표준 표기라면 Que sommes-nous처럼 동사와 대명사를 하이픈으로 묶는데, 화면에서는 Venons Nous, Sommes Nous, Allons Nous가 모두 띄어 쓰여 있습니다. 악센트는 있습니다. 첫 줄 D’où와 셋째 줄 Où, 두 곳 모두 u 위에 그라브 악센트가 얹혀 있습니다.

세 줄은 왼쪽이 가지런하지 않습니다. 줄마다 시작하는 자리가 조금씩 어긋나 있고 글씨 크기도 줄마다 다릅니다. 붓으로 쓴 필기체라 획이 고르지 않고, 노란 바탕 아래로 캔버스의 올이 그대로 비쳐 나옵니다. 벽에 적어 둔 낙서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글자들은 그림 밖의 표찰이 아닙니다. 글씨 바로 왼쪽 아래, 같은 노란 바탕 위에 파랑과 분홍이 섞인 꽃 한 송이와 잎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연회색 타원형 열매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글자와 꽃이 같은 화면 안에 있습니다.

노란 색면 위에 진한 청회색 필기체로 세 줄이 적혀 있는 부분 확대. 첫 줄 D'où Venons Nous, 둘째 줄 Que Sommes Nous, 셋째 줄 Où Allons Nous가 줄마다 시작 자리를 달리해 적혀 있고 물음표나 하이픈은 어디에도 없으며, 글씨 왼쪽 아래에 파랑과 분홍이 섞인 꽃 한 송이와 잎, 그 옆에 연회색 타원형 열매가 그려져 있다
같은 그림의 왼쪽 위 모서리 부분이다. 이 글의 세부 도판은 모두 퍼블릭도메인 원본에서 잘라 확대한 것이다. 세 줄 어디에도 물음표가 없고, 단어 사이에 하이픈도 없다. 노란 칠 아래로 캔버스의 올이 그대로 비쳐 나오는 것과, 글씨 왼쪽 아래의 꽃과 열매가 같은 화면 안에 그려져 있다는 것을 함께 보라.

흥미로운 것은 고갱이 편지에서는 이 세 줄을 다르게 적었다는 점입니다. 1898년 2월 조르주 다니엘 드 몽프레(Georges-Daniel de Monfreid)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미술학교 학생들에게 로마상 과제로 이런 주제를 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918년에 인쇄된 서한집에 실린 그 대목에는 하이픈이 붙어 있고 끝에 물음표가 찍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고갱이 죽고 열다섯 해 뒤에 활자로 짜인 판본입니다.

고갱 자신이 쓴 것으로 남아 있는 쪽은 다릅니다. 같은 해 2월 샤를 모리스(Charles Morice)에게 보낸 짧은 쪽지에서 그는 적어 넣은 명문은 이렇다며 세 문장을 옮겨 적습니다. 현존하는 그 쪽지의 전사문은 D’où venons nous, Que faisons nous, Où allons nous입니다. 물음표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 줄이 화면과도 다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물음표 셋이 붙은 형태와 Que sommes-nous라는 둘째 줄은 모리스가 1919년에 낸 자기 책에 실은 인용문에서 나옵니다. 편집된 인용입니다.

그러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물음표는 화면에도 없었고 고갱의 쪽지에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뒤에 붙었습니다. 1918년의 인쇄된 서한집과 1919년의 모리스 책, 곧 화가가 죽은 뒤에 활자로 짜인 판본들에서 붙었습니다. 왜 붙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확인되는 범위를 정확히 적어 두겠습니다. 현재 확인되는 화면과 1898년의 자필 자료에는 물음표가 없고, 물음표 셋이 붙은 형태는 화가가 죽은 뒤의 인쇄판에서 확인됩니다. 그 사이에 오간 모든 표기와 전시 표제를 다 살핀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이 그림을 부르는 제목의 물음표 세 개는 그림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그린 그림

이 그림이 어떤 사정에서 나왔는지는 고갱 자신의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 1897년 1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건강이 갈수록 참담하다고 쓰고, 빵 한 조각조차 없다고 씁니다. 물 조금과 그때 열리는 구아바와 망고 몇 개로 살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편지에서 그는 그해 12월에 무엇을 했는지 밝힙니다. 자기 결심은 12월로 굳어져 있었고, 그래서 죽기 전에 머릿속에 있던 큰 그림 한 점을 그리고 싶었으며, 그 달 내내 유례없는 열에 들떠 밤낮으로 작업했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그리고 싶었다는 말은 고갱 자신의 표현입니다. 이 문장을 유언이라는 말로 바꾸어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었고, 그는 그 뒤로도 여러 해를 더 살았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도 적었습니다. 이것은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의 그림처럼 자연을 사생하고 밑그림 카툰을 뜨는 식으로 만든 캔버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카툰(carton)은 벽화나 큰 화면에 옮기기 위해 미리 그려 두는 실물 크기 밑그림을 말합니다. 전부 즉흥으로, 붓 끝으로, 매듭과 거친 결이 가득한 부대자루 천 위에 그렸고, 그래서 겉모습이 지독하게 거칠다고 했습니다. 1901년 7월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이 큰 그림이 실행으로 보면 아주 불완전하며, 한 달 만에 아무 준비도 사전 습작도 없이 그렸다고 되풀이합니다.

이 서술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고갱의 말 바깥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준비 없이 그렸다는 말을 확인하거나 뒤집으려면 물감층을 들여다본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현재 공개돼 있지 않아 이 진술을 화면에서 검증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확인된 제작 과정이 아니라 화가 본인이 그렇게 적었다는 진술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지지체에 관해서는 기관 서술이 따로 있습니다. 보스턴 미술관은 이 그림의 매끈한 물감 도포와 거칠고 무거운 삼베 지지체 선택이 프레스코 같은 효과를 더 강조했다고 적습니다. 고갱이 부대자루 천이라 부른 것과 미술관이 삼베라 적은 것이 같은 천을 가리킵니다. 보통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가 아니라 자루를 만드는 천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미술관 페이지에서도 소장정보란은 재질을 캔버스에 유채로 적고 해설문은 삼베라 적는데, 이 둘은 다른 천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1898년 2월 모리스에게 보낸 쪽지에 이 글의 질문과 직접 맞닿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한 달 만에 진짜 미친 사람처럼 4미터 50짜리 큰 그림을 끝냈다고 적은 다음, 적어 넣은 명문은 이렇다며 세 문장을 옮기고,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그리고 나는 그림이 그 명문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림이 글씨를 설명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뒤로 벌어진 일은 그 믿음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죽지 않았다

1898년 2월로 적힌 그 편지에는 그림 이야기 앞에 다른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우편선이 닿자마자, 파리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았고, 건강은 갑자기 거의 회복되어 버려서 자연사할 가망조차 없어졌으므로 자기는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개미가 자기 시체를 먹어 치울 산속으로 몸을 숨기러 갔고, 권총은 없었지만 습진을 앓는 동안 모아 둔 비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의 하룻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적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한 가지는 구분해 두어야 합니다. 편지가 1898년 2월로 적혀 있다는 것과 그 일이 1898년 2월에 있었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편지 본문은 우편선이 닿자마자라고만 쓰고 날짜를 적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을 다루는 글들이 흔히 적는 2월이라는 날짜는 편지가 쓰인 달에서 온 것이고, 편지 자체가 확정해 주는 날짜가 아닙니다.

확정되는 것은 순서입니다. 1901년 7월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자기는 죽으려 했고 그 절망 속에서 단숨에 그렸으며, 서둘러 서명을 하고 엄청난 양의 비소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고통은 왔으나 죽음은 오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그림을 끝내고, 서명하고, 그다음에 비소였습니다. 그는 이 순서를 1898년 2월과 1901년 7월, 두 번 적었습니다.

같은 해 6월 편지에는 짧은 한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시도했을 때 죽어 버렸더라면.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그리고 싶었다던 그림을 그려 놓고 그는 1903년까지 살았습니다. 이 그림을 끝낸 뒤로 다섯 해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섯 해 동안 그가 계속한 일 가운데 하나가 이 그림을 설명하는 일이었습니다.

화면에 있는 것

고갱은 1898년 2월 편지에서 화면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위쪽 두 모서리는 크롬 옐로이고 왼쪽에는 명문이 오른쪽에는 자기 서명이 있으며, 모서리가 상한 프레스코를 금빛 벽에 붙여 놓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크롬 옐로는 짙고 불투명한 노랑을 내는 물감 이름입니다. 그다음이 인물 설명인데, 시작하는 자리가 화면 오른쪽 아래입니다.

오른쪽 아래에 잠든 아기 하나, 그다음에 웅크린 여자 셋. 자주색 옷을 입은 두 인물이 서로에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고, 원근을 무릅쓰고 일부러 거대하게 그린 인물 하나가 웅크린 채 두 팔을 들어 올려 감히 제 운명을 생각하는 저 두 사람을 놀라서 바라봅니다. 가운데 인물 하나가 과일을 따고, 아이 곁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고, 흰 염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우상은 두 팔을 신비롭게 들어 올려 저 너머를 가리키는 듯하고, 웅크린 인물 하나가 그 말을 듣는 듯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에 가까운 노파 하나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듯하며, 그 명문을 끝맺습니다. 그 발치에는 발톱으로 도마뱀을 쥔 기이한 흰 새 한 마리가 있어 헛된 말의 무용함을 나타낸다고 그는 적었습니다.

설명의 진행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입니다. 보스턴 미술관도 자기 해설에서 고갱이 편지들에서 이 구성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서술했다고 적습니다. 다만 그가 관람자에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라고 지시한 문장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몽프레 서한집과 모리스의 책 어디에도 그런 문장은 나오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그가 오른쪽 아기에서 시작해 왼쪽 노파에서 끝나는 순서로 설명했다는 것, 그리고 미술관이 그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한다고 정리한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 순서를 따라 화면을 보겠습니다. 오른쪽 끝부터입니다.

화면 오른쪽 끝 부분 확대. 아래쪽에 갓난아기가 흰 천 위에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고 머리는 오른쪽 발은 왼쪽을 향하며, 그 위로 등을 돌린 인물이 고개를 숙여 아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 왼쪽에 한 인물이 팔로 턱을 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으며, 오른쪽 가장자리 붉은 보랏빛 땅 위에 검은 개 한 마리가 흰 발끝을 내밀고 엎드려 있다
같은 그림의 오른쪽 끝 부분이다. 아기는 머리를 오른쪽에 두고 흰 천 위에 누워 있다. 화면 맨 오른쪽 가장자리의 검은 개를 보라. 고갱은 편지에서 이 화면의 짐승을 열거하면서 개는 말하지 않았다.

아기는 흰 천 위에 옆으로 누워 있고 몸빛은 노랑입니다. 그 위로 인물 셋이 모여 있는데 셋의 자세가 서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정면으로 관람자를 마주 보고, 한 사람은 팔로 턱을 괴고 눈을 내리깔았으며, 한 사람은 등을 돌린 채 아기 쪽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화면 가장 오른쪽 가장자리에 검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귀가 서 있고 흰 발끝이 보입니다. 고갱은 고양이 두 마리와 흰 염소와 흰 새를 편지에 적었지만 개는 적지 않았습니다.

가운데로 오면 화면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수직 형태가 있습니다. 한 인물이 정면을 향해 똑바로 서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있습니다. 몸은 강한 노랑이고 허리에 흰 천을 둘렀습니다. 전경 인물 가운데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어 가장 강한 수직축을 만드는 것이 이 인물입니다. 나머지 전경 인물은 거의 다 앉아 있거나 웅크리고 있거나 기대어 있습니다. 뒤쪽 우상 곁에 검은 긴 옷을 입고 선 인물이 하나 더 있지만, 옆모습이고 위로 뻗은 팔이 없습니다. 고갱이 과일을 따는 인물이라 부른 것이 이 사람입니다.

색을 보면 이 인물이 왜 그렇게 도드라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갱은 편지에서 색조의 이행이 있어도 풍경의 인상은 끝에서 끝까지 한결같이 파랑과 베로네세 초록이며, 그 위로 벌거벗은 인물들이 모두 대담한 주황으로 떠오른다고 적었습니다. 베로네세 초록 역시 물감 이름으로, 푸른 기가 도는 밝은 초록을 가리킵니다. 배경을 파랑과 초록으로 깔아 두고 몸을 주황 계열로 올려 놓으면 인물이 앞으로 나옵니다. 고갱을 후기인상주의로 묶어 설명할 때 자주 붙는 말, 곧 자연의 빛을 옮기는 대신 상징과 장식적 색면으로 화면을 만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여기서 보입니다. 그 묶음이 언제 누가 만든 이름인지는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정리한 글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왼쪽 끝이 고갱이 설명을 끝맺은 자리입니다.

화면 왼쪽 끝 부분 확대. 흰 머리의 노파가 무릎을 세우고 웅크린 채 두 손을 들어 얼굴 양옆에 대고 눈을 감다시피 하고 있으며 살빛이 올리브빛 회녹색이다. 그 왼쪽 아래 구석에 주황 부리의 흰 새가 서 있고, 노파 오른쪽에는 젊은 여자가 다리를 옆으로 접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으며 허리에 옅은 청백색 천을 둘렀다. 뒤로 넓은 흰 색면이 깔려 있다
같은 그림의 왼쪽 끝 부분이다. 노파의 살빛만 올리브빛 회녹색이어서 다른 인물들의 노랑, 주황과 확연히 갈린다. 왼쪽 아래 구석의 흰 새와 그 발 앞도 눈여겨볼 자리다.

노파는 무릎을 세우고 웅크린 채 두 손을 들어 얼굴 양옆에 대고 있습니다. 시선은 아래를 향합니다. 이 인물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세가 아니라 색입니다. 살빛이 올리브빛 회녹색이어서, 노랑과 주황으로 칠해진 다른 인물들과 확연히 갈립니다. 머리는 희끗합니다.

그 왼쪽 아래 구석에 흰 새가 있습니다. 부리는 주황이고 눈은 작고 검습니다. 고갱은 이 새가 발톱으로 도마뱀을 쥐고 있으며 헛된 말의 무용함을 나타낸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도판을 확대해 보면 새의 발 앞에 회녹색 형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도마뱀인지는 확정되지 않습니다. 형태가 뭉개져 있습니다.

이 한 마리 새에 대해 모리스는 자기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도마뱀을 쥔 새는 우리에게 말의 무용함을 상기시키려 거기 있으며, 그것은 고갱 자신이 일러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안에 적어 넣은 세 줄로 말을 시작한 화가가, 화면 반대편 구석에 말이 소용없다는 표시를 놓아두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고, 이 그림이 놓인 자리를 그대로 보여 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뜻풀이는 화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가가 알려 준 것이고, 모리스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적어 두었습니다.

당대의 비평

이 그림은 1898년 11월 17일부터 12월 10일까지 파리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화랑에서 처음 공개됐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 있었고, 그림은 몽프레에게 보내진 뒤 그와 대리인을 거쳐 볼라르에게 위탁됐습니다.

그림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1898년 7월 편지에서 고갱은 전시 조건을 직접 지시합니다. 큰 그림은 크기가 크니 값을 까다롭게 굴 것 없고 좋은 손에 제대로 놓이기만 하면 된다면서, 액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싼 것으로 하되 폭 10센티짜리 단순한 나무 띠에 석회를 칠해 벽화처럼 보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같은 편지에 초대장을 보낼 사람 명단도 손수 적었습니다. 드가(Degas), 르누아르(Renoir), 말라르메(Mallarmé), 로댕(Rodin),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가 그 명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명단 끝에 한 줄을 덧붙였습니다. 세뤼지에(Sérusier)와 드니(Denis) 패거리에게는 보낼 것 없고 언론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는 이 그림이 어떤 액자에 담겨 누구 앞에 놓일지까지 정하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그 앞에 선 비평가는 화면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앙드레 퐁텐(André Fontainas)이 1899년 1월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에 쓴 전시평이 그것입니다. 그는 고갱이 내놓은 그 넓은 패널에서는 아무것도, 거기를 고요히 지나가는 그 유연하고 생각에 잠긴 두 인물도, 신비로운 우상의 능란한 환기도 알레고리의 뜻을 알려 주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조건절을 붙였습니다. 그가 캔버스 위쪽 한 귀퉁이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써 두는 수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 문장은 이 글의 질문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화가는 그림이 명문을 설명한다고 적었는데, 그 그림을 본 비평가는 명문이 없었다면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두 사람의 판단이 정확히 반대입니다.

퐁텐이 고갱을 깎아내리려 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글에서 그는 자기가 폴 고갱 씨의 예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먼저 밝히고, 오랫동안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성급하게 농조로 말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볼라르의 가게에 걸린 최근작들을 주의 깊게 살폈고, 자기 감정이 아주 조금밖에 바뀌지 않았다 해도 이 화가의 진지하고 사려 깊고 성실한 작업에 대한 확실하고 깊은 존경이 생겨나 굳어지는 것은 느꼈다고 적었습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화가의 성실성이 아니라 이 화면이 뜻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같은 전시에 대한 다른 반응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보스턴 미술관은 타데 나탕송(Thadée Natanson)이 이 그림을 불분명하고 붙잡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우리 운명의 신비를 명상하도록 초대한다고 적었다고 전합니다. 다만 이것은 미술관이 영어로 옮겨 인용한 문장이어서, 나탕송이 프랑스어로 실제 어떤 표현을 썼는지까지는 이 문장으로 알 수 없습니다.

고갱이 오래 침묵한 것은 아닙니다. 그 비평이 나온 지 두 달 만인 1899년 3월, 그는 타히티에서 퐁텐에게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여섯 쪽짜리 자필 편지이고, 프랑스령 오세아니아 관청(Etablissements francais de l’Oceanie)의 레터헤드 용지에 적혀 있습니다. 이 편지는 경매에 나온 적이 있고, 그 경매 카탈로그의 기술에 따르면 고갱은 이것이 답장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단순한 토론이라고 먼저 밝혔다고 합니다. 색을 음악의 울림에 견주고, 자기 꿈은 붙잡히지 않으며 알레고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음악적인 시처럼 대본 없이 해낸다고 적었다고 전합니다. 화면의 우상에 대해서는 문학적 설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조각상으로 자기 꿈 속에 들어와 있다고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편지에서 제목에 대해 말합니다. 그림을 다 마친 뒤에야 그 물음들이 떠올랐고, 그것을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서명으로서 벽에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글이 출발한 자리에 그대로 닿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 노란 모서리에는 서명이 있고, 왼쪽 위 노란 모서리에는 물음표 없는 세 줄이 있습니다. 고갱의 말을 그대로 따르면 그 세 줄도 서명입니다. 양쪽 위 모서리에 서명이 둘 있는 셈입니다. 그가 그것을 질문이 아니라 서명이라 불렀다는 것과 화면에 물음표가 없다는 관찰은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편지의 내용은 경매에 나온 그 편지의 카탈로그 기술로 확인한 것이고, 프랑스어 원문을 직접 읽은 것은 아닙니다.

두 해 뒤에 그는 같은 비평을 다시 꺼냅니다. 1901년 7월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늘 자기에게 호의적이었던 퐁텐이 자기가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무력했다고, 추상적인 제목이 화면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나무랐으며, 언제나 이해 가능한 퓌비 드 샤반을 본보기로 들었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칩니다. 퓌비는 자기 생각을 설명한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는 그리스인이고 나는 야만인이며, 목줄 없이 숲에 있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예를 듭니다. 퓌비는 그림 제목을 순결이라 붙이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백합을 든 어린 처녀를 그릴 것이고, 알려진 상징이니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다. 고갱은 순결이라는 제목에 맑은 물의 풍경을 그릴 것이며, 문명인의 더럽힘이 하나도 없는, 어쩌면 인물 하나쯤 있는 풍경일 것이다.

여기서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그림은 알려진 상징으로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택한 방식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퐁텐이 지적한 현상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반박은 편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림이 아니라 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평가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고갱의 협력자였고 그와 함께 〈노아 노아 Noa Noa〉를 만든 모리스는 1919년에 낸 자기 책에서 이 화면을 놀랍고 첫눈에는 당혹스럽다고 적으면서, 이것이 패널 가장자리에 적힌 세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묻고 스스로 아니라고 답합니다. 이것은 그 세 질문 자체이며, 그 질문을 따져 보는 일이 인간의 삶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려진 문학의 경이라 불렀습니다. 다만 이 글은 1898년 전시장에서 나온 신문 비평이 아니라 스무 해 넘게 지나 고갱의 동료가 쓴 책의 한 대목입니다. 읽을 때 그 거리를 감안해야 합니다.

그가 말한 것과 그림이 보여 주는 것

고갱이 이 그림에 대해 남긴 말을 실물과 나란히 놓고 보면 어긋나는 자리가 여럿 있습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첫째는 크기입니다. 고갱은 1898년 2월 편지에서 이것이 가로 4미터 50, 높이 1미터 70짜리 캔버스라고 적었습니다. 모리스도 자기 책에 같은 수치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미술관이 실제로 잰 값은 그보다 작습니다. 이 글 첫 도판의 캡션에 적어 둔 것이 그 실측값입니다. 가로로 75센티, 세로로 31센티가 차이 납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공개 자료는 아직 없습니다. 재어 본 값을 적은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쓴 수치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도 짐작입니다.

둘째는 흰 염소입니다. 고갱은 편지에 흰 염소 한 마리라고 적었습니다. 화면에서 그 자리, 곧 우상의 대좌 바로 아래 오른쪽에 네발짐승이 한 마리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짐승은 흰색이 아닙니다.

화면 왼쪽 3분의 1 지점 부분 확대. 둥근 검푸른 대좌 위에 연한 청백색 입상이 정면으로 서서 두 팔을 좌우로 벌려 팔꿈치를 굽히고 있으며 하반신에 흰 천을 둘렀고, 그 오른쪽에 검은 긴 옷을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인물이 옆모습으로 서 있다. 대좌 아래 왼쪽에는 검푸른 네발짐승이 얼굴에 흰 무늬를 띠고 뿔 또는 귀로 보이는 돌기를 세운 채 엎드려 있다
같은 그림의 왼쪽 3분의 1 지점이다. 대좌 아래 왼쪽의 네발짐승을 보라. 고갱은 편지에 흰 염소라고 적었으나 이 짐승의 몸은 검푸르고 얼굴에만 흰 무늬가 있다.

몸은 검푸르고 얼굴 쪽에 흰 무늬가 있으며, 뿔인지 귀인지 모를 돌기가 서 있습니다. 이 짐승이 그가 말한 흰 염소인지, 아니면 다른 짐승이고 흰 염소는 화면의 다른 곳에 있는지는 판정하지 않겠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편지의 흰 염소와 이 자리의 짐승이 색에서 맞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도마뱀을 쥔 새도 앞 절에서 본 대로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도판에서 그 위쪽을 보면 우상이 있습니다. 연한 청백색 입상이 둥근 검푸른 대좌 위에 정면으로 서서 두 팔을 좌우로 벌려 팔꿈치를 굽히고 손바닥을 앞으로 들고 있습니다. 하반신에는 흰 천을 둘렀고 머리에 관 모양 장식이, 귀에 큰 귀걸이가 보입니다. 보스턴 미술관은 이 우상에 대해 고갱이 저 너머를 가리킨다고 말했다는 것까지만 적고, 어느 신인지는 특정하지 않습니다. 현재 공개된 기관 자료에는 이 우상을 특정 신으로 밝히는 서술이 없습니다.

셋째는 서명 아래의 연도입니다. 이것은 어긋남이 아니라 출처의 문제입니다.

화면 오른쪽 위 노란 모서리 부분 확대. 잎이 달린 가지와 갈색 덩어리가 노란 바탕 위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 아래쪽에 옅은 청회색 필기로 P Gauguin으로 읽히는 한 줄이 있으며 그 아래에 더 흐린 글자 한 줄이 남아 있으나 무엇인지 판독되지 않는다
같은 그림의 오른쪽 위 모서리 부분이다. 왼쪽 모서리와 같은 노란 색면이고 여기에는 서명이 있다. 서명 아래 한 줄이 더 남아 있으나 이 도판에서는 읽히지 않는다.

보스턴 미술관은 이 그림의 명문 기록에 오른쪽 위 서명이 P. Gauguin이고 그 아래 1897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도판에서 확인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노란 색면 위에 옅은 청회색으로 쓴 필기 한 줄이 P Gauguin으로 읽히고, 그 아래에 글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도판에서 판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미술관 기록을 따릅니다. 그러니 1897이라는 연도는 화면에서 읽어 낸 것이 아니라 미술관 기록에서 온 것입니다. 한편 미술관이 작품 연도로 표기하는 것은 1897~1898년입니다. 서명 아래의 1897은 그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갱의 편지는 그림을 12월 한 달에 그렸다고 적었습니다.

넷째는 액자입니다. 고갱이 요구한 것은 석회를 칠한 폭 10센티 나무 띠였고, 보스턴 미술관도 그가 단순한 흰 액자에 걸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적습니다. 그런데 전시실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이 그림은 잎 문양이 줄지어 새겨진 금박 액자에 들어 있습니다.

미술관 전시실 벽에 걸린 이 그림의 전경. 가로로 긴 화면이 안팎 테두리에 잎 문양이 줄지어 새겨진 금박 액자에 담겨 연한 색 벽에 걸려 있고, 전시 조명 아래라 화면의 초록과 파랑이 도판보다 어둡게 보이며 왼쪽 위 노란 모서리의 세 줄과 오른쪽 위 노란 모서리가 액자 안쪽에서 눈에 띈다
보스턴 미술관 전시실에 걸린 같은 그림이다. 미겔 에르모소 쿠에스타(Miguel Hermoso Cuesta) 촬영, CC BY-SA 4.0. 액자의 안쪽과 바깥쪽 테두리를 따라 잎 문양이 줄지어 새겨져 있다. 전시 조명 아래에서는 화면의 초록과 파랑이 위의 도판보다 어둡게 보인다.

그 사진이 찍힌 시점에 그랬다는 뜻입니다. 그가 벽화처럼 보이게 하려던 그림이 어느 시점에는 액자다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습니다.

이 어긋남들을 고갱이 틀렸다는 쪽으로 정리하지는 않겠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미 손을 떠난 그림에 대해 기억으로 쓴 편지와, 그 그림 앞에 서서 줄자를 대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은 오랫동안 화가의 말에 기대어 왔는데, 그 말은 그림의 사본이 아닙니다. 편지에 흰 염소가 있고 화면에 검푸른 짐승이 있으며, 편지에 개가 없고 화면에 개가 있습니다. 그가 남긴 말을 지도 삼아 화면을 보면, 지도와 땅이 어긋나는 자리가 여럿 나옵니다.

딸의 죽음

이 그림을 그리기 여덟 달쯤 전, 고갱은 딸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1897년 4월로 적힌 몽프레 앞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당신 편지가 아내의 아주 짧고 아주 끔찍한 편지와 함께 도착했으며, 아내는 자기 딸이 며칠 만에 악성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무뚝뚝하게 알려 왔다는 것입니다. 딸의 이름은 알린(Aline)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이 편지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이 소식은 나를 조금도 흔들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고통에 길들여진 탓이다. 그러다 날마다 생각이 밀려오면서 상처는 점점 더 깊게 벌어지고, 지금 나는 완전히 낙심해 있다.

확인되는 것은 고갱이 1897년 4월에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인도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고갱 자신의 편지는 악성 폐렴이라 적었고, 1925년에 나온 장 드 로통샹(Jean de Rotonchamp)의 전기는 악성 열병이라 적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당사자의 편지가 먼저입니다.

모리스는 자기 책에 고갱이 딸을 잃은 뒤에 쓴 글을 옮겨 두었습니다. 나는 방금 딸을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어머니처럼 그 아이 이름도 알린이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이어지고,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 아이의 무덤, 저 먼 곳, 꽃들. 그 모두가 겉모습일 뿐이다. 그 아이의 무덤은 여기, 내 바로 곁에 있다. 내 눈물이 꽃이다. 살아 있는 꽃.

이 그림과 이 죽음을 연결한 문장은 고갱이 남긴 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설명하는 편지를 여러 통 남겼고 그 안에서 화면의 인물을 하나하나 짚었지만, 딸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딸의 죽음이 이 그림을 낳았다고 쓰는 것은 자료가 하지 않는 말을 대신 하는 일이 됩니다.

확인되는 것은 시간의 배열뿐입니다. 1897년 4월에 부고가 왔고, 그해 12월에 그는 죽기 전에 그리고 싶었다는 그림을 밤낮으로 그렸으며, 그 그림의 오른쪽 끝에는 잠든 아기가 있고 왼쪽 끝에는 죽음에 가까운 노파가 있습니다. 이 셋을 나란히 놓는 데까지가 자료가 허락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이를 잇는 선은 각자가 그을 몫이고, 그 선이 그어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타히티에서 그린다는 것

이 그림의 배경은 고갱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숲 아래 냇가이고, 뒤쪽에 바다와 이웃 섬의 산이 있습니다. 실제 장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 구분을 살피려면 이 그림이 어디에서 누구를 그린 것인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보스턴 미술관은 이 작품 해설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고갱은 6년 전 프랑스를 떠나 타히티로 갔고, 그 프랑스 식민지에서 훼손되지 않은 열대의 낙원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싸게 살면서 예술을 진전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격한 근대성에 좌절했고, 프랑스 식민 당국과 다투었고, 재정적으로 시달렸으며,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파르게 무너져 갔습니다.

이 해설에서 미술관은 프랑스 식민지라는 말을 쓰고 식민 당국과의 마찰도 적습니다. 그러나 고갱이 그 섬에서 현지 소녀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이 해설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그 페이지에 무엇이 적혀 있고 무엇이 적혀 있지 않은지를 읽은 결과입니다.

자료의 범위가 다릅니다. 런던 테이트(Tate)의 고갱 작가 소개에는 이 문제에 관한 서술이 아예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기관들의 견해가 갈린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테이트의 그 페이지는 화가 한 사람을 몇 문단으로 소개하는 자리이고, 아래에서 볼 시카고 미술관의 글은 특정 작품 한 점을 다루는 연구 카탈로그입니다. 페이지의 목적이 다르므로 담는 범위도 다릅니다. 그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은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씁니다. 고갱의 다른 그림 〈테하마나의 조상들 Merahi metua no Tehamana〉(1893) 해설에서 미술관은 그림 속 인물을 열세 살의 타히티 소녀 테하마나라고 적고, 고갱이 이스터섬 서판에서 따온 글자들과 폴리네시아와 힌두 원천에서 영감을 얻은 여신을 조합해 막연한 이국성과 신비의 감각을 지어냈으며, 테하마나를 자기 욕망의 화신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씁니다.

이 서술이 기대는 문장은 고갱 자신의 책에 있습니다. 1901년에 나온 〈노아 노아〉에서 그는 그 소녀를 만나는 장면을 직접 적었습니다. 자기가 무섭지 않으냐고 묻자 아이는 아니라고 답했고, 자기 오두막에서 계속 살겠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으며, 그것이 전부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열세 살쯤 된, 유럽으로 치면 열여덟이나 스무 살쯤 되는 이 아이는 자기를 매혹했고 주눅 들게 했고 거의 겁나게 했다. 저 영혼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이에게 그토록 늙은 자기야말로, 모든 이득이 자기 쪽에 있는, 그토록 성급하게 구상되고 체결된 계약에 서명하는 순간 망설이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시키고 요구한 것인지 모르고, 어쩌면 저들끼리 흥정한 거래인지 모른다.

열세 살이라는 나이도, 계약이라는 말도, 거래라는 말도 고갱의 원고에 실제로 나오는 단어입니다. 다만 〈노아 노아〉를 사실 기록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카고 미술관의 연구 카탈로그는 이 책을 반쯤 허구화된 기록이라고 규정합니다. 첫 초고에는 소녀의 이름이 테하마나(Tehamana)로 적혀 있는데 둘째 초고에서는 테후라(Tehura)로 바뀝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기록에 따르면 고갱은 원고를 샤를 모리스에게 넘겼고, 모리스가 그것을 개정하고 자기 시를 덧붙여 출판했습니다. 문학적 구성이 섞여 있고 출판 과정에서 남의 손도 거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저 단어들이 고갱의 원고에 있다는 것까지가 확인되는 자리이고, 그 장면이 있었던 그대로의 기록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시카고 미술관이 쓰는 문장과 그가 1901년에 쓴 문장은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만 그 해설은 1893년에 그려진 다른 그림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고 있는 1897~1898년의 화면이 같은 인물을 그린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그림 자체에 대해서도 한 가지가 겹칩니다. 시카고 미술관은 고갱의 또 다른 그림 〈신의 날 Mahana no atua〉(1894)을 두고 화가가 지어낸 이 열대의 낙원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 화면의 인물들이 개인의 초상이라기보다 상징적 형태로 보인다고 적습니다. 그 그림은 파리에서 그려졌으므로 사정이 다릅니다. 다만 인물이 개인이 아니라 형태로 배치된다는 관찰은 이 그림 앞에서도 그대로 성립합니다. 고갱 자신이 편지에서 화면의 사람들을 부르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잠든 아기 하나, 웅크린 여자 셋, 자주색 옷의 두 인물, 과일을 따는 가운데 인물, 죽음에 가까운 노파. 이름이 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화면에 그려진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그들이 이 그림에 그려지는 데 동의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배치와 색과 세 줄의 글씨이고, 인물들은 태어남과 삶과 죽음이라는 자리에 놓인 형태로 남았습니다. 열세 살이라는 단어를 자기 책에 쓴 사람이, 같은 섬의 사람들을 시카고 미술관이 그의 다른 화면을 두고 쓴 표현대로 개인의 초상이라기보다 상징적 형태로 보이게 배열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이 글이 확인한 것은 이 한 점의 그림과 고갱이 남긴 몇 편의 글입니다. 그것으로 이 화가의 생애 전체나 그의 모든 작품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그림이 던지는 세 질문이 크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적은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빼놓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림을 보는 일과 그 그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아는 일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지금 보는 법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 시드니 앤드 에스터 랩 갤러리(Sidney and Esther Rabb Gallery)에 현재 전시 중입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그가 시도한 것 가운데 가장 큰 그림이라고 적습니다. 도판은 퍼블릭도메인으로 공개된 고해상 파일이 있어서, 누구든 내려받아 원하는 만큼 확대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세부 도판 다섯 장도 전부 그 파일에서 잘라 확대한 것입니다.

확대해 볼 자리를 넷만 고르면 이렇습니다. 첫째, 왼쪽 위 노란 모서리의 세 줄과 그 아래 꽃과 열매. 둘째, 오른쪽 위 노란 모서리의 서명과 그 아래 흐린 한 줄. 셋째, 왼쪽 아래 구석 흰 새의 발 앞. 넷째, 우상의 대좌 아래 네발짐승의 색입니다. 이 넷은 각각 이 글이 다룬 네 대목에 대응합니다.

그리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화가는 왜 이 그림에 대해 그토록 오래 말해야 했는가.

확인된 것을 시간 순서로 늘어놓으면 이렇게 됩니다. 1897년 12월에 그는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1898년 2월에 그림이 명문을 설명한다고 적었습니다. 그해 11월 파리에서 그림이 걸렸고, 1899년 1월에 그 그림을 본 비평가는 귀퉁이의 글씨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두 달 뒤인 1899년 3월에 고갱은 그 비평가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자기 그림이 알레고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1901년 7월에는 모리스에게 같은 비평을 다시 꺼내 반박했습니다. 그는 1903년에 죽었습니다.

이 배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설명이 늘 그림 바깥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그가 화면에 세 줄을 적어 넣은 것부터가 이미 설명이었습니다. 그림 안에 글씨를 들여놓는 것은 그림만으로는 닿지 않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퐁텐이 지적한 것이 정확히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고갱의 대응도 그림이 아니라 편지였습니다. 비평이 나온 지 두 달 만이었습니다. 그는 알려진 상징으로 뜻을 전달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고 스스로 밝혔는데, 그 선택의 대가가 설명의 의무였던 셈입니다.

그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해야 했는지는 그의 계획 밖의 일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리고 싶다고 했던 그림을 그려 놓고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1898년에 그의 손을 떠나 파리로 갔고, 화가는 그 뒤로 다섯 해를 더 살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오는 반응에 편지로 답했습니다. 그림이 명문을 설명한다고 믿은 사람이, 그 뒤 여러 해 동안 명문과 그림을 함께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그림 앞에 서면 두 가지가 동시에 보입니다. 하나는 화면입니다. 오른쪽 끝의 잠든 아기부터 왼쪽 끝의 노파까지, 색과 자세로만 배열된 사람들과 짐승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왼쪽 위 노란 모서리의 세 줄입니다. 물음표 없이 적힌 그 세 줄은 질문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채 질문 자리에 서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 안에 남긴 첫 번째 설명이자, 그가 평생 거두지 못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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