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바르베리니 궁에 라파엘로가 그린 여인의 초상이 한 점 걸려 있습니다. 여인은 거의 벗은 몸으로 앉아 있고, 왼쪽 윗팔에 파란 띠를 하나 두르고 있습니다. 그 띠에 금색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여인의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사람의 것입니다. 라틴어로 RAPHAEL VRBINAS, 우르비노의 라파엘로입니다.
이 그림은 〈라 포르나리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빵집 여자라는 뜻이고,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이름과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제빵사 딸이라는 신분이 늘 함께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화면에서 확인되는 이름은 여전히 화가의 것 하나뿐입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그래서 하나입니다. 여자의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답을 먼저 적자면 이렇습니다. 그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는 순서를 따라가 보면, 이름이 그림보다 한참 뒤에 도착합니다.
팔에 적힌 글자
글자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보겠습니다. 흔히 팔찌라고 부르지만 손목이 아닙니다. 어깨와 팔꿈치 사이, 왼쪽 윗팔입니다. 소장 미술관이 이 부분을 적을 때 쓰는 말도 윗팔에 두르는 고리를 뜻하는 아르밀라(armill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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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산치오, 〈여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1519~1520년, 나무판에 유채, 87 × 63 cm, 로마 바르베리니 궁 국립미술관(Gallerie Nazionali Barberini Corsini) 소장, 인벤토리 2333. 화면에 글자가 적힌 자리는 둘이다. 왼쪽 윗팔의 파란 띠와, 오른쪽 아래 어두운 구석이다. |
띠는 청금석 빛이 도는 파랑이고 위아래로 금테가 둘렸습니다. 금테 안쪽에는 금색 구슬점이 두 줄로 박혀 있습니다. 글자는 금색 로마자 대문자입니다. RAPHAEL 다음에 마름모꼴 점이 하나 찍히고 VRBINAS 가 이어집니다. U 자리에 V 를 쓴 것은 고대 로마의 비문을 따른 표기입니다.
확대해 보면 이 글자가 평평한 판에 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띠가 팔을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앞쪽 글자는 넓고 곧게 서 있는데 뒤로 갈수록 곡면을 따라 눌려 좁아지고, 마지막 S 는 거의 옆에서 본 모양이 되어 띠의 가장자리에 걸립니다. 이름 전체가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팔을 돌려세워야 다 읽히는 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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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산치오, 〈여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부분. 두 단어 사이의 마름모꼴 점 하나를 찾아보라. 앞쪽 글자는 곧게 서 있고 뒤쪽 글자는 팔의 곡면을 따라 눌려 좁아진다. 띠의 양 끝은 팔 뒤로 돌아가 보이지 않는다. |
이 화면에 금색으로 적힌 글자는 하나 더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 어두운 곳에 두 글자가 작게 적혀 있습니다. 이쪽은 서명이 아닙니다. 소장 미술관 기록은 이것을 바르베리니 가문의 세습신탁 표시로 적어 두었습니다. 세습신탁은 재산을 대대로 팔지 못하게 묶어 두는 제도이고, 그러니 이 글자는 화가가 아니라 뒷날 소유자가 남긴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그림에서 또렷하게 읽히는 이름은 화가의 이름 하나이고, 나머지 금색 글자는 소유자의 표시입니다. 여자의 이름은 화면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파엘로가 어떤 사람이었고 로마에서 무슨 일을 맡고 있었는지는 그의 생애를 다룬 글에서 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 포르나리나, 바사리가 쓰지 않은 이름
그렇다면 여자의 이름은 어느 기록에서 나왔을까요. 흔히 조르조 바사리를 댑니다. 그는 1568년에 화가들의 전기를 묶은 책을 다시 펴냈고 거기에 라파엘로의 생애가 들어 있습니다. 그 글에는 라파엘로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 여인을 그린 초상이 피렌체 상인 마테오 보티의 집에 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사리가 말한 그 초상과 지금 바르베리니 궁에 있는 이 그림을 같은 작품이라고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둘을 갈라 놓으려 한 사람은 1839년의 독일 미술사가 요한 다비트 파사반트입니다. 바르베리니 궁의 이 그림은 1642년부터 그 집의 회화 목록에 올라 있는데, 보티 집의 초상은 1677년까지도 피렌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1677년이라는 연도는 그해에 누군가 그 집에 가서 그림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파사반트 자신이 같은 대목에 근거를 밝혀 두었습니다. 그가 든 것은 프란체스코 보키가 1591년에 펴낸 피렌체 안내서와, 조반니 치넬리가 그 책을 뒤에 다시 펴낸 1677년판입니다. 1591년의 문장이 1677년판에 그대로 실린 것이고, 그것을 뒤의 연도로 읽으면 있지도 않았던 관찰이 하나 생깁니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사리가 가리킨 초상이 피렌체의 한 상인 집에 있던 것이라는 데까지이고, 그것과 이 그림이 같은 작품이라는 확인은 없습니다.
1568년판 라파엘로 전기의 본문을 통째로 검색해 보면 포르나리나도, 마르게리타도, 루티도, 제빵사도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 결과의 사정거리를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확인된 것은 그 한 권의 본문에 그 단어들이 없다는 것이지 16세기의 모든 기록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16세기 문서는 그 책 말고도 많고, 그것을 전부 뒤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 자체는 언제부터 기록에 나올까요. 소장 미술관이 정리한 소장 이력의 첫 줄은 1595년 로마의 한 컬렉션입니다. 활자로 남은 이른 서술은 1642년의 것입니다. 지롤라모 테티가 『아이데스 바르베리나이(Aedes Barberinae)』에서 이 그림을 서술하고 평가했습니다. 그 뒤 1657년에는 프란체스코 스칸넬리라는 사람이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화랑에 실물 크기의 여인 반신상이 한 점 있다고 적으면서, 그것이 화가 자신의 연인의 초상으로 믿어진다고 썼습니다. 그림이 그려지고 약 140년 뒤입니다. 그리고 그는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믿어지는」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바르베리니 가문이 남긴 재산 목록도 있습니다. 1644년, 1671년, 1686년, 1730년 네 건입니다. 네 건 모두 이 그림을 라파엘로의 손으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이름은 어느 것에도 없습니다. 1671년 목록만 라파엘로의 여인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1686년 목록은 그중 기술이 가장 자세해서 한 손은 가슴에, 다른 손은 넓적다리 사이에 둔 벗은 여인이라고 적고 붉은 천까지 적었는데도 이름은 적지 않습니다.
같은 목록에서 한 가지가 더 나옵니다. 이 그림에는 여닫는 나무 문짝이 달려 있었습니다. 1644년 목록은 아직 금을 입힌 호두나무 장식만 적습니다. 닫히는 문짝 둘이 처음 명시되는 것은 1671년 목록의 199번 항목이고, 그 뒤의 목록들도 닫히는 문짝, 안쪽에도 조각을 넣은 문짝, 조각하고 금을 입힌 호두나무 보관함이라고 되풀이합니다. 1730년에는 공의 사적인 거처에서 알현실 옆방에 다른 라파엘로 작품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벽에 그냥 걸어 두는 그림이 아니라 덮어 두었다가 여는 그림이었다는 뜻입니다.
1839년의 「사랑을 담아」
팔의 글자가 이야기의 근거로 쓰이기 시작한 자리는 확인됩니다. 1839년 파사반트의 라파엘로 전기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붉은 옷이 무릎을 덮고 그 위에 금 장식을 두른 왼팔이 놓여 있다고 적은 다음 이렇게 씁니다. 라파엘로는 사랑을 담아 그 고리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
여기서 한 걸음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띠에 적힌 것은 이름뿐입니다. 사랑을 담아라는 말은 글자에 없습니다. 파사반트가 붙인 말입니다. 그 한 마디가 붙는 순간 이름 한 줄은 서명에서 고백으로 바뀝니다.
그러니 여기서 두 가지 일을 갈라야 합니다. 글자를 읽은 일과, 그 글자를 사랑의 증거로 읽은 일입니다.
글자를 읽은 일은 훨씬 이릅니다. 1597년 2월 22일 로도비코 크레마스키가 쓴 편지가 이미 왼팔의 팔찌에 적힌 「라파엘 우르비나스(Raphael Urbinas)」를 명시합니다. 파사반트보다 240년 넘게 앞섭니다. 이 글자는 뒤늦게 발견된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이 그림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240년 동안 그 글자에 붙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을 담아라는 말입니다. 1597년의 편지가 적은 것은 팔찌에 화가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고, 1839년에 파사반트가 보탠 것은 그 이름을 적은 마음입니다. 서명을 확인하는 일과 고백을 읽어 내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그림의 이야기에서 1839년이 분기점인 것은 글자가 그때 나타나서가 아니라, 글자의 뜻이 그때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글자를 다르게 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1880년에 나온 이탈리아어 책 한 권이 리오라는 프랑스 비평가의 말을 옮겨 적었는데, 거기서 라파엘로는 그 여인이 전리품처럼 두른 금팔찌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은 사람입니다. 사랑의 맹세가 아니라 소유의 표시로 읽은 것입니다. 적어도 1880년 이전에 이 글자가 이미 논쟁거리였다는 뜻입니다.
지금 소장 미술관도 이 글자를 두 겹으로 읽습니다. 공식 해설은 이것을 작가의 서명이자 사랑의 맹세라고 적습니다. 읽기는 갈리지만, 갈리는 두 읽기가 한 가지를 똑같이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합니다. 이 여인이 라파엘로의 연인이라는 전제입니다. 글자는 그 전제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글자가 말해 주는 것은 화가의 이름뿐입니다.
라 포르나리나라는 이름이 생긴 자리
이제 이름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소장 미술관의 공식 해설은 이렇게 적습니다. 그려진 여인은 전승에 따르면 라파엘로의 연인이자 뮤즈인 마르게리타 루티, 트라스테베레의 한 제빵사의 딸이며 거기서 포르나리나라는 별명이 나왔다. 앞에 붙은 「전승에 따르면」이 이 문장의 핵심입니다. 미술관은 이것을 확인된 신원으로 적지 않습니다.
별명 쪽부터 보면 나이를 잴 수 있습니다. 파사반트는 1839년에 이미, 포르나리나라는 이름조차 지난 세기 중엽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1839년에 쓴 글이니 18세기 중엽입니다. 그는 각주에서 그 이름의 유래는 자기도 모른다고 먼저 밝힌 다음, 그 이름을 처음 쓴 사람은 푸치니인 듯하다고 적고, 보타리도 그 뒤의 델라 발레도 라파엘로의 연인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각주가 괄호 안에 적어 둔 출처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파사반트가 든 것은 『피렌체 왕립 미술관(Real Galleria di Firenze)』, 곧 피렌체에 있는 미술관의 도록입니다. 이 그림은 그때도 지금도 로마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각주에서 확인되는 것은 파사반트가 그 이름의 첫 사용자로 지목한 사람이 든 자료가 피렌체의 도록이라는 데까지이고, 그 이름이 처음 붙은 자리가 이 그림이었는지는 이 각주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책의 다른 자리가 그 각주보다 멀리 갑니다. 파사반트는 제2권에서 작품을 하나씩 세어 나가는데, 거기에 이 그림의 항목이 따로 있습니다. 그 항목은 이 초상에 반복작이 많지만 의심할 바 없는 원작은 로마 바르베리니 화랑이 소장한다고 못박습니다. 다른 그림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항목 끝에 이 그림을 옮긴 판화들이 열거되는데, 목록의 첫 줄이 도메니코 쿠네고가 1772년에 새긴 판화이고 파사반트는 그 판화 아래에 인쇄된 문구까지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Raphaelis Amasia, vulgo La Fornarina. 라파엘로의 연인, 흔히 라 포르나리나라 부르는.
곧 1772년에는 이 그림에 그 별명이 이미 인쇄되어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범위에서 가장 이른 인쇄 기록입니다. 이것을 그 별명이 처음 쓰인 자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른 것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파사반트가 각주에서 처음인 듯하다고 지목한 쪽보다 이른 기록이 그의 책 안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것을 그의 실수로 읽을 일은 아닙니다. 그는 그 각주에서 이름의 유래는 자기도 모른다고 먼저 밝혔고, 처음인 듯하다는 추정형을 썼습니다. 단정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그의 책 두 자리를 나란히 놓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놓고 보면 별명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가 조금 더 멀리까지 보입니다.
제빵사의 딸이라는 이야기의 출처도 파사반트가 따라갔습니다. 미시리니라는 사람이 그 여인을 테베레 강 건너 산타 체칠리아 근처에 살던 제빵업자의 딸이라고 썼고, 지금도 비아 디 산타 도로테아 20번지의 작은 집을 그 여인의 생가라고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사반트는 곧바로 덧붙입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이 전설을 순전한 날조로 보아야 함을 밝혀냈다. 미시리니는 자기 이야기를 칸첼리에리가 어느 필사본에서 찾아 전해 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카무치니는 칸첼리에리가 라파엘로의 죽음이 여자 때문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증언했고, 풍길레오니는 친구인 칸첼리에리에게서 라파엘로의 연인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고 확언했습니다.
1880년에는 다비드 파라불리니가 이 이야기를 통째로 따져 보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여인의 이름이 마르가리타였던 듯하다고 쓰면서 근거를 하나 댑니다. 바사리 전기 1568년판 한 부의 여백에 16세기에 펜으로 적힌 메모가 있었고 거기서 그 이름이 나왔으며, 그 책은 로마의 법학자 주세페 반누텔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거는 그 여백 메모 한 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더 확인됩니다. 이 1880년 책의 본문 전체에 마르게리타도 루티도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는 것은 마르가리타뿐이고 그것도 위의 한 대목입니다. 성까지 붙은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완성형 이름은 1880년의 이탈리아 전문 단행본에도 아직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를 연대순으로 세워 보면 순서가 보입니다. 1772년에는 판화에 별명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1839년에는 파사반트가 팔의 글자에 사랑을 담아라는 말을 붙입니다. 1880년에도 성은 아직 붙어 있지 않습니다. 별명이 먼저 왔고 이름은 뒤에 왔습니다. 그림에 적힌 것은 여전히 화가의 이름 하나뿐인데, 여자의 이름은 그림 밖에서 한 조각씩 따로 도착한 것입니다.
파라불리니 자신이 당시의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적어 두었습니다. 옛사람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근대인들이 많은 것을 썼는데, 제 머리로 지어내거나 꾸며낸 전승에 기초한 것이다.
2020년에는 소장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조사 결과 발표회에서 같은 말을 더 짧게 했습니다. 포르나리나가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이름을 얻은 「탄생」은 전적으로 19세기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기관 자신이 그 이름을 19세기의 산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안 됩니다. 확인되는 것은 셋입니다. 1568년의 그 책 본문에 이 이름들이 없다는 것, 그 이름이 19세기에 활자로 나타난다는 것, 소장 기관 자신이 그 이름 붙이기를 19세기의 것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삼백 년 동안 로마 사람들이 이 그림을 두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남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것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다릅니다. 19세기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지어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에 이 이야기가 눈에 띄게 불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림도 함께 늘었습니다. 앵그르는 라파엘로의 생애를 연작으로 그리려 했고 실제로 그린 주제는 둘인데, 그중 하나가 라파엘로와 포르나리나입니다. 이 주제만 카탈로그에 다섯 점이 올라 있습니다. 첫 판으로 추정되는 1813년 그림은 리가의 미술관에 있다가 1941년에 사라졌고, 1814년 판이 그해 살롱에 걸렸으며, 1840년 판은 건축가 친구에게 준 것입니다. 1860년에는 화가가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지금 최신 판을 작업하고 있고 그것이 앞의 것들을 잊게 만들기를 바란다고 적었습니다. 그 마지막 판은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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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 1814년, 캔버스에 유채, 64.8 × 53.3 cm, 미국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 소장, 1943.252. 화가는 여인을 안고 있으면서 얼굴만 오른쪽 이젤로 돌린다. 이젤 위의 그림은 얼굴까지만 그려져 있고 그 아래는 아직 비어 있다. 뒤쪽 벽에는 둥근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
같은 주제를 그린 19세기 이탈리아의 회화와 조각도 여럿 남아 있고, 이야기는 무대와 책으로도 옮겨 갔습니다. 1858년의 서사시, 1870년의 4막 희곡, 1891년의 극 장면이 모두 라파엘로와 포르나리나를 제목에 달고 나왔습니다. 1859년에는 폴란드어로 된 시도 나왔습니다. 파라불리니가 1880년에 굳이 반박서를 쓴 것 자체가 그 무렵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책이 열거하며 반박하는 것만 해도 미시리니의 주장, 우르비노 옹기장이의 딸이라는 설, 프랑스 소설, 그리고 어느 베네치아 여인이 남장을 하고 라파엘로 문하에 들어와 포르나리나를 죽이려 자객을 샀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집니다. 앵그르가 어떤 화가였는지는 그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다룬 글에 적어 두었습니다.
줄리오 로마노 귀속설과 지금의 기록
19세기에 자란 것은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그림이 라파엘로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같은 시기에 활자로 나왔습니다.
1880년의 파라불리니가 그렇게 단정했습니다. 바르베리니 궁의 이 초상은 포르나리나를 나타내지 않을 뿐 아니라 라파엘로의 손으로 된 작품도 아니며, 줄리오 로마노 말고는 누구에게도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는 파사반트가 적어 둔 다른 기록이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는 로마 자니콜로 언덕의 한 별장을 언급하면서, 그 한 방에 줄리오 로마노 혹은 그 제자 가운데 하나가 프레스코로 여인들의 초상을 그렸고 그 가운데 라파엘로의 연인이 바르베리니 궁의 초상과 똑같이 있다고 썼습니다. 같은 얼굴이 다른 벽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파사반트는 또 로마에 이 그림의 옛 모사본이 많다고도 적었습니다. 이 얼굴은 일찍부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독일의 안톤 슈프링거는 더 멀리 갔습니다. 파라불리니가 옮겨 적은 대목에서 슈프링거는 포르나리나가 라파엘로의 죽음과 관계있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런 처녀가 존재한 적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합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그리던 시기의 여인 초상은 많아야 두 점인데, 흔히 포르나리나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그 둘은 전혀 입증된 바 없고 같은 인물을 나타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들보다 앞선 문서는 다른 쪽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본 바르베리니 재산 목록 네 건은 1644년부터 1730년까지 한결같이 이 그림을 라파엘로의 손으로 적었습니다. 파사반트도 1839년에 이 그림을 라파엘로에게서 떼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완성되지 않았고 손 부분이 제자 솜씨라고 말한 대상은 피렌체 피티 궁에 있는 다른 초상이었습니다. 이 둘을 뒤섞어 옮긴 서술이 흔하니 읽을 때 주의할 만합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닫힌 것은 아닙니다. 이탈리아 국가문화재 목록은 작가를 「산치오 라파엘로(귀속)」로 적습니다.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보되 확정이 아니라 전칭이라는 표기입니다. 202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 기록은 한 걸음 더 나가, 이 그림의 작가로 라파엘로와 줄리오 로마노를 함께 적었습니다. 1880년에 활자로 나왔던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라 포르나리나의 반지와 들어 올린 손
다시 화면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그림에는 팔의 글자 말고 단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왼손의 반지입니다.
왼팔은 무릎 위로 내려와 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며 진홍색 천 위에 얹혀 있습니다. 네 손가락이 펼쳐져 있는데, 아래에서 두 번째 손가락 곧 약지에 가느다란 반지가 감겨 있습니다. 손가락의 어느 마디에 걸려 있는지는 도판에서 갈리지 않습니다. 반지 바로 위로 마디의 도드라진 자리가 지나가는데 그것이 첫 마디인지 두 번째 마디인지가 확대해도 확정되지 않습니다. 반지 머리에는 금테에 물린 작은 돌이 하나 있고 색은 어두운 붉은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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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산치오, 〈여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부분. 반지는 화면 아래 가장자리에 거의 닿아 있다. 금테가 빛을 받는 쪽은 또렷하고 반대쪽은 살빛 위의 흐린 자국으로 남는다. 팔의 글자와 견주어 얼마나 조용하게 칠해졌는지 비교해 보라. |
이 반지는 크게 확대해야 보입니다. 화면 아래 가장자리에 거의 닿아 있고, 띠의 글자처럼 또렷하게 칠해져 있지도 않습니다. 팔의 글자가 파란 바탕 위에 금색으로 또박또박 박혀 있는 데 비해, 반지는 살빛 위에 얇게 얹힌 금색 선 하나와 어두운 자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화면에는 단서가 둘 있습니다. 화가의 이름과, 결혼을 떠올리게 하는 손가락의 반지입니다. 둘이 한 사람의 몸에 함께 있으니 이 그림은 처음부터 이 여자가 누구의 사람인가를 묻게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화면을 보고 내리는 읽기이고, 이 글의 읽기입니다.
다만 19세기의 글들이 근거로 삼은 쪽은 팔의 글자였습니다. 파사반트는 왼팔과 붉은 천까지 적으면서 반지는 적지 않았고, 1686년의 바르베리니 목록도 손의 위치를 적으면서 반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을 근거로 그때 반지가 화면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산 목록은 반지 같은 세부를 적는 종류의 문서가 아니고, 전기도 화면을 전부 옮겨 적지는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그 글들이 이야기의 근거로 집어 든 것이 이름 쪽이었다는 것까지입니다.
손은 하나 더 있습니다. 오른손입니다. 흔히 가슴을 가리는 손이라고 설명하지만 확대해 보면 다릅니다. 엄지와 검지가 얇은 천을 집어 올리고 있고, 천은 두 손가락 사이에서 봉우리처럼 솟았다가 오른쪽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가슴 아래를 가로질러 누워 있을 뿐입니다. 가슴은 두 쪽 다 드러나 있습니다. 가리는 손이 아니라, 가릴 수 있는 천을 들어 올린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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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산치오, 〈여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부분.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천이 솟아오르는 자리를 보라. 손은 살을 덮는 것이 아니라 덮을 수 있는 천을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가슴 한가운데를 세로로 지나는 가는 선 한 줄도 함께 보인다. |
소장 미술관은 이 손 자세를 고대 조각의 베누스 푸디카, 곧 부끄러워하는 베누스의 도상을 따른 것으로 읽습니다. 가리려는 몸짓이면서 정작 감추려는 곳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몸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 얼굴 뒤에 베누스의 표상이 숨어 있다고 적습니다. 기관의 해석이 여기까지입니다.
시선은 또 다릅니다. 얼굴은 보는 사람의 왼쪽으로 조금 돌아가 있고 눈동자도 그쪽 구석에 몰려 있어서 반대편에 흰자가 넓게 남습니다. 관람자와 눈을 맞추지 않습니다. 몸은 정면을 향하는데 시선만 비켜 있습니다. 입은 다물었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으며 뺨에는 붉은 기가 돕니다.
머리에는 금빛과 황토빛 바탕에 짙은 청색 줄이 촘촘히 든 천을 터번처럼 감았습니다. 천은 머리 꼭대기에서 매듭처럼 말려 올라간 뒤 뒤쪽으로 술을 늘어뜨립니다. 가르마는 가운데이고, 관자놀이 쪽에는 금테에 물린 붉은 돌과 그 아래 매달린 진주가 있습니다. 벗은 몸과 견주면 머리 쪽만 유독 차려입은 셈입니다.
배경의 식물에는 소장 미술관의 해설이 이름을 붙여 두었습니다. 도금양 덤불과 모과나무 가지이고, 앞의 것은 사랑의 여신의 상징, 뒤의 것은 다산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풀이도 미술관 해설의 것입니다. 여기에 뜻을 더 얹지는 않겠습니다.
2020년 조사와 배경의 두 겹
2020년 1월 28일부터 사흘 동안, 소장 미술관은 이 그림 한 점만 놓고 조사를 했습니다. 행사 이름은 가까이서 본 라파엘로였습니다. 곧 라파엘로 서거 500주년 전시에 대여될 예정이었고, 그 직전에 시행한 조사입니다.
첫날에는 기가픽셀 촬영과 3차원 사진측량을 했습니다. 앞면과 뒷면과 옆면을 전부 찍었습니다. 담당 회사는 이 사진측량에서 나온 3차원 모델로 대상의 형태와 붓질과 균열을 수십 마이크론 단위의 정밀도로 지도화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X선 형광 매크로 스캔을 돌렸습니다. 화면 전체에 X선을 쬐어 어느 자리에 어떤 원소가 있는지를 지도로 얻는 방법입니다.
결과는 그해 9월 21일에 발표됐습니다. 세 가지가 나왔습니다.
첫째, 철과 납의 분포 영상이 명암을 넣은 바탕 밑칠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밑칠은 본그림을 올리기 전에 바탕에 먼저 깔아 두는 칠입니다. 1500년대 초에 널리 쓰인 방식이고 다른 라파엘로 작품에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밑그림과 다릅니다. 밑그림은 붓이나 목탄으로 그어 둔 선이고, 여기서 확인된 것은 명암까지 넣어 둔 바탕 칠입니다. 두 말이 자주 섞여 쓰이니 갈라 두겠습니다.
둘째, 수은의 분포가 진사, 곧 붉은 안료가 쓰인 자리를 보여 주면서 배경에 중대한 변경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 변경은 1983년의 X선 촬영에서 이미 확인된 것이고, 인물의 명암을 다시 조정하는 일이 뒤따랐다고 합니다.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변경 전에 그 자리에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셋째, 이번에 새로 나온 것은 배경 식물의 재료입니다. 구리와 철과 칼슘과 망간의 분포를 읽자 초목 배경에 대한 새로운 상이 나왔습니다. 더 넓은 잎들에는 철이 든 흙 안료가 쓰였는데 그중에도 망간이 함께 검출된 자리는 엄버, 곧 흙을 태워 만든 갈색 안료입니다. 도금양 가지 쪽은 구리 녹과 골탄이 바탕이었습니다. 골탄은 뼈를 태워 만든 검은 안료입니다. 그리고 화가가 형태와 안료를 두께까지 조절해 가며 썼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전히 알아볼 수 없는 입체감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이 발표는 화면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왼쪽 위와 오른쪽 위 모서리에 짙은 청색 하늘이 조금 트여 있습니다. 그 하늘을 등진 잎은 검은 실루엣이 되어 잎 하나하나의 윤곽이 또렷하게 세어집니다. 바로 옆, 하늘이 없는 자리의 잎은 올리브빛으로 칠해져 거의 검은 바탕 위에 희미하게 떠 있습니다. 같은 덤불인데 두 가지로 보입니다. 배경은 검은 벽 한 장이 아니라 앞뒤로 갈린 두 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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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산치오, 〈여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부분. 왼쪽은 하늘을 등진 잎이라 잎 하나하나를 셀 수 있고, 오른쪽은 어둠 속의 잎이라 올리브빛 붓질로만 드러난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머리에 두른 천의 끝이 함께 들어와 있다. |
X선 형광 조사는 지금까지 세 번 있었습니다. 1983년, 2001년, 2020년입니다. 판에 손을 댄 마지막 복원은 2000년이었습니다.
발표를 한 큐레이터는 같은 자리에서 아직 열려 있는 것들도 함께 말했습니다. 이 작품의 의미, 제작 과정, 원래의 용도 셋입니다.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보다 더 길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붙인 발표 제목도 아직 열려 있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재료와 순서는 더 잘 보이게 되었지만 이 그림이 왜 그려졌는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라 벨라타〉와의 관계
답부터 적겠습니다. 두 그림이 같은 사람을 그렸다고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라 벨라타〉는 피렌체 피티 궁의 팔라티나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 기록과 해설은 우피치 공식 사이트에 함께 실립니다. 앞뒤로 우피치라고 적은 것은 그래서이고, 따로 떨어진 다른 미술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 해설은 머리에 얹은 베일이 기혼 여성의 신분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면서도, 주인공의 신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호사스러운 옷과 보석 때문에 오히려 주문을 받아 그린 젊은 귀부인의 초상으로 보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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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 산치오, 〈라 벨라타〉, 1512~1515년경, 캔버스에 유채, 82 × 60.5 cm, 피렌체 피티 궁 팔라티나 미술관 소장, 1912년 목록 245번. 베일과 소매와 목걸이가 화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라 포르나리나〉와 나란히 놓고 옷의 양을 견주어 보라. |
같은 해설에 바사리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바사리가 이 그림을 피렌체 상인 마테오 보티의 집에서 보았고 라파엘로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의 초상이라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에는 포르나리나라 불리는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이름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앞에서 본 대로 그 이름은 바사리의 글에 없습니다. 후대의 이름이 바사리의 진술 위에 얹힌 것입니다. 다른 그림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바르베리니 쪽 공식 해설은 〈라 포르나리나〉를 설명하면서 〈라 벨라타〉를 아예 언급하지 않습니다.
19세기의 두 사람도 갈립니다. 파사반트는 이 그림이 믿어지는 대로 바르베리니 초상과 같은 인물을 나타낸다면이라는 조건절로만 썼고, 슈프링거는 같은 인물을 나타내지도 않는다고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옷이 정반대입니다. 한쪽은 거의 벗었고, 다른 쪽은 베일과 소매와 목걸이가 화면을 채웁니다. 얼굴이 닮았는지 아닌지를 두고는 오래 다퉈 왔지만 두 소장 기관 가운데 어느 쪽도 같은 사람이라고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자료가 허락하는 자리입니다.
라파엘로 라 포르나리나 감상법
이 그림은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에 있습니다. 대표작을 모아 둔 전시실에 걸려 있습니다. 도판은 고해상으로 공개돼 있으니 화면에서 확대해 보면 됩니다. 볼 자리를 순서대로 적어 둡니다.
- 왼쪽 윗팔의 파란 띠. 글자가 팔의 곡면을 따라 좁아지는 자리를 보면 됩니다. RAPHAEL 과 VRBINAS 사이의 마름모꼴 점 하나도 찾을 수 있습니다.
- 왼손의 약지. 화면 아래 가장자리에 거의 닿아 있습니다. 금색 선 하나와 그 위의 어두운 붉은 돌입니다.
-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천이 두 손가락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자리입니다.
- 왼쪽 위와 오른쪽 위 모서리. 하늘을 등진 잎과 어둠 속의 잎이 얼마나 다르게 칠해졌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 목 아래에서 가슴 한가운데로 내려가는 가는 세로선 한 줄. 판재의 이음인지 균열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오른쪽 아래 어두운 곳의 금색 두 글자. 화가가 아니라 소유자가 남긴 표시입니다.
이 그림은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있습니다. 2022년 봄과 여름에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라파엘로 전에 대여됐고, 그 교환으로 한스 홀바인의 〈다람쥐와 여인〉이 평소 이 그림이 걸리는 그 전시실에 와 있었습니다. 2026년 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라파엘로 전에 나가 있었습니다.
소장 이력은 1595년 로마의 한 컬렉션에서 시작해 1605년에 다른 컬렉션을 거쳤고, 1642년부터 바르베리니 컬렉션에 있었습니다. 국가가 바르베리니 컬렉션에서 사들인 해는 같은 미술관 기록 안에서도 1934년과 1936년으로 갈려 적혀 있어 하나로 적지 않겠습니다. 주문자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미술관은 그 사실이 라파엘로가 만년에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렸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뿐입니다. 팔에 적힌 화가입니다. 여자의 이름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설명해 온 글들 속에서 자랐고, 그 글들의 순서는 지금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1568년의 책에는 그 이름들이 없고, 1657년에는 연인의 초상으로 믿어진다고 적혀 있으며, 1839년에 「사랑을 담아」가 붙고, 1880년의 이탈리아 단행본에도 성은 아직 붙어 있지 않습니다. 소장 미술관은 지금 그 이름 앞에 「전승에 따르면」을 놓습니다. 그동안 화가의 이름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도 거기 적혀 있는 이름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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