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심사위원단은 한 화가의 대표작을 거부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화가는 항의하거나 포기합니다. 쿠르베는 다른 길을 갔습니다. 박람회장이 보이는 자리에 자기 돈으로 가건물을 세우고, 거기에 거부당한 그림을 포함해 40점이 넘는 작품을 걸었습니다. 건물 이름은 사실주의관이었습니다.
화가가 국가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전시를 여는 일. 오늘날에는 당연한 이 방식이 이때 처음 나왔습니다.
• 한 줄 정의: 눈에 보이는 현실만 그리겠다고 선언하며 사실주의를 연 화가
• 생몰: 1819년 6월 10일 오르낭 출생, 1877년 12월 31일 스위스 라투르드펠츠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프랑스, 고향 오르낭과 파리, 만년의 스위스 망명지
• 활동 분야: 사실주의 회화, 풍경과 인물과 사냥 장면
•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 〈돌 깨는 사람들〉, 〈화가의 아틀리에〉,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 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1854년,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두 사람은 모자를 벗어 들었고 화가는 턱을 든 채 서 있다. |
거부당한 그림 옆에 세운 건물
거부당한 그림은 〈화가의 아틀리에〉였습니다.
| 귀스타브 쿠르베, 〈절망한 남자〉, 1840년대. 젊은 시절 그는 자기 얼굴을 여러 차례 그렸다. |
| 귀스타브 쿠르베, 〈파이프를 문 남자〉(자화상), 1840년대,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같은 얼굴을 전혀 다른 표정으로 그렸다. |
가로 6미터에 가까운 이 대작에는 서른 명 가까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화면 한가운데 화가가 앉아 풍경을 그리고 있고, 그 곁에 벌거벗은 여인이 서 있으며, 왼쪽에는 사냥꾼과 노동자와 성직자 같은 사람들이, 오른쪽에는 그를 지지하던 문인과 수집가들이 있습니다.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나의 예술 생활 7년을 요약하는 진짜 알레고리.
|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 1855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1855년 만국박람회가 거부한 그림이다. |
심사위원단이 거부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지만, 크기와 주제가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큰 몫을 했습니다. 역사와 신화를 다루는 데 쓰던 규모에 화가 자신의 작업실을 그려 넣었기 때문입니다.
쿠르베가 세운 사실주의관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고 돈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서 발표한 짧은 글이 남았습니다. 자기 시대의 풍속과 사상을 자기 눈으로 옮기는 것, 살아 있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주의라는 이름이 미술사에 자리 잡은 순간입니다.
시골 장례를 역사화 크기로 그린다는 것
그가 살롱을 흔든 첫 사건은 그보다 몇 해 앞선 〈오르낭의 매장〉이었습니다.
화면은 가로 6미터가 넘습니다. 그 안에 고향 마을 사람들이 실물 크기로 늘어서 있습니다. 사제와 성가대원과 유족과 마을 유지들이 구덩이 주변에 서 있고, 개 한 마리가 딴 데를 보고 있습니다. 화면 어디에도 중심 인물이 없습니다. 시선을 모으는 주인공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도 없습니다.
|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1850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화면 앞쪽에 파 놓은 구덩이가 관람자 바로 앞에 온다. |
당시 회화의 등급에서 이 크기는 왕과 성인과 전투에 배정된 것이었습니다. 쿠르베는 그 자리에 이름 없는 시골 사람들의 장례를 넣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격분했습니다. 그런데 격분의 이유가 그림이 못 그려서가 아니라 소재가 그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반응 자체가 그가 겨눈 표적이었습니다.
화면 앞쪽에 파 놓은 구덩이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관람자가 서 있는 자리가 그 구덩이 바로 앞이 되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림 밖의 사람이 장례의 참석자 위치에 놓입니다.
본 것만 그린다는 원칙
그의 태도를 요약하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천사를 그려 달라는 요청에 천사를 데려오면 그리겠다고 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 말이 언제 어떤 자리에서 나왔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확인이 갈립니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이라기보다 그의 태도를 요약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가 직접 쓴 글에서 확인되는 것은 다른 문장입니다. 1855년 전시 목록 앞에 그는 자기 시대의 풍속과 생각과 모습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옮기는 것이 목표라고 적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그림에서 그대로 확인됩니다. 그는 상상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그렸습니다. 〈돌 깨는 사람들〉에서 늙은 인부와 소년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자세로 그려졌습니다. 관람자가 그들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고 동정하는 대신, 그들이 하고 있는 노동 자체를 보게 만듭니다.
| 귀스타브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년. 두 사람 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자세다. |
재료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두껍게 밀어 바르곤 했습니다. 바위와 흙과 나무껍질을 그릴 때 그 방식은 대상의 질감을 화면의 질감으로 옮겨 놓습니다. 매끄럽게 다듬는 마무리를 완성으로 보던 기준에서는 거칠고 미완성으로 보였습니다.
인체를 다룰 때도 그는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1866년작 〈세상의 기원〉은 오스만 제국 외교관이자 수집가였던 할릴 베이의 주문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애초에 공개 전시를 전제하지 않은 작품이었고, 소장자의 손을 옮겨 다니며 개인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이 그림이 일반 관람객 앞에 처음 걸린 것은 1988년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의 쿠르베 회고전에서였습니다. 미술관 소장품이 된 것은 그로부터 몇 해 뒤인 1995년입니다. 두 해를 하나로 합쳐 적는 글이 많은데, 첫 공개와 미술관 입수는 서로 다른 사건입니다. 지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방돔 기둥과 32만 프랑
1871년의 정치적 선택이 그의 남은 생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날짜를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쿠르베가 방돔 기둥을 무너뜨리자고 앞장섰다고 적히지만, 남아 있는 기록의 순서는 조금 다릅니다.
그가 이 기둥 문제를 처음 꺼낸 것은 코뮌보다 반년 앞선 1870년 9월입니다. 당시 국방 정부에 보낸 청원에서 그는 기둥을 뽑아내되 포병 박물관으로 옮기고 남는 자재는 조폐국으로 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부수자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파리에서 코뮌이 수립됩니다. 코뮌이 기둥 철거를 의결한 것은 4월 12일이었고, 쿠르베가 코뮌 의원으로 뽑힌 것은 그보다 나흘 뒤인 4월 16일 보궐선거에서였습니다. 3월 본선거에서는 낙선했습니다. 다시 말해 철거를 결정한 표결에 그는 없었습니다. 선출된 뒤에는 4월 27일 회의에서 집행을 촉구하면서, 동시에 기둥의 기단은 남기자고 제안했습니다. 기둥이 실제로 쓰러진 것은 5월 16일입니다.
| 무너진 방돔 기둥, 1871년. 오른쪽 아래에 기둥 꼭대기에 있던 청동상이 누워 있다. |
코뮌이 진압된 뒤 쿠르베는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섰습니다. 1871년 9월 2일 판결은 그가 기둥을 직접 무너뜨렸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인정된 것은 직권을 남용해 파괴에 가담했다는 것이었고, 형은 징역 6개월과 벌금 500프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처벌은 나중에 왔습니다. 1870년대 중반에 사건이 다시 열렸고, 기둥을 다시 세우는 비용을 그가 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기둥을 다시 세우는 비용 전액이 그에게 청구되었습니다. 32만 3091프랑이었습니다.
지불 방식은 매년 1만 프랑씩 나눠 내는 것이었습니다. 공식 분납 기간은 33년이었습니다. 판결은 1877년 5월 4일에 났고, 당시 그는 쉰일곱이었습니다. 이 청구서는 벌금이 아니라 사실상 남은 평생을 채무자로 살라는 선고였습니다. 그는 1873년에 스위스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회화가 그에게서 가져간 것
다음 세대가 물려받은 것은 화풍이 아니라 두 가지 태도였습니다.
첫째는 주제의 문을 연 것입니다. 무엇이 그릴 만한 대상인가를 정하는 권한이 아카데미에서 화가에게로 넘어왔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이 기차역과 무도회장과 빨래하는 여인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쿠르베가 시골 장례를 6미터 화면에 올린 뒤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전시의 문을 연 것입니다. 1855년의 그 가건물은 실패한 사업이었지만 선례가 되었습니다. 1874년에 인상주의자들이 살롱 바깥에서 자기들끼리 전시를 열었을 때 그들은 이미 있는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제 판단을 하나 덧붙이면, 쿠르베의 그림 자체는 오늘날 인상주의만큼 대중적으로 사랑받지는 않습니다. 화면이 무겁고 색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이후 100년의 미술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쿠르베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아틀리에〉를 비롯한 대표작 다수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고향 오르낭에는 그의 생가를 활용한 쿠르베 미술관이 있습니다. 전시 여부는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Q. 사실주의는 무엇이 새로웠나요?
A. 기법이 아니라 대상 선택이 새로웠습니다. 그 이전에도 사실적으로 그리는 화가는 많았지만, 무엇을 그릴 것인가는 신화와 역사와 종교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실주의는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것을 그리겠다고 선언했고, 그 대상에 노동자와 농민이 포함되었습니다.
Q. 방돔 기둥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A. 다시 세워졌고 지금도 파리 방돔 광장에 서 있습니다. 재건 비용을 쿠르베 한 사람에게 물린 판결은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하루 전날
1877년 12월 31일, 쿠르베는 스위스의 호숫가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 분납금을 내기로 한 날의 하루 전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한 푼도 내지 않았고, 프랑스로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오르세에서 〈오르낭의 매장〉 앞에 서실 기회가 있다면 화면 앞쪽에 파 놓은 구덩이의 위치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서게 만드는 것이 이 화가가 평생 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