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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생애와 작품, 살롱이 그를 인정하면서 거부한 이유

1866년 파리, 한 젊은 소설가가 신문에 이런 문장을 실었습니다. 마네 씨가 카바넬 씨의 분첩이라도 빌려서 올랭피아의 뺨과 가슴에 분칠을 조금 했더라면 그 처녀는 내놓을 만했을 것이다. 에밀 졸라의 비아냥이었습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은 전통 진영의 화가였고, 뒤에 살롱 심사위원장 자리에 앉습니다.

그로부터 15년 뒤, 바로 그 카바넬이 살롱 심사장에 앉아 마네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우리 중에 저런 머리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넷도 안 될 겁니다. 그러고는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인정과 거부가 같은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평생 받은 대접이 이 한 장면에 들어 있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살롱의 문을 두드리기를 끝내 멈추지 않으면서 살롱의 그림법을 정면으로 어긴 화가
• 생몰: 1832년 1월 23일 파리 출생 ~ 1883년 4월 30일 파리 사망
• 국적·활동지: 프랑스 국적, 파리에서 나고 자라 파리에서 활동
• 활동 분야: 근대 도시의 인물과 풍속을 그린 회화, 판화
• 대표작: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 〈풀밭 위의 점심〉,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밀 졸라〉, 〈발코니〉, 〈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 〈기찻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분첩을 빌렸더라면

약식 군복 차림에 붉은 바지를 입은 소년 악사가 회색 배경 앞에서 피리를 부는 전신 유화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 캔버스에 유채, 160.5 × 97.0 cm입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RF 1992. 소년이 선 바닥과 벽이 어디서 나뉘는지 찾아보십시오. 나뉘는 자리가 없습니다.

1866년 살롱 심사위원단은 이 그림을 떨어뜨렸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의 공식 기록은 작품 정보 옆에 그 사실을 아직도 적어 둡니다. 1866년 살롱에서 거절됨. 같은 해 졸라는 신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피리 부는 소년, 올해 낙선한 그림이다.

같은 캔버스였습니다. 한쪽은 걸 수 없다고 했고, 다른 쪽은 그해 최고라고 했습니다. 이 어긋남은 취향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두 진영은 그림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졸라가 남긴 조롱 한 줄에 들어 있습니다. 분첩 이야기입니다.

졸라가 겨눈 것은 분첩이라는 한 낱말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카바넬의 분첩은 살롱 그림이 여자의 살결을 다루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분칠을 하면 내놓을 만해졌을 것이라는 문장은 그 방식을 비꼰 것입니다. 마네는 그 분첩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화면을 만드는 방식은 달랐고, 졸라는 그 방식을 따로 설명합니다.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

검은 모자와 외투 차림으로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의 흑백 사진, 짧은 수염과 정면을 향한 시선
펠릭스 나다르가 촬영한 에두아르 마네의 사진입니다. 졸라는 그를 두고 몸짓과 목소리가 더없이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마네는 1832년 1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프티조귀스탱가 5번지, 지금의 보나파르트가입니다. 2월 2일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삼형제의 맏이였고, 아버지는 판사였으며 집에는 재산이 있었습니다. 루이 필리프 시대에 한창 올라서던 부르주아 계층의 한복판이었습니다.

그는 법학 공부를 거부했습니다. 부모는 화가의 길을 막았습니다. 막다른 자리에서 그가 꺼낸 말은 뜻밖이었습니다. 선원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화실에 들어가는 것보다 배를 타는 편을 택했습니다. 아버지가 르아브르까지 따라갔고, 그는 리우데자네이루로 가는 상선 라과들루프에 견습선원으로 올랐습니다.

항해에서 그의 붓이 처음 쓰인 곳은 뜻밖의 자리였습니다. 화물로 실린 네덜란드 치즈가 바닷물에 색이 바랬습니다. 선장은 그림 재주가 있다는 견습선원을 불러 치즈에 색을 다시 칠하게 했습니다. 뒤레는 이 항해에서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 그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브라질에서 돌아온 아들은 떠나기 전과 똑같았습니다. 부모는 결국 물러섰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상의해 토마 쿠튀르를 스승으로 골랐고, 1850년 무렵 그 화실에 들어갔습니다. 쿠튀르는 1847년 살롱에 〈쇠퇴기의 로마인들〉을 걸어 이름을 얻은 역사화가였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큰 그림을 그리는 큰 화가였습니다.

마네는 열심이었습니다. 뒤레는 기법을 익히기 위해 마네만큼 공부한 화가는 없다고 썼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와 독일과 이탈리아를 돌며 미술관을 봤고, 루브르에서 벨라스케스와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를 모사했습니다. 그런데 스승과는 부딪쳤습니다. 충돌과 화해가 반복되다 결국 갈라섰습니다.

이 결별의 내막을 처음 전한 사람은 앙토냉 프루스트입니다. 콜레주 롤랭 시절 친구였고 쿠튀르 화실의 동료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훗날 잡지에 스승과 제자 사이를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이야기는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는 얼룩으로 보았다

공원 나무 아래 실크해트를 쓴 신사들과 모자를 쓴 여인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야외 군중 그림
마네,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 1862년, 캔버스에 유채, 76.2 × 118.1 cm입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NG3260. 얼굴 하나하나가 아니라 검은 모자들이 만드는 리듬을 먼저 보십시오.

졸라는 1866년에 마네의 화실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림을 만드는 방식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그는 대상 앞에 마주 서서 그 대상을 큰 얼룩덩어리로, 힘찬 대비로 보았고,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입니다. 같은 글에서 그는 한 번 더 못을 박습니다. 마네의 존재 전체가 얼룩으로, 단순하고 강한 덩어리로 보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칭찬이기 전에 설명입니다. 전통적인 그림은 먼저 윤곽을 세우고 그 안을 색으로 채웠습니다. 밝은 데서 어두운 데로 넘어가는 층을 여러 단계로 쌓았습니다. 그렇게 쌓아야 살결이 매끈해집니다. 마네는 그 층을 줄였습니다. 정확한 색조를 찾아 화면 위에 나란히 놓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화면은 평평해 보입니다. 〈피리 부는 소년〉에서 바닥과 벽의 경계를 찾을 수 없는 것이 그래서입니다. 소년은 공간 안에 서 있다기보다 회색 위에 얹혀 있습니다. 붉은 바지와 검은 상의와 흰 각반이 서로 부딪치면서 형태를 만듭니다.

1866년 살롱은 이 그림을 걸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졸라는 하필 그 낙선작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이보다 덜 복잡한 수단으로 이보다 강한 효과를 얻는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한쪽은 이 그림에 걸 자리를 주지 않았고, 다른 쪽은 그해의 맨 앞에 두었습니다.

졸라는 그해 글에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마네의 자리는 루브르에 예약되어 있다고 썼습니다. 쿠르베의 자리가 그렇듯이, 원래부터 독창적이고 강한 기질을 가진 모든 예술가의 자리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근거 없는 편들기처럼 들렸을 말입니다. 그 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이 글 끝에서 보겠습니다.

웃음거리가 된 그림들

숲속 풀밭에 벌거벗은 여인과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앉아 있고 뒤편에서 한 여인이 물에 몸을 굽힌 그림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3년, 캔버스에 유채, 207.0 × 265.0 cm입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RF 1668. 벌거벗은 여인이 화면 밖을 보고 있습니다. 시선의 방향이 이 그림의 사건입니다.

1863년 살롱은 유난히 많은 그림을 떨어뜨렸습니다. 불만이 커지자 낙선작들을 따로 모아 거는 전시가 열렸습니다. 낙선전이라고 불린 자리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거기 걸렸습니다.

그림은 소동이 되었습니다. 신화도 우화도 아닌 자리에 벌거벗은 여인이 앉아 있었고, 곁의 두 남자는 그 시대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뒤레는 마네가 이 구성을 루브르에 있는 조르조네의 그림에서 얻었다고 적었습니다. 마네 자신도 왜 조르조네에게는 묻지 않는 것을 자기에게만 따지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2년 뒤 〈올랭피아〉가 살롱에 걸렸을 때 소동은 더 커졌습니다. 뒤레는 이 그림과 함께 걸린 다른 작품까지 더해져 마네가 얻은 명성이 그때까지 어떤 화가도 가진 적 없는 것이었다고 썼습니다. 드가는 마네가 가리발디만큼 유명하다고 말했습니다. 과장이 아니었다고 뒤레는 덧붙입니다.

흰 시트 위에 목에 검은 끈을 두른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정면을 응시하고 하녀가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그림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5 × 191.0 cm입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RF 644. 몸의 명암이 몇 단계로 나뉘어 있는지 세어 보십시오.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다만 그 명성은 그가 바라던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사람들이 돌아봤고, 그가 어느 자리에 들어서면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뒤레는 사람들이 그를 진기한 짐승처럼 손가락질했다고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목받는 것이 흐뭇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관심의 형태가 곧 그것을 지웠다는 것입니다.

졸라의 글에는 당시 여론이 그대로 옮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길에서 그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심은 아니시죠,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와 〈피리 부는 소년〉의 그 대단한 희극을 같이 좀 웃읍시다. 졸라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올랭피아를 다시 보았는데, 여러분이 아는 많은 아가씨들을 닮았다는 중대한 결함이 있더라고요.

뒤레의 회고에는 시간이 지난 뒤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올랭피아가 마른 몸에 다소 앙상한 다리와 각진 어깨를 가진 여인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신화 속 님프 못지않게 정숙해 보이고, 머리는 홀바인 같은 정확함으로 그려져 있다고 했습니다. 1865년에는 아무도 그것을 볼 상태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초록색 난간과 덧문을 배경으로 흰 옷을 입은 두 여인과 남자가 발코니에 서고 앉아 각기 다른 곳을 보는 그림
마네, 〈발코니〉, 1868~1869년, 캔버스에 유채, 170 × 125 cm입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RF 2772. 난간과 덧문의 초록이 흰 옷과 부딪치는 자리를 보십시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1869년 살롱에는 〈발코니〉가 걸렸습니다. 화면 속 세 사람은 모두 마네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의 해설에 따르면 앞줄에 앉은 사람이 베르트 모리조이고, 그가 마네의 그림에 처음 나타난 자리가 이 작품입니다. 곁에 선 여인은 팡니 클라우스, 뒤쪽 남자는 앙투안 기유메입니다.

당시 부르주아의 실내와 발코니는 유행하던 소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 유행이 기대하던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데를 보고 있고, 서로 말을 걸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없고 일화도 없습니다. 오르세의 해설은 꽃이 어떤 얼굴보다 공들여 그려져 있다는 점도 짚습니다.

반응은 앞선 그림들과 같은 종류였습니다. 캐리커처를 그리던 샴은 덧문을 닫으라고 비꼬았습니다. 어느 비평가는 마네가 페인트공과 경쟁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난간과 덧문의 초록, 남자의 파란 넥타이, 흰 옷과의 강한 대비가 그런 말을 불렀습니다. 얼룩으로 보는 눈은 6년이 지나도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책상 앞에 앉은 남성 뒤로 일본 병풍과 판화와 그림 인쇄물이 벽에 붙어 있는 실내 초상
마네, 〈에밀 졸라〉, 1868년, 캔버스에 유채, 146.0 × 114.0 cm입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RF 2205. 벽에 붙은 인쇄물 가운데 올랭피아가 있습니다. 변호에 대한 답례가 그림 안에 들어갔습니다.

조롱이 이어지는 동안 그의 곁에는 몇 사람이 남았습니다. 졸라가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68년 마네는 졸라를 자기 화실로 불러 초상을 그렸습니다. 책상 앞에 앉은 소설가 뒤 벽에는 일본 판화와 인쇄물이 붙어 있고, 그중 하나가 올랭피아입니다. 자기를 변호한 글에 그림으로 답한 셈입니다.

마드리드에서 멕시코까지

올랭피아가 파리를 흔들던 1865년, 마네는 스페인으로 떠났습니다. 오래 꿈꾸던 곳이었습니다. 마드리드의 한 호텔 식당에서 그는 낯선 프랑스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포르투갈을 거쳐 마흔 시간 역마차를 타고 막 도착한 젊은 여행자였습니다. 테오도르 뒤레였습니다.

두 사람은 곧 가까워졌고 함께 마드리드를 다녔습니다. 뒤레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날마다 프라도 미술관의 벨라스케스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투우를 보러 갔고 마네는 거기서 크로키를 했습니다. 나중에 투우 그림의 바탕이 된 스케치입니다. 톨레도에도 가서 대성당과 엘 그레코의 그림을 봤습니다.

그런데 여행 내내 그를 괴롭힌 것이 있었습니다. 음식이었습니다. 그는 상에 올라오는 요리의 냄새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먹기를 포기했습니다. 뒤레는 그를 두고 파리 사람이었다고 적습니다. 스페인의 그림 앞에서는 오래 서 있었지만 스페인의 식탁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오래갔습니다. 뒤레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마네가 죽고 20년 가까이 지나 그의 전기를 씁니다. 오늘 우리가 마네의 삶에 대해 아는 상당 부분이 그 책에서 왔습니다. 다만 그것은 친구가 쓴 책입니다. 뒤에서 한 번 더 짚겠습니다.

총살대가 나란히 서서 사격하는 순간을 그린 대형 그림, 화면 왼쪽이 잘려 나가고 여러 조각을 이어 붙인 상태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1868년경, 캔버스에 유채, 193 × 284 cm입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NG3294. 화면이 조각조각 잘렸다가 다시 이어 붙여진 상태입니다. 빈 곳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보십시오.

스페인에서 돌아오고 2년 뒤, 그는 스페인이 아니라 멕시코에서 벌어진 일을 그렸습니다. 1864년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이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업고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는 약속한 군사 지원을 거두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1867년 5월 공화파에 붙잡혔고 6월 19일 두 장군과 함께 총살됐습니다.

내셔널 갤러리의 공식 해설에 따르면 마네는 이 죽음에 분노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나폴레옹 3세의 야심과 무능이 만든 희생자로 널리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건이 큰 그림으로 다룰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이 장면을 네 번 그렸습니다. 큰 그림 셋과 스케치 하나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오늘 쿤스트할레 만하임에 있는 판본입니다.

그는 같은 장면으로 석판화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1869년 1월 정부 검열관이 그것을 눌렀습니다. 판화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50부짜리 판이 찍힌 것은 그가 죽은 뒤인 1884년입니다. 살롱 심사만 그를 막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직접 막은 적도 있었습니다.

위 도판이 겪은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것은 네 판본 가운데 두 번째 그림입니다. 1883년에 찍힌 사진을 보면 황제와 메히아 장군이 있던 왼쪽 부분이 이미 잘려 나가 있습니다. 마네가 죽은 뒤 가족이 캔버스를 잘라 조각으로 나눠 팔았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조각들을 사 모은 사람이 드가였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1918년 드가의 유품 경매에서 그 조각들을 사들였고, 조각들이 한 캔버스 위에 다시 합쳐진 것은 1970년대 후반입니다.

그들은 불렀고 그는 남았다

철제 난간 앞에서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등을 돌려 증기를 바라보고 푸른 옷의 여인이 강아지를 안고 정면을 보는 그림
마네, 〈기찻길〉, 1873년, 캔버스에 유채, 93.3 × 111.5 cm입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소장, 1956.10.1. 기차는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흰 증기만 있습니다.

1874년 봄, 젊은 화가들이 카퓌신 대로에 모여 자기들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드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네를 설득했습니다. 마네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문화부가 정리한 기록은 그가 거절하며 한 말을 전합니다. 살롱이야말로 진짜 싸움터이고 거기서 겨루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명한 거절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말의 출처는 당대의 문서가 아닙니다. 앙토냉 프루스트의 회고록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네를 알았고 뒷날 예술부 장관이 되는 친구가, 마네가 죽은 뒤 기억을 되살려 적은 문장입니다. 문화부 자료도 그 회고록의 쪽수를 밝히며 인용합니다. 마네가 저 뜻으로 말했다는 것은 여러 곳이 일치하지만, 우리가 아는 문장의 형태는 친구의 기억을 거쳐 왔습니다. 앞에서 여러 번 인용한 뒤레의 책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마드리드에서 만나 평생 곁에 있었던 사람이 쓴 전기입니다. 그래서 안에서만 아는 장면이 많고, 동시에 그를 아끼는 눈으로 정리된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덟 번 열린 그 전시 어디에도 자기 그림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등을 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시 밖에서 그들 편에 섰습니다.

1876년 3월 19일, 마네는 〈르 피가로〉의 비평가 알베르 볼프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 친구인 모네와 시슬레와 르누아르와 모리조 부인이 전시를 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은 아직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자기 그림도 여전히 공격받던 시기에 남의 전시를 위해 쓴 편지였습니다.

1877년 세 번째 전시에는 그가 가진 그림이 대신 걸렸습니다. 모네 두 점과 시슬레 한 점을 빌려주었습니다. 전해에는 바지유의 초상을 빌려주었습니다. 이름은 목록에 없고 그림만 벽에 있었습니다.

같은 해 그의 살롱 성적은 반반이었습니다. 〈나나〉는 떨어졌고 〈햄릿 역의 포르〉는 붙었습니다. 그 전해인 1876년에는 두 점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빨래〉와 드부탱을 그린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그해 4월 15일부터 5월 1일까지 자기 아틀리에를 대중에게 열어 낙선한 그림을 걸었습니다. 살롱이 안 걸어 주면 자기 집 벽에 걸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제비꽃 다발을 든 젊은 여인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초상
마네, 〈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 1872년, 캔버스에 유채, 55.5 × 40.5 cm입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RF 1998 30입니다. 검은색이 형태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얼굴을 밀어 올립니다.

인상주의 진영과 그의 인연은 그림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여러 차례 모델로 세운 화가 베르트 모리조는 훗날 그의 동생 외젠 마네와 결혼합니다. 1882년 일곱 번째 전시를 둘러싼 내부 사정을 알려 주는 편지들도 외젠이 남긴 것입니다. 그 무렵 마네 집안은 인상주의 그룹의 안쪽에 있었습니다. 정작 그의 그림만 그 전시에 없었습니다.

제도는 움직였고 취향은 버텼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살롱 자체가 흔들립니다. 예술차관 에드몽 튀르케는 살롱을 공화국화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심사 구성이 넓어졌고, 그해 마네는 두 점을 걸었습니다. 친구를 그린 〈앙토냉 프루스트의 초상〉과 〈페르 라튀유네 가게에서〉입니다.

다만 걸린 자리가 문제였습니다. 문화부 기록은 그해 마네의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걸렸다고 적습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받아들이되 눈에 띄지 않게 두는 방식이었습니다.

1881년에는 제도가 한 번 더 바뀝니다. 살롱 운영이 국가의 손을 떠나 예술가 단체로 넘어갔습니다. 그해 마네는 〈페르튀제의 초상〉과 〈앙리 로슈포르의 초상〉을 걸었고, 마침내 2등 메달을 받았습니다. 문화부 기록은 그 대목에 마침내라는 말을 넣어 두었습니다.

메달의 무게는 상 그 자체보다 자격에 있었습니다. 그는 1861년에 이미 가작을 한 번 받은 상태였습니다. 두 번째 포상을 받으면 등급과 상관없이 심사 면제 자격으로 올라섭니다. 앞으로는 심사를 거치지 않고 살롱에 걸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20년 넘게 심사위원단 앞에 그림을 내밀어 온 사람에게는 큰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메달이 나온 심사장의 풍경을 뒤레가 남겼습니다. 심사위원들이 〈페르튀제의 초상〉 앞에 섰을 때 격론이 붙었습니다. 메달을 줄 만한 그림에 넣자는 쪽과 빼자는 쪽이 맞섰습니다. 그때 심사위원장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기 우리 중에 저런 머리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넷도 안 될 겁니다.

카바넬은 전통 진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하고서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표는 한두 표가 모자랐습니다. 마지막에 앙리 제르베가 볼롱과 드 뇌빌을 설득해 표를 옮겼고, 그렇게 메달이 결정됐습니다.

15년 전 졸라가 마네를 변호하며 조롱한 이름이 바로 카바넬이었습니다. 분첩의 주인입니다. 그 사람이 15년 뒤 마네의 솜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도 손은 반대편에 들었습니다. 제도는 움직였지만 취향은 버텼습니다. 적어도 1880년과 1881년 두 해의 살롱에 관한 한 그렇게 보입니다. 그해의 메달은 취향의 합의가 아니라 표 계산의 결과에 가까웠습니다.

마지막 2년, 그리고 그 뒤

1879년 가을 어느 날, 아틀리에를 나서던 마네가 길에 쓰러졌습니다. 허리에 격통이 왔고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뒤레는 이것을 신경 중추의 마비, 곧 운동실조라고 적었습니다. 낫지 않는 병이었습니다. 그 뒤로 3년 넘게 살았지만 걷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고 나중에는 거의 의자에 붙들려 지냈습니다.

치료가 병을 키운 대목도 있습니다. 그는 신경질환 의사에게 독한 약을 시험받았습니다. 잠깐씩 기운이 도는 효과가 있어 계속 썼고, 특히 맥각을 남용했습니다. 뒤레는 그것이 혈액 중독을 불렀다고 적습니다. 왼쪽 다리 아랫부분이 결국 죽었고, 괴저가 번져 절단 수술을 받았습니다. 후대의 연구에서는 이 병의 뿌리를 매독의 만년 증상으로 보는 견해가 나옵니다. 다만 그것은 뒤레의 기록에는 없는, 뒷날의 진단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끝내 듣지 못한 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이 깊어지던 그 시기에 훈장이 왔습니다. 1882년 새해, 예술부 장관이 된 친구 앙토냉 프루스트가 직접 와서 레지옹 도뇌르를 달아 주었습니다. 쉽게 결정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각료회의에서 명단이 읽히자 쥘 그레비 대통령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아, 마네는 안 됩니다. 레옹 감베타가 나섰습니다. 각 장관이 자기 부에 배정된 훈장의 수훈자를 정하고 대통령은 서명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대리석 바 앞에 선 여종업원 뒤로 거대한 거울이 샹들리에와 관객들을 비추는 실내 그림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2년, 캔버스에 유채입니다. 런던 코톨드 소장입니다. 대리석 바 위의 병들이 몇 번의 붓질로 서 있는지 보십시오.

그 몸으로 그는 마지막 대작을 그렸습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입니다. 그리고 1882년 살롱에 냈습니다. 걷기 어려운 사람이, 심사 면제 자격을 이미 받아 둔 사람이, 그래도 살롱에 냈습니다. 이 그림의 거울이 만드는 어긋남과 화면 곳곳의 장치는 단독 글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1883년 4월 30일 마네는 파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쉰한 살이었습니다. 파시 묘지에 묻혔고, 무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한 사람은 앙토냉 프루스트였습니다. 쿠튀르 화실의 동료였고, 훈장을 달아 준 장관이었고, 뒷날 그의 말을 기록으로 남길 친구였습니다.

죽음 뒤의 속도는 생전과 달랐습니다. 세잔은 그의 죽음을 하나의 재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듬해 열린 유작전은 많은 화가에게 마네의 작업 전체를 처음으로 보여 준 자리가 되었습니다. 피사로는 1883년 말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렇게 어리석게 오해받아 온 이 위대한 예술가의 전모를 확인할 기회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조롱하던 세계가, 그가 없어지자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1890년에 나옵니다. 〈올랭피아〉를 국가에 들이자는 모금이 시작됐고, 그 발의자가 클로드 모네였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의 공식 기록은 이 작품의 취득 경위를 지금도 그렇게 적어 둡니다. 클로드 모네의 발의로 공공 모금을 통해 1890년 국가에 기증되었다는 문구입니다. 25년 전 살롱에서 웃음거리가 된 그림이 국가의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발코니〉가 걸어온 길도 비슷합니다. 이 그림은 1884년 2월에 열린 마네의 유작 경매에서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3,000프랑에 샀습니다. 카유보트는 자기 소장품을 국가에 남겼고, 1896년 국가가 그 유증을 받아들이면서 〈발코니〉는 뤽상부르 미술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덧문을 닫으라는 조롱을 받은 그림이 27년 만에 공공 미술관의 벽에 걸린 것입니다.

1866년에 졸라는 마네의 자리가 루브르에 예약되어 있다고 썼습니다. 국가가 그의 그림을 공공 소장품으로 들이기 시작한 것은 1890년의 〈올랭피아〉와 1896년의 〈발코니〉였습니다. 마네는 둘 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카바넬 같은 입들이었습니다. 솜씨는 인정하면서 표는 반대로 던지는 입들 말입니다. 그는 그 입들 앞에 20년 넘게 그림을 내밀었고, 마지막 그림까지 그 자리에 냈습니다. 인상주의를 함께 만든 베르트 모리조를 비롯한 동료들이 새 무대를 세울 때에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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