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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 모리조, '직업 없음'으로 기록된 인상주의 여성 화가 — Art is long

베르트 모리조, '직업 없음'으로 기록된 인상주의 여성 화가

  모리조는 1864년 23세에 국가 공식 전람회인 파리 살롱전에 처음 입선한 후 연이어 여섯 번이나 통과할 정도로 실력 있는 화가였습니다.


  파리 살롱전을 통해 데뷔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던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와 그녀의 대표작 <요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는 부유한 집안의 네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궁정 회계감사원 고문이었고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받았으며, 어머니는 로코코 미술의 대가인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증손녀였습니다. 

 

  어머니가 딸들에게 그림 도구를 선물하며 아버지의 생신 선물로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모리조와 언니들은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특히 둘째 언니 에드마와 모리조는 스승이 놀랄 정도로 그림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두 자매는 여러 화가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안타깝게도 정규 미술 교육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이 전문 교육을 받거나 직업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베르트 모리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모습

 

  두 자매는 약 10년 동안 함께 그림을 배우고 살롱전에도 입상하였지만,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따라 언니 에드마는 30세에 해군 장교와 결혼하면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세 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에드마는 동생 베르트에게 종종 편지를 써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실감을 표현했습니다.

 

  언니와 달리 베르트는 창작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화가와 교류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후 모리조는 마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단순한 모델과 화가를 넘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료였습니다. 모리조는 마네에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것을 권하는 등 그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1874년, 모리조가 33세 되던 해에는 드가의 권유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결혼 조건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화가였던 외젠은 아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결혼 후에도 작품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결혼 전 이름인 '베르트 모리조'를 서명으로 계속 사용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덕분에 모리조는 아이를 낳은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평생 800여 점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요람> -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린 걸작

  모리조의 대표작 <요람>은 바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그림 속 모델은 결혼 후 그림을 포기해야 했던 언니 에드마와 그녀의 딸 블랑슈입니다. 잠든 아기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깊은 애정과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모리조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붓 터치와 흑백의 미묘한 색채 대비를 통해 일상의 평온한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여성적'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모리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인상주의 전시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요람 작품 보여주는 이미지
<요람 The Cradle> 1872년, 56 x 46.5cm, 오르세 미술관

   모리조는 주변의 정원이나 풍경, 가족, 여가를 즐기는 모습 등 주로 친숙하고 따뜻한 감성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는 여성이 그릴 수 있는 소재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성 화가들이 발레리나, 세탁부, 술집 댄서, 매춘부 등을 그렸던 것과 달리, 여성인 모리조는 카바레, 카페, 바와 같은 공적인 장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리조의 그림은 유화임에도 맑고 투명한 느낌이 강했고, 파스텔 톤의 화사하면서도 미묘한 색채 구성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이었던 모리조의 작품은 초기에 '우아하고 고상하며 여성적인 그림'이라는 평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꾸준히 참여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남성 동료 화가들에게도 그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1892년에는 개인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고, 1894년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는 그녀를 '인상주의의 위대한 세 여성' 중 한 명으로 꼽으며 극찬했습니다. 나머지 두 명은 미국의 메리 커샛과 프랑스의 마리 브라크몽이었습니다.

 

  모리조는 54세에 폐렴으로 사망하여 파리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사망증명서 직업란에는 '직업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평생을 화가로 살았지만, 당시 사회는 그녀를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여성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보여주어 깊은 씁쓸함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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