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휘슬러 생애와 작품: 그림에서 이야기를 걷어내려다 법정까지 간 화가
1878년 11월,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재무법원 법정에 화가 한 사람이 증인석에 섰습니다. 상대편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그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이틀이라는 답이 돌아오자 변호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틀 노동에 200기니를 요구하는 것이냐고. 화가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평생 쌓은 것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졌습니다. 그는 이 재판에서 이겼고, 손에 쥔 것은 4분의 1페니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외우다시피 하는 이 짧고 날카로운 문답의 형태는 법정 기록에서 그대로 건너온 것이 아닙니다. 화가 자신이 판결 직후부터 인쇄해 퍼뜨리고 12년 뒤 자기 책에서 마지막으로 손본 판본입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 한 줄 정의: 그림에서 이야기와 교훈을 걷어내고 색과 배열만 남기려 한 미국 태생의 화가
• 생몰: 1834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 출생 ~ 1903년 7월 17일 런던 사망
• 국적·활동지: 미국 국적,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년기, 파리와 런던에서 평생 활동
• 활동 분야: 유미주의 회화와 판화, 실내장식
• 대표작: 〈흰색 교향곡 1번: 하얀 소녀〉, 〈회색과 검정의 배열 1번: 화가의 어머니〉,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 〈청색과 금색의 조화: 공작실〉, 템스 연작 에칭 16점, 베네치아 에칭
휘슬러는 어떤 화가인가
휘슬러는 그림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 화가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그림은 대체로 이야기를 담고 교훈을 남겨야 했습니다. 관람객은 그림 앞에서 줄거리를 읽었고 비평가는 그 줄거리의 도덕을 채점했습니다. 휘슬러는 그 관습을 정면으로 걷어냈습니다. 그는 자기 그림에 〈교향곡〉, 〈야상곡〉, 〈배열〉, 〈조화〉 같은 음악의 낱말을 붙였습니다. 이 그림에서 읽을 줄거리는 없고 색의 배치만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선언의 대가는 컸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비평가에게 공개적으로 모욕당했고,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기고도 파산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번 되받아쳤고, 되받아치는 방식이 늘 같았습니다. 인쇄물이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웨스트포인트로, 그리고 런던
휘슬러는 1834년 매사추세츠주 로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지 워싱턴 휘슬러는 토목기사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철도 공사의 자문을 맡아 러시아로 갑니다. 가족이 뒤따라 건너가면서 소년 휘슬러는 열한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웁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유럽 궁정 도시의 미술 교육을 먼저 받은 셈입니다. 그가 평생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배경에는 이 유년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갑니다. 그림은 로버트 위어에게 배워 성적이 좋았지만 다른 과목이 따라 주지 않았고, 화학 낙제로 1854년 퇴교합니다. 이듬해 그는 파리로 건너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859년에는 런던으로 옮겨 정착합니다.
런던에서 그가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은 유화가 아니라 동판화였습니다. 그는 템스강 남안의 부두와 창고, 뱃사람들의 골목을 파고들었습니다. 1859년부터 186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이 작업은 1871년 런던에서 〈템스 풍경 에칭 열여섯 점〉으로 묶여 나옵니다. 제작에서 출판까지 열두 해가 걸렸습니다. 이 시기의 휘슬러는 아직 아름다움보다 관찰의 화가였습니다.
왜 그림에 음악의 제목을 붙였는가
답부터 말하면, 관람객이 그림에서 줄거리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1861년에서 186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그리기 시작해 뒤에 여러 번 손을 댄 이 그림에 휘슬러가 붙인 제목은 〈하얀 소녀〉였습니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흰 커튼 앞 늑대 가죽 위에 서서 백합을 들고 있습니다. 모델은 그의 연인이었던 조애나 히퍼넌입니다. 그림은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 거부당했고 파리 살롱에서도 거부당했습니다. 그리고 1863년, 낙선한 작품들을 모은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 걸립니다. 같은 전시에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걸려 있었습니다. 두 그림은 함께 조롱받았고 함께 유명해졌습니다. 그때 나란히 조롱받은 화가의 후기작은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분석한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목을 둘러싼 첫 싸움은 그보다 앞서 벌어졌습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거부당한 이 그림을 런던 버너스가의 화랑이 걸면서 〈흰 옷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광고했습니다. 당시 크게 읽히던 윌키 콜린스의 소설 제목이었습니다. 휘슬러는 곧바로 잡지에 공개 편지를 보냈습니다. 화랑 측이 자기 승낙 없이 그림을 그렇게 불렀다고, 자기는 콜린스의 소설을 그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실은 읽어 본 적도 없다고, 자기 그림은 흰 커튼 앞에 흰 옷을 입고 선 소녀를 그린 것일 뿐이라고 썼습니다. 1862년, 재판보다 열여섯 해 앞선 일입니다.
그는 뒤에 이 그림을 〈흰색 교향곡 1번〉으로 고쳐 부릅니다. 흰색이라는 하나의 색조 안에서 몇 개의 흰색이 서로 다르게 울리는가, 그것만 보라는 요구였습니다. 이 개칭이 그의 어법이 바뀐 지점입니다. 이후 그의 그림 제목에서는 대상이 사라지고 색이 앞으로 나옵니다.
같은 시기에 그는 일본 미술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부채와 병풍, 도자기가 그림 안으로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라, 화면을 나누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깊이를 만드는 대신 평면을 겹치고, 여백을 채우지 않고 남깁니다. 이 무렵 유럽 화가들이 공유하던 흐름은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정리한 글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다만 휘슬러는 인상주의자들처럼 빛의 순간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두워진 뒤의 강을 그렸습니다.
그 결과가 〈야상곡〉 연작입니다. 밤의 템스강, 안개, 물 위에 번지는 불빛. 형태는 거의 지워지고 색면만 남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낱말은 그가 고른 것이 아닙니다. 야상곡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그의 후원자였던 선박업자 프레더릭 레일런드였습니다. 쇼팽을 즐겨 치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휘슬러의 밤 그림에서 야상곡을 떠올린 것입니다. 1872년 11월, 휘슬러는 레일런드에게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내 달빛 그림들의 제목으로 야상곡이라는 이름을 준 것에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란다고, 그 이름이 평론가들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즐거운지 당신은 모를 것이라고, 게다가 그 이름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시적으로 말해 주되 바라지 않는 것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남이 준 이름을 받아 자기 무기로 만들고, 그것이 비평가를 찌른다는 사실을 후원자에게 대놓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1875년의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은 런던의 유원지 크레몬 가든을 그린 여섯 점 가운데 하나이며, 밤하늘에서 터져 흩어지는 불꽃을 담았습니다. 패널에 그린 60.3×46.7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입니다. 이 작은 그림이 몇 해 뒤 그를 법정으로 데려갑니다.
화가의 어머니가 회색과 검정의 배열이 된 과정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 초상의 정식 제목에는 어머니라는 말이 없습니다. 1871년에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회색과 검정의 배열 1번〉이고, 〈화가의 어머니〉는 그 뒤에 붙은 부제입니다. 모델은 실제로 그의 어머니 애나 맥닐 휘슬러입니다.
그가 보라고 한 것은 모성이나 노년이 아니라 화면의 구조였습니다. 벽에 걸린 액자의 사각형, 커튼이 만드는 수직선, 검은 옷이 이루는 커다란 삼각형, 그 사이를 채우는 몇 단계의 회색입니다. 옆모습을 택한 것도 표정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이 그의 요구를 정확히 거절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부제로 기억했고, 20세기에는 어머니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1934년 5월 2일 미국은 어머니들을 기리는 3센트 우표에 이 그림을 실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도안자는 인물이 작아 보인다는 이유로 화면을 잘라 노부인을 키우고 왼쪽 아래 빈자리에 카네이션을 그려 넣었습니다. 휘슬러가 재어 놓은 회색과 검정의 면적은 그 과정에서 무너졌고, 당시에도 훼손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화가가 걷어내려 한 이야기가 오히려 이 그림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입니다.
제도의 평가는 프랑스가 먼저 내렸습니다. 1891년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을 사들였고, 미국 화가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국립 컬렉션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미국 밖에 있는 가장 유명한 미국 회화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공작실, 후원자와 화가가 갈라선 방
1876년, 야상곡이라는 이름을 준 바로 그 후원자 레일런드는 런던 프린스 게이트 49번지 자택의 식당을 새로 꾸미고 있었습니다. 설계는 건축가 토머스 젝킬이 맡았고, 중국 도자기 컬렉션을 진열하기 위한 방이었습니다. 그 방 벽난로 위에는 이미 휘슬러의 그림 〈도자기 나라의 공주〉가 걸려 있었습니다.
휘슬러가 위임받은 일은 작았습니다. 가죽 벽지의 붉은 장미를 노란색으로 손보고, 젝킬의 유리문 무늬를 따라 처마 돌림띠에 물결무늬를 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방 전체를 칠했습니다. 벽과 천장과 덧문을 청색과 금색으로 덮고, 바닥에 파란 양탄자를 깔고, 곳곳에 자기 나비 서명을 남겼습니다. 작업 중에는 다른 화가들과 기자들을 불러 구경시켰습니다. 방의 이름도 그가 붙였습니다. 〈청색과 금색의 조화: 공작실〉입니다.
돌아온 레일런드는 자기가 시키지도 원하지도 않은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휘슬러가 청구한 금액은 2,000파운드였고, 레일런드는 1876년 10월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며칠이면 끝날 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달 30일 그는 600파운드를 보냈고, 앞서 빌려준 250파운드와 미리 준 150파운드를 합쳐 모두 1,000파운드로 셈을 닫았습니다. 휘슬러 쪽 기억은 달랐습니다. 그는 서로 1,000기니씩 부담하기로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갈린 것은 액수가 아니라 화폐의 종류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기니는 화가와 전문직에게 값을 치를 때 쓰는 돈이었고 파운드는 상거래에 쓰는 돈이었습니다. 차액은 크지 않습니다. 1,000기니는 21,000실링이고 1,000파운드는 20,000실링이니 1,000실링이 모자랄 뿐입니다. 그러나 거래용 화폐로 값을 치른다는 것은 상대를 장인이 아니라 거래 상대로 대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휘슬러는 〈도자기 나라의 공주〉 맞은편 벽에 서로 맞선 공작 두 마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한쪽은 초라하고 한쪽은 발밑에 은화를 흩뿌리고 있습니다. 처음 붙인 이름은 〈부유한 공작과 가난한 공작〉이었고, 뒤에 그는 이 그림을 예술과 돈, 혹은 이 방의 이야기라고 불렀습니다. 후원자와 화가의 싸움을 방 안에 영구히 새겨 넣은 것입니다.
이 방은 레일런드가 죽고 한참 뒤인 1904년 미국의 수집가 찰스 랭 프리어가 사들여 해체한 뒤 디트로이트의 자택으로 옮겼고, 지금은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에 있습니다. 소장 번호는 F1904.61입니다. 여기서 휘슬러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는 분쟁을 감추지 않고 작품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러스킨 재판, 1파딩으로 이기고 파산하다
1877년 7월, 옥스퍼드 초대 슬레이드 미술 교수였던 존 러스킨은 자신이 펴내던 소식지 〈포스 클라비게라〉에 이렇게 썼습니다. 런던내기의 뻔뻔함은 전에도 많이 보고 들었지만, 물감통을 대중의 얼굴에 끼얹어 놓고 200기니를 요구하는 멋쟁이의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상은 〈떨어지는 불꽃〉이었습니다.
이 문장에는 이미 액수가 들어 있습니다. 러스킨이 참지 못한 것은 그림만이 아니라 그 그림에 붙은 값이었습니다. 레일런드와 부딪친 것이 화가를 어떤 사람으로 대우하느냐의 문제였다면, 러스킨과 부딪친 것은 그림값을 무엇으로 매기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두 자리에서 그가 지킨 답은 하나입니다. 값은 들인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 아는 눈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재판은 1878년 11월 25일과 26일 이틀간, 런던 고등법원 재무법원부에서 허들스턴 남작 판사와 특별배심 앞에 열렸습니다. 배심은 휘슬러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다만 배상액은 1파딩, 4분의 1페니짜리 가장 작은 동전이었고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이었습니다. 이기고도 자기가 쓴 돈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듬해 5월 그는 지급불능 선고를 받습니다. 다만 이 파산을 재판 하나의 결과로 읽으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글래스고대학의 휘슬러 자료는 세 가지를 함께 꼽습니다. 소송에 들어간 비용, 건축가 에드워드 고드윈이 설계해 첼시 타이트가에 새로 지은 집과 작업실에 들인 돈, 그리고 들쭉날쭉한 수입에 맞추지 못한 씀씀이입니다. 그 집은 1879년 9월 18일 경매로 넘어갔고, 이듬해 2월에는 그의 살림살이가 런던의 경매장에 올랐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베네치아에 있었습니다.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는 인쇄기를 먼저 찾았습니다. 판결이 난 그해 12월, 몇 주 만에 갈색 종이 팸플릿을 찍습니다. 제목은 〈휘슬러 대 러스킨: 예술과 예술 비평가들〉이고 열일곱 쪽짜리였습니다. 그는 이 재판을 화가들을 위해 싸운 전투라고 불렀습니다. 팸플릿은 두 달 사이에 다섯 판을 찍었습니다.
널리 인용되는 그 문답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가 이 재판에서 가장 자주 오해되는 대목입니다. 완전한 공식 기록은 전하지 않습니다. 첫날인 1878년 11월 25일 법정을 법원 관계자가 적은 기록이 남아 글래스고대학에 소장되어 있지만, 휘슬러 쪽 변호사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 한 뭉치가 전부입니다. 1992년에 이 재판을 책 한 권 분량으로 복원한 미술사가 린다 메릴이 신문 기사와 편지, 소송 당사자들이 나중에 쓴 글에 기대어 장면을 재구성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것은 서로 조금씩 다른 여러 판본이고, 시간이 갈수록 문장이 짧고 날카로워집니다.
재판 다음 날인 1878년 11월 26일 자 〈타임스〉는 간접화법으로 전했습니다. 그는 이틀 작업에 대해 200기니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평생의 작업에서 얻은 지식에 대해 요구했다고 말했다는 식입니다. 몇 주 뒤에 나온 휘슬러 자신의 팸플릿에서 이 대목은 문답의 형태를 갖춥니다. 이듬해 〈애뉴얼 레지스터〉는 또 다르게 줄여, 이 그림은 평생에 걸친 연구의 결과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1890년의 〈적을 만드는 우아한 기술〉에서 문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굳습니다. 답변에서 작업이라는 말이 빠지고 평생의 지식만 남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괄호로 한 마디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박수라고. 오늘 인용되는 것은 이 마지막 판본입니다.
말의 취지가 법정에서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굳는 과정 전체를 그가 손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 이 사람의 특징입니다. 판결이 난 지 몇 주 만에 인쇄기를 돌렸고, 12년 뒤 마지막으로 문장을 줄였으며, 방청석의 반응까지 판본 안에 넣었습니다.
이 한 가지가 그의 생애 전체를 다르게 보이게 합니다. 남이 준 이름을 받아 자기 무기로 삼은 것, 방 하나에 맞선 공작을 그려 넣은 것, 팸플릿을 찍고 강연을 연 것은 전부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작품만 만든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전해질 이야기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파산 이후, 베네치아의 판화들과 열 시 강연
파산한 화가에게 손을 내민 것은 런던의 화상 파인 아트 소사이어티였습니다. 베네치아를 담은 에칭 12점을 크리스마스까지 만들어 달라는 의뢰였습니다. 휘슬러는 1879년 9월 베네치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1880년 11월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에칭 50여 점과 파스텔 100여 점, 몇 점의 유화와 수채를 만들어 돌아왔습니다. 열두 점을 부탁받고 그 네 배를 만든 것입니다. 이 작업은 1880년의 〈첫 번째 베네치아 세트〉와 1886년의 〈두 번째 베네치아 세트〉로 묶여 나왔고, 그를 재정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되살렸습니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성당과 광장 대신 뒷골목과 문간, 운하의 어두운 안쪽을 팠습니다. 런던에서 템스강 부두를 파던 눈이 20년 뒤 베네치아에서 다시 작동한 셈입니다.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말로 싸웠습니다. 1885년 2월 20일 밤, 런던 피카딜리의 프린스 홀에서 그는 한 시간짜리 강연을 했습니다. 저녁 열 시에 시작했기 때문에 제목이 〈열 시〉입니다. 청중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두르지 않게 오도록 잡은 시각이었습니다. 유행을 좇는 런던 사람들과 화가, 화상, 기자가 모였고 오스카 와일드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강연에서 그는 예술이 자연을 베끼는 일도 대중을 가르치는 일도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자연 안에는 모든 그림의 색과 형태가 이미 들어 있고 그것은 건반에 모든 음악의 음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데, 예술가는 그 가운데서 골라내고 묶어 조화를 만들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3년 전 그가 반겼던 음악 제목과 이 강연은 같은 생각을 다른 자리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강연문은 처음에 25부만 인쇄되었다가 1888년 런던에서 정식으로 출판되었고, 같은 해 나온 프랑스어판은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번역했습니다. 영국 화가의 강연문을 프랑스 최고의 시인이 옮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느 쪽에서 더 이해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90년에는 자신을 둘러싼 논쟁과 편지, 신문 지면의 설전을 모아 〈적을 만드는 우아한 기술〉을 펴냅니다. 앞서 본 법정 문답이 실린 책이 이것입니다. 그는 1903년 7월 17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대의 미움과 후대의 자리
휘슬러는 살아 있는 동안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후원자와 소송했고, 비평가와 소송했고, 친구들과도 자주 갈라섰습니다. 그가 만든 적의 목록은 그가 남긴 작품 목록만큼 깁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상당 부분은 그가 먼저 걸었습니다.
그가 걸었던 싸움은 뒤에 진지하게 다시 다루어졌습니다. 그림이 반드시 무언가를 알아보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은 20세기 회화의 큰 흐름 하나를 열었고, 색과 형태의 배치 자체가 내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기이한 주장이 아닙니다. 물론 이야기와 재현이 그림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대에 조롱받은 쪽이 미술의 정당한 한 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1891년에 그의 어머니 초상을 사들인 것은 그 변화를 미리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는 인상주의에도 후기인상주의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같은 방향을 먼저 걸어간 사람입니다.
다만 그를 이론가로만 기억하면 그림을 놓칩니다. 〈야상곡〉 앞에 서면 먼저 보이는 것은 주장이 아니라 몇 단계로 나뉜 어둠입니다. 검정이라고 부르는 색 안에 실제로 몇 가지 다른 검정이 있는지, 그 차이만으로 강과 하늘과 물 위의 불빛이 어떻게 갈라지는지가 이 화가의 솜씨입니다. 그림에서 이야기를 걷어내야 그 미묘한 차이가 비로소 보이기 때문에, 그가 평생 통제하려 한 이야기도 결국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초상은 오르세에, 〈하얀 소녀〉는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 공작실은 스미스소니언에 있습니다.
그림값을 무엇으로 매길 것이냐는 물음은 그 법정에서 끝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붙인 이상한 이름들, 야상곡과 배열과 조화는 지금 미술관 명찰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휘슬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림 옆에도 〈회색과 검정의 배열 1번〉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200기니를 요구한 사람의 판본이 남은 것입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