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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검은 그림」 14점, 작가를 둘러싼 20여 년의 논쟁

사건 한눈에 보기
• 대상: 「검은 그림」(Pinturas negras) 14점, 프란시스코 데 고야
• 제작 추정: 고야가 별장을 매입한 1819년 이후부터 1823년 사이(프라도 개별 작품 페이지 표기는 1820년부터 1823년 사이)
• 원래 자리: 마드리드 만사나레스강 변 별장 킨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 귀머거리의 집)의 두 방 벽면
• 현재: 캔버스로 옮겨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067실, 발야누에바 건물)
• 쟁점: 2003년 후안 호세 훈케라(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 교수)가 이 작품들이 고야의 것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
• 현재 프라도의 입장: 고야의 작품으로 소장·전시(공식 백과사전 기준, 2026년 7월 확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가장 어두운 방에는 그림 열네 점이 걸려 있습니다. 아들을 통째로 삼키는 사투르누스, 서로를 노려보는 두 늙은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검은 산양. 프라도는 이 그림들을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말년에 살던 별장 벽에 직접 그린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늙은 사투르누스가 벌거벗은 인물의 몸을 움켜쥐고 뜯어먹는 장면, 어두운 배경과 거친 붓질
프란시스코 데 고야,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잡아먹다〉, 1819~1823년경. 원래 벽화, 현재 캔버스, 프라도 미술관. 퍼블릭 도메인(Wikimedia Commons).

그런데 2003년, 한 미술사 교수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그림이 가짜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림이 걸린 그 벽 자체가, 고야가 살아 있을 때는 없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벽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립니까. 이 질문 하나가 20년 넘게 이어진 논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이 집부터 알아야 합니다. 킨타 델 소르도는 큰 집 한 채에 작은 별채 두 채가 딸린 시골집이었습니다. 큰 집은 2층이었고, 그림은 이 큰 집 1층과 2층에 나뉘어 걸려 있었습니다. 1층에 일곱 점, 2층에 일곱 점. 정확히 절반씩입니다. 훈케라 교수가 문제 삼은 건 바로 이 2층입니다. 고야가 이 집에 살 때 2층이 정말 있었을까요, 아니면 고야가 떠난 뒤에 지어진 걸까요.

한 장으로 보는 경과

「검은 그림」 귀속 논쟁 경과
시기사건
1806년훗날 고야가 사들일 땅을, 안셀모 몬타녜스의 미망인이 페드로 마르셀리노 블랑코에게 매도(이 매매증서가 뒤에 건물 구조 논쟁의 근거가 됨)
1819년 2월 27일고야가 페드로 마르셀리노 블랑코로부터 킨타 델 소르도를 매입
1823년고야가 이 별장을 손자 마리아노에게 증여
1824년고야,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
1828년고야, 보르도에서 사망. 화가 안토니오 데 브루가다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브루가다 인벤토리"가 이 무렵 그림 목록을 남김(작성 시점 자체가 논쟁의 대상)
1859년여러 차례 유찰 끝에 세군도 데 콜메나레스가 별장을 매입. 이때 작성된 마드리드 부동산등기부에 건물 구조가 기록됨
1860년대 중반(글렌디닌 추정)사진가 J. 로랑이 그림을 촬영(현재 남은 가장 오래된 그림 상태 기록)
1874년프라도의 화가이자 복원가 살바도르 마르티네스쿠벨스가 그림을 벽에서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아들 엔리케·프란시스코와 함께 작업한 것으로 추정)
1878년소유자 데를랑제 남작이 파리 만국박람회 트로카데로 궁에서 14점을 전시했으나 매수자를 찾지 못함
1881년 12월 20일왕령으로 스페인 국가 기증이 승인됨
1882년 1월 2일작품이 프라도 미술관에 실제로 입고됨
1889년프라도에서 대중 공개 전시가 시작됨
2003년훈케라, 잡지 기고·단행본·학술논문 세 편으로 고야 귀속에 의문 제기
2004년글렌디닌, 같은 학술지에 훈케라 반박 논문 발표
2005년훈케라, 같은 학술지에 재반론 발표(1830년 혼인 재산목록 재제시, 로랑 사진 추정 일부 수정)
2016년카를로스 테익시도르 카데나스, 1828년부터 1830년 사이 제작된 마드리드 모형에서 킨타 델 소르도를 식별한 논문 발표(이 논쟁에 직접 응답한 것인지는 확인 못함)
2026년 7월(확인 시점)프라도 공식 백과사전은 여전히 고야 귀속으로 서술, 67실에 상설 전시 중

훈케라 교수의 의심

후안 호세 훈케라는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의 미술사 교수입니다. 2003년, 그는 잡지 기고와 책과 논문, 세 가지 형태로 같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검은 그림」을 그린 사람은 고야가 아니라 그 아들 하비에르 고야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작은 서류였습니다. 훈케라는 이 집을 사고팔고 빌려준 온갖 문서를 뒤졌습니다. 방 개수, 가구, 심지어 "그림 몇 점"까지 적어놓은 꼼꼼한 문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검은 그림」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서류들이 이렇게 큰 그림들을 하나같이 빠뜨렸다는 게 이상하다고 훈케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림이 고야가 살던 시절엔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림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서로 오래 여겨져 온 것이 하나 있습니다. "브루가다 인벤토리"라는 목록입니다. 고야와 가까웠던 화가 브루가다가 썼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 문서엔 첫 페이지가 없습니다. 언제, 누구를 위해 썼는지 알려줄 바로 그 부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훈케라는 이 목록에 쓰인 단어를 하나씩 살폈습니다. "바르궤뇨"라는 책상, "마케"라는 옻칠, "루이 15세풍"이라는 표현. 이런 말들이 19세기 후반에야 그런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목록은 고야가 죽고 한참 뒤, 어쩌면 1859년 이후에 쓰였을 수 있습니다.

그림이 걸렸다는 초기 기록들도 수상합니다. 1834년과 1835년에 나온 두 글은 이 벽화를 "프레스코"라 부르고, 분위기도 밝고 유쾌하다고 적습니다. 심지어 고야가 예전에 어느 귀족 부부의 별장에 그려준 마녀 그림과 비슷하다고까지 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검은 그림」은 어둡고 기괴합니다. 전혀 다른 그림을 말하는 것 같다고 훈케라는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는 그 모습으로 처음 묘사되는 건 1868년이 되어서입니다.

이 모든 걸 엮어 훈케라는 결론을 냅니다. 1층 벽은 원래 얇은 무늬 천으로 덮여 있었고, 2층은 고야가 이 집을 떠난 뒤에야 지어졌다. 그렇다면 그 벽에 그림을 그린 건 고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굴까요. 훈케라가 지목한 사람은 고야의 아들 하비에르입니다. 아버지가 위독할 때는 늦게 도착했지만 유산 문제에는 발 빠르게 움직였던 인물이라고 훈케라는 그립니다. 아버지의 화풍을 잘 알던 하비에르가 이 벽에 그림을 그렸고, 손자 마리아노가 이걸 할아버지 작품으로 팔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훈케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증거를 하나 더 보탭니다. 〈리타 루나의 초상〉, 〈파케테 아저씨〉, 〈어울리지 않는 결혼〉. 지금도 고야가 직접 그렸는지 확실치 않은 이 그림들을 「검은 그림」과 나란히 놓고 보면, 검은 색조를 유독 짙게 쓰는 버릇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 버릇의 주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게 훈케라의 마지막 카드였습니다.

글렌디닌의 반박

니겔 글렌디닌은 런던대학교 퀸메리칼리지의 교수입니다. 사실 그는 훈케라보다 먼저 이 집을 들여다본 사람이었습니다. 1986년, 건축가 롤프 켄티시와 함께 킨타 델 소르도의 건물 역사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글렌디닌의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훈케라가 읽은 문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

가장 중요한 반박은 매매증서에서 나옵니다. 훈케라는 1819년 증서에 적힌 "낮은 방들"이 큰 집 자체를 가리킨다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렌디닌은 13년 앞선 1806년 증서를 찾아냈습니다. 거기엔 "낮은 방 두 채"가 별채를 가리킨다고 더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큰 집과 별채를 나란히 적었을 뿐, 큰 집이 몇 층인지는 어느 문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글렌디닌의 지적입니다.

층수를 직접 밝히는 문서도 찾아냈습니다. 1859년에 작성된 부동산등기부입니다. 여기엔 "1번 건물은 1층과 본층으로 이루어진 별장이며, 그 정면이 화가 고야의 원래 집이고, 벽에는 여러 그림이 있다"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별채는 따로 "1층만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글렌디닌은 이게 큰 집이 2층 건물이었다는 강한 증거라고 봅니다. 19세기 말 별장을 찍은 사진에서 오래된 부분과 증축된 부분의 창틀·벽 두께·굴뚝이 서로 다르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브루가다 인벤토리에 대한 반박도 이어집니다. 훈케라가 "1층 벽을 덮은 천"의 근거로 든 문서를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천은 벽이 아니라 침대를 장식하는 덮개였습니다. 단어 연대 문제도 하나씩 풀립니다. "바르궤뇨"라는 단어를 처음 썼다고 알려진 사람 본인이 "예로부터 쓰던 말"이라고 밝혔고, "마케"라는 단어는 1835년 다른 문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루이 15세풍"이라는 표현도 볼테르 시대부터 있었다고 글렌디닌은 씁니다.

1874년 J. 로랑이 킨타 델 소르도 실내에서 촬영한 흑백 사진, 벽에 걸린 〈개〉가 보인다
J. 로랑(Jean Laurent, 1816~1886), 킨타 델 소르도 실내에서 촬영한 〈개〉, 1874년(추정). 이 사진이 정확히 언제 찍혔는지가 훈케라·글렌디닌 논쟁의 핵심 물증 중 하나입니다. 사진: 스페인 문화부 국가유산사진자료실(Fototeca del Patrimonio), CC BY-SA 2.5 ES(Wikimedia Commons).

사진에 대한 반박도 있습니다. 유리판에 새겨진 번호를 다른 로랑 사진들과 비교하면, 촬영 시기는 1860년대 중반으로 좁혀진다는 것이 글렌디닌의 주장입니다. 훈케라가 말한 "1870년대 이후, 심지어 프라도로 옮겨진 뒤"라는 추정과는 다른 결론입니다. 사진 속에 남은 벽지 무늬도, 유럽 벽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빌려 182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하비에르가 실제로 화가였을 가능성에도 글렌디닌은 회의적입니다. 하비에르의 서명이 확인된 그림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혼 이후 그는 그림보다 부동산과 재산 관리에 매달렸습니다. 무엇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주재하는 사투르누스를 중심에 둔 이만큼 상상력 넘치는 그림을 하비에르가 구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글렌디닌은 씁니다. 1872년, 프라도와 가까운 전문가 페드로 데 마드라소도 이미 "고야의 가장 뛰어난 작품 열서너 점"이 이 별장에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프라도 근처 전문가가 그때 이미 고야의 것으로 의심 없이 여겼다는 뜻입니다.

양쪽 논거 대조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가지 쟁점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훈케라(2003)와 글렌디닌(2004)의 논거 대조
쟁점훈케라의 주장글렌디닌의 반론
건물 층수 1819년 증서의 "낮은 방들"은 본채 자체.
위층(그림이 걸린 절반)은 고야가 떠난 뒤 증축
1806년 증서와 대조하면 "낮은 방들"은 단층 부속 건물.
1859년 등기부는 본채를 "1층과 본층"으로 명시
브루가다 인벤토리 작성 시기 "바르궤뇨"·"마케"·"루이 15세풍" 어휘가 19세기 후반 것.
인벤토리는 1859년 이후 작성 추정
세 어휘 모두 더 이른 사용 사례 확인됨.
언어학적 근거로 후대 작성을 단정할 수 없음
1층 벽의 사라사 천 1830년 재산목록의 사라사 천이 1층 방 벽을 덮었다.
그 벽에 그림이 있었을 가능성 낮음
해당 재산목록 원문은 침대(catre) 장식.
방의 벽을 가리키지 않음
초기 문헌의 성격 1834~1835년 기록은 그림을 "프레스코"로, 주제를 온화하거나 해학적인 것으로 묘사.
오늘날의 「검은 그림」과 안 맞음
1834년 기사는 고야가 "별장의 모든 벽"을 그렸다고 명시.
카르데레라의 1838년 글은 계단 그림도 언급해 2층 존재를 뒷받침
로랑의 사진 촬영 시기 2003년에는 1870년대 이후, 프라도 이관 뒤일 가능성까지 제기.
2005년에는 벽화 이전 직전 킨타에서 촬영됐을 가능성을 수용
유리건판에 새겨진 일련번호를 다른 사진들과 비교해 1860년대 중반으로 추정
실제 화가 아들 하비에르 고야일 가능성.
손자 마리아노가 고야 작품으로 팔았을 수 있음
하비에르의 서명작 전무.
이후 행적은 재정·부동산 관리.
이 정도 상상력·기법의 근거 없음

두 사람의 논쟁은 2004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이 그림들이 프라도로 오는 길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캔버스로 옮긴 뒤 이걸 갖고 있던 데를랑제 남작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그림을 내걸었습니다. 팔려고 내놓은 것이었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남작은 스페인 정부에 기증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지금 프라도는 이 열네 점을 여전히 고야의 작품이라고 소개합니다. 미술관 공식 백과사전을 쓴 발레리아노 보살은, X선으로 확인된 흔적과 그림의 수준이 고야 자신의 솜씨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항목은 훈케라의 주장을 아예 언급하지 않습니다. 참고문헌에도 훈케라의 이름은 없습니다. 열네 점은 지금도 프라도 발야누에바 건물 67실에 걸려 있습니다.

훈케라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2005년 재반론에서 그는 새 문서를 꺼냈습니다. 손자 마리아노가 결혼하며 작성한 재산 공증 서류입니다. 가구와 식품, 심지어 할아버지가 그려준 작은 그림 여덟 점까지 적혀 있는데, 「검은 그림」은 여기서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진 촬영 시기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벽화를 캔버스로 옮기기 직전에 찍혔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인 것입니다.

2016년에는 또 다른 연구가 나왔습니다. 카를로스 테익시도르 카데나스는 1828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마드리드 모형에서 이 집을 찾아냈고, 원래 건물이 2층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다만 이 모형 자체가 고야가 떠난 뒤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므로, 1819년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이 연구가 두 학자의 논쟁에 답한 것인지, 그 뒤 다른 반응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훈케라가 처음 의문을 던진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도 그 방 벽에 걸린 열네 점에는 이름표가 하나뿐입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다만 이건 지금 프라도가 그렇게 보고 있다는 뜻일 뿐, 이 논쟁에 정답이 나왔다는 뜻은 아닙니다.

확인한 자료

이 글의 사실관계는 아래 자료로 확인했습니다(모두 2026년 7월 31일 확인).

  • 프라도 미술관 공식 백과사전 "Pinturas negras [Goya]"(집필: Valeriano Bozal), 제작연도·기법·소장경위·X선 재사용 흔적·귀속 서술의 근거
  • 프라도 미술관 공식 itinerary 페이지 "Goya pinturas negras", 현재 전시 위치(67실) 확인
  • Junquera, Juan José. "Los Goya: de la Quinta a Burdeos y vuelta." Archivo Español de Arte, 76(304), 2003, pp. 353~370. (CSIC, 동료심사 학술지), 훈케라 주장의 1차 근거
  • Glendinning, Nigel. "Las Pinturas Negras de Goya y la Quinta del Sordo. Precisiones sobre las teorías de Juan José Junquera." Archivo Español de Arte, 77(307), 2004, pp. 233~245. (CSIC), 반론의 1차 근거
  • Carderera, Valentín. "Biografía de don Francisco Goya, pintor." El Artista, 제2권, 1835, pp. 253~255, 훈케라가 초기 문헌으로 인용한 글
  • Carderera, Valentín. "Goya." Semanario Pintoresco Español, 제120호, 1838, pp. 631~633, 글렌디닌이 2층 존재의 근거로 인용한 별도의 글
  • Junquera, Juan José. "La Quinta del Sordo en 1830: respuesta a Nigel Glendinning." Archivo Español de Arte, 78(309), 2005, pp. 83~88. DOI: 10.3989/aearte.2005.v78.i309.210, 훈케라의 2005년 재반론(1830년 혼인 재산목록 재제시·로랑 사진 추정 수정)의 근거
  • Teixidor Cadenas, Carlos. "La casa de Goya en la Quinta del Sordo, en 1828." Iberic@l, 2016, HAL-SHS: shs.hal.science/hal-03815667, 1828년부터 1830년 사이 제작된 마드리드 모형에서 킨타 델 소르도를 식별한 연구의 근거

다음은 존재를 확인했으나 이번 조사에서 내용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 테익시도르 카데나스의 2016년 연구가 훈케라·글렌디닌의 논쟁에 직접 응답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2016년 이후 이 논쟁에 대한 추가 학술 반응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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