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2~1483년경, 밀라노에 도착한 서른 살 무렵의 화가가 밀라노의 지배자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기 능력을 열 항목으로 정리한 편지 초안을 마련합니다. 이동식 다리를 만들 수 있다고 적습니다. 공성 무기와 장갑 차량, 대포와 땅굴 병기도 만들 수 있다고 적습니다. 아홉 항목에 걸쳐 군사 기술을 내세운 뒤, 마지막 항목에서야 건축과 수리 공사, 조각과 회화도 맡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편지 초안을 남긴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무엇보다 화가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궁정에 자신을 팔 때 화가라는 이름을 맨 뒤에 두었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소개한 방식과 후대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를 따라가면 다빈치의 생애가 다르게 보입니다.
• 한 줄 정의: 화가·기술자·해부학자의 경계를 넘나든 르네상스의 만능 탐구자
• 생몰: 1452년 ~ 1519년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빈치 출생, 피렌체·밀라노·로마를 거쳐 프랑스에서 사망)
• 활동 분야: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 조각·건축·해부학·공학 연구
• 대표작: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담비를 안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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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소묘〉, 붉은 초크. 자화상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
형성기, 베로키오 공방에서 있었던 일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인근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카테리나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카테리나가 정확히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오랫동안 빈치 마을의 평범한 소작농의 딸로 알려져 왔습니다.
2023년, 나폴리 동양학대학의 연구자 카를로 베체가 새 문서를 발굴했습니다. 피렌체 국가기록보관소의 이 문서를 근거로 그는 카테리나가 노예 신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대학교의 다빈치 연구자 마틴 켐프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이 해석에 반박합니다. 두 견해 모두 아직 학계의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빈치는 열네 살 무렵인 1466년경 피렌체의 화가 겸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습니다. 1472년, 스무 살의 나이로 피렌체 화가 조합인 성 루가 길드에 정식 등록해 장인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적어도 1476년까지 베로키오의 공방에 남아 조수로 일했습니다.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얽힌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6세기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는 어린 다빈치가 그림 왼쪽의 천사 하나를 맡아 그렸다고 전합니다. 그 솜씨가 스승 베로키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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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스도의 세례〉, 1470~1475년경, 우피치미술관. 왼쪽 아래 두 천사 가운데 하나를 다빈치가 맡았다고 전합니다. |
이 그림을 소장한 우피치미술관의 공식 자료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다빈치의 손길이 천사뿐 아니라 배경과 그리스도상까지 더 폭넓게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바사리의 이야기를 확정된 사실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 일로 베로키오가 붓을 놓았다”는 통설은 후대에 덧붙여진 각색에 가깝습니다.
생애의 전환점들
1482년, 다빈치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향합니다. 이 무렵 작성된 편지는 그가 밀라노 궁정에 어떤 능력을 내세우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보낸 자기소개서에서 그는 군사 기술을 앞세웠습니다. 그림과 조각은 열 번째 항목으로 가장 나중에 덧붙였습니다. 다빈치는 궁정에 자신을 화가가 아니라 유능한 기술자로 팔았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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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폭발탄을 쏘는 박격포〉, 1485년경, 펜과 잉크. 편지에서 앞세운 군사 기술이 이런 종류의 구상이었다. |
이후 그는 1499년까지 약 17년 동안 스포르차 궁정에 머뭅니다. 이 시기에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고, 루도비코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리는 청동 기마상 제작에도 매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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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460×880cm, 밀라노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1999년에 끝난 복원 뒤의 모습이다. |
그러나 1499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하면서 스포르차 궁정은 무너집니다. 다빈치는 높이 8미터에 이르는 기마상 점토 모형을 만드는 데 12년을 매달렸습니다. 프랑스 궁수들이 이 모형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모형은 비와 결빙이 반복되면서 훼손돼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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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포르차 기마상에 관한 원고 낱장〉, 1493년경, 펜과 잉크, 21×15cm,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12년을 매달렸으나 청동으로는 남지 않았다. |
궁정을 잃은 다빈치는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거쳐 떠돕니다. 1502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 밑에서 군사 기술자로 일합니다. 요새를 점검하고 지도를 그리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편지에서 자신을 소개했던 그대로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한 셈입니다.
1503년, 다빈치는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이 시기에 ‘모나리자’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시청사인 팔라초 베키오의 대회의실 벽화도 위촉받습니다.
그런데 같은 공간, 맞은편 벽에는 또 다른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스물세 살 연하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습니다. 두 사람이 실제로 같은 공간에서 경쟁한 것으로 기록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1506년, 다빈치는 다시 밀라노로 갑니다. 이번에는 파비아대학 의학교실에서 해부학 교수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가까이 연구합니다.
1510년에서 1511년 사이 겨울, 다빈치가 최대 스무 구의 시신을 해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두 사람의 구체적인 역할과 공동 저술 계획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델라 토레가 1511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교류도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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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깨 해부 연구〉, 1510~1511년경, 펜과 잉크. 델라 토레와 시신을 해부하던 무렵의 낱장이다. |
1513년, 다빈치는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 바티칸 벨베데레에 머뭅니다. 그리고 1516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갑니다. 앙부아즈 인근 클로 뤼세 성에서 3년을 보낸 뒤, 1519년 5월 2일 그곳에서 눈을 감습니다.
“프랑수아 1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클로 뤼세 성의 공식 자료는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프랑수아 1세는 생제르맹앙레에 머물며 그날 왕실 문서에 서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낭만적인 임종 장면은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화풍은 왜, 언제 바뀌었는가
다빈치의 초기 회화는 베로키오 공방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정교한 세부 묘사와 또렷한 윤곽선이 특징입니다. 1차 밀라노 시기에 들어서면서 그는 스푸마토(sfumato, 윤곽선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흐리는 기법)를 확립합니다.
‘최후의 만찬’과 이 시기의 초상화들이 그 예입니다. 인물의 윤곽은 더 이상 또렷한 선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의 점진적인 이행으로 표현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법 발전을 넘어섭니다. 다빈치는 이 무렵부터 해부학·광학·지질학 연구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림 속 인체의 근육 구조나 배경의 지질학적 형태가 점점 더 과학적 관찰에 근거하게 됩니다. 회화가 곧 자연을 연구하는 방법이 되어간 것입니다.
정작 이 왕성한 탐구심은 완성작의 수를 늘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만토바의 후원자 이사벨라 데스테는 6년 동안 다빈치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받은 것은 스케치 한 점뿐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기마상도 오랜 작업 끝에 실물로 주조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다빈치의 것으로 확인된 완성 회화는 20점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함께한 사람들, 그리고 미켈란젤로
다빈치의 생애를 지나간 후원자는 여럿입니다.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17년가량 그를 곁에 두었고, 체사레 보르자는 그를 군사 기술자로 썼습니다. 말년의 프랑수아 1세는 그에게 궁정 화가라는 이름과 거처를 함께 내주었습니다. 다빈치가 죽을 때까지 곁에 둔 ‘모나리자’는 프랑스로 옮겨졌고, 그의 사후 프랑수아 1세의 컬렉션에 들어갔습니다.
동료 화가와의 관계에서는 1504년 팔라초 베키오의 벽화 위촉이 가장 뚜렷한 장면을 남겼습니다.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면서 전통적인 프레스코가 아닌 유성 매체를 활용한 벽화 기법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안료층이 벽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해 일부만 작업한 채 중단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밑그림만 완성한 채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떠났고, 실제 벽화는 그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느 쪽도 완성작을 남기지 못한 경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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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스가 모사한 〈앙기아리 전투〉의 중심 장면. 다빈치의 벽화는 남지 않아 이런 모사로만 구도가 전합니다. |
당대의 평판과 후대의 신화
오늘날 다빈치는 회화·조각·건축·과학을 넘나든 만능 천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생전의 평판은 이 이미지와 결이 달랐습니다. 후원자들의 편지와 기록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그의 재능에 대한 감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을 끝맺지 못하는 데 대한 답답함입니다. 이사벨라 데스테가 거듭 보낸 헛된 초상화 요청과 끝내 주조되지 못한 청동 기마상이 그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다빈치를 오늘날과 같은 만능 천재의 상징으로 굳힌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특히 19세기 이후의 재해석입니다. 완성하지 못한 스케치와 노트 수천 장이 후대에 재조명됩니다. “끝내지 못한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탐구했기 때문”이라는 낭만적인 서사로 다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당대의 답답함과 후대의 경탄은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르게 읽은 결과입니다.
대표작
회화
- 최후의 만찬(1495~1498) ·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 벽면, 실험적 기법 탓에 이른 시기부터 훼손이 기록된 작품
- 담비를 안은 여인(1489~1491) · 밀라노 궁정의 연인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초상
- 모나리자(1503년경~) · 피렌체 귀환기에 착수, 죽을 때까지 곁에 두었던 작품
소묘·연구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c.1490) · 인체 비례를 기하학으로 분석한 소묘
‘최후의 만찬’은 460×880센티미터 크기로, 마른 회벽 위에 템페라와 유채를 결합한 실험적 기법으로 그려졌습니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을 썼다면 정교한 수정이 어려웠을 텐데, 다빈치는 수정 가능성을 택하는 대신 내구성을 희생했습니다. 완성 후 스무 해가 지나기 전에 이미 훼손이 기록될 만큼 취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스무 해 남짓 이어진 복원의 결과입니다.
‘담비를 안은 여인’은 호두나무 패널에 유채로 그린 54.8×40.3센티미터 크기의 초상입니다. 현재 폴란드 크라쿠프국립박물관(차르토리스키미술관)에 있습니다. 모델은 스포르차의 연인이었던 체칠리아 갈레라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34.4×24.5센티미터의 작은 소묘입니다. 인체와 기하학적 도형을 겹쳐 그린 이 이미지는 오늘날 다빈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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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담비를 안은 여인〉, 1489~1491년, 호두나무 패널에 유채, 54.8×40.3cm, 크라쿠프국립박물관. 얼굴의 윤곽이 선이 아니라 빛으로 넘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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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년경, 펜과 잉크, 34.4×24.5cm. 인체와 원·정사각형을 겹쳐 놓았다. |
모나리자는 atelier4u.kr에서 이미 스푸마토 기법과 도상학적 해석까지 깊이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 생애 이야기에서는 이 작품이 피렌체 귀환기에 시작돼 다빈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 두었던 작품이라는 사실만 짚었습니다. 작품 자체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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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503년경 착수, 루브르박물관. 죽을 때까지 곁에 두었던 그림이다. |
오늘, 다빈치를 만나는 법
다빈치를 처음 만난다면 ‘최후의 만찬’과 ‘담비를 안은 여인’을 나란히 놓고 보는 것을 권합니다. 하나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대형 벽화이고, 다른 하나는 조용한 개인 초상입니다. 두 작품 모두에서 인물의 윤곽이 또렷한 선이 아니라 부드럽게 번지는 빛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에서, ‘담비를 안은 여인’은 크라쿠프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소장 위치·전시 여부는 변동될 수 있어 방문 전 공식 홈페이지 확인을 권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다빈치는 화가로 초빙되어 밀라노에 갔나요?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밀라노 도착 무렵 작성한 편지 초안에서 다빈치는 회화보다 군사·토목 기술을 훨씬 앞세웠습니다. 그림과 조각은 열 번째 항목, 즉 편지의 맨 마지막에야 짧게 덧붙여집니다.
Q. 다빈치는 왜 완성작이 적나요?
정확한 이유는 기록으로 확정되지 않았지만, 후원자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는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벌여놓고 끝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사벨라 데스테는 그에게 6년 동안 초상화를 요청했지만 결국 스케치 한 점만 받았습니다. 스포르차 청동 기마상도 12년을 매달렸으나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Q. 다빈치는 정말 프랑수아 1세의 품에서 죽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왕실 문서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1519년 5월 2일, 생제르맹앙레에 머물며 왕실 문서에 서명하고 있었습니다. 다빈치가 죽던 날 왕이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로 봅니다.
Q. 다빈치의 어머니는 누구였나요?
오랫동안 빈치 마을의 평범한 소작농의 딸로 알려져 왔습니다. 2023년 한 연구자가 새 문서를 근거로 노예 신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다른 다빈치 연구자들은 이 해석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아직 학계의 합의에 이르지 못한 논쟁입니다.
다빈치는 스스로를 다리와 대포를 만드는 기술자로 팔았지만, 정작 오늘날 우리 곁에 남은 것은 다빈치의 작품으로 널리 인정되는 스무 점이 채 되지 않는 회화와 수천 장의 노트입니다. 그가 스스로 소개한 방식과 후대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야말로 다빈치라는 인물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노트 몇 장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완성을 미룬 자리에 무엇을 남겨두었는지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소장처·전시 정보는 2026년 8월 작성 시점 기준이며, 이후 변경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