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와 작품, 화가라는 이름은 편지 맨 끝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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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오늘날 무엇보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의 화가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서른 살 무렵 밀라노의 실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신을 소개하려고 쓴 편지에서 그는 화가라는 이름을 맨 끝에 적었습니다. 이동식 다리, 해자의 물을 빼는 법, 요새를 무너뜨리는 법, 가볍게 옮기는 대포, 땅굴, 덮개를 씌운 전투 수레, 투석기. 아홉 항목을 전쟁 기술로 채운 뒤 열 번째 항목에서야 「평화 시에는」 건축과 물길 공사를 맡을 수 있고, 조각과 회화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편지 하나로 그가 화가가 아니라 기술자로 자신을 팔았다고 말하는 글이 많습니다. 원문을 읽어 보면 그렇게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편지는 날짜도 발송 기록도 없는 초고이고, 맨 끝의 회화 대목에서 그는 「누구와 견주어도, 상대가 누구든」 해내겠다고 썼습니다. 밀라노에서 문서로 남은 그의 첫 일도 제단화였습니다. 이 글은 그 편지에서 출발해, 화가라는 이름이 왜 맨 끝에 있었고 생애 끝에서는 어디로 옮겨 갔는지를 따라갑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화가·기술자·해부학자의 경계를 넘나든 르네상스의 탐구자
• 생몰: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빈치 출생, 피렌체·밀라노·로마를 거쳐 프랑스 앙부아즈에서 사망)
• 활동 분야: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 조각·건축·해부학·공학 연구
• 대표작: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암굴의 성모, 담비를 안은 여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붉은 초크로 그린 노인의 얼굴. 긴 수염과 눈썹이 얼굴을 덮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소묘〉, 붉은 초크, 토리노 왕립도서관. 자화상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긴 수염과 눈썹 아래 눈매만 또렷하게 남겼다.

다빈치 생애, 베로키오 공방에서 있었던 일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인근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카테리나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카테리나가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오랫동안 빈치 마을의 평범한 농가 딸로 알려져 왔는데, 2023년 나폴리 동양학대학의 연구자 카를로 베체가 피렌체 국가기록보관소의 문서를 근거로 노예 신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이 해석에는 반론도 있어 아직 학계의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빈치는 1460년대 후반 피렌체의 화가 겸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간 해를 적은 문서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1472년, 스무 살에 피렌체 화가들의 단체인 성 루가 회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 뒤로도 몇 해 동안 베로키오 공방과 함께 일했습니다.

강물에 선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 왼쪽 아래에 옷을 든 두 천사가 무릎을 꿇고 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스도의 세례〉, 1470~1475년경, 나무판에 템페라와 유채, 177×151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1890 n. 8358. 왼쪽 아래 두 천사 가운데 몸을 돌려 어깨 너머로 얼굴을 보이는 쪽이 다빈치의 천사로 전한다.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얽힌 이야기는 16세기 화가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가 전합니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서 어린 다빈치가 옷을 받쳐 든 천사 하나를 그렸는데 스승의 인물보다 훨씬 나았고, 그 때문에 베로키오가 어린아이가 자기보다 더 잘 안다는 데 분해 다시는 물감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림을 소장한 우피치 미술관은 이 이야기를 다빈치의 천사가 「나이 든 베로키오를 당황하게 했다」는 데까지만 옮깁니다. 대신 지금의 연구가 다빈치의 손길을 더 넓게 본다고 설명합니다. 강가 풍경과 금빛 햇살, 그리스도의 몸까지 그의 몫으로 보고, 위쪽의 하느님의 손과 비둘기처럼 덜 다듬어진 부분은 또 다른 나이 든 화가가 그렸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사리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책 안에서도 보입니다. 1550년 첫 판은 세르 피에로를 다빈치의 삼촌이라 적었고, 두 판 모두 다빈치가 일흔다섯에 죽었다고 적었습니다. 실제로는 예순일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바사리의 일화에서 뼈대와 장식을 나눠 읽습니다. 다빈치가 공방에서 천사를 그렸다는 뼈대는 우피치도 받아들이지만, 스승이 붓을 꺾었다는 장식은 바사리 말고는 전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생애의 전환점들

1482년 무렵 다빈치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갑니다. 앞에서 본 편지는 이 무렵 쓴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편지 자체에는 날짜가 없습니다. 지금은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레오나르도의 낱장 원고를 모은 큰 묶음)에 들어 있습니다. 다빈치는 왼손잡이라 평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울 글씨를 썼는데, 이 편지는 드물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였고 필체와 철자도 그의 다른 원고와 다릅니다. 19세기 말 레오나르도 원고를 펴낸 장 폴 리히터는 이런 차이가 있어도 위작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깨끗한 정서본을 위해 다듬던 마지막 초안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 적은 사본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군데군데 지운 구절이 남아 있어 초고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편지의 첫머리부터 그는 경쟁자를 의식합니다. 전쟁 기구의 명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시도를 충분히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발명은 흔히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누구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아는 비결을 열어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번호 항목 여럿이 「~할 방법이 있습니다」로 시작합니다. 원문의 열 번째 항목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평화 시에는 건축과 공공·개인 건물의 설계, 물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끌어오는 일에서 누구와 견주어도 충분히 만족시켜 드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대리석·청동·점토 조각, 그리고 회화에서도 누구와 견주어도, 상대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겠습니다.」 그다음 줄에서 그는 루도비코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릴 청동 말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항목이 있으면 정원에서 직접 시험해 보이겠다며 끝을 맺습니다. 순서는 전쟁 기술이 앞이지만 회화를 낮춘 문장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편지가 내민 것은 「화가 대신 기술자」가 아니라, 기술을 앞에 세우고 회화를 맨 뒤에 붙인 한 사람의 쓸모 전체였습니다.

펜과 잉크로 그린 대포 두 문과, 공중으로 흩어지는 수십 개의 둥근 탄
레오나르도 다빈치, 〈폭발탄을 쏘는 박격포〉, 1485년경, 펜과 잉크. 포 두 문에서 솟은 탄이 공중에서 흩어지며 떨어지는 궤적까지 그렸다. 편지에서 앞세운 군사 기술이 이런 구상이었다.

밀라노가 그에게 실제로 맡긴 일은 편지의 순서와 달랐습니다. 문서로 남은 첫 일은 1483년 4월 밀라노 화가 형제 암브로조·에반젤리스타 데 프레디스와 함께 맺은 제단 장식 계약입니다. 이 계약에서 나온 그림이 〈암굴의 성모〉입니다. 바사리는 또 다른 이유를 적었습니다. 리라 소리를 좋아하던 공작 앞에서 연주하라고 불려 갔고, 다빈치가 은으로 손수 만든 말 머리뼈 모양의 리라를 들고 갔다는 것입니다. 다만 바사리는 그 해를 1494년으로 적어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최후의 만찬 미술관은 그가 1499년까지 궁정에서 화가, 놀라운 공연과 무대의 연출가, 기술자, 조각가로 두루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약 17년 동안 스포르차 궁정에 머뭅니다. 이 시기에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리는 청동 기마상에 오래 매달립니다. 1490년 4월 23일 노트에는 「이 책을 시작했고 말을 다시 시작했다」고 적었습니다. 궁정 생활이 넉넉하지만은 않았던 듯, 루도비코에게 쓴 또 다른 편지 초안에는 먹고살 돈을 버느라 공작이 맡긴 일을 이어 가지 못해 몹시 유감이라고 적었습니다.

긴 식탁 뒤에 열세 사람이 앉아 있고 가운데 인물만 홀로 떨어져 있는 벽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4~1498년(미술관 작품 정보는 1495~1498년), 마른 벽에 그린 벽화, 460×880cm, 밀라노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피닌 브람빌라 바르칠론이 1977년에 시작해 1999년에 마친 복원 뒤의 모습이다.

1499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하면서 스포르차 궁정은 무너집니다. 기마상의 점토 모형은 끝내 청동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조하려고 모아 둔 청동은 1494년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앞두고 대포를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바사리는 밀라노에 들어온 프랑스군이 이 모형을 산산이 부쉈다고 적었고, 프랑스 궁수들이 표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말의 다리와 주형 구조를 그린 낱장에 뒤집힌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포르차 기마상에 관한 원고 낱장〉, 1493년경, 펜과 잉크, 21×15cm,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말의 다리와 주형 구조 사이를 뒤집힌 글씨가 메우고 있다.

궁정을 잃은 다빈치는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거쳐 1500년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1502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 밑에서 요새를 점검하고 지도를 그리는 군사 기술자로 일합니다. 편지에서 앞세웠던 쓸모를 실제로 쓴 시기입니다. 1503년 다시 피렌체에 자리 잡은 그는 〈모나리자〉를 시작하고, 시청사 팔라초 베키오 대회의실의 벽화 〈앙기아리 전투〉를 맡습니다. 같은 방에 들어갈 또 하나의 전투 장면은 스물세 살 아래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맡았습니다.

1506년부터 다빈치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오가다 1508년 무렵 밀라노에 다시 자리를 잡습니다. 이 시기에 파비아에서 강의하던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함께 인체를 연구했다고 바사리가 전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돕는 사이였다는 것입니다. 다빈치는 해부 노트 서문에 몇 안 되는 정맥을 제대로 알려고 「열 구가 넘는 시신을 해체했다」고 썼습니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그가 서른 구가 넘는 시신을 해부했다고 적습니다. 델라 토레가 1511년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책을 내려던 계획도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어깨와 팔의 근육을 여러 각도에서 그린 낱장. 그림 사이에 뒤집힌 글씨가 적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깨 해부 연구〉, 1510~1511년경, 펜과 잉크, 윈저 영국 왕실 컬렉션. 같은 어깨를 여러 각도로 돌려 그리고 그 사이에 뒤집힌 글씨로 설명을 달았다.

1513년 다빈치는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따라 로마로 가 바티칸 벨베데레에 머뭅니다. 그리고 1516년 가을, 예순네 살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하인 바티스타 데 빌라니스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습니다. 짐 속에는 〈모나리자〉와 〈성 안나와 성모자〉, 〈세례자 요한〉, 그리고 노트와 소묘가 들어 있었습니다. 앙부아즈 성 가까이의 클로 뤼세 저택에서 지내다 1519년 5월 2일 그곳에서 눈을 감습니다.

바사리는 다빈치가 왕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고 적었고, 이 장면은 오늘날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클로 뤼세의 설명은 다릅니다. 그날 프랑수아 1세는 멀리 생제르맹앙레 성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대목에서 나이를 여덟 살이나 틀리게 적은 바사리의 기록이므로, 임종 장면은 전설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바사리의 같은 장면에는 다빈치가 왕 앞에서 예술에 마땅히 쏟아야 할 만큼 일하지 못해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털어놓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 고백 역시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바사리가 그를 끝내 그림을 덜 그린 화가로 기억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빈치의 화풍은 왜 언제 바뀌었는가

다빈치의 초기 회화는 베로키오 공방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정교한 세부 묘사와 또렷한 윤곽선이 특징입니다. 다만 스푸마토(sfumato, 윤곽선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흐리는 기법)가 밀라노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피렌체 시기의 〈지네브라 데 벤치〉(1474~1478년경,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이미 부드러운 명암 이행이 뚜렷합니다. 1차 밀라노 시기를 지나며 그는 이 방식을 더 밀고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초상화에서 인물의 윤곽은 또렷한 선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의 점진적인 이행으로 표현됩니다. 〈최후의 만찬〉은 결이 다릅니다. 이 벽화가 보여주는 것은 윤곽의 처리보다 구도와 인물들의 몸짓·표정입니다.

이 무렵부터 다빈치는 해부학·광학·지질학 연구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림 속 인체의 근육이나 배경의 바위 모양이 점점 더 관찰에 근거하게 됩니다. 회화가 곧 자연을 연구하는 방법이 되어 간 것입니다.

탐구의 폭이 넓어지는 동안 완성작은 늘지 않았습니다. 만토바의 후원자 이사벨라 데스테는 1499~1500년 무렵 만토바에 들른 다빈치가 소묘 초상을 그린 뒤 여러 해에 걸쳐 채색 초상을 거듭 요청했지만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다빈치에게 전부 또는 일부 귀속되는 현존 회화는 목록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스무 점이 채 되지 않습니다. 클로 뤼세는 그 수를 17점으로 꼽고, 여기에는 미완성작과 귀속 논쟁작도 섞여 있습니다.

다빈치와 함께한 사람들, 그리고 미켈란젤로

다빈치의 생애를 지나간 후원자는 여럿입니다.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17년가량 그를 곁에 두었고, 체사레 보르자는 그를 군사 기술자로 썼습니다. 말년의 프랑수아 1세는 그에게 거처와 연금을 내주었습니다. 클로 뤼세가 전하는 칭호는 「왕의 첫째 화가, 기술자, 건축가」입니다. 서른 살 무렵 편지에서 맨 끝에 있던 화가라는 이름이, 프랑스로 건너간 뒤의 칭호에서는 맨 앞에 와 있습니다. 두 문서를 나란히 놓으면 다빈치가 스스로를 기술자로 판 사람이라기보다, 처음 찾아간 궁정에는 쓸모부터 내밀었고 생애 끝에 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에 가깝다는 것이 이 글의 판단입니다. 그가 프랑스로 가져간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그가 죽을 때까지 끝내지 못한 채 손질하던 그림이고, 프랑수아 1세가 1518년에 사들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동료 화가와의 관계에서는 1504년 팔라초 베키오의 벽화가 가장 뚜렷한 장면을 남겼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다빈치는 산타마리아노벨라 수도원의 「교황의 방」에서 〈앙기아리 전투〉 밑그림을 시작했고, 깃발 하나를 두고 뒤엉켜 싸우는 말 탄 병사들을 그렸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프레스코가 아닌 기름을 쓴 벽화 기법을 시험했으나 물감이 벽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일부만 그린 채 손을 뗐다고 전해집니다. 미켈란젤로는 밑그림만 남긴 채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떠났습니다. 결국 어느 쪽도 완성된 벽화를 남기지 못한 경쟁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 쪽에서 본 이야기는 미켈란젤로의 생애에서 이어집니다.

말 탄 병사 넷이 깃대 하나를 두고 뒤엉켜 싸우는 소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다빈치의 구도를 옮긴 16세기 익명 작가의 그림을 손질하고 넓힌 〈앙기아리 전투〉의 중심 장면,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빈치의 벽화는 남지 않아 이런 사본으로만 구도가 전한다. 깃대 하나를 두고 말 탄 병사 넷이 엉켜 있다.

다빈치 당대의 평판과 후대의 신화

오늘날 다빈치는 회화·조각·건축·과학을 넘나든 만능 천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생전의 평판은 이 이미지와 결이 달랐습니다. 후원자들의 편지와 기록에는 그의 재능에 대한 찬사와, 일을 끝맺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사벨라 데스테가 여러 해에 걸쳐 초상화를 요청한 일 자체가 그의 명성을 보여 주는 증거이면서, 끝내 받지 못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끝내 주조되지 못한 청동 기마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인적인 천재라는 상은 이미 16세기에 바사리가 그려 놓았습니다. 그는 다빈치의 정신을 「더없이 신성했다」고 쓰고, 그 정신이 왕의 품에서 떠났다는 장면으로 전기를 끝맺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 달라진 것은 천재상의 탄생이 아니라, 완성하지 못한 스케치와 노트 수천 장이 출판되면서 과학자·기술자로서의 이미지가 크게 넓어진 일입니다. 루도비코에게 보낸 편지가 그를 기술자로 소개하는 대표 자료가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당대의 불만과 후대의 경탄은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르게 읽은 결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대표작

주요 작품

회화

  • 암굴의 성모(1483년 계약) · 밀라노에서 문서로 남은 첫 주문, 파리 루브르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두 점
  • 최후의 만찬(1494~1498) ·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벽, 실험적 기법 탓에 이른 시기부터 훼손이 기록된 작품
  • 담비를 안은 여인(1490년 무렵) · 밀라노 궁정의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초상
  • 모나리자(1503년경~) · 피렌체에서 시작해 프랑스로 가져가 말년까지 손질한 작품

소묘·연구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1490년 무렵) · 인체 비례를 원과 정사각형에 겹쳐 분석한 소묘

〈최후의 만찬〉은 프레스코가 아니라 마른 벽에 그린 벽화이고, 오늘 우리가 보는 모습은 1999년에 끝난 복원의 결과입니다.

〈담비를 안은 여인〉은 호두나무 판에 유채로 그린 초상으로, 지금 폴란드 크라쿠프 국립박물관(차르토리스키 미술관)에 있습니다. 모델은 루도비코의 연인이었던 체칠리아 갈레라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금속 첨필과 펜, 엷은 수채로 그린 작은 소묘입니다. 이름은 고대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게서 왔지만, 소장처인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이 그림의 치수와 비례가 비트루비우스의 글보다 15세기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조각론을 따르며, 라틴어를 몰랐던 다빈치가 비트루비우스의 책을 깊이 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흰 담비를 품에 안고 몸을 튼 채 화면 밖을 보는 젊은 여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 〈담비를 안은 여인〉, 1489~1491년(소장처는 1490년경으로 표기), 호두나무 판에 유채, 53.4×39.3cm, 크라쿠프 국립박물관(차르토리스키 미술관), MNK XII-209. 여인과 담비가 같은 쪽으로 몸을 틀었고, 얼굴의 윤곽이 선이 아니라 빛으로 넘어간다.
팔다리를 벌린 남자를 원과 정사각형에 겹쳐 그린 소묘. 위아래에 뒤집힌 글씨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년 무렵, 흰 종이에 금속 첨필·펜과 잉크·수채, 34.4×24.5cm(34.6×25.5cm로 적는 자료도 있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228. 팔다리를 벌린 자세와 모은 자세 두 개를 한 몸에 겹쳤다.

〈모나리자〉는 아틀리에에서 스푸마토 기법과 도상 해석까지 따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 생애 이야기에서는 피렌체에서 시작돼 프랑스로 옮겨진 뒤 말년까지 손질된 그림이라는 사실만 짚었습니다. 작품 자체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함께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두 손을 포갠 채 앉아 화면 밖을 보는 여인의 초상. 뒤로 안개 낀 물과 산이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503년경 착수, 포플러 나무판에 유채, 79.4×53.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포갠 두 손 뒤로 안개 낀 물과 산이 멀어진다.

다빈치 작품 감상, 오늘 만나는 법

다빈치를 처음 만난다면 〈최후의 만찬〉과 〈담비를 안은 여인〉을 나란히 놓고 보는 것을 권합니다. 하나는 극적인 순간을 붙잡은 큰 벽화이고, 다른 하나는 조용한 개인 초상입니다. 앞의 것에서는 열세 사람을 묶어 놓은 구도와 몸짓·표정을, 뒤의 것에서는 인물의 윤곽이 또렷한 선이 아니라 부드럽게 번지는 빛으로 넘어가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 식당에서, 〈담비를 안은 여인〉은 크라쿠프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보존을 위해 평소에는 전시하지 않으니, 베네치아에 가더라도 실물을 볼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소장 위치와 전시 여부는 바뀔 수 있어 방문 전 공식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다빈치는 화가로 초빙되어 밀라노에 갔나요?

초빙 경위를 적은 당대 문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밀라노 무렵 쓴 것으로 보는 편지 초안에서 다빈치는 군사·토목 기술을 앞세우고 회화는 열 번째 항목에 적었습니다. 하지만 밀라노에서 문서로 남은 그의 첫 일은 1483년 〈암굴의 성모〉 제단화 계약이었고, 바사리는 그가 리라 연주자로 불려 갔다고 전합니다.

Q. 다빈치는 왜 완성작이 적나요?

정확한 이유는 기록으로 확정되지 않았지만, 후원자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는 여러 일을 동시에 벌여 놓고 끝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사벨라 데스테는 소묘 초상을 본 뒤 여러 해에 걸쳐 채색 초상을 요청했지만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스포르차 청동 기마상도 오래 매달렸으나 청동으로 남지 못했습니다.

Q. 다빈치는 정말 프랑수아 1세의 품에서 죽었나요?

그렇게 볼 근거가 약합니다. 이 장면은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서 나왔는데, 바사리는 같은 문장에서 다빈치의 나이를 일흔다섯으로 잘못 적었습니다. 클로 뤼세에 따르면 1519년 5월 2일 프랑수아 1세는 생제르맹앙레에 있었습니다.

Q. 다빈치는 시신을 몇 구나 해부했나요?

다빈치는 해부 노트에 열 구가 넘는 시신을 해체했다고 직접 적었습니다. 곰브리치는 서른 구가 넘는다고 썼습니다. 정확한 수를 확정할 기록은 없습니다.

Q. 다빈치의 어머니는 누구였나요?

오랫동안 빈치 마을의 평범한 농가 딸로 알려져 왔습니다. 2023년 한 연구자가 새 문서를 근거로 노예 신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반론도 있어, 아직 학계의 합의에 이르지 못한 논쟁입니다.

다빈치는 서른 살 무렵 다리와 대포를 앞세운 편지로 자신을 소개했고, 그 편지의 맨 끝에 화가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밀라노가 처음 그에게 맡긴 것은 제단화였고, 프랑스 왕이 마지막에 준 칭호는 화가로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스무 점이 채 안 되는 회화와 수천 장의 노트입니다. 루도비코에게 쓴 편지 초안이 든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도 기계 설계와 건축 스케치가 한 묶음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에게 기술자와 화가는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 함께 적히던 일로 보입니다. (본문의 소장처·전시 정보는 2026년 10월 기준이며, 이후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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