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뮤즈로 불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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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가 1909년에 그린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시인과 그의 뮤즈를 그린 것인데, 모델은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시인은 기욤 아폴리네르이고 뮤즈는 화가 마리 로랑생입니다. 그림 속에서 여자는 팔을 들어 시인에게 영감을 내려 주는 자세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남자보다 크게, 화면의 왼쪽을 차지하며 그려져 있습니다.

두 인물이 정면으로 나란히 서 있고 왼쪽 인물이 팔을 들어 올렸으며 발치에 붉고 흰 꽃이 피어 있는 그림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년. 로랑생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팔을 든 쪽이 로랑생이고 옆이 아폴리네르이며, 여자가 남자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루소가 사람을 크게 그린 데에는 별 뜻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로랑생을 소개하는 방식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시인의 뮤즈로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그는 그 서클을 자기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고, 그 그림을 사 간 사람은 파리에서 가장 안목 있는 수집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큐비즘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큐비즘을 택하지 않고 자기 색조를 밀고 나간 화가
• 본명: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 생몰: 1883년 10월 31일 파리 출생 ~ 1956년 6월 8일 파리 사망(향년 72세)
• 국적·활동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 1914~1921년 스페인과 독일에서 망명 생활
• 활동 분야: 유화, 수채, 판화, 무대·의상 디자인, 삽화
• 대표작: 예술가 그룹(1908), 발레 〈암사슴들〉의 무대와 의상(192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1930)
※ 로랑생의 작품은 아직 저작권 보호 기간에 있어 이 글에는 그의 그림 이미지를 싣지 않았습니다. 실물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자기 공방에서 시작한 사람

로랑생은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린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홀로 키웠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짧은 곱슬머리에 어두운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정면을 바라보는 흑백 사진
마리 로랑생, 1949년 사진. 촬영 칼 반 벡텐. 그림이 아니라 화가 본인의 모습이다.

그가 처음 배운 것은 회화가 아니라 도자기에 그림을 넣는 기술이었습니다. 세브르의 공방에서 배운 이 기술이 뒤에 그의 화면을 설명하는 단서가 됩니다. 도자기 채색은 유화와 다릅니다. 색이 얇고 투명해서 윤곽선이 또렷하게 남고, 바탕의 흰색이 색 밑에서 비쳐 올라옵니다. 그의 그림에서 흔히 ‘파스텔 톤’이라 불리는 성질이 여기서 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1904년 그는 앵베르 아카데미에 들어갑니다. 사립 화실이었고 여성도 받았습니다. 국립미술학교가 여성에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제약이 많던 시절이라, 이런 사립 화실이 여성 화가의 통로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조르주 브라크와 동문이 됩니다. 몇 해 뒤 큐비즘을 만들게 되는 사람입니다.

바토라부아르의 유일한 여자

브라크의 소개로 그는 몽마르트르의 낡은 작업실 건물 바토라부아르 서클에 들어갑니다. 피카소가 그곳에 있었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드나들었습니다.

1907년 무렵 로랑생과 아폴리네르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략 다섯 해 남짓 이어지다 끝났고, 이 이별이 아폴리네르의 유명한 시들과 연결되어 이야기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로랑생은 시에 나오는 사람으로 먼저 소개됩니다.

여기서 나란히 놓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1908년, 스물다섯의 로랑생은 〈예술가 그룹〉이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화면에는 피카소와 아폴리네르와 피카소의 연인, 그리고 로랑생 자신이 함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거트루드 스타인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새 그림을 가장 먼저 알아보던 수집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같은 시기에 그는 그려지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루소의 화면 안에서는 뮤즈였고, 자기 화면 안에서는 그 서클의 기록자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놓지 않으면 그의 생애를 절반만 보게 됩니다.

큐비즘 옆에 서서 다른 것을 하다

1910년 전후 몇 해 동안 파리에서 벌어진 일은 미술사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대상을 분해해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겹치는 방식을 밀고 나갔고, 곧 다른 화가들이 합류했습니다.

로랑생은 이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1911년 앵데팡당전에서 큐비스트들의 그림을 모아 건 전시실에 그의 작품도 걸렸고, 이후 큐비즘 계열 전시에도 참여했습니다. 큐비즘을 옹호한 이론서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큐비즘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형태를 조각내지 않고, 갈색과 회색의 단조로운 색조를 쓰지도 않습니다. 대신 이런 특징을 가집니다.

  • 색이 옅고 맑습니다. 분홍·회색·연푸른색·검정이 주조를 이룹니다.
  • 얼굴이 단순해집니다. 타원형 얼굴에 검은 눈, 코와 입은 최소한으로 표시됩니다.
  • 여성과 동물이 반복됩니다. 여자들과 사슴, 말, 개가 함께 등장하며 배경은 대체로 비어 있습니다.
  • 깊이가 얕습니다. 인물이 배경 앞에 떠 있듯 놓입니다.

이 선택은 오랫동안 능력의 한계로 읽혔습니다. 큐비즘의 지적인 실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장식적인 그림에 머물렀다는 평가입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자주 ‘여성적’이라는 말과 함께 왔습니다. 칭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본류에서 밀어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서를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큐비즘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브라크와 같은 화실에서 배웠고, 피카소의 작업실을 드나들었으며, 큐비스트 전시실에 자기 그림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려는 것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같은 시기 마티스도 형태를 분해하는 대신 색과 평면으로 갔습니다. 20세기 초의 길이 큐비즘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적을 잃다

1914년, 그는 독일 국적의 화가 오토 폰 베트옌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몇 주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당시 프랑스 법에서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국적을 따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과 동시에 프랑스인이 아니게 되었고, 전쟁이 시작되자 적국인이 되었습니다. 파리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스페인으로 갑니다. 마드리드와 말라가에서 지냈고, 이후 독일에도 머뭅니다. 망명기는 육 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색이 더 옅어지고 인물은 더 비현실적으로 변합니다.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그린 화면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 옅음이 다르게 읽힙니다.

망명은 1921년 4월에 끝납니다. 그해 7월 이혼하고, 프랑스 국적은 이듬해 4월에 회복합니다. 돌아왔을 때 그는 서른일곱이었습니다.

1920년대, 파리가 그를 사다

귀국 후 십여 년은 그의 전성기였습니다. 1920년대 파리에서 그의 그림은 매우 잘 팔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여러 갈래였습니다.

  • 초상화 · 사교계 여성들이 그에게 초상을 주문했습니다. 그의 화면에서 사람들은 실제 생김새보다 그의 양식에 맞추어 그려졌습니다. 그것이 인기의 이유이기도 했고, 때로 갈등의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의 초상을 그렸으나 당사자가 받기를 거부한 일이 전해집니다.
  • 무대미술 · 1924년 발레 뤼스가 올린 〈암사슴들〉의 무대와 의상을 맡았습니다. 젊은 작곡가의 음악에 맞춘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로랑생의 색조가 무대 전체를 덮었습니다. 회화의 양식을 극장 규모로 확대한 사례입니다.
  • 삽화 · 1930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비롯한 책의 삽화를 맡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로는 활동이 줄어들지만 그림은 계속 그렸고, 후배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956년 파리에서 일흔둘로 세상을 떠납니다.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습니다. 장례 때 그가 남긴 뜻에 따라 손에 장미 한 송이와 아폴리네르의 편지가 함께 놓였다고 전해집니다. 사십 년도 더 전에 끝난 관계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20세기 후반 일본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어 많은 작품이 그곳으로 건너갔습니다. 오늘날 그의 대표작 상당수가 프랑스 밖에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요 작품

※ 로랑생의 작품은 아직 저작권 보호 기간에 있습니다. 아래 작품들은 이미지 대신 제목으로만 정리했습니다. 실물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을 비롯한 소장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예술가 그룹(1908) · 아폴리네르·피카소와 자신을 함께 그린 초기작. 거트루드 스타인이 구입했습니다.
  •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1909) · 같은 서클을 다시 그린 확장판.
  • 망명기 연작(1915~1920) · 스페인 체류 중 그린 여성 인물화들. 색이 가장 옅어지는 시기입니다.
  • 여인과 사슴 계열(1920년대) · 여성과 동물이 함께 놓인 그의 대표적 도상.
  • 발레 〈암사슴들〉 무대·의상(1924) · 발레 뤼스와 함께한 무대미술.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1930) · 책 삽화 작업.

이 글에는 로랑생 본인의 그림이 한 점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나 저작재산권 보호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 두 도판은 로랑생의 작품이 아니라 ①그를 모델로 그린 앙리 루소의 그림(1909년 · 퍼블릭 도메인)과 ②화가 본인을 찍은 사진(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작품 실물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을 비롯한 소장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연결된 페이지는 본문에 나온 발레 〈암사슴들〉의 오랑주리 소장 작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리 로랑생은 큐비스트입니까?
큐비스트 그룹의 전시에 참여했고 그 서클의 일원이었지만, 화면 자체는 큐비즘의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형태를 분해하지 않고 옅은 색조와 단순한 윤곽으로 인물을 그렸습니다. 큐비즘의 주변에 있으면서 다른 길을 간 화가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Q. 왜 프랑스 국적을 잃었습니까?
1914년 독일 국적의 화가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랑스 법은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국적을 따르도록 했고, 곧 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적국인 신분이 되어 프랑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1921년 프랑스로 돌아와 같은 해 이혼했고, 국적은 1922년에 회복했습니다.

Q. 그의 그림에 왜 이 글에서는 이미지가 없습니까?
저작권 때문입니다. 1956년에 사망했으므로 저작재산권 보호 기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작품을 보려면 소장 미술관의 공식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Q. ‘여성적인 화가’라는 평가는 정당합니까?
그의 색조와 소재가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표현이 오랫동안 작품을 본류 바깥으로 밀어내는 데 쓰였다는 점은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시기 남성 화가가 옅은 색과 단순한 형태를 썼을 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Q. 아폴리네르와의 관계는 그의 예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서클에 진입하고 활동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관계가 그의 화풍을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양식적 특징은 관계가 끝난 뒤 망명기와 1920년대에 오히려 뚜렷해집니다.

다시 그 그림 앞에서

루소가 그린 시인과 뮤즈로 돌아갑니다. 그림 속에서 여자는 팔을 들어 시인에게 영감을 내려 줍니다. 백 년 넘게 이 구도가 그를 설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영감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그는 자기 캔버스 앞에 서서 그 서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몇 해 뒤 큐비스트들의 전시실에 자기 그림을 걸었고, 그 방법을 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국적을 잃고 육 년을 떠돌았고, 돌아와 극장의 무대 전체를 자기 색으로 덮었습니다.

영감을 준 사람이 아니라 영감을 가지고 일한 사람으로 그를 다시 놓으면, 옅은 분홍과 회색으로 된 그 화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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