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해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스푸마토의 의미
1. 레오나르도 다빈치
✅ 핵심 요약 : 모나리자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르네상스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적 탐구와 예술적 통찰이 집대성된 결과물입니다. 그의 말년 활동 무대였던 프랑스는 이 작품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1503년경 피렌체로 돌아와 제작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 시기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으며, 인체 해부학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예술과 결합되던 때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인물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의 심리, 즉 "영혼의 움직임(moti dell'animo)"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이미 관찰되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깊은 이해, 자연에 대한 세밀한 묘사력, 인물의 감정을 포착하는 능력은 모두 모나리자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동경하던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습니다. 1516년, 그는 왕의 거처인 앙부아즈 성 근처의 클로 뤼세(Clos Lucé) 성에 머물며 '국왕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 기술자'라는 칭호를 받고 최고의 예우 속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정리하는 데 집중했으며, 모나리자를 비롯한 아끼는 작품들을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이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3년은 모나리자가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남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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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1503년~1506년경, 53 x 79 cm, 루브르 박물관 |
2. 모나리자의 탄생 배경
✅ 핵심 요약 : 이 작품은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를 위해 주문했으나,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인도하지 않고 평생 간직하며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모나리자는 1503년경 피렌체의 부유한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가 자신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했다는 것이 가장 널리 인정되는 설입니다. '라 조콘다'라는 이름은 남편의 성에서, '모나리자'는 '리사 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 유독 애착을 가져 주문자에게 인도하지 않고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이주할 때 직접 가져갔습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그림을 수정하고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프랑스 국왕에게 판매되었고, 이후 왕실 소장품이 되어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3. 작품의 재료와 보존 상태
✅ 핵심 요약 : 포플러 나무 위에 수십 겹의 얇은 유화 기법으로 그려졌으며, 500년의 세월 동안 자연스러운 균열(크라클뤼르)과 바니시 변색이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루브르의 첨단 기술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포플러 나무 패널 위에 유화로 그려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안료를 기름에 섞어 아주 얇게 겹쳐 칠하는 글레이징(Glazing) 기법을 극단적으로 사용하여 스푸마토 효과를 완성했습니다. 현재 작품 표면에는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인 미세 균열(크라클뤼르)이 있으며, 여러 겹의 바니시(varnish) 층이 산화되어 전체적으로 노란빛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박물관 연구복원센터(C2RMF)의 과학적 분석 결과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항온, 항습, 방탄유리로 구성된 최첨단 시스템으로 작품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4. 루브르 박물관 공식 작품 해설
✅ 핵심 요약 :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를 '혁신적인 구도', '살아있는 듯한 존재감', '인간과 자연의 융합'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공식 해설하며, 이는 전 세계 연구의 표준이 됩니다.
서양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이 초상화는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인 리사 게라르디니의 초상으로 추정됩니다. 이 작품이 지닌 신화적인 위상은 그 역사만큼이나 다채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모델은 당시 피렌체 초상화의 관습과는 다른 혁신적인 구도로 그려졌습니다. 가슴 높이에서 잘린 채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몸을 관람객에게 거의 3/4 각도로 틀고, 얼굴은 정면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몸과 얼굴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이 역동적인 자세('콘트라포스토')는 인물에게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부여합니다.
초상화가 주는 강력한 인상은 무엇보다도 모델과 관람객 사이에 형성되는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레오나르도는 윤곽선을 부드럽게 뭉개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빛과 그림자가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모델의 얼굴에 미묘한 생명력을 부여했습니다. 모델은 관람객을 직접 바라보며 그 유명한,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입꼬리와 눈가의 윤곽선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하여 표정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미소의 의미는 포착하기 어려우며 보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배경의 광활한 풍경은 바위, 물, 아득한 산들로 이루어져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수평선이 인물의 눈높이보다 높고 왼쪽과 오른쪽 풍경이 불일치하는 구성은 이곳이 실제 장소가 아닌 상상 속의 이상적인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레오나르도가 평생 곁에 두었던 이 작품은 그가 프랑스로 이주하며 가져왔고, 프랑수아 1세가 구입한 이후 왕실 컬렉션에 포함되었습니다.
5. 모델의 진짜 정체
✅ 핵심 요약 : 수많은 가설이 있었지만, 현재 정설은 16세기 역사가 바사리의 기록에 근거한 피렌체 상인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입니다.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미술사학계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인물은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입니다. 그녀는 15-16세기 피렌체의 부유한 비단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이자 역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작품의 이탈리아어 제목인 '라 조콘다(La Gioconda)'는 바로 남편의 성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상적인 여인상, 레오나르도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심지어는 여성화된 레오나르도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6. 과학과 예술의 구체적인 연결
✅ 핵심 요약 : 모나리자의 사실성은 레오나르도의 광범위한 과학적 지식과 탐구의 결과입니다. 특히 그의 정교한 안면 근육 연구는 모나리자의 '모호한 미소'를 구현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술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해당 해부도가 모나리자의 직접적인 준비 드로잉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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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안면 및 팔 근육 해부도 |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은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탐구 정신에 있으며, 모나리자는 그 정점에 있는 결과물입니다. 그의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는 작품의 사실성을 비약적으로 높였습니다.
- 해부학과 미소 : 레오나르도는 인간의 얼굴을 직접 해부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모든 미세 근육의 움직임을 상세히 스케치했습니다. 특히 입둘레근, 광대근, 구각거근 등 표정근과 근육 섬유의 방향, 수축·이완을 집요하게 기록했습니다. 모나리자의 포착하기 어려운 미소, 즉 입꼬리와 광대 주변의 미세한 명암 전이(스푸마토)는 이러한 해부학적 관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술적 처리입니다. 모나리자(c.1503–1519) 제작 기간과 그의 안면 해부 스케치 시기(c.1510–1511)가 부분적으로 겹치므로, 그의 최신 해부 지식이 초상화 완성과정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광학과 스푸마토 : 그는 빛이 물체에 부딪히고 눈이 이를 인식하는 과정을 연구한 광학(Optics)의 대가였습니다. 특히 시야의 중심보다 주변부에서 형태가 더 흐릿하게 보인다는 '주변시(peripheral vision)'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스푸마토 기법은 바로 이 원리를 회화에 적용하여, 관람객이 입술을 직접 보지 않을 때 미소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만든 과학적 장치입니다.
- 지질학과 풍경 : 모나리자의 배경에 있는 기암괴석과 물의 흐름은 단순한 상상이 아닙니다. 이는 레오나르도가 알프스 산맥을 여행하며 직접 관찰하고 스케치한 물의 침식 작용과 퇴적암의 형성 과정에 대한 지질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과학적으로 재구성된 풍경입니다.
7. 레오나르도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
✅ 핵심 요약 : '지네브라 데 벤치', '담비를 안은 여인' 등 이전 작품들과 비교할 때, 모나리자는 인물의 심리 묘사와 배경의 통합 면에서 레오나르도 초상화 예술의 정점이자 완성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혁신성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다른 초상화들과 비교할 때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의 초기 초상화인 '지네브라 데 벤치'는 3/4 정면의 구도를 취하고 있으나 다소 경직된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로 인물의 내면보다는 외형적 묘사에 치중합니다. '담비를 안은 여인'에서는 상체와 머리의 방향을 달리하여 역동성을 부여하는 '콘트라포스토'를 적용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배경과 인물이 다소 분리된 느낌을 줍니다.
반면 모나리자는 이러한 시도들이 총체적으로 완성된 결정체입니다. 자연스러운 콘트라포스토 자세, 스푸마토 기법을 통해 배경과 완벽하게 융화된 인물, 그리고 포착할 수 없는 내면의 심리를 담아낸 미소는 이전의 모든 초상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게 하는, 서양 미술사상 전례 없는 성취를 보여줍니다.
8. 시대별 감상과 해석의 역사
✅ 핵심 요약 : 초기에는 '사실적인 그림'으로, 19세기에는 '신비로운 팜 파탈'로, 20세기에는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평가받는 등, 모나리자는 시대의 사상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왔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변해왔습니다. 16세기 조르조 바사리는 그림의 '살아있는 듯한 생생함'을 극찬하며 기술적 완벽함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수 세기 동안은 왕실 컬렉션의 일부로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진 작품이었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모나리자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팜 파탈'의 상징으로 재탄생합니다. 특히 영국의 비평가 월터 페이터는 그녀를 "수없이 죽음을 경험하고 무덤의 비밀을 배운 뱀파이어"에 비유하며, 그녀의 미소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인간 경험의 총체라고 해석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새로운 해석의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모나리자의 미소가 레오나르도의 유년기 기억 속에 있는 친어머니의 미소와 계모의 미소가 결합된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사실 여부를 떠나, 작품을 화가의 내면 심리를 탐구하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현대적 비평의 문을 열며 모나리자 해석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9. 미술사적 의의
✅ 핵심 요약 : 스푸마토, 콘트라포스토, 대기 원근법이라는 3대 혁신을 통해, 모나리자는 이전까지의 평면적인 초상화 개념을 깨고 인간의 내면을 담아내는 살아있는 예술로 격상시켰습니다.
모나리자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정점에서 탄생한, 과학과 예술이 결합된 인간 탐구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 스푸마토 (Sfumato) : 윤곽선을 명확히 그리지 않고 색을 미묘하게 번지게 하여 형태를 부드럽게 융화시키는 기법입니다. 특히 입꼬리와 눈가에 적용된 스푸마토는 모나리자의 신비롭고 포착하기 어려운 미소의 핵심 비결입니다.
-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의 적용 : 인물의 상체와 얼굴의 방향을 미세하게 틀어 정적인 초상화에 생동감과 움직임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당시 초상화의 전형적인 딱딱함을 깨는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 인물과 배경의 통합 : 이전의 초상화들이 인물과 배경을 분리하여 그린 것과 달리, 레오나르도는 인물과 배경의 대기(공기)를 하나로 연결하는 '대기 원근법(prospettiva aerea)'을 적용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0. 작품의 명성을 만든 결정적 사건들
✅ 핵심 요약 : 1911년의 '대도난 사건'은 모나리자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1963년의 '미국 전시'는 그를 전 지구적인 미디어 셀러브리티로 격상시켰습니다.
1911년 도난 후 텅 빈 벽 vs 1963년 미국 전시회 인파 |
모나리자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1911년의 대도난 사건입니다. 루브르에서 일하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는 이 작품이 본래 이탈리아의 것이어야 한다는 애국심에 그림을 훔쳐 피렌체로 밀반출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입장에서 국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국가적 트라우마'로 받아들여졌습니다. 2년 후 그림이 발견되어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라 조콘드'의 귀환을 맞이했고, 이 사건을 통해 모나리자는 미술 작품을 넘어 프랑스 국민 모두의 소중한 '국가적 보물'로 각인되었습니다.
둘째는 1963년의 미국 순회 전시입니다. 당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의 요청으로 성사된 이 전시는 냉전 시대에 프랑스와 미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대대적인 문화 외교 이벤트였습니다. 워싱턴 D.C. 국립미술관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 170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그림을 관람했고, 이 모습이 TV를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었습니다. 이는 미술품 역사상 최초로 한 작품이 현대적인 미디어 셀러브리티(celebrity)의 지위를 얻게 된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11. 프랑스의 국보가 되기까지 : 소장 역사와 상징성
✅ 핵심 요약 : 레오나르도가 직접 프랑스로 가져와 국왕에게 판매한 '합법적 유산'이며, 오랜 역사를 거치며 프랑스의 문화적 자부심과 '보편적 박물관' 정신을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모나리자의 소유권 역사, 즉 프로브넌스(provenance)는 명확합니다. 1517년경 프랑스로 이주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직접 소지하고 있다가, 그가 사망한 후 제자 살라이를 거쳐 1518년 프랑수아 1세 국왕이 구입했습니다. 이후 퐁텐블로궁, 베르사유궁 등 프랑스 왕실 컬렉션으로 이어지다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1797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당한 역사 위에서, 프랑스는 모나리자를 자국의 위대한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레오나르도가 프랑스 국왕의 존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가져온 '합법적 유산'임을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루브르를 인류 전체의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여 전 세계인에게 선보이는 '보편적 박물관(Musée Universel)'으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라는 보편적 문화의 용광로 속에서 전 인류의 자산으로 승화된 상징물로 해석됩니다. 즉, 모나리자의 이탈리아적 기원은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 문화의 포용성과 세계성을 증명하는 사례로 여겨집니다.
12. 원본의 비밀을 푸는 열쇠, '프라도 모나리자'
✅ 핵심 요약 :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바로 옆에서 동시에 그린 프라도 버전은, 세월에 가려진 원본의 화사한 색감과 디테일을 보여줌으로써 '500년 전 모나리자의 모습'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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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비교(루브르 버전 프라도 버전) |
루브르의 모나리자를 이해하는 또 다른 창은 바로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한 모나리자 복제품입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단순한 모작으로 알려졌으나, 2012년 과학적 분석 결과 레오나르도의 제자(프란체스코 멜치로 추정)가 스승과 동일한 시간에 바로 옆에서 함께 그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프라도 버전은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며, 특히 검게 변색된 바니시 층을 제거하자 루브르 원본에서는 세월에 가려 보이지 않던 놀라운 세부 묘사와 화사한 원본 색감이 드러났습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500년 전 모나리자의 원래 모습'을 추정하고, 루브르 원본의 노화 과정을 역추적하는 귀중한 단서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복제품은 레오나르도 공방의 제작 시스템과 제자 교육 방식을 연구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로 활용됩니다.
13.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과 패러디
✅ 핵심 요약 : 마르셀 뒤샹의 도발적인 패러디를 시작으로, 모나리자는 수많은 예술, 영화, 광고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되며 '고전'을 넘어 '현대의 아이콘'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20세기 이후 미술관의 벽을 넘어 대중문화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1919년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 복제품에 콧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라는 제목을 붙인 다다이즘 작품이었습니다. 이는 기존 예술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등 수많은 예술가가 모나리자를 재해석했으며, 냇 킹 콜의 노래 'Mona Lisa'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는 작품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설정으로 다시 한번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광고, 영화, 애니메이션, 상품 디자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명작' 혹은 '풀리지 않는 신비'를 상징하는 시각적 기호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14. 최신 연구결과
✅ 핵심 요약 :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밑그림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배경 속 다리의 실제 장소가 특정되는 등 모나리자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탐구입니다.
첨단 과학 기술의 발전은 모나리자의 숨겨진 비밀을 계속해서 밝혀내고 있습니다.
- 밑그림(스폴베로 기법)의 발견 : 프랑스 C2RMF의 다중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모나리자 그림 아래에 숨겨진 밑그림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스폴베로(Spolvero)' 기법, 즉 도안에 구멍을 뚫고 그 위로 목탄 가루를 두드려 윤곽선을 나무판에 옮기는 방식을 사용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그가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사전에 정교한 준비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입니다.
- 초기 구상의 변화 : 과학적 분석 결과, 현재 보이는 모습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구상과는 다소 다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눈썹이 그려져 있었으며, 의상의 일부나 손의 위치도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레오나르도가 오랜 기간 그림을 곁에 두고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며 수정한 결과입니다.
- 배경 속 다리의 정체 확인 : 오랫동안 상상의 풍경으로 여겨졌던 그림 배경 속 다리의 실제 장소가 확인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실바노 빈체티(Silvano Vinceti)는 항공사진, 드론 촬영, 역사 문서를 비교 분석하여 그림 속 다리가 토스카나 주 아레초(Arezzo)현에 위치했던 '로미토 디 라테리나(Romito di Laterina)' 다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4개의 아치를 가졌던 이 다리의 모습이 그림 속 묘사와 일치하며, 레오나르도가 1500년대 초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모나리자에 대해 가장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그래서 모나리자의 모델은 정확히 누구인가요?
A: 현재 가장 유력한 정설은 피렌체의 비단 상인 아내였던 '리사 게라르디니'입니다. 이는 16세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Q2: 모나리자는 왜 그렇게 유명해졌나요?
A: 세 가지 결정적 계기가 있습니다. 첫째, 레오나르도의 혁신적인 기법이 담긴 예술적 가치. 둘째, 1911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도난 사건. 셋째, 1963년 대중 매체의 주목을 받은 미국 순회 전시입니다.
Q3: 모나리자의 미소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요?
A: 비밀은 레오나르도가 창안한 '스푸마토' 기법에 있습니다. 입꼬리와 눈가의 윤곽선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하여, 보는 사람의 시선이나 각도에 따라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도록 만든 과학적인 장치입니다.
Q4: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그림인데 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나요?
A: 도난이나 약탈이 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이주할 때 직접 가져갔고, 이후 국왕에게 정식으로 판매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합법적인 경로로 프랑스 왕실 소유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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