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의 만년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물감이 문질러진 자국이 나옵니다. 붓끝으로 낸 선이 아니라 무언가로 눌러 밀어 놓은 흔적입니다. 그것이 손가락이라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그의 제자였던 팔마 일 조바네입니다. 다만 우리가 읽는 형태로 기록된 것은 1674년, 티치아노가 죽고 100년쯤 지난 뒤입니다. 베네치아 회화를 다룬 마르코 보스키니의 책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화가가 남긴 기록이 아니라 제자의 증언을 후대가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남아 있는 그림이 그 서술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 한 줄 정의: 60년 넘게 활동하며 색으로 형태를 만드는 베네치아 회화를 유럽 전체의 기준으로 올려놓은 화가
• 생몰: 1488년에서 1490년 사이 피에베 디 카도레 출생, 1576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베네치아 공화국, 아우크스부르크와 로마 등지의 궁정
• 활동 분야: 제단화와 신화화, 초상화
• 대표작: 〈성모 승천〉,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 〈우르비노의 비너스〉, 펠리페 2세를 위한 신화화 연작, 미완의 〈피에타〉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증언,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기록의 성격은 전언이지만, 그림이 그 전언을 뒷받침합니다.
| 티치아노, 〈자화상〉,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옷과 손의 처리가 굵은 붓질로만 이루어져 있다. |
보스키니가 옮긴 서술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티치아노는 마지막 단계에서 붓보다 손가락을 더 많이 썼고, 밝은 부분에서 중간 톤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이었으며, 어느 구석을 강하게 만들고 싶으면 손끝에 물감을 묻혀 어두운 점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이 갈립니다. 노년의 그가 붓을 제대로 쥘 수 없어서 그랬다는 설명이 있고,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물감층을 겹쳐 쌓으면서 경계를 흐리는 방식이 인물에 움직임과 깊이를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느 쪽도 화가 자신이나 동시대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보스키니의 서술 자체가 손가락을 썼다는 사실만 전할 뿐 이유를 적지 않습니다.
다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 방식은 회화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형태를 선으로 확정한 뒤 그 안을 채우는 방식이 표준이던 시대에, 그는 색 덩어리를 쌓고 문질러서 형태가 저절로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루벤스와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가 딛고 선 자리가 여기입니다.
색으로 형태를 만든다는 것
그가 배우던 무렵의 베네치아가 마침 그 방향으로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티치아노는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배웠고, 젊은 시절에는 조르조네와 함께 일했습니다. 두 사람이 그린 그림을 지금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가까웠습니다. 벨리니의 그림도 처음부터 색이 앞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기작은 윤곽이 뚜렷하게 잡혀 있고, 유화로 옮겨 가면서 만년에야 색과 빛이 형태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티치아노가 들어간 자리가 그 변화의 한복판이었습니다.
|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젊은 시절의 티치아노는 이 화가와 함께 일했고 두 사람의 그림은 지금도 구분이 어렵다. |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같은 자세를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 놓았다. |
같은 시기 피렌체와 로마의 화가들이 소묘를 회화의 뼈대로 삼았다면, 베네치아는 색을 뼈대로 삼았습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습기가 많은 도시라 벽화가 오래가지 못했고, 그래서 캔버스에 유화로 그리는 방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캔버스와 유화 물감은 여러 번 덧칠하고 고쳐 그리기에 적합합니다.
1518년에 프라리 성당에 걸린 〈성모 승천〉이 그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알린 작품입니다. 높이 7미터에 가까운 화면에서 성모가 붉은 옷을 입고 위로 올라가고, 아래쪽 사도들은 팔을 뻗어 올려다봅니다. 성당의 긴 통로 끝에서 보면 붉은색 덩어리 하나가 어둠 속에서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색이 구도를 대신하는 화면입니다.
| 티치아노, 〈성모 승천〉, 1518년,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 화면을 셋으로 나눈 가로 띠와 그 사이를 잇는 붉은색의 위치를 본다. |
몇 해 뒤 같은 성당에 걸린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에서는 성모를 화면 중앙에서 옆으로 밀어냈습니다. 제단화의 중심을 비우는 이 결정이 이후 구도의 관습을 바꿨습니다.
| 티치아노,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 성모가 화면 중앙에서 옆으로 밀려나 있다. |
황제의 화가가 된다는 것
군주의 초상을 그린 화가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그 대가로 작위까지 받은 경우는 드뭅니다.
1533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그를 궁정백으로 삼고 황금박차 기사 작위를 내립니다. 화가에게 주어진 예외적인 대우였습니다. 이후 티치아노는 황제와 그 아들 펠리페 2세를 위해 오래 일했습니다.
| 티치아노, 〈뮐베르크의 카를 5세〉. 그는 이 황제에게 귀족 칭호와 기사 작위를 받았다. |
이 관계를 두고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업 중에 티치아노가 붓을 떨어뜨리자 황제가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워 주었다는 것입니다. 화가의 지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보여 주는 일화로 자주 인용되지만, 동시대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로 봅니다.
확인되는 것은 계약과 편지에 남은 사실들입니다. 그는 연금을 받았고, 대금 지급이 늦어지면 끈질기게 독촉했으며, 아들의 성직록을 청탁하기도 했습니다. 낭만적인 예술가상과는 거리가 있는, 사업가에 가까운 면모입니다.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린 신화화 연작은 그의 후기 작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는 이 그림들을 시라는 뜻의 말로 불렀습니다. 이야기를 설명하는 그림이 아니라 시처럼 읽히는 그림을 목표로 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이 화면에서 무엇을 뜻했는지는 그가 직접 적어 두었습니다. 1554년에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보내면서 쓴 편지에서, 먼저 보낸 〈다나에〉를 앞에서 본 모습으로 그렸으니 이번에는 다르게 해서 반대쪽을 보이고 싶었다고 밝힙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걸면 같은 몸을 앞뒤로 돌려 본 셈이 됩니다. 조각을 돌려 가며 보는 일을 회화가 두 장으로 해낼 수 있다는 주장이고, 그림 한 점이 아니라 그림들 사이의 관계로 말하는 방식입니다.
| 티치아노, 〈비너스와 아도니스〉.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린 신화화 연작 가운데 한 점이다. |
만년, 형태가 풀리기 시작하다
여든이 넘어서도 그는 그리고 있었고, 화면은 점점 풀렸습니다.
후기 작품의 특징은 어둠입니다. 배경이 짙어지고 인물이 그 어둠에서 반쯤 떠오릅니다. 윤곽선은 사라지고 물감의 두께와 밝기 차이만 남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당대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완성하지 않고 내놓았다는 비판이 있었고, 반대로 이것이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이후 400년 동안 반복됩니다. 어디까지 그려야 그림이 끝난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576년 여름 베네치아에 역병이 돌았고, 티치아노는 그 와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습니다. 출생을 기록한 문서가 확인되지 않는 데다, 본인이 남긴 숫자부터 믿기 어렵습니다. 1571년에 펠리페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기 나이를 아흔다섯이라고 적었습니다. 오늘날 통용되는 추정보다 열 살 넘게 많은 숫자입니다. 앞에서 본 독촉 편지들과 같은 자리에 놓고 보면 짐작이 갑니다. 늙었다는 말은 밀린 대금을 재촉하는 데 쓸모가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티치아노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베네치아의 프라리 성당에 〈성모 승천〉과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가 원래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 펠리페 2세 소장품을 물려받아 티치아노를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린 여섯 점의 신화화 연작 ‘포에지에’는 여러 나라로 흩어졌고 프라도에 남은 것은 〈비너스와 아도니스〉 한 점입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과 런던 내셔널갤러리에도 대표작이 있습니다. 전시 여부는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Q. 베네치아 회화와 피렌체 회화는 무엇이 다른가요?
A. 크게 보면 무엇을 뼈대로 삼는가가 다릅니다. 피렌체는 소묘, 즉 선으로 형태를 확정하는 것을 회화의 기초로 보았고, 베네치아는 색을 그 자리에 두었습니다. 이 차이는 당시에도 논쟁거리였고, 두 진영이 서로를 비판하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Q. 정확한 생년이 왜 불분명한가요?
A. 출생을 기록한 문서가 확인되지 않았고, 후대 자료마다 연도가 다르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1571년 편지에 적은 아흔다섯이라는 숫자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에는 1488년에서 1490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미완의 피에타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그림은 〈피에타〉였습니다. 자기 무덤에 걸 작품으로 준비한 것인데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다른 화가가 마무리해 지금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화면 전체가 회갈색으로 가라앉아 있고 인물의 형태는 물감 덩어리에서 겨우 떠오릅니다. 60년 넘게 색을 다룬 사람이 도달한 자리가 거기였습니다. 붓을 쥐기 어려워서였든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든, 마지막에 그는 손으로 직접 물감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 티치아노, 〈피에타〉,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끝내 완성하지 못해 다른 화가가 마무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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