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 해설 : 미술사를 바꾼 혁명적 구도 (프라리 성당)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는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제단화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1519년부터 1526년에 걸쳐 완성한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 Madonna con la famiglia Pesaro>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종교화가 아니라, 회화와 건축, 그리고 관람자의 시선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엮어낸 혁명적인 작품입니다.
야망과 신앙의 만남 : 누가, 왜 이 그림을 의뢰했을까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는 베네치아 귀족이자 주교였던 야코포 페사로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1502년 산타 마우라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베네치아 해군 사령관이기도 했습니다.
1518년, 야코포 페사로는 자신의 군사적 승리와 가문의 영광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프라리 성당의 제단을 구입했고, 당시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였던 티치아노에게 이 대작을 맡겼습니다. 7년에 걸친 제작 기간은 이 작품이 단순한 헌정화를 넘어, 신앙과 정치, 그리고 가문의 선언문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담긴 사적인 기억
그림 속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이상화된 성인像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인간적인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여러 미술사학자들은 이 성모의 모델이 티치아노의 아내 체칠리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체칠리아는 이 작품이 완성된 직후인 1530년경 출산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티치아노는 가장 사적인 사랑의 대상을 가장 성스러운 이미지로 승화시켜, 사랑과 신앙을 하나의 얼굴로 영원히 남겼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공적인 제단화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헌사이기도 합니다.
비대칭 구도와 ‘60도 사선 시선’의 탄생
이 작품이 미술사에서 특별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가 화면 중앙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시작됩니다. 티치아노는 성모와 아기 예수를 오른쪽 상단으로 과감히 이동시키고, 중앙을 비워 두는 파격적인 구도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 제단화의 오랜 규칙을 정면으로 깨뜨린 시도였습니다. 미술사학자 토마스 푸트파르켄은 이 구도가 우연이 아니라, 프라리 성당 왼쪽 복도를 따라 이동하는 관람객의 동선을 계산한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 관람객은 약 60도 각도에서 이 제단화를 마주하게 되며, 그 순간 성모와 시선이 자연스럽게 교차합니다. 그림은 평면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완성됩니다.
르네상스 제단화의 공간 혁명은 마사치오 〈성삼위일체〉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늘로 솟은 ‘구름 기둥’의 신학적 암호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듯 솟아오른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은 당시 제단화에서는 전례 없는 요소였습니다. 이 기둥은 단순한 건축적 장식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하늘의 문’으로 상징하는 신학적 장치입니다.
이는 “나의 보좌는 구름 기둥 위에 있다”라는 집회서의 구절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X선 조사 결과, 티치아노가 처음에는 전통적인 아치형 천장을 구상했다가, 제작 과정 중 이 기둥 구조로 변경한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이 작품이 완성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깊은 사유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아기 예수의 놀이에 숨겨진 수난의 예고
아기 예수는 성모의 베일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이 천진한 몸짓은 인간적인 친근함을 전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복선이 숨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있으며, 그의 손과 발에는 이미 성흔이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구름 위의 푸티 천사들은 십자가를 세우려는 듯한 동작을 취합니다. 놀이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훗날 다가올 고난과 희생, 그리고 부활을 조용히 예고합니다.
페사로 가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인물 배치
화면 하단에는 페사로 가문의 구성원들이 성스러운 질서 속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성 페트로는 성모보다 한 단계 아래 계단 중앙에 서 있으며, 그의 발치에는 천국의 열쇠가 놓여 있습니다.
왼쪽에는 흰 터번을 쓴 투르크인 포로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야코포 페사로의 해전 승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정치적 상징입니다. 반면 오른쪽 아래의 어린 소년 레오나르도 페사로는, 유일하게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림과 현실을 잇는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색채로 완성된 공간의 혁명
티치아노는 이 작품에서 색채를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용했습니다. 성모의 붉은 드레스에는 신대륙에서 수입된 코치닐 염료가 사용되었고, 푸른 망토에는 가장 값비싼 안료인 울트라마린이 아낌없이 쓰였습니다.
그는 붓뿐 아니라 손가락으로 물감을 문질러 올리는 방식으로, 갑옷의 금속성, 벨벳의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색채는 칠해진 것이 아니라, 쌓이고 형성된 것입니다.
<페사로 가족의 마돈나>는 흔히 ‘입체 안경 없이 즐기는 16세기의 3D 영화’에 비유됩니다. 건축과 회화, 그리고 관람자의 움직임까지 계산에 넣은 티치아노의 시선은, 오늘날의 공간 디자인과 비교해도 전혀 낡지 않은 감각을 보여줍니다.
프라리 성당을 방문하게 된다면, 제단 정면이 아니라 왼쪽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가 보기를 권합니다. 그 순간 이 그림은 조용히 평면을 벗어나, 관람자의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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