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베네치아에서 독일 화가 뒤러가 당국에 소를 제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탈리아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뒤러의 〈성모의 생애〉 연작을 베끼면서 화면 아래 붙은 표식까지 함께 새겨 넣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소송의 기록도 판결문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알려진 내용은 뒤러가 세상을 떠나고 40년이 지난 1568년, 바사리가 쓴 전기에서 나옵니다. 저작권의 역사를 다루는 연구도 이 사건을 ’50년 뒤에 전해진 분쟁’으로 따로 구분합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다른 쪽에 있습니다. 뒤러는 1511년에 제국 특권을 받았습니다. 〈요한 계시록〉과 〈성모의 생애〉, 수난 연작을 무단으로 복제하지 못하게 하는 권리였고, 이것은 동시대 인쇄물로 확인됩니다. 같은 해 그는 〈성모의 생애〉 판에 자기 표식을 도용하는 위조자를 경고하는 글을 직접 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전언 속의 판결이 아니라, 자기 표식과 그것이 붙은 출판 사업이었습니다.
• 한 줄 정의: 판화라는 복제 매체로 유럽 전역에 자기 이름을 유통시킨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
• 생몰: 1471년 5월 21일 뉘른베르크 출생, 1528년 4월 6일 같은 도시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독일 뉘른베르크, 두 차례의 이탈리아 체류와 네덜란드 여행
• 활동 분야: 목판화와 동판화, 유화, 미술 이론 저술
• 대표작: 〈요한 계시록〉 목판 연작, 〈멜랑콜리아 I〉, 〈기사, 죽음, 악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1500년의 정면 자화상, 〈코뿔소〉
왜 서명 하나 때문에 법정까지 갔는가
그 서명이 그의 사업이었기 때문입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1500년의 자화상〉, 1500년,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정면 구도는 당시 성상화에 쓰이던 형식이다. |
뒤러의 판화 아래쪽에는 대문자 A 안에 D가 들어앉은 표식이 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서명이라고 부르지만 기능으로 보면 상표에 가깝습니다. 그의 판화는 한 점씩 팔리는 원화가 아니라 수백 장씩 찍어 유럽 여러 도시로 나가는 상품이었고, 구매자가 진품을 알아보는 가장 뚜렷한 단서가 그 표식이었습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이브〉, 1504년, 동판화. 화면 가운데 나뭇가지에 걸린 명패에 화가의 이름과 제작 연도가 새겨져 있다. |
그래서 그것이 복제되면 그림 한 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시장 전체를 잃습니다. 라이몬디의 복제품은 솜씨가 좋았습니다. 다만 그는 자기 이니셜과 출판자 표식을 함께 넣기도 했으므로, 위조라기보다 원작과 복제품의 경계를 흐렸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뒤러가 표식을 지키려 한 것은 예술가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지식재산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기 전의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 시대의 판단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이미지를 베끼는 행위는 관행으로 인정되었고, 문제가 된 것은 남의 표식을 달아 남의 것인 척하는 행위였습니다. 저작권보다 상표에 가까운 감각입니다. 1511년의 제국 특권도 정확히 그 지점을 겨눴습니다.
금세공사의 아들이 판화로 간 이유
손에 익은 기술과 집안의 인맥이 정확히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부터가 이민의 기록입니다. 할아버지는 헝가리의 아이토시라는 마을에서 뉘른베르크로 왔는데, 헝가리어로 아이토는 문짝을 뜻합니다. 뉘른베르크 사람들이 이 집안을 문짝장이라 부른 것이 굳어져 성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 시니어는 그 헝가리에서 온 금세공사였고, 아들도 처음에는 금세공 수업을 받았습니다. 금속판에 정을 대고 선을 파 내려가는 일은 동판화의 기술과 같습니다. 훗날 그의 동판화가 보여 주는 극도로 가는 선과 촘촘한 명암은 이 훈련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금세공에서 판화로 곧장 건너간 것은 아닙니다. 1486년부터 1489년까지 그는 뉘른베르크의 화가 미하엘 볼게무트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했습니다. 볼게무트의 공방은 목판 삽화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던 곳이었습니다. 그의 초기 대표작이 전부 목판화인 것은 금세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이 공방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조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의 대부 안톤 코베르거는 뉘른베르크에서 당대 독일 최대 규모의 인쇄 공방을 운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뒤러는 인쇄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책과 그림이 어떻게 도시를 건너 팔려 나가는지를 어릴 때부터 곁에서 보고 자랐습니다.
도제 과정을 마친 1490년부터 4년 동안 그는 관례에 따라 여러 도시를 돌았습니다. 라인강 상류의 바젤과 스트라스부르에서 책 삽화 목판을 그리며 생계를 이었고, 콜마르까지 간 것은 당대 동판화의 대가 마르틴 숑가우어에게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도착했을 때 숑가우어는 전해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가 이 4년 동안 익힌 것은 그림보다 그림이 인쇄라는 사업과 어떻게 맞물리는지였습니다.
1498년에 그는 〈요한 계시록〉 목판 연작을 직접 기획해 출판했습니다. 인쇄에는 코베르거 인쇄소가 관여했지만,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획하고 발행한 것입니다. 화가가 자기 작품의 제작자이자 발행인이 된 이른 사례입니다. 이 연작이 성공하면서 그는 회화보다 판화로 더 많은 돈과 명성을 얻게 됩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요한 계시록〉 연작 중 〈네 기사〉, 1498년, 목판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굵고 힘 있는 선이 목판화의 성질이다. |
두 번의 이탈리아, 무엇이 달라졌는가
두 번의 체류가 그에게 남긴 것은 성격이 달랐습니다.
1494~1495년경으로 추정되는 첫 이탈리아 체류에서 뒤러는 인체와 공간을 다루는 남쪽의 방식을 접했습니다. 북유럽 회화가 사물의 표면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면, 이탈리아는 인체와 공간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체 비례에 대한 그의 관심은 1500년경 야코포 데 바르바리를 만난 뒤의 기록에 나타나고, 원근법 연구는 1506년의 두 번째 체류 때 기록됩니다. 뒤러는 이 틀을 가져와 평생 붙들었고, 말년에는 비례와 측정에 관한 이론서를 직접 저술합니다. 화가가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습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500년 자화상과 달리 옆으로 튼 자세이고, 옷차림이 장인이 아니라 신사다. |
1505년부터 1507년까지의 두 번째 베네치아 체류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때 그는 이미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고, 베네치아에서 대접받았습니다.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여기서는 자기가 신사 대접을 받는데 집에 돌아가면 기생충 취급을 받는다는 취지로 적었습니다. 적어도 그가 느낀 차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화가를 장인에서 지식인으로 끌어올리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 변화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장미 화관의 축제〉, 1506년, 프라하 국립미술관. 두 번째 베네치아 체류에서 그린 대형 제단화다. |
1500년의 정면 자화상은 이 문제와 이어집니다. 그는 자기를 완전한 정면으로, 긴 머리를 좌우 대칭으로 늘어뜨린 채,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린 자세로 그렸습니다. 이 구도는 당시 그리스도를 그릴 때 쓰던 형식이었습니다. 이것을 신성모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창조하는 자로서의 화가라는 관념을 화면으로 주장한 것에 가깝습니다.
마이스터슈티헤 세 점
1513년과 1514년에 그는 동판화 세 점을 잇달아 내놓습니다. 후대에 이 셋을 묶어 마이스터슈티헤(Meisterstiche), 즉 거장 판화라고 부릅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멜랑콜리아 I〉, 1514년, 동판화. 화면 오른쪽 위 숫자판의 가로세로 합이 모두 같다. |
〈기사, 죽음, 악마〉는 갑옷 입은 기사가 해골 형상과 괴물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앞만 보고 나아가는 장면입니다.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창으로 들어온 빛이 방 안을 고르게 채우는 고요한 실내이고, 성인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으며 사자와 개가 바닥에 엎드려 잠들어 있습니다. 앞의 그림이 위험을 뚫고 가는 삶이라면 뒤의 그림은 물러나 사유하는 삶입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기사, 죽음, 악마〉, 1513년, 동판화. 기사의 시선이 좌우 어느 쪽도 향하지 않고 앞만 보고 있다. |
| 알브레히트 뒤러,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1514년, 동판화. 창틀을 지난 빛이 바닥과 벽에 격자 그림자를 남기는 자리를 보라. |
나머지 한 점이 앞의 도판에 실린 〈멜랑콜리아 I〉입니다. 날개 달린 인물이 컴퍼스를 쥐고 턱을 괸 채 앉아 있고, 주위에는 저울과 모래시계와 대패와 못이 흩어져 있으며, 화면 위쪽에는 숫자를 넣은 사각 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 판은 마방진이라 부르는 것으로, 가로와 세로와 대각선의 합이 모두 같아집니다. 아래쪽 두 칸에는 1514라는 제작 연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그림이 500년 동안 해석을 불러온 이유는 도구가 손 닿는 곳에 가득한데도 중심 인물은 작업을 멈춘 듯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앞쪽의 푸토는 판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고 중심 인물도 컴퍼스를 쥐고 있지만, 정작 그 컴퍼스는 아무것도 재고 있지 않습니다. 측정할 수 있는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측정을 멈추고 앉아 있는 장면입니다.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갈립니다. 창조하는 자가 겪는 무력감으로 읽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확정된 답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보지 않고 그린 코뿔소가 300년을 버틴 이유
더 정확한 그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뒤러의 판화가 다른 도판을 압도할 만큼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1515년 리스본에 인도에서 보내온 코뿔소 한 마리가 도착했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대 이후 처음 보는 짐승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에 있던 뒤러는 이 동물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리스본에서 전해진 글로 된 보고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목판화를 만들었습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코뿔소〉, 1515년, 목판화. 등에 솟은 작은 뿔과 이음매의 리벳, 비늘 무늬는 실제 코뿔소에게 없는 것이다. |
결과물에는 실제 코뿔소에게 없는 것들이 들어갔습니다. 이음매의 리벳, 비늘 무늬, 등에 솟은 작은 뿔이 그렇습니다. 몸통을 덮은 갑옷 같은 판 자체는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인도코뿔소에게는 실제로 갑옷처럼 접힌 두꺼운 피부 주름이 있습니다. 같은 1515년에 한스 부르크마이어가 더 사실에 가까운 목판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널리 퍼진 것은 뒤러의 그림이었습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박물지와 교과서에 실린 코뿔소 삽화는 이 그림을 베낀 것이었습니다. 실물을 관찰한 더 정확한 도판이 나온 뒤에도 한동안 그랬습니다.
같은 일이 반대 방향으로도 일어났습니다. 〈기도하는 손〉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본 분이 많을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 가운데 하나가 광부로 일해 동생의 그림 공부를 뒷바라지했고 그 희생의 증거가 저 두 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이 소묘는 1508년 프랑크푸르트의 상인이 주문한 제단화를 준비하며 그린 사도의 손 습작이고, 그 제단화는 뒷날 뮌헨으로 옮겨졌다가 1729년 불에 탔습니다. 그림은 사라지고 그림을 위한 연습만 남아 이야기를 키운 셈입니다. 뒤러가 남긴 가족 기록에 광부 형제는 없습니다. 남은 동생들은 금세공사와 화가였습니다.
이 사례는 뒤러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는 손이 정확한 화가였지만, 그를 유럽 전체의 화가로 만든 것은 정확성이 아니라 유통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소송도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복제되는 매체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원본의 완성도만큼이나 그것이 자기 것으로 남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종이로 세운 개선문
1511년의 제국 특권은 뒷날 더 큰 일로 이어집니다.
1512년 무렵부터 뒤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일을 맡았습니다. 황제는 연 100굴든의 연금을 정했는데, 지급은 황실이 아니라 뉘른베르크 시 재정에서 나갔습니다. 이 어색한 구조가 뒤에 문제가 됩니다.
황제를 위해 만든 것 가운데 〈개선문〉이 있습니다. 돌로 세운 건축물이 아닙니다. 목판 190여 개로 찍은 종이 서른여섯 장을 이어 붙여 벽에 거는 그림이었습니다. 돌로 개선문을 세우면 그것은 한 도시에 남습니다. 종이로 찍으면 여러 도시로 보낼 수 있습니다.
뒤러가 자기 판화로 해 오던 일이 황제의 사업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가 쥔 재료는 여기서도 돌이 아니라 인쇄였습니다.
회계장부가 된 여행 일기
판화를 판 사람은 뒤러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1494년 7월 7일 그는 뉘른베르크의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했습니다. 그해 가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떠났고 돌아온 이듬해에 자기 공방을 엽니다. 순서가 이렇게 된 데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결혼한 사람만 독립 공방을 열 수 있었습니다. 아그네스는 남편의 판화를 파는 일을 맡았습니다. 뉘른베르크의 주간 시장에서 팔았고 여러 도시의 정기시에도 나갔습니다. 앞에서 본 표식이 상표였다면, 그 상표를 붙인 상품을 실제로 시장에 내다 판 사람이 아내였던 셈입니다.
1520년 7월 12일 두 사람은 네덜란드로 떠납니다. 아그네스와 하녀 수잔나가 동행했고 여행은 1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목적은 관광이 아니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가 1515년에 준 연금을 새 황제 카를 5세에게서 갱신받아야 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는 회계장부를 겸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고 얼마를 받았는지,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이 책자는 지금 밤베르크 주립도서관에 남아 있습니다. 여행 경비의 상당 부분을 그는 판화를 팔고 초상을 그려 충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기는 화가의 감상록이 아니라 판화가 실제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장부입니다. 표식을 지키려 황제의 특권까지 얻은 사람이, 그 표식을 붙인 상품을 들고 도시를 돌며 판 기록이 그대로 남은 것입니다.
여행은 대가를 남겼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병을 얻었고 그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7년 뒤 그를 죽게 한 것이 이 병이었습니다.
아그네스의 일은 그가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1528년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인체 비례에 관한 유고를 인쇄로 옮긴 사람이 아그네스였고, 그 뒤로도 남은 판화를 팔며 1539년까지 살았습니다. 다만 그녀에 대한 평판은 오래 나빴습니다. 친구 피르크하이머가 뒤러 사후의 편지에서 그녀를 인색한 사람으로 적었고 미술사가 오래 그 편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장부와 출판 기록을 들여다본 뒤의 연구는 다른 쪽을 보여 줍니다. 당대의 편지와 남은 기록이 어긋나는 자리이고, 여기서는 기록 쪽에 무게를 둡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뒤러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회화는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빈 미술사박물관 등에 나뉘어 있습니다. 판화는 성격상 여러 미술관이 같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런던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향 뉘른베르크에 그가 살던 집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Q. 목판화와 동판화는 무엇이 다른가요?
A. 목판화는 나무판에서 찍어 낼 부분만 남기고 파내는 방식이라 선이 굵고 힘이 있으며 많은 부수를 찍기에 유리합니다. 동판화는 금속판을 파 들어간 홈에 잉크를 채워 찍는 방식이라 훨씬 가는 선과 섬세한 명암이 가능합니다. 뒤러는 두 기법을 모두 능숙하게 다뤘고, 초기 대형 연작은 목판, 후기 대표작은 동판이 많습니다.
Q. 〈멜랑콜리아 I〉의 I은 무슨 뜻인가요?
A. 확정된 설명이 없습니다. 우울을 여러 단계로 나누던 당대 이론의 첫 번째 단계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널리 인용되지만, 연작의 1번을 뜻한다는 견해 등 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뒤러 자신이 남긴 설명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글의 도판은 모두 위키미디어 커먼즈의 퍼블릭 도메인 파일입니다. 판화는 같은 판에서 찍은 인상이 여러 기관에 나뉘어 있어, 특정 기관의 소장본을 가리킬 때만 소장처를 적었습니다.
두 글자
그는 1528년 4월 6일 고향 뉘른베르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러가 남긴 것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은 어쩌면 그림이 아니라 그 표식일지도 모릅니다. A 안에 들어앉은 D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판화 아래쪽에서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특권을 얻어서까지 그가 지키려 한 것이 바로 그 두 글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