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로가 2미터 가까운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어두운 감옥 안, 침대에 늙은 남자가 앉아 있고 왼쪽에서 누군가 붉은 잔을 내밉니다. 잔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남자는 소크라테스이고, 그림은 1787년에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렸습니다. 대부분의 설명은 여기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아 들면서도 의연하게 말을 멈추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화면을 확대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손은 잔에 닿아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은 그 틈에서 시작해서, 이 그림이 플라톤의 『파이돈』 가운데 정확히 어느 순간인지를 따라가 봅니다.
닿지 않은 손
먼저 그림 전체를 봅니다. 돌을 쌓아 만든 벽, 창문 없는 방, 오른쪽 위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 한 줄기. 그 빛이 가장 밝게 떨어지는 곳이 소크라테스의 맨 상체입니다. 방 안에서 가장 환한 것이 그의 몸입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을 감싸거나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129.5 × 가로 196.2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31.45. 화면 한가운데 붉은 잔과 그 위의 손 사이를 눈여겨보라. |
이제 그 한가운데를 확대합니다. 잔은 굽이 달린 얕은 그릇이고 몸통에 부조 띠가 둘려 있습니다. 안에 액체가 차 있는 것이 테두리 아래로 보입니다. 잔을 쥐고 있는 것은 아래쪽에서 올라온 다른 사람의 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손은 그 위에 있습니다. 손가락 다섯이 아래로 굽어 잡으려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손가락 끝과 잔 테두리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검지 끝조차 잔에 닿아 있지 않습니다.
| 같은 그림의 부분. 손가락 끝과 잔 테두리 사이에 틈이 있다. 잔을 실제로 쥐고 있는 것은 아래쪽 손 하나뿐이다. |
왜 이 노인이 감옥에 앉아 독이 든 잔을 받아야 했는지를 짧게 적어 둡니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죄목은 두 가지였습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 그리고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한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고발장의 내용으로 옮겨 적은 것입니다. 사형 방법은 독을 마시는 것이었고, 그가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역시 플라톤이 『파이돈』이라는 대화편에 남겼습니다. 다비드가 읽은 것도 그 책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생애와 작품에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화가는 제목에 사건이 아니라 순간을 적었다
이 그림은 1787년 파리 살롱에 걸렸습니다. 살롱에는 도록이 나왔고 그 도록에 출품작 목록이 인쇄돼 있습니다. 다비드의 항목은 119번이고, 거기 적힌 제목은 이렇습니다. 독미나리를 마시는 순간의 소크라테스. 눈여겨볼 것은 이 제목이 사건이 아니라 순간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고 적지 않았습니다.
이 도록에는 눈에 띄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같은 살롱에 다른 화가도 같은 주제를 냈습니다. 피에르 페이롱이라는 화가였고 그의 출품작 번호는 154번입니다. 그가 붙인 제목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록의 페이롱 항목에는 그림 설명이 열 줄 넘게 붙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영혼불멸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뒤 통곡하는 친구들을 나무라는 대사가 통째로 인용돼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오, 이토록 훌륭한 사람들이 슬픔에 몸을 맡기다니,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다비드의 항목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제목과 그림 크기, 그리고 소유자 이름뿐입니다. 소유자는 트뤼덴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놓습니다. 소장 미술관이 남긴 기술 조사 기록입니다. 적외선으로 물감층 아래를 들여다보고 그린 과정을 되짚은 보고서인데, 거기에 이 그림에서 마지막까지 정해지지 않은 요소가 둘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나는 소크라테스를 묶었던 쇠사슬의 위치입니다. 처음에는 침대 다리 앞으로 늘어뜨렸다가 나중에 침대 뒤를 돌아 나오게 바꿨습니다. 다른 하나가 바로 손과 잔의 관계입니다. 손목을 처음에는 잔에 더 가깝게 그렸다가 나중에 오른쪽으로 더 옮겼습니다. 화면에서 오른쪽은 잔에서 멀어지는 쪽이니, 거리가 늘어난 것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보다 앞 문장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여러 장의 습작을 거치는 동안에도 형태가 계속 바뀌었고 그림을 시작할 때까지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다비드는 밑그림을 아주 많이 그려 두고 작업을 시작하는 화가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붓을 들 때까지 결정하지 못한 자리가 여기였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기록은 왜 거리를 늘렸는지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화가 자신이 그것을 설명해 둔 글도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텍스트는 이미 받아 들었다고 적는다
『파이돈』으로 가 봅니다. 독이 오는 대목은 대화편의 거의 끝인 117b입니다. 독을 맡은 사람이 잔에 이미 빻아 넣은 것을 들고 들어옵니다. 마시고 나서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걸어 다니다가 그때 누우라고 일러 줍니다. 그러고는 잔을 소크라테스에게 내밉니다. 다음 문장이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떨지도 않았고 안색도 표정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텍스트에서는 잔이 이미 건너갔습니다. 화면에서는 아직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그림과 글이 갈라지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같은 대목에 세부가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잔을 받아 들면서 그는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눈을 크게 뜨고서라는 말이 따라옵니다.
화면의 자세를 봅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있습니다. 한쪽 다리는 침대 위에 길게 뻗어 맨발이 요 끝에 놓여 있고, 다른 다리만 침대 밖으로 내려와 맨발이 나무 디딤판을 딛고 있습니다. 상체는 곧게 세워져 있습니다.
| 같은 그림의 부분. 얼굴이 향한 쪽과 뻗은 손이 향한 쪽은 같지만, 시선은 잔보다 위를 지나간다. 잔을 건네는 사람은 얼굴을 돌린 채다. |
얼굴을 봅니다. 그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잔이 있는 쪽입니다. 그런데 눈은 아래를 향하지 않습니다. 시선은 거의 수평으로 나가서 잔보다 한참 위를 지나갑니다. 손은 잔 쪽으로 가 있는데 눈은 잔을 보지 않습니다. 그 시선이 향한 쪽에는 잔을 든 사람이 서 있습니다. 붉은 천을 걸친 젊은 남자인데, 그는 몸을 소크라테스 쪽으로 돌린 채 얼굴만 반대로 꺾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있습니다. 잔을 건네면서 상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파이돈』에도 이 사람이 나옵니다. 텍스트는 그를 그저 사내라고만 부르고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텍스트에서 얼굴을 가리는 사람은 그가 아닙니다. 독이 오기 조금 전에 열한 명 위원회의 심부름꾼이 들어와 작별을 고하고는 눈물을 터뜨리며 돌아서서 나가 버립니다. 독을 들고 들어오는 사람은 그 뒤에 오는 다른 사람입니다. 화면에는 그 둘이 한 사람으로 합쳐져 있는 셈입니다. 잔을 내미는 손과 얼굴을 가린 손이 같은 몸에 붙어 있습니다. 텍스트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화면에서 그의 눈은 그 사람 쪽을 향하되 잔은 지나칩니다.
입은 조금 벌어져 있습니다. 수염에 가려 크게 보이지는 않지만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어두운 선이 지나갑니다. 잔 쪽으로 뻗지 않은 다른 손은 위로 들려 검지 하나만 세워져 있습니다.
그 자리에 없어야 할 사람들
화면 오른쪽 아래, 침대 옆에 한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붉은 기가 도는 옷을 입었고 고개를 들어 소크라테스를 올려다봅니다. 그의 한 손이 소크라테스의 허벅지를 덮은 천 위에 얹혀 있는데, 손가락이 굽어 천을 눌러 쥐고 있습니다. 소장 미술관은 이 사람을 크리톤으로 봅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오랜 친구이고 『파이돈』에서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텍스트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크리톤이 자리를 뜨는 것은 117d, 소크라테스가 독을 마신 뒤입니다. 아직 마시지 않았으니 곁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이름은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미술관의 기술 조사 보고서조차 이 사람을 크리톤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라고 적습니다.
어긋나는 것은 다른 사람입니다. 침대 발치에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회색 옷을 두르고 등을 보인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소장 미술관은 이 사람을 통상 플라톤으로 본다고 적습니다. 이것도 확정된 비정은 아니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바로 옆에 있다고 읽은 연구자도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문제는 남습니다. 『파이돈』 59b에 플라톤은 그날 앓아누워 그 자리에 없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감옥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죽 열거되고 나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내 생각에, 앓고 있었소. 이 대화편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파이돈입니다. 플라톤은 자기가 없었다고 책에 직접 써 놓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장 미술관이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다비드가 플라톤을 침대 발치에 넣은 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 오래된 이야기를 글로 남겨 보존한 저자를 가리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면 안에는 이 그림이 그리고 있는 책의 저자가 함께 앉아 있는 셈입니다. 같은 미술관의 전시 도록에 실린 한 연구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입니다. 이 그림의 원근이 한가운데로 모이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그 모이는 지점이 바로 이 인물의 머리 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닥의 족쇄는 텍스트 그대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비드가 텍스트를 대충 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화면 아래쪽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닥에 쇠사슬이 길게 놓여 있습니다. 침대 뒤쪽 그늘에서 나와 사람들의 맨발 사이를 지나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 쇠고리가 하나 달려 있습니다. 확대해 보면 그것이 발목을 채우는 족쇄이고, 경첩이 벌어진 채 열려 있으며,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미 벗겨진 족쇄가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앞서 나온 기술 조사 기록을 여기서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다비드가 처음에는 이 사슬을 침대 다리 앞으로 늘어뜨렸다가 나중에 침대 뒤를 돌아 나오게 바꿨다고 했습니다. 지금 화면에 보이는 것이 그 바꾼 쪽입니다.
| 같은 그림의 부분. 사슬 끝의 족쇄는 열려 있고 비어 있다.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벗겨진 뒤다. |
이 세부는 『파이돈』에 있습니다. 다만 끝이 아니라 맨 앞입니다. 59e에서 제자들이 감옥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열한 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소크라테스의 족쇄를 풀고 있었습니다. 60a에서 들어가 보니 그는 막 족쇄에서 풀려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60b에서 그는 침상에 일어나 앉아 다리를 굽히고 손으로 문지릅니다. 묶여 있던 자리가 아팠는데 풀리고 나니 이상하게 시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날 그가 제자들에게 하는 첫 말입니다.
침대 위에도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뻗은 다리 너머, 침대 머리 쪽 요 위에 리라가 옆으로 놓여 있습니다. 옅은 나무빛 틀에 현이 여러 가닥 걸린 작은 현악기입니다. 그 곁에는 쇠사슬 한 토막이 요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 같은 그림의 부분. 리라와 쇠사슬이 같은 요 위에 함께 놓여 있다. |
이것도 『파이돈』의 앞부분과 짝이 됩니다. 60c에서 61b 사이에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감옥에 들어온 뒤로 시를 지었다는데 사실이냐고. 소크라테스는 같은 꿈이 자꾸 찾아와 음악을 지으라고 했기 때문에 이솝 우화를 운문으로 옮기고 아폴론 찬가를 지었다고 답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밝혀 두어야겠습니다. 다비드가 이 두 대목을 읽고 족쇄와 리라를 넣었다고 적어 놓은 미술관 문서를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두 대목과 두 물건을 나란히 놓은 것은 제가 한 대조입니다. 그리고 둘은 서 있는 자리가 같지 않습니다. 족쇄는 『파이돈』에 실제로 나오는 물건입니다. 리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트에 있는 것은 감옥에서 시와 음악을 지었다는 이야기이지 리라라는 악기가 아닙니다. 리라라는 말이 『파이돈』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훨씬 뒤에, 그것도 감옥에 놓인 물건으로가 아니라 비유로 나옵니다. 시미아스라는 사람이 영혼을 잘 조율된 리라에서 나는 화음에 빗대며 소크라테스에게 반론을 폅니다. 그러니까 화면의 리라는 그 비유와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눈에 보이는 물건 하나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방에는 하루의 처음과 끝이 함께 있습니다. 족쇄가 풀린 것은 아침이었고 독이 온 것은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파이돈』 116b가 그 시각을 해가 지는 무렵이라고 적습니다. 화면에는 그 둘이 같이 있습니다. 벽 위쪽에는 등잔이 하나 걸려 있는데 심지에서 연기가 가늘게 오르고 벽에 검은 그을음 자국이 번져 있습니다. 그런데 방 안으로는 오른쪽 위에서 낮의 빛줄기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무엇인가
제 읽기를 적겠습니다. 먼저 밝혀 둘 것이 있습니다. 다비드가 『파이돈』의 여러 대목을 골라 한 화면에 끌어모았다는 것은 저 혼자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전시 도록의 연구도 그가 구도 습작 단계에서 인물들을 옮겨 가며 플라톤의 서술에서 요소들을 끌어들였다고 적습니다. 제가 덧붙이려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다비드가 고른 것은 『파이돈』의 어느 한 문장이 아닙니다. 그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벌려서 그 안에 화면을 세웠습니다. 잔은 내밀어졌는데 아직 받아 들지 않았고, 족쇄는 아침에 이미 풀렸는데 아직 바닥에 그대로 있고, 말은 계속되는데 대화편은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 대목에서 알려 주지 않습니다. 텍스트를 따라 읽으면 이 순간은 지나가는 반 박자에 불과합니다. 그림은 그 반 박자를 붙잡아 멈춰 세웠습니다.
손과 잔 사이의 그 틈이 이 그림에서 가장 오래 망설인 자리라는 것은 미술관의 기술 조사가 확인해 줍니다. 다만 화가가 왜 그 거리를 늘렸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가 그것을 설명한 기록을 저는 찾지 못했고, 살롱 도록에도 그는 설명을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같은 살롱의 페이롱이 대사를 통째로 실어 관객에게 장면을 읽어 준 것과 대조됩니다. 다비드는 제목 하나만 내놓았습니다. 마시는 순간이라고.
그리고 이 판단은 이 그림 한 점에 관한 것입니다. 다비드가 늘 이런 식으로 주제를 골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대의 평가가 한쪽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소장 미술관이 정리해 둔 1787년 살롱 비평 목록을 보면 찬사가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해 파리에 있던 토머스 제퍼슨도 살롱에서 본 것 가운데 이 그림이 제일 낫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쪽도 적지 않았습니다. 배경이 너무 두드러져서 그림이 부드럽게 어우러지지 못하고 채색한 조각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고, 자세가 지나치게 연구되었고 마무리가 과하다는 비평도 있었습니다. 인물들이 배경과 더 잘 녹아들어야 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다비드의 그림 가운데 평범한 축이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 비평들은 저도 요약으로만 보았고 소책자 원문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림 앞으로 돌아갑니다. 다음에 이 그림을 보게 되면 한가운데의 붉은 잔부터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위의 손을 봅니다. 그 손은 잔을 잡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그 사이를 일부러 비워 두었고, 그 빈자리가 이 그림이 멈춰 세운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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