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티소(James Tissot)는 파리와 런던의 사교계를 그려 큰돈을 번 화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것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것은 무도회 장면이 아닙니다. 성서 삽화입니다. 신약 한 질만 삼백예순다섯 점입니다.
이 글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소장 미술관들이 적어 둔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큰 대목은 1885년 한 해에 몰려 있습니다.
낭트에서 파리로, 그리고 첫 성공
1836년 10월 15일 프랑스 서부 항구도시 낭트에서 태어났습니다. 호적에 오른 이름은 자크 조제프 티소입니다. 네 아들 가운데 둘째였습니다.
집안이 옷을 다뤘습니다. 아버지는 옷을 파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모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업종을 옮기는 말이 기관마다 다릅니다.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원은 패션 상인이라고 적고, 오르세 미술관은 포목 사업이라고 적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가 자라면서 본 것이 천과 옷이었다는 점은 같습니다. 국립미술사연구원은 뒷날 그의 그림과 판화에서 직물과 여성복이 유난히 공들여 그려진 것을 이 성장 배경과 연결해 적어 두었습니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 세 곳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름이 바뀝니다. 1847년부터 그는 자크 대신 제임스라는 이름을 씁니다. 학교 명부에도 그렇게 올라 있었습니다. 영국식 이름이지만 영국에 가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1856년 무렵 파리로 갑니다. 라탱 지구에 자리를 잡고 루이 라모트와 이폴리트 플랑드랭 밑에서 배웠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앵그르의 뒤를 따르던 화가였고, 오르세는 그들이 티소에게 데생에 대한 애착을 심어 주었다고 적습니다. 국립미술사연구원은 그가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갔다고 적습니다. 오르세는 학교를 말하지 않고 두 스승의 아틀리에에서 수련했다고만 적는데, 입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1857년부터는 루브르에서 그림을 모사했습니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는 제임스 휘슬러입니다. 둘 다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앵그르의 그림을 모사하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에드가 드가입니다. 같은 낭트 출신 화가 엘리 들로네가 다리를 놓았습니다. 드가와의 우정은 189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 에드가 드가, 〈제임스 티소의 초상〉, 1867~1868년경, 캔버스에 유채, 세로 151.4 × 가로 111.8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39.161. 화면 맨 위 벽에 걸린 일본 그림과, 그 아래 금색 액자에 든 작은 초상을 함께 보라. |
1859년에 살롱에 처음 나갑니다. 다섯 점을 냈습니다. 초상 둘과 중세를 소재로 한 셋이었는데, 그중 둘은 밀랍을 섞어 그린 종교화였습니다. 반응은 갈렸습니다. 오르세가 전하는 바로는 한 비평가가 그의 작품을 두고 뉘른베르크 장난감 장인이 만든 물건 같다고 썼고, 다른 비평가는 재능 있는 화가가 현학적인 모방으로 자기 재능을 배반한다고 썼습니다.
그다음이 빨랐습니다. 국가가 그의 그림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의 만남〉을 사들였습니다. 오르세는 그 매입을 1860년으로 적고 그 그림이 1863년부터 뤽상부르 미술관에 있었다고 적습니다. 국립미술사연구원은 1863년에 뤽상부르가 오천 프랑에 사들였다고 적습니다. 두 기관이 연도를 다르게 적는 대목입니다. 같은 해 런던의 화상과 거래를 트고, 이듬해에는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 처음 출품합니다. 1864년 살롱에서는 중세를 버리고 당대의 인물을 그려 호평을 받습니다. 1866년에는 살롱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1867년에는 새로 뚫린 큰길에 자기 집을 지어 들어갔습니다. 오르세는 이 시기의 그를 두고 당대에 가장 두드러진 예술가의 한 사람이 되었고 빠르게 부자가 되었다고 적습니다.
그 집에는 일본 물건이 있었습니다. 위의 초상에서 벽 맨 위에 걸린 것이 그것입니다. 티소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로 일본 물건이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그것을 모았습니다. 1864년 11월, 화가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본 물건을 파는 가게에 갔더니 옷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프랑스 화가 티소가 다 쓸어 갔으며 그가 일본 그림 석 점을 그리는 중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1868년 3월부터 9월까지는 일본에서 온 젊은이에게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전해에 만국박람회 사절단으로 파리에 온 도쿠가와 아키타케이고, 마지막 쇼군의 동생입니다.
1870년, 전쟁
1870년 프로이센과 전쟁이 나고 파리가 포위됩니다. 9월 30일, 티소는 의용대에 지원합니다. 드가와 마네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도 같은 시기에 지원했습니다. 부대의 정확한 이름은 기관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말메종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했고, 그 싸움의 참혹함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오르세는 그 기록이 그에게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겼다고 씁니다.
이듬해 파리 코뮌이 서고 무너집니다. 티소가 여기에 가담했는가는 소장 기관들이 판단을 유보한 대목입니다. 오르세는 그가 코뮌에 참가했는지를 확정하기 어렵다고 못박고, 그 이유로 그가 쿠르베처럼 정치에 몸을 던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듭니다. 국립미술사연구원은 그 기간에 그가 위생병이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는데, 프랑스어 문장 자체가 단정이 아니라 전해 들은 말을 옮기는 형식입니다.
기록이 확정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지원병으로 싸웠고, 코뮌이 진압된 이른바 피의 주간이 지난 뒤 서둘러 파리를 떠났습니다.
런던의 십일 년
1871년에 런던으로 갑니다. 오르세는 그해 여름, 국립미술사연구원은 6월이라고 적습니다.
맨손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1862년부터 1864년 사이에 런던의 공식 전시에 세 차례 작품을 냈고, 1863년부터 런던 화상과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먼저 가 있었던 셈입니다. 도착한 뒤에는 친구 집에 머물다가 세인트존스우드에 자리를 잡습니다. 『배니티 페어』라는 잡지에 유명인들의 캐리커처도 그렸습니다. 이 일은 런던으로 가기 전부터 시작해 1877년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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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티소, 〈배 위의 무도회〉, 1874년경, 캔버스에 유채, 세로 84.1 × 가로 129.5 cm, 런던 테이트 소장, N04892. 깃발 차양 아래 오른쪽 가운데, 똑같은 줄무늬 드레스를 입은 두 여성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라. |
런던에서의 평가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습니다. 1874년 로열 아카데미에 건 〈배 위의 무도회〉에 대해 당시 『타임스』는 처녀들의 우아함과 옷차림의 취향, 신사들의 성격 묘사를 아무리 높이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썼습니다. 테이트가 자기 작품 기록에 옮겨 둔 문장입니다.
| 제임스 티소, 〈HMS 캘커타의 갤러리(포츠머스)〉, 1876년경, 캔버스에 유채, 세로 68.6 × 가로 91.8 cm, 런던 테이트 소장, N04847. 왼쪽에 줄지어 선 빈 등의자와, 두 여성 사이에서 턱에 손을 댄 장교를 함께 보라. |
같은 테이트가 다른 작품 기록에는 정반대의 말을 옮겨 둡니다. 작가 헨리 제임스는 〈HMS 캘커타의 갤러리〉를 두고 딱딱하고 저속하고 진부하다고 일축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섰습니다. 1877년 그로스브너 갤러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티소는 열 점을 냈고, 존 러스킨이 자기 연속 간행물에 그 전시를 평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티소의 그림은 솜씨와 광채가 뛰어나 보는 사람이 그 성실함을 잊게 만드는데, 불행하게도 그 대부분은 저속한 사교계를 찍은 채색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러스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중 한 점만은, 이 화가가 더 진지한 생각을 따르기만 한다면 훨씬 큰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그림의 출품 제목은 〈의지의 승리〉인데 러스킨은 〈의지의 힘〉으로 잘못 적었습니다.
1875년에는 실패가 겹칩니다. 로열 아카데미에 낸 두 점이 떨어졌고, 그를 후원하던 런던 화상과의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이듬해에는 로열 아카데미에 건 〈템스강〉이 등장인물의 성도덕 문제로 물의를 빚었습니다. 테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에 대한 해명처럼 다른 그림을 다시 전시했습니다.
캐슬린 뉴턴
런던에서 그는 캐슬린 뉴턴을 만납니다. 아일랜드 사람이고, 결혼 전 성은 켈리이며, 이혼한 상태였고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오르세는 만남을 1876년으로 적습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시점은 기관마다 다릅니다. 오르세는 곧 들어와 살았다고 하고, 국립미술사연구원은 1877년경이라고 적습니다.
이후 몇 해 동안 그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집안 사람들입니다. 캐슬린과 그의 두 아이, 그리고 티소의 조카들입니다. 이들은 공쿠르 형제의 소설 『르네 모프랭』을 위해 티소가 만든 판화에도 옮겨졌습니다. 열 점의 삽화를 실은 그 책은 1884년에 나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이 시기를 대표합니다. 세로가 가로의 두 배인 좁고 긴 화면인데, 소장 미술관은 이것을 일본의 족자 형식을 따른 것으로 설명하고 그림 속 여인을 캐슬린 뉴턴으로 적습니다.
| 제임스 티소, 〈10월〉, 1877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216.5 × 가로 108.7 cm, 캐나다 몬트리올 미술관 소장, 1927.410.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는 눈과, 팔 아래 끼운 흰 책을 함께 보라. |
오르세는 캐슬린을 티소의 뮤즈라고만 적습니다. 결혼이나 다른 어떤 법적인 말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십년대 말 티소의 가장 알려진 작품들이 그를 원천으로 삼았다고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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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티소, 〈휴일〉, 1876년경, 캔버스에 유채, 세로 76.2 × 가로 99.4 cm, 런던 테이트 소장, N04413. 누운 남자가 받쳐 든 찻잔과 접시, 그리고 그가 쓴 줄무늬 모자를 보라. |
캐슬린은 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오르세는 그가 화가이자 연인인 사람의 눈앞에서 소진되어 갔다고 쓰고, 캐슬린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를 모델로 계속 썼다고 적습니다. 1882년 11월 9일에 캐슬린이 세상을 떠납니다. 일주일이 되기 전에 티소는 영국을 떠나 파리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관에 따라 하루 차이가 납니다. 그가 매우 상심해 있었다는 것은 파리에 닿자마자 그를 만난 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가 일기에 적어 두었습니다.
1885년
파리로 돌아온 뒤 1883년에 큰 회고전이 열립니다. 회화와 파스텔과 판화와 칠보를 합쳐 약 이백 점을 걸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이었습니다.
그리고 1885년이 옵니다. 그해에 네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2월부터 그는 영매를 여러 차례 찾아갑니다.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심령술이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5월 20일 런던에서 열린 강신회에서 티소는 캐슬린과 접촉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았다고 믿은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오르세는 그 그림이 낭만주의 회화의 유령과 당대에 유행하던 심령 사진의 요소를 함께 쓴 독특한 것이라고 적습니다.
같은 해에 그는 〈파리의 여인〉이라는 연작 열다섯 점을 파리에서 전시합니다. 크기가 모두 같은 그림들로, 파리에서 일하고 파리에서 눈에 띄는 여자들을 그린 것입니다.
| 제임스 티소, 〈상점 아가씨〉, 1883~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세로 146.1 × 가로 101.6 cm,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 소장, 67/55. 그가 열어 준 문 너머의 거리와, 유리창 밖에서 진열대를 들여다보는 실크해트 차림의 남자를 함께 보라. |
오르세는 이 연작을 티소의 큰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그리고 같은 글에서 전시의 반응이 온통 나빴다고 적습니다. 두 문장이 함께 있습니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그림 속 파리 여자들과 화가 자신이 너무 영국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프랑스 화가에게 붙은 말입니다.
티소는 이 연작을 책으로도 내려 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판화를 만들고 거기에 모파상과 도데를 비롯한 작가들의 짧은 소설을 붙이려 했습니다. 예약 구독까지 모집했지만 그 기획은 끝내 나오지 못했습니다. 오르세는 아마 전시의 나쁜 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적습니다. 아마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해 말, 연작의 마지막 그림을 준비하러 그는 파리의 생쉴피스 교회에 가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그림의 제목이 〈성음악〉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그는 환시를 봅니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기관마다 적는 자세함이 다릅니다. 브루클린 미술관은 종교적인 환시라고만 쓰고, 오르세는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요약하고, 국립미술사연구원은 폐허가 된 성 안에서 가난한 부부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까지 적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보았다고 적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다른 자세함으로 적는 것입니다. 세 기관이 똑같이 적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장소가 생쉴피스였다는 것, 그리고 그 뒤로 그의 작업 중심이 성서 이야기로 옮겨 갔다는 것입니다.
오르세는 연작의 실패가 그를 성서 삽화 기획으로 이끌었다고 적습니다. 국립미술사연구원은 그가 세속 연작의 마지막 그림을 준비하던 자리에서 환시를 보았다고 적습니다. 두 서술은 서로 다른 것을 앞에 둡니다. 확실한 것은 이 넷이 모두 1885년 한 해 안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
1886년부터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갑니다. 기관들은 세 차례라고 적는 데에 일치합니다. 1886년에서 1887년, 1888년에서 1889년, 그리고 1896년입니다. 목적은 오르세가 이렇게 정리합니다. 화가들의 공상으로 뒤틀려 버린 기독교 세계에서 성서 이야기의 진실을 다시 세우는 것.
그래서 그는 그 땅의 풍경과 건물과 옷과 풍습을 직접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약의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894년 파리의 샹드마르 살롱에 이 연작 이백칠십 점을 걸었습니다. 그해에 프랑스가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었습니다.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그가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받았던 평가와 정반대였습니다. 연작 전체는 1895년에 삼백예순다섯 점으로 완성됩니다. 이듬해 두 권짜리 책으로 나왔고, 책 제목 자체에 삼백예순다섯이라는 숫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 제임스 티소,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신 것〉, 1886~1894년, 회색빛 도는 녹색 종이에 흑연 밑그림 위 불투명 수채, 화면 세로 24.8 × 가로 23 cm,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 00.159.299. 그리스도의 얼굴과 몸통은 보이지 않는다. 화면 맨 아래에 그의 두 발만 있고, 한 여인이 그 발을 붙들고 있다. |
위 그림이 이 연작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한눈에 보여 줍니다. 제목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신 것〉입니다. 화면에 그리스도의 얼굴도 몸통도 없습니다. 화면 자체가 그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망토를 두른 로마 병사가 왼쪽에서 올려다보고, 말을 탄 사람들이 오른쪽에서 올려다보고, 가운데의 여자들이 손을 들어 올려다봅니다. 모두 우리 쪽을 봅니다. 그리고 화면 맨 아래를 보시면 그가 그려져 있습니다. 나란히 놓인 두 발입니다. 한 여인이 엎드린 채 두 손으로 그 발을 붙들고, 얼굴만 이쪽으로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볼 때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 발과 그 발을 붙든 사람입니다.
이 수채들은 1894년 파리를 시작으로 런던과 미국의 여러 도시를 돌았습니다. 1900년에 브루클린 미술관이 이 연작을 사기로 결정합니다. 제안한 사람은 화가 존 싱어 사전트였습니다. 이사회가 값을 육만 달러로 정했는데 이사들이 약정한 것은 일만 삼천 달러였습니다. 나머지는 시민들에게서 모았습니다. 브루클린의 지역 신문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기부를 권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미술관은 삼백오십 점 한 질을 화가에게서 직접 샀습니다. 지금도 그 작품들의 취득 경위 칸에는 공개 모금으로 구입했다는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책에 실린 것은 삼백예순다섯 점이고 미술관이 산 것은 삼백오십 점입니다. 두 숫자의 차이가 어느 작품에서 생기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티소는 이어서 구약 삽화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끝내지 못했습니다. 1902년 8월 8일,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뷔용의 옛 수도원 건물에서 예순다섯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르세 인명 기록에 그가 수도원으로 물러났다는 한 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집 때문입니다. 수도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은 구약 작업은 다른 화가 여섯이 그의 밑그림과 모델을 가지고 마무리했습니다. 1904년에 사백 점을 담은 네 권짜리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 그림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 뉴욕 유대인 박물관에 있습니다.
사교계를 그리던 화가의 마지막 십수 년이 이렇습니다. 1885년 한 해에 영매를 찾아갔고, 마지막 세속 연작이 혹평을 받았고, 그 연작의 마지막 그림을 준비하러 간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중 무엇이 그를 돌려세웠는지는 기록이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자기 글로 남겼습니다. 미국 순회전 도록에 실린 그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는 성서의 땅을 직접 보기로 했고, 그곳을 경건한 순례자로서 찾기로 했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떠난 날을 적어 두었습니다.
1886년 10월 15일. 나는 막 쉰 살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이 1836년 10월 15일입니다. 쉰 번째 생일에 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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