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생애와 작품, 자신을 화가로 부르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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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는 사람 키의 몇 배 되는 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서른네 살의 한 남자가 그 위에서 목을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Giovanni da Pistoia)라는 친구에게 말을 거는 시 한 편을 씁니다. 목에는 혹이 생겼고 수염은 하늘을 향하며, 붓에서 떨어지는 물감이 얼굴에 무늬 바닥을 깔고, 몸은 활처럼 뒤로 휜다고 우스꽝스럽게 늘어놓은 뒤 이렇게 맺습니다. 조반니, 이제 내 죽은 그림과 내 명예를 지켜 주게. 나는 있을 자리에 있지도 않고, 화가도 아니니. 지금 널리 알려진 그 천장을 그리던 사람이 쓴 말입니다.

수염을 기른 노년 남자의 얼굴 부분. 콧대 가운데가 눌려 있다
다니엘레 다 볼테라의 작품으로 전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부분), 1545년 무렵, 나무판에 유채, 88.3×64.1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977.384.1. 콧대 가운데가 눌려 있다. 콘디비와 바사리는 이 코를 소년 시절 맞은 주먹 탓으로 적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편지와 영수증에 자기를 조각가로 적으면서 시스티나 천장과 성 베드로 대성전 돔까지 맡은 피렌체 사람
• 본명: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생몰: 1475년 3월 6일 토스카나 카프레세 출생 ~ 1564년 2월 18일 로마에서 사망(향년 88세)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피렌체, 로마, 볼로냐, 카라라
• 활동 분야: 조각, 회화, 건축, 시
• 대표작: 피에타, 다비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최후의 심판, 모세, 론다니니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자기 이름 뒤에 조각가라고 적었다

시 한 줄만 있다면 엄살로 읽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편지를 모아 보면 같은 말이 서명으로 되풀이됩니다. 스물두 살이던 1497년 7월 로마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끝에 그는 「조각가 미켈란젤로, 로마에서」라고 적었습니다. 1875년 피렌체에서 엮은 그의 편지 모음에서 서명이 남은 편지 약 400통을 하나씩 세어 보면, 이름 뒤에 조각가(scultore)를 붙인 것이 70통 남짓이고 화가(pittore)를 붙인 것은 한 통도 없습니다.

천장을 그리던 4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 로마에서 보낸 편지 52통 가운데 39통에 그는 조각가라고 서명했습니다. 더 눈에 띄는 것은 1508년 5월 10일 자기 손으로 남긴 영수 기록입니다. 교황 율리오 2세에게서 예배당 천장 그림 값으로 500두카토를 받았고 그 일을 오늘 시작한다고 적은 문서인데, 그 문장의 주어가 나, 조각가 미켈란젤로입니다. 그림 대금을 받는 영수증에도 직함은 조각가였습니다. 이듬해 1월 아버지에게는 일이 나아가지 않는다며 이렇게 씁니다. 일이 어렵기도 하고, 또 제 본업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림을 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문서로 남은 그의 첫 수련은 화가 공방에서 그림을 배우는 일이었고, 1504년에는 피렌체 시청 대회의실 벽 절반에 전투 장면을 그리는 일을 스스로 맡았습니다. 훗날 그는 그 일을 두고 밑그림을 이미 끝내 놓아 돈을 반은 번 셈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그림이라는 일이 아니라 화가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표가 무엇을 뜻했는지는 1548년 조카 리오나르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납니다. 한 신부가 그에게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라고 편지를 보내자, 그는 조카에게 그 신부한테 이렇게 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만 알려져 있다, 제단화를 그리고 싶으면 화가를 찾아라, 나는 가게를 차린 사람들처럼 화가였던 적도 조각가였던 적도 없다, 아버지와 형제들의 명예를 위해 늘 그것을 피해 왔다. 이때 그는 일흔세 살이었고, 편지에서 조각가(scultore)를 붙인 서명은 1526년을 마지막으로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젊어서는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서명했고, 늙어서는 그 조각가라는 말마저 거두었습니다. 둘을 한 줄로 잇는 설명은 그 자신이 남기지 않았지만, 1548년에 그가 댄 이유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는 가게를 차린 장인으로 불리는 것을 집안의 명예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조각가였을까요. 1547년 무렵 피렌체의 문인 베네데토 바르키가 회화와 조각 중 어느 쪽이 더 고귀한지 묻자 그는 답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림은 부조 쪽으로 갈수록 좋게 여겨지고, 부조는 그림 쪽으로 갈수록 나쁘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조각이 그림의 등불이며 둘의 차이는 해와 달 같다고 생각해 왔다. 다만 그 편지에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며 둘은 같은 것이니 이런 논쟁은 그만두자고 덧붙입니다. 논쟁에 드는 시간이 형상을 만드는 시간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조각은 다른 예술을 재는 자였습니다. 이 자가 그의 그림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는 천장에서 보입니다.

미켈란젤로 생애, 그림을 배운 소년과 부러진 코

미켈란젤로는 1475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습니다. 콘디비에 따르면 아버지 로도비코는 그때 카프레세와 키우시의 행정관(포데스타)이었고, 아들이 손으로 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가 1553년에 펴낸 전기에는 아버지와 숙부들이 그림을 집안의 수치로 여겨 소년을 자주 때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오나로티 집안은 형편이 기울었어도 스스로를 시민 계층으로 여겼습니다. 1548년 편지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명예」는 여기서 이어지는 말입니다.

그래도 아들은 공방으로 갔습니다. 1488년 4월 1일, 아버지는 열세 살 아들을 피렌체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형제의 공방에 3년 기한으로 맡긴다고 적었습니다. 계약의 목적은 그림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조르조 바사리가 1568년판 『미술가 열전』에 그대로 옮겨 실었는데, 기를란다요가 소년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콘디비의 서술을 반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부른 사람의 공식 수련은 그림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공방이 남긴 그림 한 점은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았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열다섯이나 열여섯 무렵 메디치 가문이 산 마르코 정원에 모아 둔 고대 조각 곁에서 배우게 되었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이 소년을 자기 집에 들여 1492년 로렌초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게 했습니다. 대리석을 처음 깎아 본 것도 이 정원에서였다고 바사리는 전합니다.

이 시기의 일 하나가 그의 얼굴에 평생 남습니다. 함께 배우던 피에트로 토리자노의 주먹에 코가 부러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 사람이 다르게 전합니다. 콘디비는 토리자노를 사납고 오만한 자로 적고, 미켈란젤로가 죽은 듯 업혀 집에 왔으며 토리자노는 이 일로 피렌체에서 쫓겨났다고 썼습니다. 바사리는 메디치 정원에서 시기심 때문에 벌어진 일로 적었습니다.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자서전에서 토리자노 본인에게 들은 말을 옮겼는데, 장소가 카르미네 성당의 마사초 벽화 앞이었고 미켈란젤로가 그림 공부하는 동료들을 놀려 대서 쳤다고 합니다. 코뼈가 과자처럼 바스러졌고 그 표시를 죽을 때까지 달고 다닐 것이라며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장소와 사정은 갈리지만, 코가 부러졌다는 데는 세 사람이 같습니다. 뒷날 그의 초상들에서 콧대가 눌린 모습으로 나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이 주는 우아한 인상과 달리, 그 시절 공방과 작업장은 이런 곳이기도 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콘디비에 따르면 스물한 살 무렵 그는 잠든 큐피드를 대리석으로 깎았고, 땅에 묻어 두면 고대 조각으로 통하겠다는 말을 듣고 오래된 것처럼 손을 봤습니다. 이 조각은 로마의 한 추기경에게 고대품으로 200두카토에 팔렸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30두카토였고, 속은 것을 안 추기경 쪽 사람을 따라 그는 1496년 로마로 갑니다. 그해 7월 로마에서 보낸 그의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중개상에게 그 아기상을 돌려 달라고 했더니, 차라리 백 조각을 내겠다며 거칠게 거절했다는 내용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서명, 〈피에타〉의 띠

미켈란젤로가 자기 이름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스물넷 무렵 완성한 〈피에타〉 하나입니다. 지금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습니다.

무릎에 죽은 아들을 안은 성모의 대리석 군상. 성모의 가슴을 띠가 가로지른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8~1499년, 대리석,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성모의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띠에 서명이 새겨져 있다.

1498년 8월 27일의 계약서는 그를 「피렌체의 조각장이 미켈란젤로 선생」이라 부르고, 사람 크기의 대리석 피에타를 금화 450두카토에 1년 안에 만들기로 정했습니다. 보증을 선 로마의 은행가 야코포 갈리는 계약서에 이것이 지금 로마에 있는 대리석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 되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성모가 아들보다 젊어 보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콘디비가 옮긴 그의 대답이 남아 있습니다. 정숙한 여인은 그렇지 않은 여인보다 훨씬 덜 늙는다는 것입니다.

서명의 자리는 성모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입니다. 라틴어로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고 있었다는 뜻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동사입니다. 그는 완료형(만들었다)이 아니라 미완료형을 썼습니다.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박물지』 머리말에서 아펠레스나 폴리클레이토스 같은 고대 작가들의 서명으로 소개한 형식입니다. 플리니우스는 이 형식을 예술이 언제나 시작 단계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듯이 남긴 표시로 풀었습니다.

이 서명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바사리는 1568년판에서, 롬바르디아에서 온 사람들이 이 조각을 보고 「우리 밀라노의 곱사등이」가 만든 것이라 말하는 것을 미켈란젤로가 듣고, 그날 밤 등불과 정을 들고 들어가 이름을 새겼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15년 앞서 미켈란젤로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쓴 콘디비의 전기는 〈피에타〉를 길게 다루면서도 이 일화를 적지 않았습니다. 일화가 나중에 붙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운 증인이 말하지 않았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조각 자체를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띠는 옷을 여미는 데 쓰이지 않고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글자 한 줄을 받기에 알맞은 자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서명 자리는 돌을 쪼기 시작할 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홧김에 새긴 이름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 둔 선언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그가 이름을 온전히 남긴 단 한 자리는 조각이었고, 그 문장의 동사는 「만들고 있었다」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하기 싫었던 시스티나 천장화

〈피에타〉 뒤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1501년부터 버려져 있던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로 〈다비드〉를 깎아 1504년에 세웠습니다. 그 돌의 내력과 자리를 정한 회의는 다비드상 이야기에 자세히 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시청 대회의실 벽화를 맡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한 방의 벽을 절반씩 나눠 맡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벽화를 완성하지 못했고, 레오나르도 쪽 사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쪽에서는 교황의 부름이 그 일을 끊었습니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에게 자기 영묘를 맡겼습니다. 조각상 수십 점이 들어가는 거대한 계획이었고, 조각가로서는 마음껏 대리석을 다룰 수 있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는 카라라 채석장에서 여덟 달을 머물며 대리석을 떠냈습니다. 그런데 교황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돈을 받으러 갔다가 교황의 방에서 쫓겨났고, 그 길로 로마를 떠났습니다. 이듬해 볼로냐에서 교황을 다시 만나 용서를 빌었을 때 받은 일은 교황의 청동상이었는데, 그는 그때도 그것은 자기 기술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적었습니다.

영묘는 그 뒤로도 줄고 또 줄었습니다. 마지막 계약은 1542년이었고, 그 결과물이 지금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벽면에 있는 율리오 2세의 장례 기념물입니다. 다만 율리오 2세의 유해는 이곳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전에 묻혀 있습니다. 콘디비는 이 40년을 무덤의 비극이라고 불렀습니다.

벽면 전체를 채운 대리석 무덤. 아래층 가운데에 수염이 긴 남자가 앉아 있다
율리오 2세 영묘,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40년에 걸쳐 줄어든 계획의 결과다. 아래층 가운데 앉은 것이 〈모세〉이고, 양옆 벽감의 두 여인은 라헬과 레아다.

시스티나 천장은 그 사이에 끼어든 일이었습니다. 콘디비는 그 배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건축가 브라만테를 비롯한 경쟁자들이 교황에게 천장화를 권한 것은 그를 조각에서 떼어 놓기 위해서였고, 거절하면 교황의 노여움을 사고 맡으면 라파엘로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리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된 기술은 조각이었으니까요. 미켈란젤로는 그것은 자기 기술이 아니라며 라파엘로를 대신 추천하기까지 했다고 콘디비는 씁니다.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사이의 사정은 라파엘로의 생애에서 이어집니다.

그림으로 가득 찬 예배당 천장. 가운데에 두 손이 마주 뻗은 장면이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1508~1512). 사진 가운데 칸이 〈아담의 창조〉다. 장면을 나누는 기둥과 받침, 그 곁의 돌빛 아이 형상들은 모두 그림으로 그린 건축과 조각이다.

여기서 그는 이상한 선택을 합니다. 1524년 무렵 쓴 편지에서 그는 첫 계획이 반달 모양 벽면에 열두 사도를 두고 나머지는 흔한 장식으로 채우는 것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런데 시작해 보니 사도들만으로는 초라해 보였고, 교황이 왜냐고 묻자 사도들도 가난했으니까요라고 답했답니다. 그러자 교황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새로 맡겼습니다. 하기 싫다던 사람이 주문받은 것보다 훨씬 큰 것을 그렸습니다. 천지창조부터 노아까지의 이야기가 가운데에 놓이고, 둘레에 예언자와 무녀들이 앉았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은 교황청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들은 회화라기보다 조각처럼 보입니다. 근육이 표면 위로 밀려 나오고, 몸은 늘 비틀린 자세로 놓입니다. 장면들 사이에는 그림으로 그린 기둥과 받침이 있고, 그 위에 돌 색깔로 칠한 아이 형상들이 조각처럼 서 있습니다. 천장 전체가 그려 넣은 건축과 그려 넣은 조각 사이에 사람을 앉히는 구조입니다. 그림이 부조 쪽으로 갈수록 좋다던 바르키에게 보낸 편지의 문장이 이 천장에서는 그대로 화면이 됩니다. 화가라는 이름을 거부한 사람은 결국 조각가의 눈으로 회화를 바꿨습니다.

누운 남자가 오른손을 뻗고, 붉은 천에 둘러싸인 노인이 왼손을 뻗어 손끝이 거의 닿는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 몸이 평면에 그린 것이라기보다 돌에서 꺼낸 것처럼 화면 밖으로 밀려 나온다.

두 손가락 사이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는 천지창조 해석에서 따로 다룹니다. 여기서 짚을 것은 그가 이 일을 혼자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콘디비는 20개월 만에 조수 하나 없이, 물감 빻을 사람조차 없이 끝냈다고 썼지만, 1509년 1월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기가 불러온 화가 야코포가 요 며칠 사이 떠났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사리도 그가 피렌체에 사람을 보내 일손을 구했다고 적었습니다. 홀로 그렸다는 이야기는 본인의 편지와 맞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 바티칸의 다른 방에서는 20대 중반의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 앞쪽 계단에 홀로 턱을 괴고 앉은 인물이 있는데, 바티칸 미술관은 이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라파엘로가 천장을 몰래 보고 와서 경의를 표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전승이지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천장은 1512년 10월 말까지 완성되었고, 11월 1일 교황이 이 예배당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은 왜 덧칠당했나

등장인물 대부분이 벌거벗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예배당의 제단 벽에 그는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천장을 그린 사람이 예순을 넘겨 다시 같은 방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제단 벽 전체를 채운 벽화. 가운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오르내린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6~1541년,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벽. 그리스도 발치 오른쪽에 칼과 벗겨진 살가죽을 든 이가 성 바르톨로메오이고, 오른쪽 맨 아래 구석에 뱀이 감긴 미노스가 있다.

성인도 순교자도 그리스도까지 옷을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려졌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인체는 작품의 핵심 언어였습니다. 반발은 완성 전부터 나왔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교황의 의전관 비아조 다 체세나는 이 존엄한 자리에 부끄러운 곳을 드러낸 나체를 이렇게 많이 그린 것은 교황 예배당이 아니라 목욕탕이나 선술집에나 어울린다고 말했고,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로 그려 넣었습니다. 화면 오른쪽 맨 아래 구석, 몸에 뱀이 감긴 인물입니다.

그 자신도 이 화면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발치에서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진 살가죽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의 자화상으로 보는 것이 바티칸 미술관이 소개하는 해석입니다. 순교자의 상징물에 자기 얼굴을 얹은 셈입니다.

교회의 판단은 결국 반대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종교개혁에 대응하던 시기였고, 바티칸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논란은 해를 넘겨 이어지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 쪽 결정으로 일부 인물을 가리기로 합니다. 그 천을 그린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다니엘레 다 볼테라였고, 사람들은 그를 바지 만드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 몇 세기 동안 가리개는 더 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 그림의 수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무엇을 그릴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이 벽은 자주 불려 나오는 사례가 되었고, 이후 서양 미술사는 이 질문을 거듭 다시 만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의 말년, 마지막까지 정과 망치

1547년 1월, 일흔한 살의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 공사의 첫째 건축가가 됩니다. 조각도 회화도 아닌 세 번째 분야였습니다. 바사리는 교황이 보수를 여러 번 보냈지만 그가 끝내 받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오늘날 로마의 하늘선을 이루는 그 돔에 대해 그가 내놓은 해법은 그가 만들게 한 큰 나무 모형에 남아 있고, 그 모형은 지금 바티칸 미술관에 있습니다.

돔이 솟은 대성당을 옆에서 그린 17세기 판화
조반니 바티스타 팔다가 새긴 성 베드로 대성전 옆모습 판화(17세기). 판 아래 제목은 이 돔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설계를 따른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만년에 그가 혼자 붙들고 있던 것은 대성전이 아니었습니다. 155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쳐 깎은, 〈론다니니 피에타〉라 불리는 조각입니다. 죽은 그리스도를 성모가 뒤에서 안고 선 형상인데, 앞서 만든 〈피에타〉와는 전혀 다릅니다. 스물넷의 〈피에타〉가 표면 하나까지 닦여 있다면, 이 조각은 형태가 채 나오지 않은 채 멈춰 있습니다. 두 인물은 거의 한 덩어리로 붙어 있고, 따로 떨어진 팔 하나가 앞선 구상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옛 유리 슬라이드에 담긴 미완성 대리석 군상 사진. 두 인물이 거의 한 덩어리로 붙어 있다
〈론다니니 피에타〉, 1550년대~1564년, 대리석,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옛 강의용 유리 슬라이드에 담긴 사진이다. 두 인물 왼쪽에 따로 선 팔은 앞선 구상에서 남은 것이다.

그는 이 조각을 마지막 나날까지 다듬었습니다. 1564년 2월 로마에서 눈을 감았을 때 그는 여든여덟이었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시신은 소동을 피하려고 짐짝처럼 꾸려져 몰래 피렌체로 보내졌고,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습니다. 살아서 로마에 붙들려 있던 사람이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미완성으로 남은 이 마지막 조각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손댄 대리석 상당수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미완성이 그의 어법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주문이 겹쳤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스물넷의 서명이 「만들고 있었다」였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미 끝을 미뤄 둔 사람이었습니다.

거친 돌담 앞 받침대 위에 선 대리석 나체 남자상의 옛 사진
〈다비드〉(1501~1504)가 팔라초 베키오 앞에 서 있던 시절의 옛 사진. 원본은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사진 속 상의 허리에는 잎 모양 가리개가 붙어 있다.

미켈란젤로 대표작과 주요 작품

조각

  • 피에타(1498~1499): 그가 이름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작품. 서명 동사가 완료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이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 다비드(1501~1504): 앞선 조각가들이 손대다 남겨 둔 대리석 덩어리에서 꺼낸 상.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 모세(1513~1515): 40년을 끈 율리오 2세 영묘에서 남은 중심 조각.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 론다니니 피에타(1550년대~1564): 마지막 나날까지 손대던 미완성작.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회화

  •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512): 열두 사도 계획을 버리고 훨씬 크게 바꿔 그린 천장. 인물이 조각처럼 보인다
  • 아담의 창조: 천장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 두 손가락이 끝내 닿지 않는다
  • 최후의 심판(1536~1541): 제단 벽 전면. 1564년 결정으로 일부 인물에 천이 덧그려졌다

건축

  • 성 베드로 대성전 돔: 일흔한 살에 공사를 맡아 보수 없이 설계했다
  •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현관 계단: 건축 부재를 조각처럼 다룬 실험적 공간

자주 묻는 질문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을 누워서 그렸나요?

본인이 남긴 기록으로는 서서 몸을 뒤로 젖힌 자세였습니다. 그가 이 무렵 쓴 시는 수염이 하늘을 향하고, 앞쪽 살갗은 늘어나고 뒤쪽은 접히며, 몸이 활처럼 휜다고 묘사합니다. 누워서 그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개설서에 보이지만 이 시와 맞지 않습니다. 그 자세가 몸에 남긴 부담은 실제였습니다. 콘디비에 따르면 오래 위만 보고 그린 탓에 한동안은 아래를 볼 때 잘 보이지 않아서, 편지 같은 작은 글씨를 읽으려면 두 팔로 종이를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야 했고, 그 뒤 차츰 아래를 보며 읽는 데 다시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피에타에 서명한 것은 화가 나서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확인되지 않습니다. 남이 만든 작품으로 오해받은 것에 분해 밤중에 새겼다는 이야기는 바사리가 1568년판에 적은 것이고, 그보다 앞서 미켈란젤로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콘디비는 이 일화를 적지 않았습니다. 서명을 얹은 띠가 처음부터 글자를 받을 자리로 깎였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즉흥적인 분풀이가 아니라 계획된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을 정말 혼자 그렸나요?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콘디비는 조수 하나 없이 끝냈다고 썼지만, 1509년 1월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기가 불러온 화가가 막 떠났다는 대목이 있고, 바사리도 그가 피렌체에서 일손을 구했다고 적었습니다. 천장의 구상과 대부분의 붓질이 그의 것이라는 점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다는 이야기는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그 발판 위로

1509년의 그 발판으로 돌아가 봅니다. 목이 꺾인 채 천장에 물감을 올리면서 그는 자기가 화가가 아니라고 시에 적었습니다. 그 말은 엄살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편지 끝에 조각가라고 서명했고, 천장 그림 대금을 받는 영수증에도 조각가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 규정을 지킨 방식이 결국 그 천장을 다른 천장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림은 부조에 가까울수록 좋다고 믿은 사람이 회화를 맡은 결과였습니다.

다음에 그의 천장화 사진을 보게 된다면 인물의 어깨와 무릎이 어떻게 놓였는지, 장면 사이에 그려 넣은 돌빛 조각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평면에 그린 사람의 배치가 아닙니다. 돌을 다루던 눈이 물감으로 옮겨 온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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