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끝까지 자신을 화가로 부르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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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는 사람 키의 몇 배 되는 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서른네 살의 한 남자가 그 위에서 목을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그는 친구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Giovanni da Pistoia)에게 시 한 편을 적어 보냅니다. 목이 뒤로 꺾여 턱이 하늘을 향하고, 붓에서 떨어진 물감이 얼굴로 흘러내리며, 몸이 활처럼 휜다고 우스꽝스럽게 늘어놓은 뒤, 마지막에 이렇게 맺습니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지금 인류가 가장 많이 올려다본 천장을 그리는 중이면서 그렇게 썼습니다.

수염을 기른 노년 남자의 얼굴 부분. 콧대 가운데가 눌려 있다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린 미켈란젤로 초상(부분). 젊은 시절 부러진 콧대가 보인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스스로를 끝까지 조각가로 규정했으나 회화와 건축에서도 시대를 바꾼 르네상스의 거장
• 본명: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생몰: 1475년 3월 6일 토스카나 카프레세 출생 ~ 1564년 2월 18일 로마에서 사망(향년 88세)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피렌체, 로마, 볼로냐
• 활동 분야: 조각, 회화, 건축, 시
• 대표작: 피에타, 다비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최후의 심판, 모세, 론다니니 피에타

그는 자기 이름 뒤에 조각가라고 적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자신을 조각가로 규정했습니다. 편지에 서명할 때 이름 뒤에 조각가라고 붙였고, 회화 주문을 받을 때마다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교황 앞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겸양이나 엄살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피렌체와 로마에서 조각과 회화는 서로 우위를 다투던 관계였고, 어느 쪽이 더 높은 예술인가를 두고 실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논쟁에서 분명한 편이었습니다. 돌 안에 이미 들어 있는 형상을 꺼내는 일, 그것이 그가 생각한 예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생애는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하기 싫은 일을 계속 맡았고, 그 하기 싫은 일들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어긋남이 그의 작품 대부분을 설명합니다.

대리석을 배운 소년과 부러진 코

미켈란젤로는 1475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행정관이었고, 아들이 손으로 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당시 조각가와 화가는 장인이었고, 부오나로티 집안은 몰락했을망정 스스로를 시민 계층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열세 살에 그는 피렌체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의 공방에 들어갑니다.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나왔는데, 옮겨 간 곳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산 마르코 정원에 모아 둔 고대 조각 수집품 곁에서 배울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이 소년을 자기 집에 들여 함께 살게 했습니다. 열다섯 안팎의 나이에 그는 당대 이름난 인문학자들이 오가는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일화 하나가 그의 얼굴에 평생 남습니다. 같이 배우던 피에트로 토리자노와 다투다 주먹으로 코를 맞아 코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뒷날 그를 그린 초상들에서 콧대가 눌린 모습으로 나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토리자노는 나중에 이 일을 자랑삼아 떠들고 다녔다고 전해지는데, 결국 그는 피렌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이 주는 우아한 인상과 달리, 그 시절 공방은 이런 곳이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서명이 조각에 있는 이유

미켈란젤로가 평생 서명을 남긴 작품은 단 한 점, 스물넷에 완성한 피에타입니다. 지금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습니다.

무릎에 죽은 아들을 안은 성모의 대리석 군상. 성모의 가슴을 띠가 가로지른다
미켈란젤로, 〈피에타〉(1498~1499),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성모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에 서명이 새겨져 있다.

서명의 자리가 특이합니다. 성모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 위에 라틴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동사입니다. 그는 완료형(만들었다)이 아니라 미완료형을 썼습니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자기 작품에 서명할 때 쓰던 방식으로, 어떤 작품도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을 담은 표기입니다. 스물넷의 조각가가 자기 첫 대표작에 붙인 말이 “아직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여기서 널리 퍼진 이야기 하나를 짚고 가야 합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을 다른 조각가의 작품으로 오해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분해서 밤중에 몰래 자기 이름을 새겼다고 전했습니다. 극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라 지금도 널리 인용됩니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이 일화를 의심합니다. 이유는 조각 자체에 있습니다. 성모가 두른 그 띠는 옷의 구조상 아무 기능이 없습니다. 오직 글자를 얹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서명 자리는 돌을 쪼기 시작한 순간부터 계획돼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화가 나서 즉흥적으로 새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에 내 이름을 넣겠다고 정해 두었다는 뜻입니다.

이 교정은 앞의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그는 회화 주문을 받을 때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했고, 자기 이름을 남긴 단 한 자리는 조각이었으며, 그 자리마저 미리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무엇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이 사람은 대단히 분명했습니다.

하기 싫었던 천장, 그리고 40년을 잡아먹은 무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자기 영묘를 맡겼습니다. 조각상 수십 점이 들어가는 거대한 계획이었고, 조각가에게 이보다 좋은 주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 끌고 가장 크게 줄어든 작업이 됩니다.

교황의 관심은 곧 성 베드로 대성전 신축으로 옮겨 갔고, 영묘 예산은 밀렸습니다. 계획은 줄고 또 줄었습니다. 처음 계약에서 40년이 지난 뒤에야 축소된 형태로 마무리되었고, 그 결과물이 지금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모세를 중심으로 한 벽면 무덤입니다. 당대의 한 전기 작가는 이 40년을 무덤의 비극이라고 불렀습니다.

벽면 전체를 채운 대리석 무덤. 아래층 가운데에 수염이 긴 남자가 앉아 있다
율리우스 2세 영묘,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40년에 걸쳐 줄어든 계획의 결과이고, 아래층 가운데 앉은 것이 〈모세〉다.

시스티나 천장은 그 사이에 끼어든 일이었습니다. 1508년, 교황은 그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예배당 천장을 맡깁니다. 그는 조각을 하러 온 사람이었고, 천장화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발판에 올랐습니다.

그림으로 가득 찬 예배당 천장. 가운데에 두 손이 마주 뻗은 장면이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1508~1512). 가운데 칸이 〈아담의 창조〉다.

여기서 그는 이상한 선택을 합니다. 애초 계획은 열두 사도를 그리는 정도였는데, 그는 그것을 밀어내고 천지창조부터 노아까지의 이야기를 화면 가운데에 늘어놓고, 그 둘레에 예언자와 무녀 들을 앉혔습니다. 등장인물은 300명이 넘습니다. 하기 싫다던 사람이 주문받은 것보다 훨씬 큰 것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들은 회화라기보다 조각처럼 보입니다. 근육이 표면 위로 밀려 나오고, 몸은 늘 비틀린 자세로 놓입니다. 평면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벽에서 꺼낸 것 같은 인상, 그것이 이 천장이 다른 천장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화가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 회화를 바꾼 방식은 결국 조각가의 눈이었습니다.

누운 남자가 오른손을 뻗고, 붉은 천에 둘러싸인 노인이 왼손을 뻗어 손끝이 거의 닿는다
〈아담의 창조〉. 몸이 회화라기보다 조각처럼 화면 밖으로 밀려 나옵니다.

같은 시기 바티칸의 다른 방에서는 스물일곱 살의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 앞쪽에 홀로 턱을 괴고 앉은 인물이 있는데, 완성된 벽화 위에 나중에 덧그려 넣은 자리입니다. 미술사학자들은 그 얼굴을 미켈란젤로로 보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라파엘로가 천장을 몰래 보고 와서 경의를 표한 것이라는 해석인데, 사실이라면 당대 사람들도 저 천장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최후의 심판은 왜 덧칠당했나

같은 예배당의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린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 뒤인 1536년부터 1541년까지입니다. 천장을 그린 사람이 예순을 넘겨 다시 같은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제단 벽 전체를 채운 벽화. 가운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오르내린다
〈최후의 심판〉(1536~1541),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벽. 사후에 제자가 옷과 천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논란에 휘말립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옷을 걸치지 않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인도 순교자도 그리스도까지 벌거벗은 몸으로 그려졌습니다. 그에게 몸은 인간이 가진 유일한 진실이었고, 심판대 앞에 서는 자리에 옷이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종교개혁에 대응하던 시기였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화에서 음란함을 배격한다는 방침을 정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제자였던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문제가 된 인물들에게 옷과 천을 그려 넣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바지 만드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스승의 그림에 바지를 입힌 제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은 한 그림의 수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무엇을 그릴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처음 크게 불거졌고, 이후 서양 미술사는 이 질문을 반복해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여든여덟, 마지막까지 정과 망치

일흔한 살에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수석 건축가가 됩니다. 조각도 회화도 아닌 세 번째 분야였고, 그는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로마의 하늘선을 이루는 그 돔의 기본 설계가 이때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돔이 솟은 대성당을 옆에서 그린 17세기 판화
성 베드로 대성전과 돔을 옆에서 본 판화(조반니 바티스타 팔다, 1667~1669년). 판 아래에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따른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만년에 그가 혼자 붙들고 있던 것은 대성당이 아니었습니다. 론다니니 피에타라 불리는 조각입니다. 죽은 그리스도를 성모가 안고 있는 형상인데, 앞서 만든 피에타와는 전혀 다릅니다. 스물넷에 만든 피에타가 표면 하나까지 닦여 있다면, 이 조각은 형태가 채 나오지 않은 채 멈춰 있습니다. 두 인물은 거의 한 덩어리로 붙어 있고, 팔 하나는 이전 구상의 흔적으로 허공에 남아 있습니다.

옛 유리 슬라이드에 담긴 미완성 대리석 군상 사진. 두 인물이 거의 한 덩어리로 붙어 있다
〈론다니니 피에타〉(1564),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옛 강의용 유리 슬라이드에 담긴 사진이다.

그는 이 조각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쪼고 있었습니다. 1564년 2월, 여든여덟이었습니다. 로마에서 눈을 감았지만 시신은 곧 피렌체로 옮겨져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습니다. 조카가 유해를 몰래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살아서 로마에 붙들려 있던 사람이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미완성으로 남은 이 마지막 조각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손댄 대리석 상당수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미완성이 그의 어법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단순히 주문이 겹쳤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스물넷의 서명이 “만들고 있었다”였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미 끝을 유예해 둔 사람이었습니다.

거친 돌담 앞 받침대 위에 선 대리석 나체 남자상의 옛 사진
〈다비드〉(1501~1504)를 1860년대에 찍은 사진.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기기 전, 팔라초 베키오 앞에 서 있던 시절이다.

주요 작품

주요 작품

조각

  • 피에타(1498~1499): 그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 서명 동사가 완료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이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 다비드(1501~1504): 앞선 조각가들이 손대다 버려 둔 대리석 덩어리에서 꺼낸 상.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 모세(1513~1515): 40년을 끈 율리우스 2세 영묘에서 남은 중심 조각.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 론다니니 피에타(1564): 사망 며칠 전까지 손대던 미완성작.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회화

  •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512): 주문받은 것보다 훨씬 큰 계획으로 바꿔 그린 천장. 인물이 조각처럼 보인다
  • 아담의 창조: 천장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 두 손가락이 끝내 닿지 않는다
  • 최후의 심판(1536~1541): 제단 벽 전면. 사후 제자가 옷을 덧그려 넣었다

건축

  • 성 베드로 대성전 돔: 일흔한 살에 수석 건축가를 맡아 보수 없이 설계했다
  •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현관 계단: 건축 부재를 조각처럼 다룬 실험적 공간

자주 묻는 질문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을 누워서 그렸나요?

아닙니다. 그는 서서 목을 뒤로 젖힌 자세로 그렸습니다. 누워서 그렸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퍼진 것으로, 그가 직접 남긴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세가 몸에 남긴 부담은 실제였고, 한동안 고개를 젖힌 상태가 아니면 글을 읽기 어려웠다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피에타에 서명한 것은 화가 나서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의심받고 있습니다. 다른 조각가의 작품으로 오해받은 것에 분해 몰래 새겼다는 이야기는 조르조 바사리가 전한 것인데, 서명을 얹은 띠가 옷의 구조상 아무 기능이 없어 처음부터 서명을 위해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즉흥적인 분풀이가 아니라 계획된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다시 그 발판 위로

1509년의 그 발판으로 돌아가 봅니다. 목이 꺾인 채 천장에 물감을 올리면서, 그는 자기가 화가가 아니라고 시에 적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엄살이 아니라 자기 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 규정을 지킨 방식이 결국 그 천장을 다른 천장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회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벽에서 형상을 꺼냈습니다.

다음에 그의 천장화 사진을 보게 된다면 인물의 어깨와 무릎이 어떻게 놓였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평면에 그린 사람의 배치가 아닙니다. 돌을 다루던 눈이 물감으로 옮겨 온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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