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생애와 작품, 고대 로마 유적을 지키려 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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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 8월, 교황 레오 10세는 서른두 살의 화가에게 로마의 대리석과 돌을 맡기는 짧은 문서를 보냅니다. 앞으로 로마와 그 둘레 10마일 안에서 파내는 대리석과 돌은 모두 그에게 알려야 했고, 사흘 안에 알리지 않으면 벌금을 물었습니다. 글자가 새겨진 돌은 그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 석공이 깨거나 자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가 맨 앞에 적은 목적은 유적 보호가 아니었습니다. 새로 짓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쓸 돌을 먼 곳에서 실어 오지 말고 로마 안에서 구하겠다는 것, 그에 알맞은 돌을 그가 골라 교황을 위해 사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화가가 라파엘로입니다. 우리는 그를 성모자상과 〈아테네 학당〉의 화가로 기억합니다. 그는 대성당에 쓸 고대의 돌을 사들이는 자리에 앉고 4년쯤 지나, 교황에게 올릴 글에서 지금 보이는 새 로마가 고대 대리석을 구워 만든 석회로 지어졌다고 썼습니다. 이 글은 이 두 문서를 실마리로 그의 생애를 따라갑니다. 그가 정말 유적을 지키려 했는지는 두 번째 문서가 답합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우르비노에서 나서 로마에서 교황 두 사람의 벽화와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맡은 화가이자 건축가
• 생몰: 1483년 우르비노 출생(태어난 날은 바사리가 적은 성금요일로 치면 3월 28일, 묘비로는 4월 6일로 갈립니다), 1520년 4월 6일 로마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우르비노와 페루자, 피렌체, 로마
• 활동 분야: 회화와 프레스코, 건축, 고대 로마 건물 실측
• 대표작: 바티칸 서명의 방 벽화(〈아테네 학당〉 포함), 〈시스티나의 성모〉, 〈그리스도의 변용〉,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초상〉

화가가 왜 로마의 돌을 관장하게 되었는가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한 해 전인 1514년 8월 1일, 레오 10세는 다른 문서로 그를 이 공사의 책임자로 세웠습니다. 화가에게 왜 건축을 맡겼는지도 그 문서에 적혀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회화뿐 아니라 건물을 짓는 일에서도 브라만테에게 인정받았고, 대성당 공사를 시작한 브라만테가 죽음을 앞두고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그가 내놓은 대성당 설계안도 근거로 들고, 해마다 금화 300개를 주게 했습니다. 1515년의 문서도 그를 「이 건축의 책임자」라고 부르며 돌의 감독을 덧붙였습니다.

검은 모자를 쓰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초상
라파엘로, 〈자화상〉, 1506년, 나무판에 유채, 47.3×34.8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1890 n. 1706. 검은 모자와 흰 셔츠 깃만 비치는 어두운 옷을 우피치는 화가의 작업복 차림으로 설명한다.

16세기 초의 로마는 고대 도시 위에 새 도시를 짓고 있었고, 건축 자재가 대량으로 필요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공급처는 발밑의 고대 유적이었습니다. 1515년의 문서는 그 공급을 대성당 쪽으로 모으는 문서였고, 한 조항만 다른 방향을 향했습니다. 교황은 글자와 기념물이 새겨진 고대 돌이 석공들 손에 함부로 잘려 글자가 지워진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그런 돌은 라틴 문예를 가꾸는 데 남길 가치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 조항이 지키려 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돌에 새긴 글자였습니다.

라파엘로는 새 건물을 짓는 쪽의 사람이면서 옛 건물이 사라지는 현장을 매일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1515년의 직함은 이 두 얼굴을 한 문서에 담았습니다. 그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었는지는 몇 해 뒤의 글에서 드러납니다.

레오 10세에게 올린 이 글에는 날짜가 없습니다. 다만 글쓴이가 「내가 로마에 온 지 아직 11년째가 되지 않았다」고 적어, 1508년 무렵 로마에 온 라파엘로의 1519년 무렵 글로 봅니다. 18세기에 처음 인쇄될 때는 외교관이자 문필가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편지로 소개되었고(1733), 1799년 이탈리아 학자 다니엘레 프란체스코니가 라파엘로의 글이라고 다시 지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글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붙어 다닙니다.

검은 옷과 회색 모피를 두른 남자가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을 바라보는 반신 초상
라파엘로,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초상〉, 1514~1515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82×67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611. 레오 10세에게 올린 글이 처음 인쇄될 때 이 사람의 편지로 소개되었다. 회색 모피 소매 아래로 두 손을 포개고 정면을 본다.

글은 고대 로마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해 곧 고발로 넘어갑니다. 고트족과 반달족을 탓할 일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이 유적을 지켜야 했던 역대 교황들이 신전과 조각상과 개선문을 허물었다고 씁니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이 새 로마가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모두 고대 대리석으로 만든 석회로 지어졌다고 적습니다. 자기가 로마에 온 뒤에도 알레산드리나 길에 있던 메타라는 고대 건축물과 아치 하나, 많은 기둥과 신전이 허물어졌다며 허문 사람의 이름까지 댑니다.

이 글이 개탄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다음에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교황이 자기에게 고대 로마를 도면으로 옮기라고 명했다고 밝히고, 그 방법을 적습니다. 자석 나침반을 단 둥근 측량 기구를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하고, 벽 하나하나의 방향과 길이를 재서 종이에 옮기는 순서를 적습니다. 도면은 건물마다 세 장입니다. 바닥의 평면, 건물 바깥의 입면, 그리고 건물을 반으로 자른 듯 안쪽을 보여 주는 단면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원근법에 관한 것입니다. 멀어지는 쪽을 줄여 그리는 것은 「원근법의 이치이고 화가의 일이지 건축가의 일이 아니다」, 줄어든 선에서는 바른 치수를 얻을 수 없으니 건축 도면은 모든 선을 평행으로 그어야 한다고 씁니다. 유적을 그림의 소재가 아니라 다시 세울 수 있는 정보로 남기려 했다는 것이 이 문장에서 분명해집니다.

계획이 실제로 진행되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죽고 며칠 뒤 베네치아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은 편지에, 그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세계를 그린 것처럼 고대 로마의 건물을 한 권의 책에 펼쳐 놓고 있었고 첫째 구역을 이미 끝냈다고 적었습니다. 폐허에서 평면과 자리를 모았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없는 곳은 고대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책과 옛 기록으로 정면의 장식까지 되살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대 로마 유적을 지키려 한 화가」라는 말은 이 글에 기대면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그 말을 1515년의 직함에까지 넓히면 사실과 어긋납니다. 그 직함은 무엇보다 돌을 사들이는 자리였고, 보호 조항은 글자 새긴 돌에 머물렀습니다. 라파엘로는 대성당에 쓸 돌을 고르던 그 무렵에 사라지는 건물을 재고 있었습니다.

라파엘로 생애, 궁정에서 자란 아이

그는 화실에서만 자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이 함께 그를 길렀습니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1568)은 라파엘로가 1483년 우르비노에서 성금요일 밤에 태어났다고 적습니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우르비노 궁정에서 일하던 화가였습니다. 바사리는 그를 아주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지만 재주 있는 사람으로 적고, 아들을 유모에게 보내지 않고 어머니 젖으로 키웠으며 일찍부터 그림을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우르비노는 작지만 학자와 화가가 모이던 궁정이었습니다. 그 궁정을 키운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얼굴은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에 옆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 마자는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1491년, 그가 여덟 살 때였습니다. 1494년 7월 27일 조반니 산티가 남긴 유언장은 그녀를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으로 적고, 아들의 후견인으로 사제인 동생 바르톨로메오를 지정합니다. 조반니는 그해 8월 1일에 숨졌고, 라파엘로는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물려받았고, 우르비노에 살던 숙부 손에서 자랐습니다.

이 배경은 그의 경력을 설명해 줍니다. 바사리는 그를 「친절 그 자체인 사람」이라 불렀고,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그가 누구와도 잘 지냈고 활발한 공방을 꾸렸다고 썼습니다. 교황 두 사람과 로마의 유력 가문들이 그에게 계속 일을 맡긴 데에는 솜씨와 함께 이런 처신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 아들을 페루자의 화가 페루지노에게 맡겼습니다. 바사리는 이 시기 라파엘로의 그림이 스승의 것과 구별되지 않았다며 페루자 산프란체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예로 듭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그 공방에 있었는지는 바사리의 서술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이때 몸에 밴 부드러운 윤곽과 온화한 표정, 좌우가 정돈된 구도는 뒤의 그림에서도 오래 남습니다.

문서 쪽에서 보면 그림이 조금 달라집니다. 그가 일찍부터 페루지노 밑에서 정식 도제로 지냈다는 설은 연구자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고,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2022년 소장품 도록 저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서에 남은 그의 첫 일은 1500년 12월, 열일곱 살에 맺은 제단화 계약입니다. 이 계약에서 그는 이미 「마스터」로 이름이 올랐고, 함께 이름을 올린 사람은 페루지노가 아니라 아버지 조반니 산티 밑에서 일했던 화가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였습니다. 치타 디 카스텔로의 산타고스티노 성당에 걸린 이 성 니콜라 다 톨렌티노 제단화는 1789년 지진으로 부서져 지금은 조각 몇 점만 남아 있습니다. 바사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페루자로 보낼 때 어머니가 많이 울었다고까지 쓰지만, 어머니는 앞서 본 대로 149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사리의 연대를 그대로 믿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성모가 아기를 안고 가운데 앉아 있고 좌우에 두 성녀, 뒤에 두 천사가 대칭으로 선 원형 제단화
페루지노 공방, 〈두 천사와 성녀 로사·성녀 카타리나에 둘러싸인 성모자〉, 1475~1500년, 포플러 나무판에 유채, 지름 14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719. 오래 페루지노의 그림으로 여겨졌으나 루브르는 공방의 협업자, 아마도 안드레아 다시시가 그렸다는 견해를 함께 적는다. 성모를 가운데 두고 성녀와 천사가 좌우로 짝을 이룬다.

스승의 공방은 여러 손이 한 화면을 나눠 그리는 곳이었습니다. 이 점은 뒤에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꾸린 공방을 볼 때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만난 두 거장

1504년 무렵 피렌체로 간 것이 그의 화면을 바꿨습니다.

바사리는 계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라파엘로는 시에나에서 화가 핀투리키오의 도서관 벽화 밑그림을 돕고 있었는데, 그곳 화가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마 전투 밑그림과 미켈란젤로의 나체 인물 밑그림을 크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일을 두고 피렌체로 왔다는 것입니다. 피렌체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다빈치는 라파엘로보다 서른한 살, 미켈란젤로는 여덟 살 위였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마사초의 옛 벽화와 두 사람의 작업을 공부하며 화풍이 크게 나아졌다고 씁니다.

이 시기에 그가 되풀이해 그린 것이 성모자상입니다. 〈초원의 성모〉를 비롯한 이 연작에서 성모와 두 아이는 대체로 삼각형 안에 들어앉고, 시선과 손이 서로를 향해 이어집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은 같은 시기 〈방울새의 성모〉의 피라미드 구도가 다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자〉 밑그림과 미켈란젤로의 〈브뤼헤의 성모〉에서 받은 인상을 반영한다고 설명합니다. 두 아이의 손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는 〈초원의 성모〉 해설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풀밭에 앉은 성모가 두 아이에게 손을 뻗고 있고 세 인물이 삼각형을 이룬다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 1505년 또는 1506년, 포플러 나무판, 113×88.3cm, 빈 미술사박물관, GG 175. 성모의 머리를 꼭짓점으로 세 인물이 삼각형을 이룬다.

이 시기의 그림을 보면 그의 작업 방식이 드러납니다. 전례 없는 형식을 새로 만들기보다 앞선 사람들이 이룬 것을 받아들여 자기 화면으로 정리하는 쪽이었습니다. 바사리도 그가 나체 인물에서는 미켈란젤로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좇는 대신 여러 분야에 두루 능한 화가가 되기로 했다고 씁니다.

라파엘로의 바티칸과 공방이라는 모델

1508년 무렵 로마로 부름을 받으면서 그의 규모가 달라집니다. 바사리는 같은 우르비노 출신으로 먼 친척이던 브라만테가 교황에게 말을 넣어 그를 불렀다고 씁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자기 서재 겸 개인 집무실로 쓰던 방의 벽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지금 서명의 방이라 부르는 이 방의 벽화는 1508년에서 1511년 사이에 그려졌고, 그 가운데 하나가 〈아테네 학당〉입니다. 같은 시기 가까운 건물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아치 아래 계단에 수십 명의 인물이 모여 있고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 나온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1년, 프레스코, 바티칸 서명의 방. 겹겹의 아치와 격자 천장, 바닥의 줄이 가운데 두 철학자 쪽으로 좁아든다.

이 벽화를 앞의 글과 나란히 놓으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은 배경의 거대한 건축이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 계획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아치 안쪽 천장의 격자무늬를 따라가 보면 멀어질수록 칸이 작아지고, 바닥의 줄도 가운데로 모입니다. 화가로서 그는 건물을 멀어질수록 줄여 그렸습니다. 10년쯤 뒤에는 건축 도면에서 바로 그 줄이는 일을 하지 말라고 썼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기술을 두고 그림과 기록을 갈라 놓은 셈입니다.

화면 오른쪽 끝, 검은 모자를 쓰고 이쪽을 보는 인물이 바티칸 미술관이 라파엘로 자신이라고 설명하는 얼굴입니다. 앞의 우피치 〈자화상〉과 같은 모자입니다. 바티칸 미술관은 앞쪽 계단에서 대리석 덩어리에 기대 앉은 헤라클레이토스도 미켈란젤로의 초상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그 무렵 가까운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천장화를 그리던 사람입니다. 다른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아테네 학당〉 해설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은 더 늘어납니다. 서명의 방 다음으로 교황의 개인 접견실이던 엘리오도로의 방을 1511년부터 1514년까지 그렸고, 이어 보르고 화재의 방을 1514년부터 1517년까지 맡았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은 이 세 번째 방의 상당 부분을 그가 제자들에게 넘겼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인 콘스탄티누스의 방은 그가 죽은 뒤 공방이 1524년에 마쳤습니다. 방들의 벽화, 바티칸 궁 회랑의 장식, 태피스트리 밑그림, 초상화와 제단화, 그리고 대성당 공사가 겹쳤습니다. 이것을 감당한 것이 공방입니다. 바사리는 그가 궁에 갈 때면 늘 쉰 명의 화가가 따라나섰고, 그가 제자들을 자식처럼 가르쳤으며 「화가가 아니라 군주처럼 살았다」고 썼습니다.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 회랑에 대해서는 그가 밑그림을 모두 그리고 인물 여럿을 손수 칠했다고 적었는데, 바꿔 말하면 나머지는 다른 손이 칠했다는 뜻입니다.

키지는 라파엘로에게 처음으로 건축 설계를 맡긴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1513년에 공사가 시작된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키지 예배당은 라파엘로가 통째로 설계했고, 예배당의 모자이크는 1516년 베네치아 출신 루이지 데 파체가 그의 밑그림대로 완성했습니다. 여기서도 구상은 그가 하고 손일은 다른 사람이 맡았습니다.

구름 위에 선 성모가 아기를 안고 내려오고 화면 아래에 두 천사가 팔을 괴고 올려다본다
라파엘로, 〈시스티나의 성모〉, 드레스덴 고전 거장 회화관. 양옆으로 걷힌 녹색 커튼 사이로 성모가 구름을 밟고 내려오고, 아래쪽 두 천사가 팔을 괴고 위를 올려다본다.

대가도 있었습니다. 후기 작품 가운데는 어디까지가 그의 손인지 가리기 어려운 것이 있고, 귀속은 지금도 작품마다 따로 따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피렌체로 가기 전에 본 스승의 공방이 그랬듯, 라파엘로의 로마 공방도 여러 손이 한 화면을 나눠 맡는 곳이었습니다.

라파엘로, 서른일곱 살의 마지막 날

1520년 4월 6일 성금요일 밤, 그는 서른일곱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키엘의 편지는 병이 보름 동안 이어졌고 그사이 교황이 적어도 여섯 번 사람을 보내 소식을 물었다고 적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교황의 시종(쿠비쿨라리오) 직함을 지니고 있었고, 교황이 그의 죽음에 비통하게 울었다고 적었습니다.

병의 원인으로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바사리에게서 나왔습니다. 그가 남몰래 사랑하던 여인과 지나치게 어울린 뒤 고열로 돌아왔는데, 사정을 털어놓지 않아 의사들이 몸에 열이 찼다고 보고 피를 뽑았고, 그 때문에 더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죽고 30년 뒤인 1550년 바사리의 책에 처음 실렸고, 방탕과 벌을 교훈처럼 묶은 서술이라 그대로 사실로 받기는 어렵습니다. 바사리는 그 여인의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흔히 붙는 포르나리나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라 포르나리나〉 해설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2020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비코카 대학의 연구진이 바사리가 적은 사혈을 다시 따져 보는 글을 의학 학술지에 냈습니다.

유언은 바사리의 기록으로 전합니다. 그는 사랑하던 여인을 집에서 내보내되 살아갈 방편을 남겨 주고, 나머지를 제자 줄리오 로마노와 조반 프란체스코 등에게 나눴습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비비에나 추기경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기로 하고도 몇 해를 미뤘다고 씁니다. 그리고 당시 산타 마리아 로톤다라 부르던 판테온 안의 고대 감실 하나를 새로 고쳐 제단을 세우고 대리석 성모상을 두도록 재산을 남기며, 그곳을 자기 무덤으로 골랐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일하던 방, 시신의 머리맡에 마지막 제단화 〈그리스도의 변용〉을 세워 두었다고 적습니다. 죽은 몸과 살아 있는 그림을 함께 본 사람들이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프랑스 나르본 대성당에 보내려고 주문한 것이었는데, 라파엘로가 죽자 추기경은 그림을 보내지 않고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주제단에 두었습니다.

위쪽에서 그리스도가 빛에 싸여 떠오르고 아래쪽에서는 사람들이 몸을 뒤틀며 소란을 벌인다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용〉, 1516~1520년, 나무판에 템페라 그라사(기름을 섞은 템페라), 410×279cm, 바티칸 미술관 회화관, Inv. 40333. 위쪽은 빛에 싸인 그리스도, 아래쪽은 귀신 들린 아이를 둘러싼 사도들이다. 마태오복음에 잇달아 나오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쌓았다.
석관 아래 대리석 판에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는 판테온 내부
판테온 안 라파엘로 무덤의 라틴어 비문. 「QVO DIE NATVS EST EO ESSE DESIIT」(태어난 그날 생을 마쳤다) 아래 줄에 「VIII ID APRIL MDXX」(1520년 4월 6일)가 보이고, 위쪽에는 「PICTVRAE ET ARCHITECT. OPERIBVS」(회화와 건축 작업으로)가 새겨져 있다.

무덤의 비문은 1515년의 문서를 교황의 이름으로 쓴 비서이자 문인 피에트로 벰보가 지은 것으로 전합니다. 비문은 그가 서른일곱 해를 온전히 살고 「태어난 그날 생을 마쳤다」고 적고, 날짜를 4월 6일로 새겼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성금요일에 태어나 성금요일에 죽었다고 썼습니다. 1520년의 성금요일은 4월 6일이지만 1483년의 성금요일은 3월 28일입니다. 바사리는 교회력의 같은 날을, 비문은 달력의 같은 날을 「태어난 날」로 센 셈이고, 태어난 날이 두 가지로 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비문은 그를 화가로만 부르지 않습니다.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 두 교황의 회화와 건축 작업으로 영광을 더했다고 새겼습니다. 그가 계획한 고대 로마 도면집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미키엘이 전한 대로 첫째 구역까지 나아간 상태에서 작업은 멈췄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라파엘로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대표적인 벽화 연작은 바티칸 박물관 안의 라파엘로의 방들에 있고, 〈그리스도의 변용〉도 바티칸 미술관 회화관에 있습니다. 〈시스티나의 성모〉는 독일 드레스덴 고전 거장 회화관에, 〈자화상〉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카스틸리오네 초상〉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초원의 성모〉는 빈 미술사박물관에 있습니다. 전시 여부는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Q. 다빈치, 미켈란젤로와는 어떤 관계였나요?

A. 다빈치보다 서른한 살, 미켈란젤로보다 여덟 살 아래였고, 두 사람의 작업을 공부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교황과 다투고 피렌체로 떠나 있던 사이, 시스티나 예배당 열쇠를 가진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에게 천장화를 보여 주었다고 적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가 라파엘로를 띄우려고 자기에게 해를 끼쳤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런 기록에서 나왔습니다. 미켈란젤로 쪽 사정은 미켈란젤로 생애에서, 다빈치의 생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생애에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

Q. 왜 오랫동안 미술 교육의 표준이 되었나요?

A. 구도와 인체와 색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규칙으로 정리해 가르치기 좋았다는 설명이 흔합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도 고전주의의 본보기로서 그의 선례가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아카데미 회화의 전통을 지배했다고 설명합니다. 19세기 영국 화가들이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며 라파엘전파를 결성한 것도, 그가 미술 아카데미의 기준으로 굳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판테온 안에서

판테온은 고대 로마의 신전이 교회가 되어 지금까지 서 있는 건물입니다. 라파엘로는 그 안의 고대 감실을 고쳐 자기 무덤으로 삼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로마의 다른 고대 건물들은 석회 가마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교황에게 올리려 한 글의 요지는 단순합니다. 사라지기 전에 재어 두자는 것입니다. 원근법으로 화면을 세우던 화가가 그 원근법을 내려놓고 쓴 문장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그의 그림 못지않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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