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4년 5월, 베네치아의 산 로코 대신도회는 운영진이 모이는 방인 알베르고의 천장을 꾸미기로 합니다. 가운데 타원 칸부터였습니다. 신도회는 베네치아에 있던 화가 넷을 불러 한 달 안에 소묘를 내게 했습니다. 주세페 살비아티, 마침 베네치아에 와 있던 페데리코 주카로, 파올로 베로네세, 그리고 야코포 틴토레토였습니다. 가장 잘 그린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네 해 뒤 조르조 바사리가 펴낸 『미술가 열전』에 따르면, 다른 화가들이 소묘에 공을 들이는 사이 틴토레토는 칸의 치수를 재고 큰 화폭에 아무도 모르게 그림을 그려 제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어느 아침 소묘를 보러 모인 회원들은 화를 내며, 소묘를 청했지 일을 맡긴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자기 소묘 방식이고 달리는 할 줄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값을 치르고 싶지 않다면 선물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신도회 기록이 확인해 주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6월 22일 신도회는 이 선물을 받아들였고, 며칠 뒤 그림을 떼지 말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 한 줄 정의: 베네치아의 색채에 격렬한 동세와 원근을 결합해 극적인 화면을 만든 화가
• 생몰: 1518년 또는 1519년 베네치아 출생(사망 기록의 나이로 거꾸로 셈한 해), 1594년 5월 31일 같은 도시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베네치아 공화국, 평생 이 도시를 거의 떠나지 않음
• 활동 분야: 대형 종교화와 신화화, 초상화
• 대표작: 〈노예를 구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 산 로코 대신도회 회당의 연작, 〈최후의 만찬〉, 두칼레 궁의 〈천국〉
완성작을 몰래 건 그날, 그리고 그 뒤 스물네 해
이 한 수가 그 뒤 스물네 해 동안 이어진 일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 일화는 두 층으로 나눠 읽어야 합니다. 신도회가 경합을 열었고, 틴토레토가 완성작을 선물했고, 신도회가 그것을 받아들여 떼지 말라고 정한 것은 신도회의 기록입니다. 남들 모르게 그려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는 장면은 바사리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 틴토레토, 〈자화상〉, 1588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63×5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572. 배경과 옷을 어둠에 묻고 얼굴과 수염만 밝게 남겼다. 오른쪽 어깨 높이에 「그 자신의」라는 뜻의 라틴어 IPSIVS가 보인다. |
「몰래」라는 말은 바사리의 것입니다. 그는 틴토레토가 그림을 아무도 모르게 그렸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바사리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피렌체 사람인 그는 사건 두 해 뒤인 1566년에 베네치아를 찾았고, 그때 들은 이야기를 1568년 책에 실었습니다. 오늘날 산 로코 대신도회도 이 장면을 소개할 때 「바사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큰 화폭을 회원들 모르게 천장에 올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신도회 안에 도운 사람이 있었는지도 바사리는 적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커집니다. 틴토레토가 죽고 48년 뒤인 1642년, 베네치아의 화가이자 전기 작가 카를로 리돌피는 장면을 더 채워 넣었습니다. 하인들에게서 몰래 치수를 얻었고, 그림을 판지로 덮어 두었다가 심사 날 벗겼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은혜를 입은 성 로코께 바치겠다고 했고, 성인에게 바친 것은 신도회의 법으로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돌피는 이 일을 1560년 무렵으로 적었고, 경합에 나온 화가로 안드레아 스키아보네를 꼽았습니다. 스키아보네는 1563년 12월 1일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해마다 100두카토(베네치아 금화)를 받기로 했다는 대목도 기록에서는 13년 뒤인 1577년에 틴토레토 자신이 내건 조건으로 나옵니다. 리돌피는 서로 다른 해의 일을 한 장면에 모았습니다. 그의 생생한 세부를 사실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걸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공모전에 완성작을 몰래 걸었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요. 「공모」는 맞습니다. 신도회 스스로 이 일을 경합이라 부르고 기한과 참가자를 정했습니다. 다만 누구나 응모하는 공모가 아니라 네 사람을 불러 겨루게 한 자리였습니다. 「몰래」는 바사리가 전한 말입니다. 「기증」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틴토레토는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나머지 천장 그림도 값을 받지 않고 마쳤습니다.
| 틴토레토, 〈영광의 성 로코〉, 1564년, 캔버스에 유채, 베네치아 산 로코 대신도회 알베르고 천장. 1564년 경합 때 소묘 대신 제자리에 올려 둔 바로 그 그림이다. 위 왼쪽에서 하느님 아버지가 천사들과 함께 내려오고, 가운데 붉은 옷의 성 로코는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로 다리와 몸이 짧게 줄어 있다. |
바사리가 옮긴 틴토레토의 대답에는 한 문장이 더 있습니다. 작품의 소묘와 모형은 누구도 속이지 않으려면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천장화라는 조건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린 타원은 하느님 아버지가 천사들과 함께 내려와 성 로코를 맞는 장면이고, 신도회는 이 그림의 특징으로 대담한 원근 단축(멀어지는 부분을 짧게 줄여 그려 깊이를 내는 기법)을 꼽습니다. 이런 그림은 손에 든 종이 위에서와 머리 위 천장에서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리돌피는 틴토레토가 평소 인형을 실로 들보에 매달아 놓고 올려다보며 천장화의 단축을 연구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의 대답은 제자리에 걸린 그림만이 회원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속임 없이 보여 준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일감을 먼저 차지한 데 대한 그럴듯한 변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16년 전의 그는 반대로 움직였습니다. 1548년 산 마르코 대신도회에 〈노예를 구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을 넘겼을 때, 구성이 낯설다며 회원들 사이에 이견이 일자 그는 그림을 작업실로 도로 가져갔다가 지지자들의 청으로 다시 넘겼습니다. 1548년에는 거둬 갔고 1564년에는 먼저 걸었습니다. 두 사건을 잇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신도회 회원들의 이견이 그림의 운명을 어떻게 흔드는지 이미 한 번 겪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뒤의 일은 기록이 촘촘합니다. 1565년 그는 이 신도회의 회원이 되었고, 같은 해 알베르고 정면 벽에 〈십자가 처형〉을 그렸습니다. 그 벽은 1553년 티치아노가 그림을 내겠다고 했다가 끝내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알베르고의 수난 연작은 1567년 초에 끝났고, 1575년부터는 위층 대회의실, 1582년부터는 아래층 홀로 이어졌습니다. 1577년 11월 그는 해마다 성 로코 축일(8월 16일)에 큰 그림 세 점을 물감값까지 스스로 대며 넘기겠다고 하고, 그 대가로 평생 해마다 100두카토만 청했습니다. 신도회는 이 일을 큰 화가의 솜씨를 적은 값에 얻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1564년부터 1588년 무렵까지, 그는 이 건물 세 층을 60점이 넘는 화폭으로 채웠습니다.
| 틴토레토, 〈십자가 처형〉, 1565년, 베네치아 산 로코 대신도회 알베르고 방. 가운데 십자가에서 빛살이 퍼지고, 왼쪽에서는 밧줄로 다른 십자가를 끌어 세우는 중이다. 화면이 가로로 아주 길어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시선이 좌우로 옮겨 다니게 된다. |
바사리는 이 일화를 틴토레토가 일감을 얻는 방식을 설명하는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는 틴토레토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수단으로도 늘 일감을 얻는다며, 다른 수단이 통하지 않으면 싼값에든 선물로든 억지로든 어떻게든 맡으려 한다고 썼습니다. 빠르고 값싸게 그린다는 평판은 그보다 먼저 시작됐습니다. 1545년 문필가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그의 그림을 반기면서도 제작이 빠르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그래도 바사리는 그 단락을 참으로 유능한 사람이며 칭찬받을 화가라는 말로 맺습니다. 당대 기록 속의 그는 실력자이면서 다루기 어려운 경쟁자였습니다.
다만 산 로코의 결과물은 수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위층 대회의실에서는 천장의 구약 장면들과 벽의 신약 장면들이 서로 짝을 이루도록 짜였다고 신도회는 설명합니다. 한 사람이 한 건물을 20년 넘게 채우면서 화면끼리 이어지게 만든 셈입니다. 신도회는 일부 비평가가 바로 이 통일성 때문에 이곳을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견준다고 소개합니다. 회당 안에서는 천장과 사방의 벽이 끊김 없이 그림으로 이어집니다.
틴토레토, 염색공의 아들이라는 이름
그의 이름 자체가 출신을 가리킵니다.
본명은 야코포 로부스티입니다. 틴토레토는 「작은 염색공」이라는 뜻의 별명으로, 아버지 바티스타가 비단에 물을 들이는 염색공이었던 데서 나왔습니다. 그는 초기 그림에 자신을 「염색공」이라고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난 해는 사망 기록에서 거꾸로 셈합니다. 1594년 5월 31일의 사망 기록이 그를 일흔다섯 살로 적어, 1518년이나 1519년이 됩니다.
| 틴토레토, 〈젊은 날의 자화상〉, 1548년 무렵, 소나무 판에 유채, 약 45.7×36.8cm,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CAI.103. 몸은 돌린 채 고개만 어깨 너머로 돌려 이쪽을 본다. |
집안의 원래 성을 코민(Comin)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버지 형제가 1509년 파도바 포위전에서 보인 힘 때문에 「건장한」이라는 뜻의 로부스티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이 따라붙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그의 집안 족보라는 문서에서 나왔고, 이탈리아 인명사전은 그 족보를 위작으로 봅니다. 기록에 남은 그의 이름은 로부스티와 틴토레토입니다.
이 배경은 그의 경력과도 이어집니다. 그는 베네치아를 거의 떠나지 않았습니다. 외국 궁정의 주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578년 만토바 공작 굴리엘모 곤차가가 먼저 곤차가 가문의 전공을 그린 네 점을 주문했고, 이듬해 나머지 네 점을 더 주문해 모두 여덟 점의 연작이 되었습니다. 1580년 9월 그는 아내 파우스티나와 함께 만토바에 가서 그림이 걸리는 것을 직접 지켜봤습니다. 이것이 그가 도시 밖으로 나간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드문 사례입니다. 그래도 그는 궁정으로 옮겨 가지 않았습니다. 1559년부터 베네치아 도제(국가원수)의 공식 초상을 맡았고, 1574년 운하 옆 작은 저택을 사서 가족과 작업장을 옮긴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습니다. 티치아노가 황제와 왕을 상대했다면 틴토레토는 자기 도시의 신도회와 성당과 관청을 상대했습니다.
공방도 가족이 꾸렸습니다. 1550년대 말 그는 파우스티나 에피스코피와 결혼했고, 1560년 11월에 태어난 아들 도메니코를 비롯해 여러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보다 앞선 1554년 무렵에는 결혼 밖에서 얻은 딸 마리에타가 있었습니다. 말년의 그는 그림의 손일을 마리에타와 도메니코, 마르코 같은 자녀들에게 점점 더 맡겼습니다. 마리에타는 초상화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남아 있는 확실한 작품이 적고, 1590년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틴토레토 자화상 글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틴토레토,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
그가 작업하던 방 벽에 써 붙였다고 전해지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를 처음 적은 사람은 1642년의 리돌피이고, 이탈리아 인명사전은 이것을 리돌피가 다듬어 널리 퍼진 신화라고 부릅니다. 그보다 앞선 기록은 틴토레토가 살아 있던 1584년에 나왔습니다. 피렌체의 문필가 라파엘로 보르기니는 그가 처음부터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으뜸 스승으로 삼았고, 색은 자연을, 그다음에는 특히 티치아노를 본받았다고 스스로 말한다고 적었습니다. 벽에 실제로 글이 붙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을 함께 겨냥했다는 방향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 자신의 말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회화는 두 진영으로 갈려 있었습니다. 피렌체와 로마는 소묘를, 즉 선으로 형태를 확정하는 것을 회화의 기초로 보았고 그 정점에 미켈란젤로가 있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색을 기초로 삼았고 그 정점이 티치아노였습니다. 틴토레토의 문구는 이 둘을 한 화면에서 합치겠다는 선언입니다.
실제 그의 화면이 그렇습니다. 인물의 몸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처럼 근육이 뚜렷하고 자세가 격렬한데, 그것을 만드는 방식은 선이 아니라 빛과 색의 덩어리입니다. 리돌피에 따르면 그는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 무덤의 조각 〈새벽〉, 〈황혼〉, 〈밤〉, 〈낮〉을 본떠 만든 작은 모형을 구해, 등불 아래에서 그림자가 짙게 지도록 놓고 수없이 그렸습니다. 어두운 배경에서 밝은 부분만 끌어올려 형태를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 이런 연습과 이어집니다. 인물이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느낌도 여기서 옵니다.
|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5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149.4×168cm, 런던 내셔널갤러리, NG1313. 인물들이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는 데는 사정이 있다. 1727년 이전 언젠가 화면 아래쪽 3분의 1가량이 잘려 나가, 지금 보이는 것은 원래 그림의 위쪽이다. |
그가 누구 밑에서 배웠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화가로 홀로 선 시점은 문서에 남아 있습니다. 집주인이 1538년 1월에 낸 세금 신고 문서에 따르면 열여덟 살 무렵의 그는 산 카시아노 구역에 작업장 딸린 집을 해마다 20두카토에 빌려 자기 이름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티치아노 공방에 들어갔다가 며칠 만에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스승이 제자의 재능을 경계했다는 설명이 붙곤 하는데, 이 이야기는 리돌피의 1642년 전기에 처음 나오고, 이탈리아 인명사전은 그의 수련기를 소설 같은 일화로 엮인 시기라고 부릅니다.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는 티치아노 생애 글에서 따로 짚었습니다.
틴토레토의 화면은 왜 늘 기울어 있는가
그의 그림 상당수가 정면이 아니라 아래나 옆에서 보는 자리를 염두에 두고 짜였기 때문입니다.
| 틴토레토, 〈노예를 구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 1547~1548년, 캔버스, 416×544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카탈로그 42. 성인이 화면 위에서 머리를 아래로 하고 내리꽂히고, 그 바로 아래 땅바닥에 노예가 누워 있다. |
1548년 4월 이전에 완성된 〈노예를 구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이 그 시작입니다. 산 마르코 대신도회 대회의실에 걸렸던 그림입니다. 화면 위 가운데에서 성 마르코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등을 보이며 내리꽂힙니다. 바로 아래 땅바닥에는 벌거벗은 노예가 누워 있고, 그 둘레에 부러진 나무망치와 쇠붙이 조각이 흩어져 있습니다. 오른쪽에서는 집행인이 부서진 쇠망치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젖히고, 그 위 높은 자리에서 주인이 몸을 앞으로 내밀어 내려다봅니다. 성인에서 시작해 노예로 내려간 뒤 오른쪽으로 따라 올라가면 기적과 그 결과와 사람들의 반응이 한 바퀴로 이어집니다. 아레티노는 이 그림을 보고 노예의 몸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썼는데, 같은 편지에 그 빠르기를 인내로 바꾼다면 이름이 복될 것이라는 충고도 넣었습니다.
리돌피는 그가 이런 각도를 어떻게 연습했는지도 적었습니다. 밀랍과 진흙으로 작은 인형을 빚어 헝겊 옷을 입히고, 판자와 판지로 만든 작은 집 안에 세운 뒤 창마다 작은 등불을 달아 빛과 그림자를 살폈다는 것입니다. 인형을 실로 들보에 매달아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도 연구했는데, 리돌피는 그 까닭을 천장화의 단축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사후 전기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극단적으로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본 각도가 그의 화면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것은 그림에서 확인됩니다. 산 로코의 천장 타원도 그런 각도로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렸는지는 동시대 사람의 눈에도 띄었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때로 밑그림 단계의 거친 상태를 완성작으로 내놓아, 붓 자국이 소묘와 판단보다 우연과 기세로 남아 있다고 썼습니다. 흠을 잡으려고 쓴 문장이지만, 인물을 하나씩 매끈하게 다듬기보다 큰 동작과 빛의 방향을 먼저 잡는 방식을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붓질이 생략된 듯하다가 물러서면 인물과 빛이 또렷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방식은 작은 그림보다 높은 벽과 천장에서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 설계는 감상 위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 상당수는 높은 벽면이나 천장, 또는 교회 옆벽에 걸릴 것을 전제로 그려졌습니다. 〈세족식〉에서 주요 인물이 화면 오른쪽 끝에 놓인 것도, 프라도 미술관은 원래 걸렸던 산 마르쿠올라 성당에서 신자들이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바라보던 자리를 계산한 결과로 설명합니다.
| 틴토레토, 〈세족식〉, 1548~1549년, 캔버스에 유채, 210×533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P002824.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화면 한가운데가 아니라 오른쪽 끝에 놓여 있다. |
대평의회실의 〈천국〉
말년에 그는 두칼레 궁에서 가장 큰 방의 벽을 맡았습니다.
1577년 화재로 두칼레 궁 대평의회실 벽의 14세기 벽화가 크게 상했습니다. 베네치아 정부는 그 자리, 도제의 자리 뒤 벽을 채울 그림을 두고 공모를 열었습니다. 이번에도 경합이었지만, 처음 일을 맡은 것은 틴토레토가 아니라 파올로 베로네세와 프란체스코 바사노였습니다. 1588년 베로네세가 세상을 떠난 뒤, 리돌피가 새로운 선정이라고 적은 절차를 거쳐 일이 틴토레토에게 넘어온 것으로 봅니다. 1564년에는 경합의 규칙을 앞질러 일을 따냈고, 이번에는 먼저 맡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일이 그에게 왔습니다.
| 틴토레토와 공방, 〈천국〉, 1588~1592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약 7미터·가로 22미터 남짓(이탈리아 인명사전 표기이며 자료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다), 베네치아 두칼레 궁 대평의회실. 가운데 위 가장 밝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인물이 커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따라가 보라. |
그렇게 해서 1588년부터 1592년 사이에 〈천국〉이 완성되었습니다. 가로 20미터가 넘는 화폭에서 수백 명의 인물이 아래에서 위로 겹겹의 원호를 이루며 올라가고, 위로 갈수록 인물이 작아지면서 빛이 밝아집니다. 관람자가 홀 바닥에 서서 올려다보면 화면 아래쪽 인물은 크고 또렷하게, 위쪽은 빛 속에 녹아들 듯 보입니다. 그가 평생 연습해 온 올려다보는 시점이 여기서 건물 한 면의 크기로 확대된 셈입니다.
다만 이 그림을 그 한 사람의 손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두칼레 궁은 이 그림을 틴토레토가 아들 도메니코와 함께 완성한 것으로 소개합니다. 그의 경력에서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맡는 화면이 커질수록, 그 화면에서 그 한 사람의 손을 구별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습니다.
틴토레토의 마지막 만찬
말년에 그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식탁은 화면을 가로지르지 않고 왼쪽 앞에서 오른쪽 안쪽으로 비스듬히 물러납니다. 그리스도는 화면 한가운데가 아니라 식탁 중간쯤에서 빛을 냅니다. 왼쪽 위 천장의 등잔에서 번진 빛과 연기 속에는 천사들의 형체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오른쪽 앞에서는 하인들이 음식을 나르며 제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성경의 장면을 정면으로 펼쳐 보이던 오랜 관습을 끝까지 따르지 않은 화면입니다. 1564년에 소묘 대신 완성작을 천장에 올리던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2~1594년,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식탁이 안쪽으로 비스듬히 물러나고, 왼쪽 위 등잔 빛 속에 천사들의 형체가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
틴토레토는 1594년 5월 31일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기록에 따르면 보름 동안 열병을 앓았고, 전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마돈나 델로르토 성당에 있는 장인의 묘, 네 해 앞서 딸 마리에타가 묻힌 자리에 묻혔습니다. 마돈나 델로르토는 그가 1560년 무렵 제단 양옆 벽에 높이 14미터가 넘는 그림 두 점을 그려 넣은 성당이기도 합니다.
바사리는 그를 회화가 가져 본 가장 무서운 두뇌라고 불렀습니다. 그래도 기록 속의 그는 산 로코 대신도회와 두칼레 궁과 동네 성당이라는 구체적인 주문자에게 하나하나 응답한 화가였습니다. 1564년의 일화가 오래 살아남은 것도 그가 주문자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한 장면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합의 규칙보다 먼저 그림을 내밀었고, 값을 선물로 바꿨고, 그 선물로 스무 해가 넘는 일을 얻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그림 한 점 한 점보다 한 건물을 차례로 채워 간 방식이었습니다. 산 로코 대신도회 회당에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벽면으로 눈이 내려오고 다시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그 과정 자체가, 그가 스무 해 넘게 한 건물에 쌓아 올린 것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틴토레토는 정말 공모전에 완성작을 몰래 걸었나요?
A. 반은 기록이고 반은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1564년 산 로코 대신도회가 베네치아의 화가 넷에게 한 달 안에 소묘를 내게 한 경합을 열었다는 것, 틴토레토가 완성작을 선물했고 신도회가 6월 22일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다른 화가들 몰래 그려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는 장면은 1568년 바사리의 책에서 나왔고, 판지 덮개나 몰래 얻은 치수 같은 세부는 그보다 훨씬 뒤인 1642년 리돌피의 전기가 더한 것입니다.
Q. 틴토레토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대부분 베네치아에 있습니다. 산 로코 대신도회 회당에 60점이 넘는 연작이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고,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두칼레 궁,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마돈나 델로르토 성당에도 대표작이 있습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과 런던 내셔널갤러리 등에도 작품이 있습니다. 전시 여부는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Q. 티치아노, 베로네세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A. 세 사람 모두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하지만 성향이 다릅니다. 티치아노는 색과 질감의 깊이, 베로네세는 밝고 화려한 장면 구성, 틴토레토는 동세와 극적인 조명이 특징입니다. 같은 주제를 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나란히 보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베로네세의 대형 연회 장면은 〈가나의 혼인 잔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Q. 작업이 빨랐다는 것이 흠이 되나요?
A. 당시에는 그렇게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1545년 아레티노가 제작이 빠르다는 점을 짚었고, 바사리는 남들이 그가 시작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끝냈다고 썼습니다. 다만 산 로코 연작처럼 20년 넘게 매달린 작업도 있어서, 속도 자체가 그의 전부는 아닙니다. 빠른 붓질은 그가 선택한 화면 효과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