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달리는 1930년대에 밀레의 〈만종〉에 관한 글을 씁니다. 저녁 기도를 드리는 두 농부를 그린 그 그림이 실은 죽음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었고, 이 글은 1963년에야 책으로 나왔습니다. 30년 가까이 붙들고 있던 확신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루브르에 그림을 엑스선으로 찍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촬영 결과 물감 아래에서 형태 하나가 나왔습니다. 지금 감자 바구니가 놓인 자리에 원래 다른 것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관 모양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 형태의 정체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것은 그 자리에 덧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 한 줄 정의: 농민의 노동을 역사화에 버금가는 기념비성으로 그려 프랑스 회화의 소재를 바꾼 화가
• 본명: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 생몰: 1814년 10월 4일 노르망디 그뤼시 출생 ~ 1875년 1월 20일 바르비종에서 사망(향년 60세)
• 국적·활동지: 프랑스. 셰르부르와 파리를 거쳐 1849년부터 바르비종
• 활동 분야: 유화, 파스텔, 판화
• 대표작: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기, 만종, 괭이에 기댄 남자, 양치기 소녀
| 나다르가 찍은 장 프랑수아 밀레. |
이삭 줍기가 위험한 그림이 된 이유
1857년 살롱에 걸린 이삭 줍기는 세 여인이 추수가 끝난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장면입니다. 사건도 없고 극적인 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격렬한 반응을 불렀습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기〉, 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5×11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RF 592. 앞쪽 세 여인 뒤로 밝은 지평선의 낟가리와 말 탄 관리인이 보인다. |
이유는 크기와 태도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정도 크기의 화면은 역사나 신화, 왕과 성인의 몫이었습니다. 밀레는 그 자리에 허리를 굽힌 농촌 여자 셋을 세웠습니다. 미화하지도 않고 비참하게 그리지도 않은 채, 그냥 노동하는 몸으로 그렸습니다.
화면을 따라가 보면 이렇습니다. 앞쪽 세 여인은 어둡고 무겁습니다. 시선을 뒤로 보내면 밝은 지평선 근처에 낟가리가 높이 쌓여 있고, 말을 탄 관리인이 그 앞에 서 있습니다. 앞의 셋이 줍는 것은 그 풍요가 떨어뜨리고 간 부스러기입니다. 한 화면 안에 가진 쪽과 줍는 쪽이 앞뒤로 나뉘어 있습니다.
혁명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시기였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그림에서 선동을 읽었습니다. 밀레 본인은 정치적 의도를 부인했고, 그가 그리려 한 것은 성경에도 나오는 오래된 노동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그린 사람의 설명을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만종 아래에 있던 형태
〈만종〉은 이삭 줍기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밭에 선 부부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멀리 교회 종탑이 보입니다. 저녁 종소리에 맞춰 기도하는 장면으로 읽히면서, 이 그림은 프랑스에서 경건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1859년, 캔버스에 유채, 55.5×66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두 사람 발치의 감자 바구니 자리에 덧칠의 흔적이 있다. |
그런데 앞서 말한 엑스선 촬영이 이 읽기에 균열을 냅니다. 두 사람 발치의 감자 바구니 자리에 원래 다른 형태가 그려져 있었고, 밀레가 그것을 덮었습니다.
여기서 확인된 것과 해석된 것을 나눠야 합니다. 확인된 것은 덧칠의 존재입니다. 그 형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밀레가 왜 지웠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더 잘 팔리도록 소재를 바꿨다는 추측도 있고, 구도상의 판단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달리는 여기서 훨씬 멀리 갔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죽은 아이의 장례 장면으로 보았고, 두 사람의 자세에서 기도가 아니라 다른 것을 읽었습니다. 그 해석은 달리 자신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밀레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소동이 남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경건하다고 여겨지던 그림 아래에 무언가 지워진 것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그림도 그린 사람의 뜻과 다르게 읽혔습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의 상징으로, 다른 쪽에서는 죽음의 그림으로. 밀레는 1865년 3월 시메옹 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장면의 출발점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저녁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던 할머니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구니 아래의 형태를 왜 바꿨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농민 화가’라는 이름표가 가리는 것
밀레는 노르망디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일찍부터 농민 화가라는 이름표가 붙었고, 지금도 대개 그렇게 소개됩니다. 반은 맞고 반은 그를 가둡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괭이에 기댄 남자〉, 1860~1862년, 캔버스에 유채, 81.9×100.3cm,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85.PA.114. 노동으로 굳은 몸을 미화 없이 그려 거센 비난을 받았다. |
그는 라틴어를 읽었습니다. 성경과 베르길리우스를 인용했고, 미켈란젤로와 푸생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었습니다. 파리에 올라와서는 폴 들라로슈의 화실에 들어갔고, 자리를 잡기 전에는 초상화와 신화 속 여인들을 그려 생계를 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그린 농부들이 조각처럼 단단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농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촌을 고전 회화의 문법으로 그렸습니다.
이삭 줍기의 세 여인이 왜 그렇게 기념비처럼 보이는지도 여기서 설명됩니다. 그는 그들을 성인이나 고대 인물처럼 기념비적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 진짜 이유였을 것입니다.
바르비종에서 보낸 26년
1849년 파리에 콜레라가 돌자 밀레는 가족을 데리고 도시를 떠납니다. 퐁텐블로 숲 가장자리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이었습니다.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는 1875년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은 한 번입니다. 1870년 프로이센과 전쟁이 터지자 가족을 데리고 고향 노르망디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말에 돌아왔고, 그 시기에 고향의 성당과 바다를 그린 그림들이 남았습니다. 그 밖에도 1866년부터 세 해 여름은 아내의 요양을 따라 중부의 온천 도시 비시에 머물며 그곳 언덕과 농지를 그렸습니다.
바르비종에는 이미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려는 화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다만 바르비종 초기와 중기에 밀레는 풍경 자체보다 그 안에서 몸을 쓰는 사람을 더 전면에 두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그는 다른 것을 그렸습니다. 순수한 풍경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186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생활은 오래 어려웠습니다. 자식이 많았고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년의 사정은 통설과 조금 다릅니다. 1860년대 중반부터 그의 평판은 올라갔고,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 회고 형식으로 작품이 걸렸으며 이듬해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다 인정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어긋납니다. 다만 그가 받은 돈과 그의 그림이 나중에 부른 값 사이의 간격은 엄청났습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양치기 소녀와 양 떼〉, 1863년경, 캔버스에 유채, 81×10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살롱에서 호평을 받아 평판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
죽고 나서 값이 오른 그림
밀레는 〈만종〉을 완성한 뒤 그리 크지 않은 값에 넘겼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4년이 지난 1889년, 이 그림이 파리 경매에 나옵니다. 프랑스 쪽 인사들과 미국 쪽 구매자가 경쟁하면서 값은 밀레가 받았던 액수의 수백 배로 뛰었습니다. 그림 한 점의 소유권이 국가의 자존심 문제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뒤에 프랑스로 돌아와 지금 오르세에 있습니다.
이 격차가 그의 수용사를 압축해 보여 줍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위험한 화가였다가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고, 죽은 뒤에는 국민적 자산이 되었으며, 20세기에는 초현실주의자의 강박 대상이 되었습니다. 같은 그림이 시대마다 다른 것으로 읽혔습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캔버스에 유채, 101.6×82.6cm, 보스턴 미술관, 17.1485. 당대에 이미 논쟁을 불렀다. |
|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색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자세와 구도는 밀레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
가장 깊이 그를 읽은 사람은 화가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를 스승처럼 여겼고, 씨 뿌리는 사람과 낮잠 같은 그림을 여러 차례 자기 방식으로 다시 그렸습니다. 색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자세와 구도는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고흐가 배운 것은 농촌의 소재가 아니라 노동하는 몸을 화면 한가운데 세우는 태도였습니다.
주요 작품
바르비종 시기의 대표작
- 씨 뿌리는 사람(1850): 큰 걸음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인물. 당대에 이미 논쟁을 불렀다
- 이삭 줍기(1857): 앞의 세 여인과 뒤의 낟가리가 한 화면에서 갈라진다. 파리 오르세
- 만종(1857~1859): 감자 바구니 자리에 덧칠의 흔적이 있다. 파리 오르세
- 괭이에 기댄 남자(1860~1862): 노동으로 굳은 몸을 미화 없이 그려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밖에
- 양치기 소녀와 양 떼(1863): 살롱에서 호평을 받아 평판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 봄(1868~1873): 만년의 풍경화. 인물이 거의 사라지고 빛과 대기가 전면에 나온다
| 장 프랑수아 밀레, 〈봄〉, 1868~1873년, 캔버스에 유채, 86×11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만년의 풍경화로 인물이 거의 사라지고 빛과 대기가 전면에 나온다. |
자주 묻는 질문
Q. 밀레와 밀레이는 다른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입니다. 이 글의 장 프랑수아 밀레(Millet)는 프랑스 화가이고, 오필리아를 그린 존 에버렛 밀레이(Millais)는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입니다. 한국어 표기가 비슷해 자주 섞이는데, 활동한 나라도 화풍도 다릅니다.
Q. 만종 아래에 정말 관이 있나요?
확인된 것은 감자 바구니 자리에 덧칠이 있다는 사실까지입니다. 그 아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관 모양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죽은 아이의 장례 장면이라는 해석은 달리의 것입니다. 확인된 것과 해석된 것을 나누어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Q. 밀레는 사회주의 화가였나요?
본인은 부인했습니다. 이삭 줍기가 살롱에 걸렸을 때 비평가들이 정치적 의도를 읽어 냈지만, 밀레는 자신이 그리려 한 것이 오래된 노동의 형상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농민을 역사화에 버금가는 기념비성으로 그린 선택 자체가 당시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읽히기 쉬웠습니다. 의도와 효과가 갈리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같은 시기에 쿠르베가 평범한 사람들의 장례를 거대한 화면에 그려 비슷한 반발을 산 것과 나란히 놓고 보면 시대의 감각이 드러납니다.
이 글의 도판은 모두 위키미디어 커먼즈의 퍼블릭 도메인 파일이다.
다시 물감 아래로
엑스선 아래 드러난 그 형태로 돌아가 봅니다. 밀레는 무언가를 그렸다가 지웠고, 그 위에 감자 바구니를 올렸습니다. 지운 이유는 그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그림 두 점입니다. 하나는 선동으로 읽혔고 하나는 기도로 읽혔으며, 뒤에는 죽음으로도 읽혔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농민화에는 같은 자세가 거듭 나타납니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그의 그림을 보게 된다면 인물의 등이 어떻게 휘어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곡선이 이 화가가 평생 거듭 돌아간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