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 7월 2일,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와 관리를 맡던 사무국인 오페라 델 두오모(Opera del Duomo)의 운영위원들이 짧은 결의 하나를 남겼습니다. 오페라 마당에 있는 「다비드라 불리는, 잘못 거칠게 깎이고 조각된 대리석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이 일에 밝은 장인들이 보고 완성할 수 있을지 판단하게 하자는 내용입니다. 그 돌에 처음 손을 대도록 맡긴 계약은 1464년의 것이었습니다. 이 결의가 나오고 6주 뒤, 미켈란젤로가 그 돌을 맡는 계약서에 이름을 올립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흔히 완성된 몸의 비례로 소개됩니다. 이 글은 순서를 바꿔서 읽습니다. 먼저 이 상이 어떤 돌에서 나왔는지, 다 만들어 갈 무렵 어디에 세울지를 두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정해진 자리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따라갑니다. 형상의 특징은 그 위에 놓고 봅니다. 묻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다비드상은 왜 그 모습으로, 왜 그 자리에 섰을까요.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은 셋입니다. 첫째, 다비드는 미켈란젤로가 고른 돌이 아니라 앞선 조각가가 손을 대다 남긴 덩어리였고, 그의 계약서에도 이 돌은 「거인이라 불리는 거칠게 깎인 사람」으로 적혀 있습니다. 둘째, 1504년 1월 자리를 논한 회의에서는 지붕 있는 로지아(주랑)에 두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최종 결정은 5월 28일 시뇨리아(시 정부)가 궁 문 앞 유디트상 자리로 내렸고, 그때 상은 이미 광장에 와 있었습니다. 셋째, 그 자리에서 369년을 서 있는 동안 팔이 부러지고 두 다리 아래쪽에 미세한 금이 갔으며, 1873년에야 실내로 옮겨졌습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높이 517cm(함께 깎아 낸 받침 포함),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트리부나, 피렌체, 조각 목록 1076번. 오른손은 허벅지 옆으로 내렸고 왼손은 어깨 앞으로 올렸으며, 고개는 왼쪽으로 돌아가 있다. 오른다리 뒤에 나무 그루터기가 붙어 있다. 사진: Francesco Bini, CC BY-SA 4.0. |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기본 정보, 크기·재료·위치
〈다비드〉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1501년부터 1504년까지 대리석으로 깎은 조각입니다. 원본은 지금 피렌체의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Galleria dell’Accademia) 안, 둥근 천창이 열린 트리부나(Tribuna)라는 공간에 서 있습니다. 미술관 공식 기록은 함께 깎아 낸 받침까지 포함해 높이 517cm, 무게 5,560kg으로 적습니다.
높이는 자료마다 숫자가 다릅니다. 이탈리아 국립연구회(CNR)의 2014년 보도자료는 상 본체를 410cm로 적었고, 전시대까지 더한 높이를 적은 자료도 있습니다. 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발밑의 받침을 넣느냐, 그 아래 전시대까지 넣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당시 문서는 이 돌의 크기를 9브라초(피렌체의 길이 단위)라고 적었고, 20세기 초에 대성당 문서를 펴낸 편집자는 이를 약 5.30m로 환산했습니다. 이 글은 미술관의 517cm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재료는 이탈리아 북서부 카라라(Carrara)에서 나온 흰 대리석입니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기록은 「카라라」까지만 말합니다. 2005년에 이탈리아 연구진이 여러 방법으로 성분을 분석했고, 카라라 시 북동쪽 미셀리아의 판티스크리티(Fantiscritti) 채석장에서 나온 돌이라는 결과가 당시 과학 매체와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분석에 쓴 시료는 1991년 한 남자가 망치로 상을 내리쳤을 때 떨어져 나온 왼발 둘째 발가락 조각이었습니다. 연구 책임자는 돌의 질이 꽤 낮다는 것도 확인했다고 말했고, 영국 신문은 이 대리석에 미세한 구멍이 많아 다른 대리석보다 빨리 상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돌의 약점은 뒤에서 몇 번 더 나옵니다.
| 〈다비드〉의 왼발. 발가락 끝 몇 곳이 둘레와 결이 다르게 떨어져 나간 자국으로 남아 있고, 발 아래는 거칠게 다듬은 바위 모양의 받침이다. 촬영자는 1991년에 손상된 발가락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사진: Mitumial, CC0. |
지금 피렌체에서 다비드를 볼 수 있는 곳은 세 군데입니다. 원본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시뇨리아 광장의 팔라초 베키오(시뇨리아 궁)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1910년 6월에 놓인 조각가 루이지 아리게티의 대리석 복제상이고, 그 자리가 원본이 1504년부터 1873년까지 서 있던 곳입니다.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 있는 것은 1875년 9월에 올린 청동 복제상입니다.
이름의 주인공은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에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다윗입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로는 모두 David라고 쓰고, 한국어 성경은 「다윗」으로 옮깁니다. 같은 인물입니다.
거인이라 불린 돌과 미켈란젤로의 계약
이 돌의 출발점은 다비드가 아니라 대성당 지붕선이었습니다. 피렌체 대성당 오페라는 1410년대부터 성당 바깥 벽을 받치는 버트레스(높은 외벽 받침) 위에 큰 형상들을 올리려 했고, 1463년에는 조각가 아고스티노 디 두초에게 첫 「거인」을 맡겨 그해 안에 넘겨받았습니다. 이듬해인 1464년 8월 18일, 같은 아고스티노와 두 번째 계약을 맺습니다. 다비드가 될 돌은 이 계약에서 나옵니다.
1464년 계약서의 조건은 지금 우리가 아는 다비드와 많이 다릅니다. 카라라에서 캐낸 흰 대리석으로 9브라초짜리 형상을 「거인의 모습으로, 예언자의 이름으로」 만들어 버트레스 하나 위에 올린다고 적었고, 형상은 네 조각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머리와 목이 한 조각, 두 팔이 두 조각, 나머지가 한 조각입니다. 처음부터 머리와 팔을 따로 깎아 붙일 계획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1466년 12월의 정산 문서를 보면 아고스티노는 네 조각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가져왔고, 오페라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형상을 자기들 소유로 두었습니다. 그 덩어리를 그가 어디까지 깎았는지는 문서가 말해 주지 않습니다. 1476년 5월에는 조각가 안토니오 로셀리노에게 마무리를 맡기려는 교섭이 있었지만 헛일로 끝났습니다. 그때 문서는 그 거인이 「지금 기초 옆에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 덩어리에 대해서는 반세기쯤 뒤의 전기 작가들이 이야기를 더 보탭니다. 화가이자 미술가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과 1568년에 펴낸 『미술가 열전』에서, 시모네 다 피에솔레라는 장인이 거인을 시작했다가 다리 사이에 구멍을 뚫어 놓는 등 돌을 망쳐 놓았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계약 문서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아고스티노이고, 19세기에 이 문서들을 펴낸 연구자도 바로 그 점을 짚었습니다. 바사리는 또 피에르 소데리니(당시 피렌체 정부의 수반인 곤팔로니에레)가 이 돌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맡기는 일을 여러 번 의논했다고 적었고, 아스카니오 콘디비는 1553년에 펴낸 미켈란젤로 전기에서 조각가 안드레아 산소비노가 「조각 몇 개를 덧붙여」 형상을 꺼내겠다며 이 돌을 원했다고 적었습니다. 둘 다 반세기쯤 뒤에 쓰인 이야기이고, 계약 문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1501년 8월 16일, 양모 길드의 영사들과 오페라 운영위원들이 함께 미켈란젤로를 오페라의 조각가로 뽑았습니다. 계약서는 그가 맡을 일을 「오페라에 있는, 9브라초짜리 대리석으로 된, 거인이라 불리는 거칠게 깎인 사람 하나」를 끝내는 것이라고 적고, 그것이 예전에 아고스티노가 「잘못」 거칠게 깎아 놓은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기간은 9월 1일부터 2년, 보수는 매달 금화 6플로린이었고, 일이 끝나면 더 높은 값을 받을 만한지 그때 판단하기로 했습니다. 6주 전 문서가 이미 「다비드」라고 부른 돌을, 계약서는 「거인」이라고 부릅니다. 1464년 계약서에서 예언자 이름이 들어갈 대목은 온전히 전하지 않아서, 다비드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이 돌에 붙었는지는 문서로 짚을 수 없습니다.
같은 계약서의 여백에는 작업을 시작한 날이 적혀 있습니다. 1501년 9월 13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미켈란젤로가 단단하고 힘차게 깎기 시작했고, 그보다 앞선 9일에 끌로 한두 번 쳐서 가슴에 있던 어떤 매듭을 떼어 냈다는 기록입니다. 이 매듭이 앞 사람이 남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대성당 오페라 안에서 벽과 판자로 칸막이를 쳐 대리석을 둘러싸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1502년 2월 길드와 오페라의 결의는 이 상을 「거인 곧 다비드」라고 부르면서 「이미 미켈란젤로가 절반쯤 만들어 놓은」 상태라고 적고, 보수를 총 400플로린으로 정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시 정부가 따로 그에게 청동 다비드를 주문했는데, 이 청동상은 프랑스로 보내졌다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콘디비는 미켈란젤로가 다른 조각을 덧붙이지 않고 이 돌에서 상을 꺼냈는데, 어찌나 꼭 맞았던지 머리 꼭대기와 발을 딛는 받침에 옛 대리석 껍질이 아직 보인다고 썼습니다. 바사리도 대리석 가장자리에 앞 장인의 첫 끌 자국 몇 개를 남겨 두었고 그것이 지금도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두 기록이 함께 가리키는 것은, 이 상이 이미 정해진 덩어리의 경계 안에서 깎였다는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없는 돌을 덧대지 않고 있는 돌의 끝까지 썼습니다.
널리 알려진 코 일화는 바사리의 1568년 판에만 나옵니다. 상이 세워진 뒤 소데리니가 코가 굵어 보인다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발판에 올라가 왼손에 끌과 대리석 가루를 조금 쥐고 끌을 가볍게 놀리며 가루만 떨어뜨렸을 뿐 코는 건드리지 않았고, 소데리니는 「이제 더 마음에 드오, 생명을 불어넣었소」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550년 판의 같은 대목에는 이 일화가 없습니다. 바사리가 두 번째 판에서 보탠 일화로 읽으면 됩니다. 다만 이야기의 열쇠가 소데리니가 「거인 바로 아래에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이 상은 처음부터 어디서 보느냐가 문제가 되는 상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라는 사람 전체에 대해서는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따라간 글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다비드상 위치를 정한 1504년 회의
1504년 1월 25일(당시 피렌체식 연도 표기로는 1503년), 오페라는 상이 거의 완성됐으니 알맞은 자리를 정하겠다며 피렌체의 미술가와 장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명단에는 조각가와 금세공인, 목수, 악사까지 서른 명 가까운 이름이 오릅니다. 화가로는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필리피노 리피, 피에트로 페루지노, 피에로 디 코시모가 있었고,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형제도 있었습니다. 기록에 개별 발언이 남은 사람은 스물한 명이고, 페루지노처럼 명단에만 있고 발언이 적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문서 끝에는 나머지 사람들은 위 사람들의 의견을 따랐기에 간략히 하려고 적지 않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회의록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궁의 전령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는 이 상을 둘 만한 곳이 둘이라며, 궁 문 앞 유디트상 자리와 「다비드가 있는」 궁 안뜰 한가운데를 꼽았습니다. 그리고 유디트를 치우자고 했습니다. 유디트는 「죽음의 표지」이고, 십자와 백합을 문장으로 삼는 도시에서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것」은 좋지 않으며, 그 상을 세운 뒤로 일이 점점 나빠져 피사까지 잃었다는 이유였습니다.
보티첼리는 성당 쪽을 택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성당 계단 모퉁이에 두고 반대편 모퉁이에는 유디트 같은 상을 하나 두거나, 아니면 시뇨리아 로지아에 두자고 하면서도, 「그보다는 성당 모퉁이가 가장 좋은 자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보티첼리의 생애는 보티첼리 전기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발언은 돌 자체를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는 대리석이 무르고 결함이 있으니 바깥 공기에 두면 금세 상한다며, 궁 옆 시뇨리아 로지아(지붕만 있고 앞이 트인 주랑)의 가운데 아치 아래에, 둘레를 돌아볼 수 있게 두거나 뒤에 검은 벽감을 대고 두자고 했습니다. 상이 「지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를 비롯한 몇 사람도 대리석이 무르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줄리아노가 말한 대로 로지아에」 두되 관청의 의식을 방해하지 않게 두자고 찬성했고, 필리피노 리피는 「장인이 자리를 더 잘, 더 오래 생각했을 것이니 그에게서 듣자」고 했습니다.
발언을 세어 보면 로지아를 말한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유디트 자리를 말한 사람은 전령이었고, 성당 모퉁이, 광장의 사자상 자리, 궁 안뜰을 말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만든 사람에게 맡기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록에는 결정 문구가 없습니다. 회의는 의견을 모은 자리였습니다.
그 뒤의 문서를 날짜 순서로 놓으면 결정이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보입니다. 4월 30일 시 정부는 건축가들에게 오페라에 있는 거인을 「시뇨리아 로지아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상은 5월 14일 오페라를 나섰습니다. 피렌체 사람 란두치는 일기에 그날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상이 나올 수 있도록 문 위의 벽을 허물었고, 그날 밤 누군가 해코지하려고 거인에게 돌을 던져 밤에 보초를 세워야 했다고. 상은 아주 튼튼한 목재에 똑바로 선 채 묶여 매달려 발이 땅에 닿지 않았고, 마흔 명이 넘는 사람이 아래에 기름 바른 통나무를 깔아 손에서 손으로 바꿔 넣으며 아주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광장까지 나흘이 걸려 5월 18일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상이 광장에 와 있던 5월 28일, 시뇨리아는 「지금 광장에 있는 거인 대리석상」을 궁 문 앞 청동 유디트상 자리에 놓고 유디트는 거기서 치운다고 결의했습니다. 로지아로 가던 상의 목적지가 운반 도중에 바뀐 것입니다. 왜 바꿨는지는 결의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회의에서 유디트 자리를 말한 사람은 전령이었지만, 결의가 그의 말을 따른 것인지도 문서로는 알 수 없습니다. 거인은 6월 8일 궁 앞 연단인 링기에라 위, 유디트가 있던 자리에 앉혀졌고, 유디트는 궁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6월 11일에는 상의 발 아래 대리석 받침을 만들라는 지시가 나왔습니다.
란두치는 9월 8일 「광장의 거인이 마무리되어 완전히 덮개를 벗었다」고 적었습니다. 미술관 공식 설명에 따르면 그때 상의 몇 부분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습니다. 머리 위의 화관, 오른다리 뒤의 나무 그루터기, 그리고 무릿매입니다. 지금 흰 돌로만 보이는 상이 처음 광장에 섰을 때는 머리의 화관과 어깨를 넘는 끈, 다리 뒤 그루터기에서 금빛이 났던 셈입니다.
다비드상 특징, 싸우기 전의 다비드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목자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무릿매(끈 가운데에 돌을 싸서 돌려 던지는 무기)를 든 채 골리앗 앞에 나섭니다.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 던져 이마를 맞혔고, 쓰러진 거인의 칼을 빼 그 머리를 벱니다. 미켈란젤로보다 먼저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다비드들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서 있습니다.
| 도나텔로, 〈다비드〉, 1435~1440년경, 청동, 바르젤로 미술관, 피렌체. 챙 넓은 모자를 쓴 소년이 오른손으로 큰 칼을 짚고 왼손을 허리에 얹었으며, 한 발을 발밑에 놓인 골리앗의 머리 위에 올렸다. 사진: Yair Haklai, CC BY-SA 4.0. |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다비드〉, 1468~1470년, 청동, 바르젤로 미술관, 피렌체, 청동 목록 450번. 짧은 갑옷 차림의 소년이 오른손에 짧은 칼을 내려 들고 왼손을 허리에 얹었으며, 잘린 골리앗의 머리가 발 옆에 놓여 있다. 사진: Rufus46, CC BY-SA 3.0. |
바르젤로 미술관에 있는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청동 다비드는 둘 다 잘린 골리앗의 머리와 함께 있습니다.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한쪽 손은 허리에 얹혀 있습니다. 일이 끝난 뒤의 소년입니다. 1504년 회의에서 전령이 말한 「궁 안뜰의 다비드」가 둘 가운데 어느 쪽이었는지는 기록마다 엇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골리앗의 머리와 함께 선 다비드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1502년에 따로 주문받은 청동 다비드 역시 콘디비의 표현으로는 「발밑에 골리앗이 있는 다비드」였습니다.
이제 미켈란젤로의 대리석상으로 돌아가 발밑부터 봅니다. 오른다리 뒤에는 나무 그루터기가 붙어 있고, 그 밖에 발 주위에 놓인 것은 없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도 칼도 없습니다. 오른손을 따라 올라가면 허벅지 옆으로 내린 손이 안으로 말려 있고, 왼손은 어깨 앞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왼쪽 어깨에서 등으로 넘어가는 끈이 무릿매이고,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 쥔 것이 돌입니다. 끈과 오른손의 돌이 이어지는 모습은 정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뒤로 돌아가야 보입니다. 바사리가 미켈란젤로의 밀랍 모형을 두고 「손에 무릿매를 든 젊은 다비드」라고 쓴 것이 이 구성입니다.
| 〈다비드〉를 오른쪽에서 본 모습,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피렌체. 허벅지 옆으로 늘어뜨린 오른손이 손바닥 안의 것을 감싸 쥐고 있고, 오른다리 뒤로 나무 그루터기가 받침까지 이어진다. 들어 올린 왼손은 어깨 앞에 있다. 사진: Jörg Bittner Unna, CC BY 4.0. |
| 〈다비드〉의 머리와 들어 올린 왼팔을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먼 곳을 보고, 눈썹 사이가 좁혀져 있다. 굽힌 왼팔이 얼굴 아래쪽을 가로막는다. 사진: Espandero, CC BY-SA 4.0. |
얼굴은 왼쪽으로 돌아가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눈썹 사이가 좁혀져 있습니다. 칼도 머리도 없이, 돌을 쥔 채 한쪽을 노려보는 소년. 연구자들은 이 상을 골리앗을 쓰러뜨린 뒤가 아니라 싸우기 전의 순간으로 읽습니다. 이탈리아 인명사전의 미켈란젤로 항목은 자세와 머리에 담긴 「경계하는 침착함」을 짚으며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에 견주어 15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움이라고 평가했고, 영어권 미술 교과서에도 앞선 작품들이 죽인 「직후」를 보여 준 데 비해 미켈란젤로는 죽이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골리앗의 머리가 없다는 것과 무릿매와 돌이 아직 손에 있다는 것까지이고, 「싸우기 전」은 그 위에 얹은 해석입니다.
| 〈다비드〉의 오른손. 허벅지 옆으로 내린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고, 안으로 말린 손가락이 손바닥 안의 것을 감싸고 있다. 허벅지 표면에는 대리석 결을 따라 가는 선이 몇 줄 비친다. 사진: Espandero, CC BY-SA 4.0. |
상 앞에 서면 많은 사람이 손과 머리가 크다고 느낍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002년 기사에서 이 비율에 대해 그동안 나온 설명을 셋으로 정리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상이 아래에서 올려다보일 것을 알았다는 설명, 다윗을 가리키는 「강한 손」이라는 표현을 형상으로 옮겼다는 설명, 자라는 소년의 어색한 팔다리를 그렸다는 설명입니다. 첫째 설명은 이 돌이 처음에 성당 버트레스 위에 올라갈 거인이었다는 내력과 맞물려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세 설명 모두 뒤에 제기된 해석이고, 그중 하나를 정답으로 고를 만큼 무게가 갈리지는 않습니다.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른손 손등의 핏줄과 마디가 정면에서도 또렷이 읽힐 만큼 크게 깎여 있다는 사실이고, 돌을 쥔 손이 이 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걸리는 세부 가운데 하나라는 점입니다.
| 미켈란젤로, 〈다비드〉를 위한 습작, 종이에 펜, 루브르 박물관 소묘실, 파리, INV 714 recto. 왼쪽 인물은 한 발을 잘린 머리 위에 올리고 섰고, 가운데에 팔 하나가 크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두 줄 메모 아래에 서명이 있다. 루브르랑스 전시 때 찍은 사진이다. |
미켈란젤로가 이 무렵 그린 소묘 한 장이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습니다. 왼쪽에는 잘린 골리앗의 머리에 한 발을 올린 다비드가 작게 그려져 있고, 가운데에는 팔 하나가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미켈란젤로의 손글씨가 있는데, 연구자들은 대체로 「다비드는 무릿매로, 나는 활로」라고 읽습니다. 연구자 가운데에는 이 「활」을 조각가가 대리석에 구멍을 뚫을 때 쓰던 활비비(활 모양 손잡이를 밀고 당겨 송곳을 돌리는 도구)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판독은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 상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물음에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바사리의 문장입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궁의 표지로서」 손에 무릿매를 든 젊은 다비드를 구상했고, 다윗이 자기 백성을 지키고 정의롭게 다스렸듯 이 도시를 다스리는 자도 용기 있게 지키고 정의롭게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이 돌은 성당 버트레스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고, 1501년 계약을 맺은 쪽도 대성당 오페라와 양모 길드였습니다. 궁 앞이라는 자리는 1504년 봄에야 정해졌고, 바사리의 이 문장은 그로부터 46년 뒤인 1550년에 처음 인쇄됐습니다. 그래서 이 설명은 조각가가 처음부터 품은 의도라기보다, 상이 궁 앞에 선 뒤 피렌체가 이 상을 읽어 온 방식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기록과 맞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예로는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도 함께 보면 좋습니다. 그쪽은 미켈란젤로가 비워 둔 마지막 장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그렸습니다.
광장의 369년과 아카데미아 트리부나
1504년 6월부터 1873년 8월까지, 다비드는 369년을 시뇨리아 광장의 궁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지붕 아래 두어야 한다는 줄리아노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상에는 기록으로 남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 존 브램턴 필폿 촬영, 시뇨리아 광장 팔라초 베키오 앞의 〈다비드〉 원본, 1860~1870년대 사진. 1873년 아카데미아로 옮기기 전, 궁의 돌벽 앞 받침대 위에 서 있던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는 허리 아래에 잎 모양 가리개가 붙어 있다. |
첫 상처는 1527년에 났습니다. 바사리는 화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의 전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해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쫓겨날 때 시뇨리아 궁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고, 궁 위에서 문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 던진 물건이 링기에라 위의 다비드를 맞혀 팔 하나를 세 조각으로 부러뜨렸습니다. 조각들은 사흘 동안 아무도 줍지 않은 채 땅에 있었는데, 아직 소년이던 살비아티와 바사리가 경비병들 사이로 들어가 그것을 주워 살비아티의 아버지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훗날 코시모 공작이 그 조각들을 구리 핀으로 제자리에 다시 붙였습니다. 바사리는 부러진 것이 어느 쪽 팔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상처는 눈에 덜 띄었습니다. 두 다리 아랫부분, 왼쪽 발목과 오른다리 뒤 그루터기 쪽에 생긴 미세한 금들입니다. 이 금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관찰됐습니다. 2014년 이탈리아 국립연구회와 피렌체 대학 연구진은 작은 석고 모형을 원심분리기에 넣는 실험을 했고, 5도를 넘지 않는 작은 기울기라도 상이 계속 기울어 있었던 것이 금이 가는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울기는 1504년부터 1873년까지 팔라초 베키오 앞에 서 있는 동안 상을 받친 받침돌이 고르지 않게 가라앉으며 조금 돌아간 것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결정적 요인은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고, 기울기의 원인은 연구진이 「그럴 것」이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상을 옮기자는 이야기는 그 금이 보이던 무렵에 나왔습니다. 1846년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는 풍화를 걱정해 상을 옮기고 청동 복제상으로 대신하라고 명했고, 이듬해 조각가 클레멘테 파피가 원본에서 1,500조각으로 된 거푸집을 떴습니다. 그때 남은 문서는 거인이 「맨다리 둘만으로 서 있고 그중 하나는 금까지 갔다」고 적었습니다. 원본을 옮기는 일과 그 자리를 채울 복제를 만드는 일은 처음부터 한 계획이었던 셈입니다. 1873년 8월 다비드는 마침내 광장을 떠나 아카데미아로 옮겨졌고, 건축가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가 이 상을 위해 설계한 트리부나가 완공될 때까지 나무 상자 안에서 9년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1882년에 세워졌습니다.
| 루이지 아리게티, 〈다비드〉 대리석 복제상, 1910년 설치, 시뇨리아 광장 팔라초 베키오 문 앞, 피렌체. 원본이 1504년부터 1873년까지 서 있던 자리다. 햇빛을 받은 복제상에서는 오른손에 쥔 돌과 오른다리 뒤 그루터기가 정면에서도 비교적 또렷하다. 사진: Jebulon, CC0. |
원본이 떠난 자리는 복제상들이 채웠습니다. 파피가 주조한 청동 다비드는 1875년 9월 13일 미켈란젤로 광장에 주세페 포지가 설계한 미켈란젤로 기념비 꼭대기에 올랐고, 시뇨리아 광장 궁 문 앞에는 1910년 6월 루이지 아리게티가 만든 대리석 복제상이 놓였습니다. 지금 광장에서 보는 다비드는 그 복제상입니다.
실내로 들어온 뒤에도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1991년 9월 14일 피에로 칸나타라는 남자가 외투 밑에 숨겨 온 망치로 왼발을 내리쳐 둘째 발가락 끝이 상했고, 곧 복원됐습니다. 그 발가락 조각이 앞에서 말한 2005년 산지 분석의 시료가 됐습니다. 2003년에는 세척 방법을 두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미술관장은 미세한 구멍 속 때를 빨아내려면 젖은 습포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작업을 맡았던 복원가는 털붓으로만 털어내야 한다며 사임했으며, 국제 전문가 39명이 세척을 미루라는 청원에 서명했습니다. 세척은 2003~2004년에 진행됐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먼지를 털어 관리합니다.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늘어놓으면 하나의 줄이 보입니다. 1464년 계약서는 이 돌을 성당 높은 곳에 올릴 형상으로 마련했고, 1504년 회의에서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무른 돌이니 지붕 아래 두자고 했으며, 시 정부는 궁 문 앞 바깥 자리를 골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상은 팔을 잃었다 되찾았고, 받침이 기울며 다리에 금이 갔고, 결국 지붕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로지아에 두었다면 무사했으리라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다비드가 겪은 일 대부분이 「어디에 서 있었는가」와 함께 기록돼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상을 비례의 견본으로만 보면 놓치는 것이 그 부분입니다. 같은 조각가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글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다비드상에 대해 자주 묻는 것
미켈란젤로 다비드상은 어디에 있나요
원본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트리부나에 있습니다. 1873년 8월 시뇨리아 광장에서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시뇨리아 광장 팔라초 베키오 앞의 상은 1910년에 놓인 대리석 복제상이고, 미켈란젤로 광장의 상은 1875년에 올린 청동 복제상입니다.
다비드상의 크기와 무게는 얼마인가요
미술관 공식 기록으로 함께 깎아 낸 받침을 포함해 높이 517cm, 무게 5,560kg입니다. 받침을 빼고 410cm로 적거나 전시대까지 더해 적는 자료도 있어, 어디까지 재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다비드상은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카라라산 흰 대리석입니다. 2005년 분석은 카라라 북동쪽 미셀리아의 판티스크리티 채석장에서 나온 돌로 보고했다고 보도됐고, 연구진은 돌의 질이 꽤 낮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비드상은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나요
영어와 이탈리아어 모두 David입니다. 작가를 붙여 Michelangelo’s David라고 부릅니다. 미켈란젤로 시대 피렌체 사람들은 이 상을 흔히 「거인(il Gigante)」이라고 불렀고, 1502년 문서에는 「거인 곧 다비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비드와 성경의 다윗은 같은 사람인가요
같은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에서 무릿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을 한국어 성경은 「다윗」으로, 이탈리아어와 영어는 David로 적습니다.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다비드는 진짜인가요
복제상입니다. 조각가 루이지 아리게티가 만든 대리석 복제상이 1910년 6월부터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원본은 1504년부터 1873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비드상은 왜 머리와 손이 큰가요
미켈란젤로가 직접 남긴 설명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설명, 다윗의 「강한 손」을 형상으로 옮겼다는 설명, 자라는 소년의 몸을 그렸다는 설명이 제기돼 있지만 어느 쪽도 기록으로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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