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로 보티첼리 생애와 작품, 그는 정말 자기 그림을 불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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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리가 1568년에 펴낸 『미술가 열전』 개정판에는 첫판에 없던 이야기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옆집에 직물 짜는 사람이 이사를 와서 베틀을 여덟 대나 세웠습니다. 베틀이 돌아가면 발판 소리와 바디 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고, 그리 튼튼하지 못한 벽 탓에 집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일을 할 수도 집에 있을 수도 없게 된 산드로가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이웃은 내 집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또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산드로는 이웃집 벽보다 높은 자기 벽 위에 수레 한 대분이 넘는 큰 돌을 아슬아슬하게 올려 두었습니다. 벽이 조금만 흔들려도 굴러떨어져 이웃의 지붕과 다락과 베틀을 박살 낼 것 같은 자리였습니다. 겁먹은 이웃이 찾아오자 산드로는 똑같은 말로 답했습니다. 내 집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다른 수가 없던 이웃은 결국 이치에 맞게 합의했고, 그 뒤로 산드로와 좋은 이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바사리는 이 고집 세고 익살스러운 화가의 끝을 전혀 다르게 그렸습니다. 수도사 사보나롤라를 따르느라 그림을 버렸고, 늙고 가난해져 지팡이 두 개를 짚고 다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흔히 장면 하나가 더 붙습니다. 그가 설교에 감화되어 자기가 그린 그림을 불 속에 던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그 이야기들이 어디서 왔고, 남아 있는 기록은 무엇을 말하는지 따라갑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메디치가 주변의 신화 그림과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단테 〈신곡〉 소묘를 남긴 피렌체 초기 르네상스 화가
• 생몰: 1444년 또는 1445년 피렌체 출생 ~ 1510년 5월 피렌체에서 사망(17일 오니산티 성당에 묻힘)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피렌체. 1481~1482년 로마에서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작업
• 활동 분야: 템페라·프레스코·유화, 소묘
• 대표작: 〈동방박사의 경배〉(1470~1475년), 〈프리마베라〉(1480년 무렵), 〈비너스의 탄생〉(1485년 무렵),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1481~1482년), 〈아펠레스의 중상〉(1495년 무렵), 〈신비의 탄생〉(1500년), 단테 〈신곡〉 소묘

보티첼리 출생과 별명, 리피의 제자

보티첼리는 1444년이나 1445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이고, 산드로는 알레산드로를 피렌체 식으로 줄여 부른 이름입니다. 생년이 한 해로 좁혀지지 않는 것은 출생 기록이 아니라 세금 신고서의 나이로 거꾸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마리아노가 1458년 2월(피렌체 달력으로는 아직 1457년)에 낸 재산 신고서에는 「산드로 내 아들, 13세, 글을 배우는 중이고 몸이 약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 근처에 가게를 빌려 가죽을 무두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보티첼리라는 이름은 「작은 통」이라는 뜻의 별명 보티첼로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문서에서 이 별명으로 먼저 불린 사람은 산드로가 아니라 큰형 조반니입니다. 같은 신고서에 조반니는 피렌체 공채 기관의 중개인으로 올라 있고, 다른 문서에는 「보티첼로라 불린 마리아노의 아들 조반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산드로가 「산드로 디 보티첼로」로 적히기 시작하는 것은 1472년부터입니다. 바사리는 아버지가 산드로를 보티첼로라는 친구 금세공사에게 맡겼고 그래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썼지만, 19세기에 바사리의 책을 엮으며 피렌체 문서를 뒤진 밀라네시는 그런 금세공사를 기록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무너진 건물 앞에서 성모와 아기 예수를 둘러싸고 여러 인물이 무릎 꿇거나 서 있는 화면, 오른쪽 끝 인물이 정면을 바라봄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0~1475년, 나무판에 템페라, 111 × 137 cm, 우피치 미술관, Inv. 1890 n. 882. 오른쪽 끝에서 노란 망토를 두르고 그림 밖을 바라보는 금발 청년을 우피치는 화가의 자화상일 수 있다고 본다.

그가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제자였다는 것은 16세기의 기록들이 한목소리로 전합니다. 언제 문하에 들어갔는지를 알려 주는 문서는 없습니다. 1908년 피렌체의 세금 신고서와 공증 문서를 처음으로 체계 있게 뒤져 보티첼리 전기를 새로 쓴 영국 연구자 허버트 호른(Herbert Horne)은, 열세 살 신고 뒤 오래지 않아 늦어도 1459년에는 입문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이 시기 피렌체가 어떤 도시였는지는 르네상스 미술 총정리에서 따로 짚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화가를 조금 다른 자리에서 기억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글을 모은 『회화론』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풍경을 좋아하지 않는 화가는 풍경을 짧고 단순한 공부거리로 여긴다, 「우리의 보티첼라」가 말했듯이 그런 공부는 헛되다고, 여러 색을 머금은 스펀지를 벽에 던지기만 해도 남은 얼룩 속에 풍경이 보인다고. 그러고는 한 줄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화가는 아주 형편없는 풍경을 그렸다.」 풍경 공부를 깎아내린 쪽이 보티첼리였고, 그것을 비판한 쪽이 레오나르도였습니다. 같은 시대 화가가 그의 풍경에 내린 평가는 이렇게 날이 서 있었습니다.

그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기억됐는지는 1540년대에 한 익명 필자가 남긴 피렌체 미술가 메모에도 나옵니다. 연구자들이 아노니모 가디아노라고 부르는 이 필자는 보티첼리를 「아주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사람」이라 적고, 그의 작품이 생전에 높이 평가받았다고 쓴 뒤 일화 하나를 붙였습니다. 톰마소 소데리니가 장가를 가라고 다그치자 보티첼리가 이렇게 답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밤에 장가드는 꿈을 꾸었는데 너무 괴로워서 깨어났고, 다시 잠들면 그 꿈을 또 꿀까 봐 일어나 밤새 미친 사람처럼 피렌체 거리를 쏘다녔다고. 소데리니는 그곳이 포도밭을 심을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들었다고 필자는 적었습니다. 바사리의 이웃 일화와 이 꿈 이야기는 서로 다른 필자가 남긴 것인데, 둘 다 말로 상대를 받아넘기는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보티첼리와 메디치가,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비너스의 탄생〉까지

1469년 스승 리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린 아들 필리피노는 보티첼리에게 맡겨졌다고 바사리는 씁니다. 1472년 피렌체 화가 조합의 장부에도 필리피노가 「산드로 디 보티첼로와 함께 있는 화가」로 올라 있습니다. 스물일고여덟의 보티첼리가 이미 제자를 둔 공방의 주인이었다는 뜻입니다.

1470년에는 시뇨리아 광장에 있던 상업 법정(메르칸치아)의 접견실에 걸 〈용기〉를 그렸습니다. 덕목을 그린 연작 전체는 1469년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에게 맡겨진 일이었는데, 톰마소 소데리니가 힘을 써 한 점이 보티첼리에게 돌아갔습니다. 폴라이올로 쪽이 항의한 탓에 그의 몫은 그 한 점에 그쳤다고 우피치 미술관은 설명합니다.

이 무렵 그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델 라마 가문 예배당 제단에 놓일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습니다. 주문자는 가스파레 델 라마였고, 우피치는 제작 시기를 1470년에서 1475년 사이로 봅니다. 맨 앞에서 아기 예수의 발에 입 맞추는 늙은 왕이 코시모 데 메디치라는 것은 바사리의 증언이고, 다른 메디치 인물들을 하나하나 짚는 것은 연구자들의 추정입니다. 오른쪽 끝의 금발 청년이 화가 자신이라는 것도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우피치는 그가 화가 자화상에 흔한 자세로 우리 쪽을 보고 있다는 점을 들어 가능성으로만 적습니다.

그가 메디치가를 위해 그린 것이 제단화와 저택의 그림만은 아니었습니다. 1478년 파치 가문의 음모가 실패한 뒤, 보티첼리는 옛 바르젤로였던 세관 건물 벽에 반역자들을 목매달린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같은 해 7월 21일 피렌체의 8인 위원회가 「반역자들을 그린 노고」로 그에게 금화 40플로린을 지급한 의결 기록이 남아 있고, 앞의 익명 필자는 그림 발치에 로렌초 데 메디치가 비문을 달았다고 적었습니다. 이 벽화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티첼리는 신화 그림의 화가이면서, 도시가 공적인 일을 맡기는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끌고 온 두 그림은 사정이 서로 다릅니다. 우피치가 1480년 무렵으로 보는 〈프리마베라〉는 15세기 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사촌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형제의 비아 라르가 집, 로렌초의 침실 옆방에 있었습니다. 1498년 그 집의 물품 목록에 「레투초(등받이 달린 긴 의자) 위에 걸린 나무판 그림 한 점, 여자와 남자 아홉 인물이 그려진 것」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 뒤 그림은 피렌체 외곽의 카스텔로 별장으로 옮겨졌습니다.

어두운 오렌지 숲을 배경으로 아홉 인물이 가로로 늘어서 있고 왼쪽에서 청년이 손을 들고 오른쪽에서 바람의 신이 여자를 붙드는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 〈프리마베라〉, 1480년 무렵, 포플러 나무판에 템페라, 207 × 319 cm, 우피치 미술관, Inv. 1890 n. 8360. 1498년 메디치가 목록이 적은 대로 여자와 남자 아홉이 어두운 숲 앞에 가로로 늘어서 있다.

1485년 무렵의 〈비너스의 탄생〉은 더 알려진 것이 적습니다. 우피치는 주문자를 메디치 가문 안에서 찾아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면서도, 1550년 바사리가 카스텔로 별장에서 이 그림을 기술하기 전에는 아무 기록이 없다고 밝힙니다. 바사리는 그곳에 두 점이 있다고 썼습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비너스와 그녀를 땅으로 실어 오는 바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미의 세 여신이 꽃으로 꾸미는 또 하나의 비너스로 봄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시인 폴리치아노가 주제를 제안했을지 모른다는 것이 우피치의 조심스러운 추정입니다. 이 그림을 화면 구석구석 따라가며 읽는 일은 〈비너스의 탄생〉 한 점만 따로 다룬 글에서 했습니다.

큰 조가비를 타고 물 위에 선 여신과 왼쪽에서 바람을 불어 보내는 두 인물, 오른쪽에서 천을 펼쳐 다가오는 여자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 무렵, 캔버스에 템페라, 172.5 × 278.5 cm, 우피치 미술관, Inv. 1890 n. 878. 1550년 바사리의 기술 이전에는 이 그림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1481년 10월 27일 로마에서 공증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새로 지은 대예배당 벽에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 열 장면과 그 아래 휘장 그림을 그리는 일을 코시모 로셀리,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피에트로 페루지노 네 사람에게 맡기고, 이듬해 3월 15일까지 마치지 못하면 금화 50두카트를 물게 한 계약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벽화 작업이 1481년에 시작되어 1482년에 끝났다고 설명합니다.

보티첼리가 맡은 것은 세 장면과, 그 위 벽감에 들어간 성인 교황들의 초상 몇 점이었습니다. 1482년 10월에는 이미 피렌체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바사리는 교황이 보티첼리를 이 일의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썼지만, 계약서는 네 화가의 이름을 나란히 적고 있습니다. 바사리는 또 그가 교황에게서 받은 큰돈을 늘 하던 대로 되는대로 살다가 로마에서 다 써 버리고 돌아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볼 바사리의 시선과 이어집니다.

같은 예배당의 천장은 훗날 미켈란젤로가 새로 그렸고,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의 눈은 대개 그 천장으로 먼저 갑니다. 천장화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시스티나 천장화에서 다뤘습니다.

고대 개선문 앞에서 향로를 든 사람들이 쓰러지고 왼쪽에서 사람들이 땅으로 꺼지는 벽화
산드로 보티첼리, 〈코라의 벌〉, 1481~148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바사리는 이 벽화를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를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린 장면」으로 적었다. 가운데 개선문 앞에서 향로를 든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
제단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화면 위쪽 바위산에서 인물 둘이 마주 서 있는 벽화
산드로 보티첼리, 〈그리스도의 유혹〉, 1481~148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앞쪽에는 제단 앞에 모인 사람들이, 뒤쪽 신전 지붕 위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화면 여러 곳에서 같은 인물이 반복해 등장하며 우물가와 양 떼와 바위산이 이어지는 벽화
산드로 보티첼리, 〈모세의 생애〉, 1481~148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바사리는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이고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딸들에게서 물을 받는 장면」으로 적었다. 한 화면 안에 같은 인물이 여러 번 나온다.

보티첼리와 사보나롤라, 그림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1490년대 중반의 피렌체는 우피치 미술관의 표현대로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고취한 공화국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피아뇨니, 곧 「흐느끼는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1497년 2월과 1498년 2월의 사육제 때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사치와 죄의 물건이라 여긴 것들을 쌓아 태우는 불길이 올랐고, 이것을 허영의 소각이라고 부릅니다.

보티첼리가 이 불에 자기 신화 그림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소개됩니다. 그 출처로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은 바사리인데, 바사리의 보티첼리 전기에는 그런 문장이 없습니다. 1550년 첫판에도, 1568년 개정판에도 없습니다. 바사리가 쓴 것은 이렇습니다. 그는 사보나롤라 분파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그 때문에 그림을 버리고 생계 수입도 없어 큰 곤경에 빠졌다, 그 편에 고집스럽게 매달려 늘 피아뇨네 노릇을 하며 일에서 멀어졌고, 늙고 잊혀 매우 궁한 처지가 되었다. 그림을 버렸다는 말은 있어도 그림을 태웠다는 말은 없습니다.

바사리가 불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화가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전기에서 그는 허영의 소각을 길게 적었습니다. 뛰어난 대가들이 그린 누드 그림과 조각이 책, 류트, 노래책과 함께 광장에 산더미처럼 실려 와 회화에 큰 손실이 났고, 바르톨로메오는 자기가 그린 누드 소묘를 전부 가져왔으며 로렌초 디 크레디도 그 본을 따랐고 피아뇨니라 불린 다른 많은 이들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바사리가 불 앞에 이름을 세운 화가는 이 둘이고, 보티첼리는 그 자리에 없습니다.

호른은 이 대목을 두고 조심스럽게 판단합니다. 보티첼리가 그 무리에 있었다면 그 사실이 전승에서 빠졌을 리 없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 일부가 그 불길에 사라졌을 가능성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가 그림을 들고 광장으로 갔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그의 그림이 하나도 타지 않았다고 증명할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프리마베라〉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집이 아니라 메디치 방계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집에 걸려 있었고, 지금 우피치에 있습니다.

그가 사보나롤라의 편에 선 시점도 따져 볼 만합니다. 호른에 따르면 동생 시모네는 사보나롤라의 대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었는데, 1497년 피아뇨니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낸 사보나롤라 탄원서에 시모네의 이름은 있어도 산드로의 이름은 없습니다. 게다가 산드로는 1496년 7월부터 1497년 7월까지 사보나롤라의 끈질긴 적수였던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른은 그가 공공연히 피아뇨니 편에 선 것은 수도사가 죽은 1498년 이후였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그 뒤 그의 공방이 피아뇨니가 모이는 곳으로 이름났다고 덧붙입니다. 동생의 열성이 바사리가 전한 이야기에 적잖이 보태졌을지 모른다는 것도 호른의 추정입니다.

그 무렵의 산드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 주는 기록은 시모네의 연대기입니다. 1499년 11월 2일 밤, 시모네는 집에서 불가에 앉아 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날 산드로는 자기 공방에서 사보나롤라 심문에 늘 뽑혀 들어갔던 도포 스피니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산드로는 무슨 잘못을 찾아냈기에 그를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였는지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스피니의 답은 이랬습니다. 「산드로,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우리는 그에게서 대죄는커녕 소죄조차 찾지 못했네.」 그러면 왜 그렇게 죽였느냐고 산드로가 다시 묻자, 스피니는 그들을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돌려보냈다면 민중이 들고일어나 자기들이 모두 갈가리 찢겼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장면의 산드로는 불 앞에서 참회하는 화가가 아니라, 죽은 수도사의 죽음을 끝까지 따져 묻는 사람입니다.

말년 작품, 〈아펠레스의 중상〉과 〈신비의 탄생〉

말년에 그의 그림 주제가 바뀐 것은 작품으로 확인됩니다. 우피치가 1495년 무렵으로 보는 〈아펠레스의 중상〉은 고대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의 사라진 그림을, 2세기 작가 루키아노스가 글로 묘사한 대로 다시 그린 작은 나무판 그림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옥좌에 앉은 왕은 잘못 판결한 미다스 왕처럼 당나귀 귀를 달고 있고, 무지와 의심을 뜻하는 두 여인이 그 귀에 속삭입니다. 횃불을 든 중상이 반쯤 벗은 남자를 머리채 잡아 끌고 오고, 누더기 차림의 원한이 그녀와 함께 걷습니다. 맨 왼쪽에는 검은 옷의 참회가 고개를 돌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벌거벗은 진실을 바라봅니다.

우피치는 이 그림을 보티첼리가 그린 마지막 알레고리·신화 주제 작품으로 봅니다. 루키아노스는 아펠레스가 자신이 중상을 당한 뒤 이 그림을 구상했다고 전하는데, 우피치는 보티첼리의 그림도 비슷한 사정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16세기 중반에 이 그림은 파비오 세니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고 바사리는 적었습니다.

조각으로 장식된 주랑 아래 오른쪽 옥좌의 왕 앞으로 여러 인물이 반쯤 벗은 남자를 머리채 잡아 끌고 오고 왼쪽 끝에 벌거벗은 여인이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는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 〈아펠레스의 중상〉, 1495년 무렵, 나무판에 템페라, 62 × 91 cm, 우피치 미술관, Inv. 1890 n. 1496. 오른쪽 옥좌의 당나귀 귀 왕에서 시작해 맨 왼쪽의 벌거벗은 진실까지 읽어 간다.

1500년의 〈신비의 탄생〉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캔버스 유화입니다. 화면 맨 위 띠에 그리스어 명문이 적혀 있는데, 호른의 판독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이 그림은 1500년 끝 무렵, 이탈리아의 혼란 속에서, 나 알레산드로가 그렸다. 때가 지난 뒤의 반 때에, 성 요한의 묵시록 11장이 이루어지는 때에, 묵시록의 둘째 화 가운데, 악마가 3년 반 동안 풀려나 있는 때에. 그 뒤 그는 12장에 따라 사슬에 묶일 것이며, 우리는 그가 이 그림처럼 짓밟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내셔널 갤러리는 「이탈리아의 혼란」을 1494년에 시작된 프랑스의 침공(1495년 나폴리, 1499년 밀라노 입성), 그리고 피렌체 안의 분쟁으로 풀이합니다. 피렌체 달력의 1500년은 1501년 3월 24일에 끝나므로, 「1500년 끝」은 지금 달력으로 1501년 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림은 명문의 마지막 말과 맞물립니다. 금빛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둥글게 손을 잡고 돌고, 가운데 마구간 지붕 위에서는 천사 셋이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화면 맨 아래에서는 천사와 사람이 세 쌍으로 얼싸안고, 그 발치와 바위 틈에는 작은 악마들이 흩어져 달아납니다. 호른은 보티첼리의 이름이 적힌 작품이 이것과 베를린에 있는 단테 「천국편」 28곡 소묘 둘뿐이라고 썼는데, 여기서도 이름은 서명이 아니라 「나 알레산드로가 그렸다」는 문장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명문은 그가 묵시록의 언어로 자기 시대를 읽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이 곧 예전 그림에 대한 후회였는지는 명문도 그림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마구간 위 하늘에서 천사들이 원을 이루며 춤추고 아래쪽에서 사람과 천사가 껴안는 세로 화면
산드로 보티첼리, 〈신비의 탄생〉, 1500년, 캔버스에 유채, 108.6 × 74.9 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NG1034. 맨 위 띠에 화가의 이름이 들어간 그리스어 명문이 있고, 맨 아래 바위 틈으로 작은 악마들이 달아난다.

보티첼리의 단테 〈신곡〉 소묘

앞의 익명 필자는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를 위해 양피지에 단테를 그려 이야기 그림으로 꾸몄고, 사람들이 그것을 놀라운 물건으로 여겼다고 적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지금 베를린과 바티칸에 나뉘어 있는 단테 〈신곡〉 소묘입니다. 바사리는 단테와 얽힌 그의 일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보티첼리가 단테의 일부에 주석을 달고 지옥편을 그려 인쇄에 부쳤는데, 거기에 많은 시간을 쓰느라 일을 하지 않아 생활에 숱한 혼란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이 인쇄를 1481년 란디노판 〈신곡〉의 판화 밑그림으로 풀이합니다.

남은 그림은 모두 93점입니다. 베를린에 85점, 바티칸에 8점이 있고, 바티칸의 8점은 양피지 7장에 그려져 있어 낱장으로는 92장입니다. 호른의 관찰에 따르면 그는 먼저 납과 은을 섞은 것으로 보이는 금속 첨필로 밑그림을 잡고, 그 위를 펜과 잉크로 그렸습니다. 색은 기본이 아니었습니다. 채색이 시작된 것은 지옥 개관도와 지옥편 10곡, 15곡, 18곡 네 장뿐이고, 그중 두 장만 채색이 꽤 진행되었습니다. 「천국편」 31곡 자리는 빈 장으로 남았고 32곡이 마지막 미완 그림입니다. 이 작업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소묘들은 오래 묻혀 있었습니다. 베를린 쪽 묶음은 한 미술사가가 영국 글래스고 근처 해밀턴 궁에서 해밀턴 공작의 장서를 보고 1854년 책에 적으면서 알려졌고, 1882년 해밀턴 장서가 경매에 나오자 프로이센 정부가 장서 전체를 사들이면서 베를린으로 갔습니다. 바티칸의 8점은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장서를 거쳐 바티칸에 들어가 있었는데, 1886년에야 보티첼리의 연작 일부로 확인되었습니다.

깔때기 모양으로 층층이 좁아지며 내려가는 지옥을 옆에서 본 채색 그림, 맨 아래 반원 안에 큰 형체가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 단테 〈신곡〉 소묘 가운데 지옥 개관도, 양피지에 금속 첨필 밑그림·펜과 잉크·채색, 바티칸 도서관. 채색이 시작된 네 장 가운데 하나이고, 깔때기 모양의 지옥이 층층이 좁아지며 땅속으로 내려간다.

보티첼리의 말년과 죽음, 바사리가 그린 가난

바사리의 1568년판은 보티첼리의 말년을 이렇게 적습니다. 끝내 늙고 가난해져서,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살아 있는 동안 돕지 않았고 그 뒤 친구들과 그의 재주를 아낀 많은 이들이 돕지 않았다면 거의 굶어 죽었을 것이다, 늙고 쓸모없게 되어 똑바로 서지 못해 지팡이 둘을 짚고 다니다가 병들고 노쇠하여 일흔여덟에 죽었고, 1515년 오니산티 성당에 묻혔다.

그 시기의 1차 기록은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1502년 9월 23일, 만토바 후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의 피렌체 대리인 프란체스코 말라테스타는 그녀의 그림을 맡을 화가를 찾으며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또 한 사람 알레산드로 보테키엘라는 훌륭한 화가이자 기꺼이 일하고 걸리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크게 칭찬받았습니다. 그와 이야기해 보니 당장 일을 맡겠다고 합니다.」 그림을 버리고 일에서 멀어졌다는 화가에 대한 말로는 맞지 않습니다.

1504년 1월 25일, 피렌체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어디에 세울지 화가와 장인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습니다. 네 번째로 일어선 사람이 보티첼리였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앞서 코시모 로셀리가 말한 대성당 계단 쪽에 세우고 반대편 모퉁이에는 유디트 상을 두자고 했습니다. 시뇨리 회랑도 괜찮지만 대성당 모퉁이가 작품의 이름을 위해서도 더 나은 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렵의 그는 도시가 의견을 묻는 화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가 죽은 날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1510년 5월 17일 오니산티 성당에 묻혔다는 두 기관의 사망자 명부이고, 사인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바사리가 적은 일흔여덟이라는 나이와 1515년이라는 해는 둘 다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바사리는 왜 이 생애를 가난으로 맺었을까요. 답은 1550년 첫판의 첫 문단에 있습니다. 바사리는 보티첼리 장을 화가 이야기가 아니라 교훈으로 시작했습니다. 자연은 많은 사람에게 재능을 주면서 그 뒷면에 무심함을 붙여 놓는다, 그들은 삶의 끝을 생각하지 않아 살아서 작품으로 세상을 빛낸 것처럼 죽을 때는 구빈원을 빛내는 일이 잦다, 그러니 재능 있는 사람, 특히 우리 미술가들은 운이 재물을 허락할 때 노년을 위해 일부를 모아 두어야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이상하게도 그 궁핍에 맞았듯이. 로마에서 받은 돈을 다 써 버렸다는 대목도, 많이 벌었지만 무심함으로 다 날렸다는 대목도 이 틀 안에 놓여 있습니다. 바사리에게 보티첼리의 생애는 돈 관리를 못 한 재능의 경고담이었습니다. 1568년 개정판에서 바사리는 이 교훈 단락을 빼고, 그 대신 이 글의 처음에 나온 직조공 이웃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보티첼리 재발견, 라파엘전파와 페이터

바사리 이후 그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6세기 말의 보르기니와 17~18세기의 발디누치가 바사리를 옮겨 적었고, 18세기의 보타리는 바사리 주석판에서 그의 작품이 어디 있는지 추적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그림이 다시 주목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호른이 인용한 감식가 모렐리의 말대로, 이 화가의 진가는 「최근에야, 그리고 맨 먼저 영국에서」 다시 인정받았습니다.

첫 단추는 1798년 말에서 1799년 초 사이, 영국인 윌리엄 영 오틀리가 로마에서 〈신비의 탄생〉을 산 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그의 첫 진품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187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갔습니다. 1849년에는 라파엘전파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홀먼 헌트와 함께 루브르에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보고 즐거워했고, 1869년에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보티첼리의 여인 초상 한 점을 20파운드에 사들였고, 이 그림을 본뜬 요소를 자기 그림에 거듭 끌어다 썼습니다. 지금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 그림입니다. 1870년 비평가 월터 페이터가 잡지에 보티첼리에 관한 글을 실었고, 이 글은 1873년 그의 책 『르네상스사 연구』에 다시 실렸습니다. 존 러스킨은 젊은 시절에는 리피와 보티첼리가 아직 자기 이해 밖이었다고 훗날 고백했습니다. 호른은 그가 보티첼리를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을 1871년 옥스퍼드 강의로 보고, 1873년 『아리아드네 플로렌티나』의 마지막 강의는 사실상 보티첼리론이었습니다.

이 재발견이 먼저 사랑한 것은 그림 속의 분위기였습니다. 문서 쪽으로 그를 다시 세운 것은 그 반작용이었습니다. 밀라네시와 크로, 카발카셀레, 그리고 호른은 스윈번과 페이터의 탐미주의에 반발해 문서고로 갔고, 1908년 호른의 책이 그 결과물입니다.

보티첼리 주요 작품

  • 〈용기〉(1470년, 우피치) · 상업 법정 접견실의 덕목 연작 가운데 그가 그린 유일한 한 점.
  • 〈동방박사의 경배〉(1470~1475년, 우피치)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델 라마 예배당 제단화. 첫째 왕이 코시모 데 메디치라고 바사리가 전하고, 오른쪽 끝 금발 청년은 자화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프리마베라〉(1480년 무렵, 우피치) · 1498년 메디치 방계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형제의 비아 라르가 집 목록에 「아홉 인물」의 그림으로 올라 있고, 그 뒤 카스텔로 별장으로 옮겨졌습니다.
  •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1481~1482년, 바티칸) · 〈모세의 생애〉, 〈그리스도의 유혹〉, 〈코라의 벌〉 세 장면과 성인 교황 초상.
  • 〈비너스의 탄생〉(1485년 무렵, 우피치) · 1550년 바사리의 기술 전에는 기록이 없고, 주문자는 메디치 가문 안에서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 〈아펠레스의 중상〉(1495년 무렵, 우피치) · 루키아노스가 전한 고대 그림을 되살린 알레고리. 우피치는 그의 마지막 알레고리·신화 주제 작품으로 봅니다.
  • 〈신비의 탄생〉(150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 화가 이름과 연도가 들어간 그리스어 묵시록 명문이 있습니다.
  • 단테 〈신곡〉 소묘(베를린·바티칸) · 그림 93점. 금속 첨필과 펜, 잉크로 그렸고 채색은 네 장에서 시작만 되었습니다.

보티첼리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보티첼리의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그 밖에 〈동방박사의 경배〉,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 세 장면,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신비의 탄생〉, 단테 〈신곡〉 소묘 연작이 그의 생애를 대표합니다.

〈비너스의 탄생〉은 어디에 있나요?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습니다. 캔버스에 템페라로 그린 172.5 × 278.5 cm의 그림이고, 1550년 바사리가 피렌체 외곽 카스텔로의 메디치 별장에서 본 것이 가장 이른 기록입니다.

보티첼리는 정말 자기 그림을 불태웠나요?

그가 자기 그림을 불에 던졌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사리도 그가 사보나롤라를 따르다 그림을 버렸다고 썼을 뿐 태웠다고는 쓰지 않았고, 허영의 소각 장면에서 이름이 나오는 화가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로렌초 디 크레디입니다. 다만 그의 그림 일부가 그 불길에 사라졌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 보티첼리와 노년의 보티첼리 사이

벽 위에 돌을 올려놓고 버티던 사람은 결국 이웃과 합의해 좋은 이웃이 되었습니다. 바사리가 1568년에 덧붙인 이야기의 끝은 그렇습니다. 같은 바사리가 그린 노년은 그림을 버리고 지팡이 둘에 기대어 굶주림 직전까지 간 화가였고, 거기에 흔히 불 속에 던져진 그림이 덧붙습니다.

기록을 따라가면 그 이야기는 줄어듭니다. 그가 그림을 태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바사리의 가난 이야기는 첫판 첫 문단의 교훈 위에 서 있고, 틀린 나이와 틀린 해와 함께 왔습니다. 1502년의 그는 당장 일을 맡겠다는 화가로 칭찬받았고, 1504년에는 〈다비드〉의 자리를 두고 의견을 냈습니다. 말년에 그의 주제가 묵시록과 단테로 기운 것은 작품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참회였는지는 아무 기록도 말하지 않습니다.

참회한 천재라는 이야기가 줄어든 자리에 남는 사람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메디치가와 도시와 교황의 일을 받아 공방을 꾸리고, 쉰 살을 훌쩍 넘겨서도 일감을 기다리던 직업 화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보나롤라가 죽은 이듬해 밤, 심문관에게 그를 왜 죽였느냐고 끝까지 물었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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