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의 오른쪽, 수평선 바로 위에 작은 어두운 덩어리가 하나 있습니다. 원화 크기로 환산하면 가로 2.1센티미터, 세로 3.4센티미터입니다. 가로 7미터가 넘는 화면 위에서 엄지손톱보다 작습니다.
그것이 구조선 아르귀스호입니다. 그리고 이 크기가 이 글의 질문입니다. 구조하러 온 배를 왜 이렇게 작게 그렸을까요.
답부터 적겠습니다. 제리코가 고른 것은 구조된 순간이 아니라 구조를 놓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그 근거를 화면과 기록 양쪽에서 하나씩 확인해 보겠습니다.
|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8~1819년, 캔버스에 유채, 491 × 716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4884(다른 소장번호 C 51). 화면 왼쪽 끝에서 약 8할 되는 자리, 수평선 위의 작은 덩어리가 구조선이다. |
메두사호의 뗏목, 수평선 위의 배는 엄지손톱보다 작다
배는 화면 왼쪽 끝에서 약 81퍼센트, 위에서 약 40퍼센트 되는 자리에 있습니다. 오른쪽 위 모서리가 아니라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수평선 바로 위입니다. 원화로 환산하면 캔버스 왼쪽 끝에서 약 583센티미터 되는 지점입니다.
찾는 방법이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신호를 보내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닙니다. 통 위에 맨발로 올라선 남자가 뒤로 돌아선 채 붉고 흰 천을 흔들고, 붉은 두건을 쓴 남자가 그의 허리와 다리를 끌어안아 받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서 또 한 사람이 통 가장자리에 한쪽 발을 딛고 흰 천을 흔듭니다. 배는 이 세 번째 사람이 쳐든 손 바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 〈메두사호의 뗏목〉의 수평선 부분 확대. 원으로 표시한 것이 구조선이다. 16배로 늘려도 선수와 선미가 갈리지 않아, 오는 배인지 가는 배인지는 화면만으로 알 수 없다. |
고해상 원본에서 이 실루엣은 가로 17화소, 세로 28화소입니다. 세로로 선 어두운 돛대와 삭구 덩어리이고, 선체 아랫부분은 파도 마루에 가려져 있습니다. 돛대 끝만 겨우 보이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기록과 맞춰 보면 답이 나옵니다.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록은 실제로 구조가 이루어진 순간의 아르귀스호를 이렇게 적습니다. 처음 「반 리외」 거리에서 돛을 전부 펴고 다가왔고, 곧 소총 사거리의 두 배까지 왔으며, 마지막에는 뗏목 옆에 배를 세웠는데 그 거리가 권총 사거리의 절반이었습니다. 그 정도 거리의 배는 그림 속 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같은 증언록은 처음 배를 보았을 때를 「돛대 끝밖에 분간할 수 없었다」고 적습니다. 화면에 그려진 크기는 뒤쪽이 아니라 앞쪽에 맞습니다.
미술사 연구도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제리코가 고른 것은 난파자들이 멀리서 아르귀스호를 보고 처음으로 구조를 청했으나 닿지 않은 순간이라고 봅니다. 그 배가 다시 나타난 것은 두 시간 뒤입니다.
화면에 남은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루브르가 첫 번째 에스키스로 기록한 작은 유화가 있는데, 거기에는 그 배가 점이 아닙니다.
|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제1 에스키스, 1818년, 캔버스에 유채, 38 × 46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RF 2229. 오른쪽 수평선 위에 돛을 편 두 돛대 범선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다. 완성작의 점과 견주어 보라. |
좌우 배치는 이미 완성작과 같습니다. 돛은 왼쪽, 신호하는 무리는 오른쪽입니다. 달라진 것은 배입니다. 이 습작에서 또렷한 형태를 가졌던 배가 완성작에서는 점으로 줄었습니다.
메두사호 사건, 1816년 뗏목에서 일어난 일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려면 사건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1816년 7월 2일 오후 3시 15분, 프랑스 해군 프리깃함 메두사호가 서아프리카 앞바다의 아르갱 퇴에 좌초했습니다. 증언록은 위치를 북위 19도 36분, 서경 10도 45분으로 적습니다. 지금의 모리타니 앞바다입니다.
피할 수 있었던 사고라는 것이 생존자들의 주장입니다. 좌초 직전 밤, 곁을 달리던 코르벳함 에코호가 여러 차례 신호를 보냈으나 제대로 응답하지 않아 에코호는 결국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여울을 아는 승객들도 항로를 바꾸면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8년 전 같은 여울에 걸린 적이 있는 세네갈 서기 피카르는 파멸을 예고했다고 증언록은 적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휘관은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였습니다. 흔히 항해 경험이 없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자료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20년 넘게 항해하지 않은 사람이 함장에 임명됐다는 것입니다.
배를 여울에서 빼내지 못하자 승조원들은 프리깃함의 부재를 뜯어 뗏목을 만들었습니다. 구명보트는 자리가 모자랐습니다. 뗏목에 오른 사람은 150명입니다. 증언록과 루브르의 기록이 같은 수를 적습니다. 그 안에 여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증언록 1818년 판은 내역의 첫 수를 122명으로 인쇄했는데 같은 문장의 합계는 150명이라, 원전 안에서 수치가 맞지 않습니다. 합계를 따릅니다.)
| 알렉상드르 코레아르, 〈유기되는 순간의 메두사호 뗏목 설계도〉, 판화, 런던 국립해양박물관(그리니치). 판 아래 서명이 생존자 코레아르 본인을 가리킨다. 그 아래 손글씨는 150명이 이 기계에 올랐고 13일 뒤 15명만 구조됐다고 적는다. 널판이 깔린 것은 가운데뿐이고 바깥쪽은 각재만 뻗어 있다. |
구명보트들이 뗏목을 끌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예인줄이 풀렸습니다. 여기서 기록이 갈립니다. 생존자들은 누군가 일부러 놓아버린 것이라고 단언하며, 줄이 저절로 끊어졌다는 총독의 설명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우리는 놓아버린 자의 이름까지 댈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같은 책 안에 다른 사람의 전언으로 「줄이 끊어졌다」는 서술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루브르의 공식 작품 설명은 「잘렸다」로 씁니다.
뗏목은 만재 상태에서 1미터 넘게 가라앉았습니다. 증언록은 앞쪽과 뒤쪽은 허리까지 물이 찼고 서로 밀착해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었다고 적습니다.
흔히 「식량도 물도 없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포도주 통과 물통 두 개, 그리고 배에서 던져준 비스킷 25파운드가 있었습니다. 비스킷은 바다에 떨어져 반죽이 됐고, 포도주 두 통과 물통 두 개는 뗏목 위에서 일어난 소동 중에 바다로 던져졌습니다.
표류는 13일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7월 5일에 버려져 7월 17일에 구조됐으니 경과한 날은 12일이고, 햇수로 세면 13일입니다. 증언록은 13일로, 루브르는 12일로 적습니다.
그사이에 일어난 일 가운데는 지금도 읽기 힘든 대목이 있습니다. 증언록은 사람들이 시신을 먹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동시에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손대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구조된 사람은 15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다섯 명이 생루이에 닿은 뒤 사망해 최종적으로 열 명이 남았습니다. 150명에서 열 명입니다.
살아 돌아온 두 사람, 해군 외과의를 지낸 앙리 사비니와 지리 기사 알렉상드르 코레아르는 1817년에 증언록을 냈습니다. 1818년 제2판은 광산 기사 브레디프의 주석을 보태고 뗏목 설계도를 함께 실었습니다. 위의 판화가 그것입니다.
같은 날 아침, 두 시간 사이
두 번의 목격은 여러 날에 걸쳐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1816년 7월 17일 같은 날 아침, 두 시간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갰습니다. 보병 대위 한 사람이 수평선을 살피다 배를 발견했습니다. 브릭이라는 것은 알아봤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돛대 끝밖에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 증언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술통의 쇠테를 곧게 펴서 그 끝에 색깔이 서로 다른 손수건들을 붙들어 맸습니다. 그리고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을 돛대 꼭대기까지 올려보내 그 작은 깃발들을 흔들게 했습니다.
증언록의 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반 시간 넘게 우리는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떠다녔다. 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환희에서 우리는 낙담과 고통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프리깃함에서 가져온 큰 돛으로 천막을 치고 그 아래 누웠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났습니다. 포수장이 뗏목 앞쪽으로 나가려고 천막 밖에 머리를 내밀자마자 큰 소리를 지르며 돌아왔습니다. 겨우 한 말이 「살았다, 브릭이 우리 위에 와 있다」였습니다.
이번에는 반 리외 거리에서 돛을 전부 펴고 곧장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배가 소총 사거리의 두 배까지 오자 그것이 아르귀스호라는 것을 알아봤고, 마지막에 배는 권총 사거리 절반 거리에 멈춰 섰습니다. 장교 르메그르가 보트를 타고 와 가장 아픈 사람부터 옮겼습니다.
제리코가 캔버스에 올린 것은 이 두 시간 중 앞쪽입니다.
돛과 돛대, 화면 왼쪽 절반
이 그림 이야기는 대개 오른쪽 위를 향하는 대각선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화면 왼쪽 절반에도 큰 형태가 하나 서 있습니다. 돛대와 돛입니다.
돛대는 화면 왼쪽에서 4분의 1쯤 되는 자리에 서 있고, 다듬은 원재 두 개를 교차시킨 임시 구조입니다. 배에 실린 정식 마스트가 아니라 뗏목 위에서 얽어 세운 것이라는 사실이 형태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꼭대기에서 밧줄이 사방으로 내려가는데, 그중 한 가닥은 화면 왼쪽 아래 바깥까지 길게 뻗어 나갑니다.
그리고 돛은 화면 왼쪽으로 불룩하게 부풀어 있습니다. 돛의 아래 가장자리가 왼쪽으로 배를 내밀고 돛폭 전체가 왼쪽으로 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몸을 뻗는 방향과 돛이 부푼 방향이 서로 반대라는 것은 화면에서 바로 확인됩니다.
그 돛 왼쪽에는 뗏목보다 높이 솟은 녹색 파도가 있습니다.
이 형태들을 넣고 보면 구도 설명이 달라집니다. 미술사 문헌은 이 화면의 뼈대를 대각선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피라미드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돛대와 그것을 잡아 주는 밧줄이 만드는 삼각형이고, 이 삼각형이 둘째를 감쌉니다. 둘째는 화면 왼쪽의 죽은 자와 절망한 자들이 이루는 덩어리입니다. 셋째는 밑바닥의 시신과 죽어 가는 사람들에서 생존자들이 솟아오르는 형태이고, 그 꼭대기에 천을 흔드는 인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방향이 서로 반대인 대각선 두 개가 겹칩니다. 돛대와 삭구를 따라가면 뗏목을 덮치려는 파도에 닿고, 뗏목에 누운 몸들을 따라가면 멀리 있는 아르귀스호에 닿습니다. 뒤쪽 설명은 루브르 자신이 적은 것입니다.
한쪽은 파멸로, 다른 쪽은 구조로 갑니다. 그리고 화면에서 더 크고 더 가까운 것은 파도 쪽입니다. 대각선 하나만 보면 이 그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그림이 되지만, 두 개를 함께 보면 올라가는 힘과 덮치는 힘이 같은 화면에 들어 있습니다.
어두움은 어디까지 화가의 선택인가
이 그림은 어둡습니다. 화면 전체의 평균 색을 재면 어두운 갈색 계열입니다. 그런데 빛이 어디서 오는가를 실제로 재어 보면 흔한 설명과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화면 위쪽 15퍼센트 띠를 가로로 열 등분해 평균 밝기를 재면, 왼쪽 끝은 152, 오른쪽 끝은 23입니다. 0이 검정이고 255가 흰색인 척도입니다. 왼쪽 위 하늘이 오른쪽 위보다 여섯 배 넘게 밝습니다. 사람들이 손을 뻗는 쪽의 위쪽이 이 그림에서 가장 어두운 자리입니다.
밝은 곳은 따로 있습니다. 수평선 높이의 띠를 같은 방식으로 재면 배가 있는 구간이 가장 밝습니다. 배 주변 하늘은 연어빛 주황입니다. 즉 이 그림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자리는 오른쪽 위가 아니라 오른쪽 수평선이라는 좁은 띠입니다. 화면에서 밝은 것은 저 배가 있는 높이뿐이고, 그 위는 캄캄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지금 보는 이 어두움이 전부 화가가 고른 색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 되돌릴 수 없는 흑변이 일어났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원인으로는 두 가지가 나란히 제시됩니다. 유대 역청으로 만든 바탕칠이거나, 산화납과 밀랍을 많이 넣어 지나치게 건조성이 강해진 기름입니다. 역청은 칠할 때는 부드러운 광택을 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검은 당밀처럼 변하면서 수축해 표면에 주름을 만들고, 그 상태는 복원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 결과 넓은 면적의 세부를 오늘날 알아보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원인인지는 갈려 있고, 루브르의 공식 기록에는 역청도 흑변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결과는 화면에서 확인됩니다. 돛대 발치의 그늘 속, 화면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자리에는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검은 덩어리로만 보입니다. 밝기를 2.3배로 올려야 얼굴이 갈립니다. 그러면 측면을 보이는 얼굴 하나, 입을 벌린 얼굴 하나,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맞잡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생존자 두 사람이 직접 모델을 선 인물들이라고 전합니다. 화가가 굳이 불러 세워 그려 넣은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셈입니다.
그러니 「화가는 왜 이렇게 어두운 색을 골랐을까」라는 질문은 그대로 물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화가가 칠한 것과 물감이 지나온 200년이 겹친 화면입니다. 변하기 전과 후의 색을 나란히 보여 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얼마나 변했는지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화면에는 사람 손도 여러 번 닿았습니다. 루브르의 소장 기록은 1949년에 르네 롱가가 니스를 부분적으로 씻어 냈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 세척이 지금의 어두움과 어떤 관계인지는 그 기록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 화면에 손이 닿은 이력은 말아서 옮긴 200년에서 따로 모아 보겠습니다.
덧붙일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실제 구조는 맑은 아침, 잔잔한 바다에서 이루어졌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하늘은 검고 바다는 사납습니다. 날씨까지 사실대로 옮긴 그림이 아닙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죽은 자와 산 자를 가르는 것
이 그림을 설명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시신의 피부가 핏기 빠진 푸른빛으로 칠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화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경의 시신과 산 사람의 살이 드러난 자리를 여섯 군데 골라 색을 재어 봤습니다. 결과는 한쪽으로 모입니다. 여섯 군데 모두 빨강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초록, 파랑이 가장 적습니다. 빨강과 파랑의 차이는 32에서 58 사이입니다. 전부 따뜻한 상아색과 황토색이고 푸른 기나 회청색은 측정되지 않습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그다음입니다. 시신과 산 사람의 색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시신 쪽이 32에서 51, 산 사람 쪽이 54에서 58입니다. 겹치지는 않지만 한눈에 갈릴 만한 거리도 아닙니다. 전해지는 제리코의 팔레트 목록을 보면 파란색은 프러시안 블루 한 가지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면에서 죽은 자와 산 자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세와 방향입니다.
시신은 몸이 수평으로 놓여 있습니다. 널판 위에 엎어지거나 등을 대고 눕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몸의 축에서 벗어나 젖혀져 있습니다. 화면 왼쪽 아래에 누운 시신은 머리를 왼쪽으로 완전히 젖혔고, 노인의 무릎 위에 가로놓인 시신은 머리가 오른쪽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물에 잠겨 있습니다. 화면 아래 가장자리에서는 흰 포말이 널판 위로 넘어옵니다.
산 사람은 반대입니다. 몸이 세워지거나 비틀려 있고, 시선과 팔이 한 방향을 갖습니다. 죽음은 방향을 잃은 몸으로, 삶은 방향을 가진 몸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화면 왼쪽에 앉은 흰머리 노인은 어깨에 붉은 천을 걸치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습니다. 구조선 쪽을 보지 않습니다. 무릎 위에는 벗은 몸이 가로놓였고 그 몸 위에 자기 팔을 얹고 있습니다. 화면 가운데의 회녹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한 팔을 배 쪽으로 곧게 뻗어 가리키면서 얼굴은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가리키는 곳과 보는 곳이 다릅니다.
화면 꼭대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통 위에 서서 천을 흔드는 인물은 뒷모습입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루브르가 보관한 습작 기록에 따르면 이 인물의 모델은 조제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소장기관이 공식 기록으로 남긴 사실입니다. 이 화면에는 피부가 검게 칠해진 인물이 셋 있습니다. 통 위의 신호자, 돛 그늘 속의 측면 얼굴, 그리고 널판 위를 오른쪽으로 기어가는 붉은 머리띠의 남자입니다.
참고로 제리코가 이 그림을 준비하면서 병원 영안실을 드나들며 시신을 스케치했고 잘린 사지를 작업실로 가져와 관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다만 그 준비가 곧 「사실 그대로의 피부색」으로 옮겨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에서 잰 값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수치들의 사정거리를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위에서 잰 것은 지금 화면의 값입니다. 앞 절에서 본 대로 이 화면은 200년을 지나온 것이므로, 이 측정이 말해 주는 것은 지금 푸르게 보이지 않는다까지입니다. 처음부터 푸르게 칠하지 않았다는 데까지 이 값으로 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오늘 이 그림 앞에 서는 사람이 푸른 시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죽은 자와 산 자가 자세와 방향으로 갈린다는 것도 그 화면에서 확인되는 일입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앞에서 관람자가 서는 자리
회화의 원근 구조에서 수평선의 높이가 곧 관람자의 눈높이입니다. 이 그림에서 그 선이 어디 있는지 두 군데에서 따로 재어 봤는데 값이 같았습니다. 화면 위에서 40.3퍼센트입니다. 원화로 환산하면 캔버스 아래 가장자리에서 약 293센티미터 되는 높이입니다.
이 선을 기준으로 나누면 이렇게 됩니다.
전경의 시신들은 전부 눈높이 아래에 있습니다. 화면의 아래쪽 절반 남짓이 통째로 눈높이 밑입니다. 곧 관람자는 죽은 사람들을 내려다봅니다. 반대로 돛대와 신호하는 무리는 눈높이 위입니다. 통 위에 선 남자의 머리는 눈높이보다 1미터 넘게 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뗏목의 앞단은 화면 맨 아래 가장자리에서 잘립니다. 널판과 인체가 화면 아래 끝까지 이어지다가 끊기고, 뗏목의 앞쪽 끝을 보여 주는 경계선이 화면 안에 없습니다. 그림이 끝나는 자리에서 뗏목이 끝나지 않습니다.
재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관람자는 뗏목 위에 올라선 것도 아니고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 바로 위, 산 사람들 바로 아래 높이에 서 있습니다.
다만 1819년에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계산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다음 절입니다.
난파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걸리다
이 그림은 1819년 파리 살롱에 나왔습니다. 회기는 8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출품 제목이 〈메두사호의 뗏목〉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살롱 도록 원본을 열어 보면 510번 항목이 이렇습니다. 작가 이름 제리코, 작품 제목 「난파 장면」. 그게 전부입니다. 도록 전문을 훑어도 「메두사」라는 말도, 「뗏목」이라는 말도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도록이 원래 제목만 싣는 책이었다면 510번이 짧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말이 밝힌 방침은 작가 이름을 작품마다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같은 도록 안에는 그림의 줄거리나 인용 구절을 여러 줄 달아 놓은 항목이 적지 않고, 바로 다음 511번에는 그 그림이 어느 도시의 주문이라는 사실까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510번이 제목 한 줄로 끝난 것은 도록의 형식이 아니라 이 항목의 상태입니다. 설명을 달 자리가 있었는데 달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제목 자체입니다. 「난파 장면」은 어떤 난파도 될 수 있는 일반명사입니다. 생존자들의 증언록이 나온 뒤 이 사건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도록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왕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원래 제목을 눌렀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걸린 자리도 남아 있습니다. 그림은 살롱 카레에 걸렸는데 처음에는 대회랑으로 가는 출입문 위였습니다. 높이 걸린 것입니다. 1열로 내려온 것은 10월 말이었습니다. 회기가 석 달 조금 넘었으니 대부분의 관객은 이 그림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왕실이 이 그림을 살 기회는 있었습니다. 왕립미술관 총감독 오귀스트 드 포르뱅이 1822년 2월 3일 왕실부 장관에게 6,000프랑에 사들이자고 올렸고, 5월 17일에 그 제안을 다시 꺼냈습니다. 베르사유 궁으로 보내기 위해 5천에서 6천 프랑으로 한 번 더 올린 일도 있습니다. 어느 것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성사되지 않았는지는 루브르 자신도 둘 중 하나로 남겨 두었습니다. 제리코가 제시된 값을 너무 낮다고 보았기 때문인지 소관 부처가 그림의 주제로 곤란해했기 때문인지, 작가 생전에는 어떤 거래도 성립하지 않았다. 어느 쪽인지 고르지 않은 문장입니다. 소장기관이 자기 소장품의 내력을 적으면서 이유를 확정하지 않았다면, 읽는 쪽도 확정하지 않는 편이 맞습니다.
살롱 심사위원단이 금메달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루브르의 공식 기록에는 그 언급이 없어, 2차 자료가 전하는 내용으로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 뒤 그림은 바다를 건넙니다. 1820년 4월 계약으로 영국 흥행사 불럭에게 대여되었습니다. 제리코가 직접 순회 전시를 한 것이 아니라 전시와 홍보를 맡긴 것입니다. 런던 이집션 홀에서 그해 6월부터 12월 말까지 걸렸습니다. 개막일은 자료에 따라 6월 12일과 6월 10일로 갈립니다. 관람객이 약 4만 명이었고 제리코가 2만 프랑가량을 벌었다고 전합니다. 이듬해 2월과 3월에는 더블린의 뉴 로턴다로 옮겼는데, 더블린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모두 성공했다고 묶으면 절반이 사실과 다릅니다.
제리코는 1824년 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 32세였습니다. 그해 11월 2일 파리에서 열린 사후 공매에서 이 그림은 1번 로트로 나왔고 6,005프랑에 낙찰됐습니다. 낙찰자는 고인의 친구였지만 실제로는 왕실부를 대신해 응찰한 것이었습니다. 대금은 포르뱅이 먼저 치렀고, 그해 11월 12일 미술 부문을 맡고 있던 라로슈푸코 자작의 편지로 왕실 취득이 확인되면서 왕립미술관 금고에서 상환받았습니다. 루브르에 상설로 걸린 것은 1826년부터입니다. 생전에는 6,000프랑 제안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값이 그보다 조금 오른 사후 경매에서 왕실로 들어갔습니다.
말아서 옮긴 200년
앞 절에서 이 그림이 바다를 건넜다고 적었습니다. 가로가 7미터를 넘는 그림을 어떻게 배에 실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답은 소장 기록에 한 단어로 적혀 있습니다. 말아서 옮겼습니다.
이 그림은 벽이 아니라 천에 그려져 있습니다. 루브르의 소장 기록은 1818년 2월 24일에 화상 겸 복원가 에티엔 레가 15피에 22피에짜리 캔버스를 440프랑에 납품했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천에 그린 그림은 틀에서 떼어 둥글게 말 수 있습니다. 벽화였다면 런던도 더블린도 없었을 것입니다.
작업하는 동안에도 자리를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포부르뒤룰가에 빌린 작업실이었고, 뒤에 테아트르이탈리앵 로비로 옮겨 1819년 7월에 완성했습니다. 8월 초에 루브르로 옮겨졌고, 거기서 레 상회가 캔버스를 틀에 다시 팽팽하게 당기고 니스를 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완성된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그림이 아니라, 그리는 동안부터 접히고 옮겨진 그림입니다.
기록에 남은 이동
루브르에 들어온 뒤로도 이 그림은 여러 번 벽에서 내려왔습니다.
1848년 말에는 사다리가 넘어지면서 캔버스가 찢어져 수리를 받았습니다. 7미터짜리 그림 앞에서 사다리를 쓰다 일어난 사고입니다.
1859년 6월부터 1860년 9월까지는 아예 관람객이 들어오지 못하는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화가 외젠 롱자와 피에르 데지레 기유메가 원작과 같은 크기의 천에 이 그림을 베끼는 동안이었습니다. 그 모사본은 지금 아미앵 피카르디 미술관에 있습니다. 왜 베꼈는지는 기록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넉 달이 아니라 열다섯 달이 걸렸다는 사실뿐입니다.
1870년 9월 21일에는 일곱 벽난로 방에서 내려 말아서 1층으로 옮겼고, 1871년에서 1872년 무렵에 다시 펴서 걸었습니다. 기록은 날짜와 한 일만 적고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전쟁 동안에는 파리를 떠나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툴루즈의 자코뱅 교회로 옮겼습니다. 이때 말았는지에 대해서는 루브르 기록 자신이 물음표를 달아 두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훨씬 길었습니다. 1939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베르사유 궁 오랑주리에서 그해 가을 사르트의 루비니성으로, 1940년 봄에 다시 수르슈성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루브르로 돌아온 것은 1946년 7월 11일입니다. 이때는 말지 않고 옮겼다고 기록은 밝혀 두었습니다.
기록에 남은 손질
돌아온 뒤로는 손질 기록이 이어집니다. 1948년에 틀을 갈고 캔버스 가장자리에 장력 띠를 대어 다시 팽팽하게 당겼습니다. 1949년에는 르네 롱가가 니스를 부분적으로 씻어 냈습니다. 가장 최근의 손질은 2018년 11월과 12월이고, 장 파스칼 비알라와 뤼크 위르테르가 장력 띠를 새로 대고 다시 당겼습니다.
걸린 자리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살롱 카레에서 대회랑으로, 다시 일곱 벽난로 방으로 옮겼다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몰리앵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다뤼실, 1995년부터 다시 몰리앵실입니다.
이 목록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적혀 있는 것이 거의 전부 사람이 그림에 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말고, 내리고, 옮기고, 당기고, 씻었습니다. 앞에서 이 화면을 두고 화가가 칠한 것과 물감이 지나온 200년이 겹친 것이라고 적었는데, 그 200년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다만 이 손질들 가운데 무엇이 지금의 어두움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를 말해 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니 수평선 위의 그 작은 배를 찾을 때, 우리가 들여다보는 것은 1819년의 화면이 아닙니다. 제리코가 그 배를 얼마나 작게 그렸는지는 화면에서 그대로 확인되지만, 그 배가 놓인 하늘이 그때도 지금만큼 어두웠는지는 이 목록 너머의 일입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루브르에서 실물을 본다면
이 그림은 루브르 드농관 1층 700실, 살 몰리앙에 있습니다. 실물 앞에 설 기회가 있다면 이 순서를 권합니다.
① 먼저 멀리서 전체를 봅니다. 가로가 7미터를 넘기 때문에 떨어져야 형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때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흐름만 보지 말고 왼쪽의 돛과 그 너머 파도를 함께 보십시오. 방향이 반대인 두 힘이 한 화면에 있습니다.
② 가까이 다가가 전경을 봅니다. 인물들이 실물 크기로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는 색보다 자세를 보십시오. 몸이 수평으로 놓였는지, 머리가 축에서 젖혀졌는지, 다리가 물에 잠겼는지. 그것이 이 그림에서 죽음을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③ 수평선에서 배를 찾습니다. 오른쪽 위 모서리가 아닙니다. 화면 왼쪽 끝에서 약 8할 되는 자리, 수평선 바로 위입니다. 흰 천을 흔드는 사람의 쳐든 손 오른쪽을 보면 됩니다. 그 크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④ 돛대 발치의 그늘을 들여다봅니다. 검은 덩어리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 안에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람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그림에 일어난 변화 때문입니다.
⑤ 한 걸음 물러나 다시 봅니다. 이제 저 작은 배가 무엇을 뜻하는지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 회화를 하나 더 보고 싶다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이 그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림이 멈춰 세운 자리
제리코 앞에는 고를 수 있는 장면이 여럿 있었습니다. 뗏목 위의 소동도, 시신을 먹은 일도, 아르귀스호가 뗏목 옆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옮겨 싣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 셋을 놓고 고민했다고 전합니다. 그중에서 그가 멈춰 세운 것은 수평선에 배가 나타난 것을 처음 보고 천을 흔들던 그 순간입니다. 아직 배가 사라지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이고 있다고 믿는 중입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아직 모릅니다. 저 배가 돌아올지,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는지. 화면에서 그 답을 알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는 오는지 가는지 형태로 갈리지 않고, 배가 있는 쪽 위쪽 하늘은 화면에서 가장 어둡습니다.
보는 사람만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배는 두 시간 뒤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열다섯 명이 살아 배에 오르고, 그중 다섯 명이 뭍에서 죽습니다.
후대의 한 역사가가 이 그림을 두고 우리 사회 전체가 메두사호의 뗏목에 타고 있다고 썼다는 말이 전합니다. 이 그림을 200년 동안 살려 둔 것은 구조의 기록이 아니라, 구조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 두 시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