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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레이턴의 타오르는 6월, "액자 값보다 쌌던 그림이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타오르는 6월을 한 문단으로

타오르는 6월은 프레데릭 레이턴이 1895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정사각형 그림으로, 지금은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소장 번호는 63.0406입니다. 오렌지색 옷을 입고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여인을 그렸고, 화가가 세상을 떠난 뒤 반세기 가까이 행방이 끊겼다가 1962년에 철거를 앞둔 런던의 한 집에서 다시 나타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족할 것 없던 사람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였던 프레데릭 레이턴(Lord Frederick Leighton, 1830-1896)은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사였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언어를 마스터했고, 음악과 미술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키가 큰 미남에 인품과 사교성까지 훌륭했지요. 20대 중반에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어 부를 쌓았고, 34세에는 왕립 예술원의 준회원이 되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완벽해 보였던 레이턴에게 딱 하나 없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는 '일과 결혼한 사람'이 꽤 많았는데, 레이턴 역시 일 중독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51세에 만난 모델

  51세가 되어서야 레이턴은 평생 사랑할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동료 화가의 화실에서 모델 일을 하던 22세의 여성을 만난 후, 레이턴은 즉시 그녀를 자신의 전속 모델로 고용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도로시 딘(Dorothy Dene, 1859-1899)'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자기 집 바로 옆에 그녀와 가족이 살 집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레이턴은 딘이 배우로서 성공하는 데 결혼이 걸림돌이 될까 배려한 것입니다. 레이턴은 평생 딘을 후원했고, 거액의 유산을 남길 만큼 그녀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바로 이 도로시 딘이 <타오르는 6월 Flaming June>의 모델입니다.

타오르는 6월(Flaming June)이란 작품을 보여주는 이미지
<타오르는 6월> 1895년, 120.6cm x 120.6cm,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

화면 읽기, 정사각형 안에 접힌 몸

이 그림의 크기는 119.1 x 119.1cm입니다. 가로와 세로가 같은 정사각형이고, 원래 치수는 46과 8분의 7인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장 번호 63.0406으로 관리되는 소장 기록의 값이며, 이 글에서는 이 수치를 확정값으로 씁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크기로 120.6 x 120.6cm가 널리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값은 소장 기록과 다르고, 어디서 어떻게 측정한 값인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도록이나 웹에서 120.6cm를 보게 되더라도 확정된 수치로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정사각형은 위아래도 좌우도 우세하지 않은 형태여서, 화면 안에 방향을 만들어 줄 요소가 따로 필요합니다. 레이턴은 그 일을 인물의 자세에 맡겼습니다. 무릎을 끌어안고 상체를 옆으로 눕힌 몸이 화면 안에서 크게 한 바퀴 도는 곡선을 만들고, 팔과 다리와 천의 주름이 그 원 안쪽으로 다시 접혀 들어옵니다. 그래서 시선이 인물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안에서 돕니다.

색도 같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오렌지색 천은 화면에서 가장 채도가 높은 덩어리이고, 그 뒤의 바다와 하늘은 채도를 낮춘 청록과 금색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뜨거운 색을 한가운데 놓고 나머지를 물리는 배치라, 눈을 감았다 떠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언제나 그 오렌지색입니다.

잠든 것인가 잠든 척인가

  작품 속 아름다운 여인이 대리석 의자 위에서 잠들어 있고, 뒤쪽 테라스 너머로는 해질녘의 햇살이 바다 위를 비추고 있습니다. 해질녘의 빛을 받아 투명한 오렌지색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은 더욱 붉게 타오르는 듯합니다. 여인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홍조와 상기된 귀 때문에 사실은 잠든 척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잠든 척이라는 해석은 화면의 몇 지점에서 나옵니다. 뺨과 귀 끝에 도는 붉은 기, 그리고 완전히 늘어지지 않고 어딘가 정돈된 손과 발의 위치입니다. 정말 깊이 잠든 사람의 몸은 이렇게 균형 잡힌 곡선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 대목은 해석이지 기록이 아닙니다. 화가가 남긴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읽어 낸 것이므로, 잠든 상태를 그대로 그렸다고 보는 쪽도 성립합니다. 소장 기관의 해설은 이런 주제를 레이턴이 자주 썼다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잠든 인물을 무의식을 형상으로 옮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붉은 기와 자세뿐이고, 그다음은 보는 사람의 판단입니다.

  여인의 독특한 포즈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무덤에 조각한 <밤>에서 영감을 받아 여러 번의 스케치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스케치 중 네 점은 누드였고 한 점만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여인의 포즈와 평온한 배경은 지중해의 따뜻한 오후를 연상시키며, 여름의 나른함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위의 협죽도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독성이 매우 강한 협죽도(Oleander)가 보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더 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협죽도는 잠과 죽음 사이의 연약한 경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Oleander(협죽도)를 보다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이미지
협죽도(Oleander)

협죽도는 잎과 꽃과 줄기 전체에 강한 독성을 가진 상록 관목입니다.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자라고 여름 내내 붉은 꽃을 피웁니다. 화면에 놓인 위치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인물 위쪽, 그러니까 잠든 사람의 머리맡에 해당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식물 하나에 고정된 뜻 하나를 붙여 읽지 않는 일입니다. 협죽도가 있으니 이 그림은 죽음을 말한다고 단정하면 화면의 나머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뒤편의 바다와 저녁 빛, 그리고 인물의 편안한 자세는 오히려 정반대의 인상을 줍니다. 이 그림에서 협죽도가 하는 일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잠과 죽음이 형태상 서로 닮았다는 오래된 연상을 화면 한구석에 남겨 두는 것에 가깝습니다.

1895년의 첫 공개와 작위

  이 작품은 1895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레이턴은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아 영국 화가 최초로 세습 남작 작위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그림이 처음 사람들 앞에 놓인 자리는 전시장이 아니라 화가의 작업실이었습니다. 1895년 4월 7일, 왕립 아카데미 출품작을 미리 공개하는 관례였던 쇼 선데이에 레이턴은 자기 화실에서 여섯 점을 내보였고 그중 하나가 이 그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여섯 점이 그가 아카데미에 낸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작위 이야기는 조금 더 정확히 적을 수 있습니다. 레이턴은 1878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1886년에 준남작이 되었습니다. 남작 서임장이 발급된 것은 1896년 1월 24일이고, 그는 그다음 날인 1월 25일에 협심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 작위는 하루 만에 소멸했습니다. 화가가 귀족 작위를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하루짜리 작위를 두고 영국 귀족 작위 가운데 가장 짧은 사례라는 서술이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20세기 초의 인명사전과 현행 귀족 계보 자료가 모두 그렇게 적고 있어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서임장 원문이나 공식 등록부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으므로, 기록상 가장 짧은 사례로 전해진다는 선에서 적어 둡니다.

본문에서 당대 최고의 인기라고 한 표현의 무게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동시에 이 작위가 하루밖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음 절의 이야기와도 겹칩니다. 그의 이름값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정점을 찍었고, 그 뒤로는 아주 빠르게 내려갔습니다.

1930년 이후 사라진 32년

1895년 이후의 이력은 한동안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1906년까지 한 부유한 미망인이 잡지사로부터 이 그림을 사들였고, 1915년에는 옥스퍼드의 애슈몰린 박물관에 대여되었으며, 1930년에는 레이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레이턴 하우스에 다시 걸렸습니다.

행방이 끊기는 것은 그 뒤부터입니다. 1930년 이후 약 32년 동안 이 그림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나타난 것은 1962년입니다. 런던 클래펌 커먼의 한 주택이 철거를 앞두고 있었고, 그 집에서 일하던 건축업자가 원래의 거대한 액자에 그대로 담긴 이 그림을 발견해 동네 미술품 가게로 가져갔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시대의 취향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중반의 미술 시장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아카데미 회화는 낡고 감상적인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홀먼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이나 밀레이의 마리아나 같은 그림들도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벽에서 내려 창고에 넣거나 집을 비울 때 두고 가는 물건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화가의 대표작이 철거 예정 주택에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취급의 정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고전주의적인 화풍은 모더니즘의 물결에 밀려 인기가 시들해졌고 그의 이름도 잊혀 갔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타오르는 6월>의 작품 가격이 액자 값보다 저렴해지기도 했습니다. 1962년 다시 발견됐을 때는 60파운드에 팔렸고, 결국 미술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것입니다.

액자가 그림보다 비쌌다는 말의 근거

액자 값이 그림 값보다 높았다는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거래에서 나온 말입니다. 발견된 뒤 이 그림은 60파운드에 팔렸고, 그때 액자가 그림보다 값이 나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그림을 화상 제러미 마스가 사들였고, 1963년에 폰세 미술관을 세운 루이스 페레가 그에게서 2,000파운드에 넘겨받았습니다.

액자가 왜 그런 평가를 받았는지는 지금 남은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장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액자의 크기는 175.3 x 171.5cm이고 무게는 60.8kg입니다. 그림의 한 변이 119.1cm이니, 액자는 그림보다 한참 크고 어른 한 사람 무게에 가깝습니다. 도금한 대형 액자는 그 자체로 재료값과 세공값이 나가는 물건이었고, 팔리지 않는 그림보다 값이 매겨진 것은 시장의 논리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장 기록으로 본 타오르는 6월

  • 제작: 1895년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19.1 x 119.1cm (46 7/8인치, 소장 기록의 확정값)
  • 액자: 175.3 x 171.5cm, 60.8kg
  • 소장: 폰세 미술관, 루이스 A. 페레 재단
  • 소장 번호: 63.0406
  • 1962년 재발견, 1963년 2,000파운드에 구입

다시 명작이 되기까지

  그러나 20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미술이 재평가받으면서, 이 작품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명작의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다시 조명받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사들인 폰세 미술관은 1959년에 문을 연 곳이라, 구입 당시에는 소장품을 갖춰 가던 신생 기관이었습니다. 미술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새 미술관이 아무도 원하지 않던 빅토리아 회화를 사들인 결정은 그때는 무모해 보였고, 지금은 이 그림이 그 미술관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소장 기관의 해설에도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페레가 이 작품을 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895년의 그 화실로 돌아간 그림

재평가의 과정을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두 번의 대여를 보면 됩니다. 2015년 6월 9일부터 9월 6일까지 이 그림은 뉴욕 프릭 컬렉션에 걸렸습니다. 프릭 컬렉션이 전시를 예고하며 낸 보도자료는 이 작품이 뉴욕에서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카리브해의 섬에 있던 그림이 미국 미술계의 중심에서 처음으로 관객을 만난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The Frick Collection 보도자료, 2014)

더 눈에 띄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2016년부터 이듬해까지 이 그림은 런던의 레이턴 하우스로 돌아가 전시되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는 화가가 살면서 작업하던 집이고, 앞에서 본 1895년 4월의 쇼 선데이에 이 그림이 처음 사람들 앞에 놓였던 바로 그 화실이 있는 곳입니다. 이 전시에는 화가가 이 작품을 위해 남긴 유일한 채색 스케치와 준비 소묘들이 함께 나왔습니다.

철거 직전의 집에서 나와 카리브해의 섬으로 건너간 그림이, 처음 걸렸던 화실로 121년 만에 돌아온 셈입니다. 액자 값보다 못하다는 평가와 이 귀환 사이의 거리가 이 그림의 이력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입니다.

남은 사람의 이야기

  안타깝게도 레이턴이 죽은 후 딘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레이턴 사망 3년 후, 딘도 병에 걸려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이턴 사후 딘이 다른 화가의 모델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가 레이턴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타오르는 6월은 어디에 있나요?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1963년에 미술관을 세운 루이스 페레가 런던에서 2,000파운드에 사들였으며 소장 번호는 63.0406입니다.

Q. 타오르는 6월의 실제 크기는 얼마인가요?

119.1 x 119.1cm입니다. 가로와 세로가 같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습니다. 120.6 x 120.6cm라는 수치가 널리 퍼져 있으나 소장 기록의 값과 다르고 측정 근거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Q. 액자가 그림보다 비쌌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재발견 직후 이 그림은 60파운드에 팔렸고 그때 액자가 그림보다 값이 나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액자는 175.3 x 171.5cm에 무게가 60.8kg으로 그림보다 크고 무겁습니다.

Q. 이 그림은 어떻게 다시 발견되었나요?

1962년 런던 클래펌 커먼에서 철거를 앞둔 주택을 작업하던 건축업자가 찾아냈습니다. 1930년 레이턴 하우스 전시를 끝으로 약 32년 동안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Q. 레이턴의 작위는 무엇이었나요?

1878년 기사 작위, 1886년 준남작을 거쳐 1896년 1월 24일 남작 서임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다음 날 세상을 떠나 작위가 하루 만에 소멸했으며, 영국 귀족 작위 가운데 기록상 가장 짧은 사례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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