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범죄와 회개의 기록"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생애 마지막 시점에 그려진 작품으로, 그가 도피 생활을 해야 했던 삶과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 작품명: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 작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
• 제작: 1606~1610년 사이(정확한 연도는 학계에서 논쟁 중)
• 재료: 캔버스에 유화
• 크기: 125×101cm
• 소장: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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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6~1610년 사이, 125×101cm, 보르게세 미술관 |
카라바조라는 이름
이 화가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입니다. '다(da)'는 '~로부터'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전치사로, '카라바조 마을에서 온 미켈란젤로'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미 백여 년 전 위대한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출신지의 이름인 '카라바조'라고 부릅니다.
'악마의 재능을 가진 화가'로 불리는 카라바조는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음주, 폭행, 살인, 탈옥 등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범죄 후 다른 곳으로 도망쳐도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 덕분에 귀족들과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서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황마저 그의 작품을 원했을 정도였습니다.
살인, 그리고 도피의 4년
1606년 5월 28일 밤, 카라바조는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테니스 코트에서 라누치오 토마소니와 결투를 벌이다 그의 넓적다리 동맥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결투는 내기 테니스 경기 중 벌어진 시비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다만 미술사학자 앤드루 그레이엄딕슨을 비롯한 일부 연구자들은, 테니스 시비라는 이야기 자체가 실제 갈등, 곧 한 여성을 둘러싼 다툼을 감추기 위해 당사자들이 지어낸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정확한 발단이 무엇이었든, 이 살인 사건으로 카라바조는 모든 것을 잃고 사형 선고를 받은 수배자가 되어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게 됩니다.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등지를 전전했지만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도망쳐야 했던 생활은 카라바조를 더욱 난폭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카라바조는 수많은 걸작을 그려냈는데, 그중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입니다. 정확히 언제 그려졌는지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려, 도피가 막 시작된 1606~1607년으로 보는 쪽과 생의 마지막 해인 1609~1610년으로 보는 쪽이 나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작품은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도피 중이었던 카라바조 자신의 심정을 담은 그림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테네브리즘, 어둠에서 인물을 끌어내는 빛
이 작품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오직 다윗과 골리앗에게만 빛이 집중됩니다.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입체감을 만드는 이러한 명암법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부릅니다. 그 뿌리는 고대 그리스 회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으며, 르네상스 시기 마사초 같은 화가들을 거쳐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러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졌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전통을 물려받되 훨씬 더 극단적으로 명암을 밀어붙였는데, 배경 대부분을 짙은 어둠으로 채우고 인물만 조명 아래 세우는 이 극한의 대비를 어둠을 뜻하는 '테네브로소(tenebroso)'에서 파생된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부릅니다.
소년 다윗은 강렬한 빛을 받으며 자신이 벤 골리앗의 머리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죽은 골리앗은 이마에 큰 상처를 입고, 눈을 감지 못한 채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는 듯합니다. 이러한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얼굴에서는 승리의 기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적장의 목을 들고 함성을 외치는 영웅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눈빛에서는 깊은 슬픔과 연민이 느껴집니다.
두 얼굴에 담긴 자화상
카라바조는 종종 자신의 작품 속에 자화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 작품의 골리앗 얼굴이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는 해석은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초기 전기,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가 1672년에 쓴 화가 열전에서부터 이미 언급된 오래된 해석입니다. 다윗의 얼굴 역시 젊은 시절의 카라바조를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이 경우 이 작품은 젊은 자신과 만년의 자신을 한 화면에 마주 세운 이중 자화상이 됩니다. 다윗 쪽의 자화상설은 골리앗만큼 확고히 굳어진 통설은 아니지만, 두 해석을 겹쳐 읽으면 이 그림은 교황과 추기경의 사랑을 받던 젊고 성공했던 시절의 카라바조(다윗)가, 살인자가 되어 떠도는 만년의 추악한 카라바조(골리앗)의 목을 벰으로써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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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칼에 새겨진 'H-AS OS'라는 문구 |
칼날의 문구, 겸손이 교만을 이긴다
다윗의 칼날에는 'H-AS OS'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여러 미술사학자가 이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했던 '겸손이 교만을 이긴다(Humilitas occidit superbiam)'는 라틴어 문구의 약자로 읽어 왔고, 지금 이 작품을 소개할 때 가장 널리 쓰이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이 문구가 맞다면, 자신의 죄가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카라바조의 절박한 심정이 칼날 위에 새겨진 셈입니다. 다만 이 글자의 정체를 둘러싼 논의가 완전히 하나로 모인 것은 아닙니다. 화가 자신의 서명 약자로 보는 견해, 혹은 그저 당시 실제 검에 새겨져 있던 제작자 표식을 충실히 옮겨 그린 것일 뿐이라는 견해도 함께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겸손이 교만을 이긴다'는 읽기가 그림이 이야기하는 참회와 속죄라는 주제와 가장 강하게 맞아떨어지기에, 지금도 가장 힘을 얻는 해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면을 향한 항해, 그리고 죽음
이 작품은 1613년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소장품 목록에 이름을 올립니다. 시피오네는 교황 파울루스 5세의 조카로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카라바조가 자신의 회개와 반성을 담아 교황의 용서를 구하려고 시피오네에게 보낸 선물이었으리라는 해석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를 직접 증명하는 문서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학계의 가설로 남아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사면받을 것을 기대하며 로마로 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로마에서 멀지 않은 항구 도시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갑자기 사망하여, 묘비조차 없이 공동묘지에 묻히고 맙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오랫동안 질병, 매독, 암살 등 다양한 설이 떠돌았습니다. 2009년 12월, 포르토 에르콜레의 한 교회 납골당에서 카라바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수습되었습니다. 이후 일 년에 걸친 탄소연대측정과 DNA 분석을 거쳐 2010년, 연구팀은 이 유골이 카라바조일 가능성을 85퍼센트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유골에서는 그림물감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높은 농도의 납 성분이 검출되어, 안료를 다루며 누적된 납 중독이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마르세유 대학 연구팀이 치아 속 치수를 이용해 다시 분석한 결과에서는 포도상구균이 함께 검출되었는데, 연구팀은 나폴리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제대로 낫지 않고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유골의 신원 확인 자체가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어서, 정확한 사인은 여전히 단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39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카라바조의 극단적인 명암법(테네브리즘)은 미술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오직 주인공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감정과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그의 화풍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빛의 화가로 알려진 렘브란트 역시 카라바조의 명암법을 깊이 연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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