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해석, 잘린 머리에 그린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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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명: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 작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
• 제작: 1606~07년 또는 1609~10년(학계 논쟁 중)
• 재료: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25×101cm
• 소장: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 인벤토리 455

어두운 배경 속 소년 다윗이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슬픈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6~07년 또는 1609~10년, 캔버스에 유채, 125×101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인벤토리 455. 다윗이 뻗은 왼팔과 골리앗의 반쯤 뜬 두 눈을 함께 보십시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가 1606년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달아난 뒤의 시기에 그린 것으로 보는 그림입니다. 소년 다윗은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지만 이긴 사람의 몸짓을 하지 않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다윗이 슬프고 우울하며 마음이 흔들린 얼굴로 그 머리를 보고 있다고 설명하고, 그 머리의 얼굴을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고 적습니다. 카라바조는 본명이 아니라 그가 자란 롬바르디아의 마을 이름입니다. 그는 1571년 가을 밀라노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고(보르게세 미술관은 밀라노로, 브리태니커는 밀라노 또는 카라바조로 적습니다), 어린 시절을 밀라노와 카라바조 두 곳에서 보냈습니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고, 이름의 「다(da)」는 「~에서 온」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전치사입니다. 앞 세기에 이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었기에 그를 출신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화가의 생애 전체는 카라바조는 누구인가에서 따로 다뤘고, 이 글은 이 그림 한 점을 봅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13년의 기록

이 그림이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확인되는 해는 1613년입니다. 그해 추기경 시피오네 보르게세는 가구 장인 안니발레 두란테에게 액자 여러 개의 제작비를 치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의 액자였습니다. 기록된 크기 「높이 5팜, 너비 4팜」은 지금의 그림과 대략 맞습니다. 같은 해 시인 시피오네 프란쿠치가 핀차나 문 곁의 보르게세 별장에서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시피오네는 교황 바오로 5세의 조카였습니다. 17세기 전기 작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에 따르면 시피오네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해 그를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데려갔고, 교황은 앉은 모습으로 카라바조에게 초상을 그리게 한 뒤 후하게 보상했다고 합니다.

그 뒤 그림은 보르게세 가문의 1693년과 1790년 소장품 목록, 1833년 가문 재산 목록을 거쳐 1902년 이탈리아 국가가 사들였습니다. 지금은 보르게세 미술관 8실, 실레노스의 방에 걸려 있고, 잎과 석류와 아칸서스 덩굴무늬로 장식한 17세기 액자에 들어 있습니다. 같은 방에는 카라바조가 로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595년 무렵 그린 〈병든 바쿠스〉도 걸려 있습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화가가 로마의 콘솔라치오네 병원에 입원했던 일과 이어 보는 자화상일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한 방에서 젊은 날의 카라바조와, 도피 시절 잘린 머리에 그려 넣은 카라바조의 얼굴을 함께 볼 수 있는 셈입니다.

카라바조의 도피와 두 개의 제작 연대

카라바조는 1606년 5월 28일 밤 테니스 시합 뒤에 벌어진 다툼에서 라누초 토마소니를 찔러 죽였습니다. 동시대 전기 작가 조반니 발리오네는 카라바조가 쓰러진 토마소니의 넓적다리를 찔렀다고 적었고, 그날 밤 시신을 살핀 외과의의 보고서를 다시 읽은 연구자들은 사타구니의 대퇴동맥이 끊겨 피를 많이 흘려 숨진 것으로 봅니다. 오랫동안 내기 시합을 둘러싼 시비로 전해졌지만, 미술사학자 앤드루 그레이엄딕슨은 두 사람이 로마의 매춘부 필리데 멜란드로니를 두고 다퉜고 싸움의 원인이 성적인 모욕이었을 수 있다고 보며, 미술사학자 마우리치오 마리니는 테니스 시합이 결투의 원인이 아니라 구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살인 혐의로 로마를 떠나 콜론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먼저 팔리아노로, 이어 나폴리로 피했습니다. 그해 그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 뒤로 몰타와 시칠리아를 거쳐 1609년 가을 다시 나폴리에 닿았습니다. 그해 10월에는 나폴리의 한 여관 앞에서 습격을 받아 얼굴을 크게 다쳤습니다.

그는 로마 시절에도 칼부림과 폭행으로 여러 차례 붙잡혔고, 몰타에서는 1608년 7월 성 요한 기사단의 은총 기사가 되었지만, 곧 지체 높은 기사와 다툰 끝에 갇혔고, 그 감옥을 밤중에 빠져나와 시칠리아로 달아났다고 전합니다.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와 메시나에서 제단화를 그렸고 팔레르모에도 들렀다고 전하는데, 이 무렵 그는 무기를 곁에 두고 잠들고, 조금만 비판을 들어도 그림을 찢었을 만큼 마음이 거칠어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이 이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 그려졌는지는 지금도 갈립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이 적는 제작 연대는 「1606~07년 또는 1609~10년」입니다. 17세기의 전기 작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가 시피오네가 이 그림을 직접 주문했다고 쓴 것을 근거로 로마 시절 끝인 1605~06년에 두는 학자들이 있었고,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가 두 번째 나폴리 체류기인 1609년으로 옮긴 뒤로는 그쪽을 따르는 학자가 많아졌습니다. 보르게세 카탈로그는 오늘날 대다수 학자가 두 번째 나폴리 체류기를 확신한다고 적습니다.

그러나 카탈로그를 쓴 안토니오 이오멜리는 그 문제를 열어 두자고 합니다. 2016년의 진단 조사에서 캔버스에 긁어 새긴 자국 여러 개와, 카라바조가 1606~07년에 그린 그림들과 비슷한 밑작업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종이에 그린 밑그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붓 손잡이 끝으로 캔버스에 직접 윤곽을 긁어 표시한 뒤 곧바로 물감을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차례의 복원으로 물감 층이 얇아지고 닳아 표면만 보고 제작 시기를 늦춰 잡게 되었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듭니다.

카라바조의 빛, 막사 입구에 선 다윗

배경은 거의 검은색이고, 빛은 왼쪽 위에서 들어와 다윗의 얼굴과 드러난 가슴, 뻗은 왼팔, 그리고 골리앗의 얼굴에 떨어집니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입체를 만드는 명암법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화가들도 이런 효과를 썼다는 흔적이 있고, 유럽 회화에서는 15세기 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끝까지 끌어냈다고 평가됩니다. 카라바조는 이것을 훨씬 극단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배경 대부분을 어둠으로 채우고 인물만 강한 빛 아래 세우는 카라바조의 이런 명암 처리를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어둠을 뜻하는 라틴어 테네브라이(tenebrae)에서 나왔습니다. 다윗의 흰 셔츠는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렸고, 오른손에 쥔 칼은 화면 왼쪽 아래에서 비스듬히 빛을 받습니다.

그림의 장면은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에서 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오래 맞서 싸운 민족으로, 「사사기」의 삼손 이야기에서도 이스라엘의 적으로 나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나온 장수 골리앗은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었다고 성경은 적습니다. 양을 치던 소년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싸움터에 나간 형들에게 볶은 곡식과 빵을 가져다주러 왔다가 이 싸움에 나섰습니다. 사울 왕이 입혀 준 갑옷과 투구는 익숙하지 않다며 벗었고, 막대기와 시냇가에서 고른 매끄러운 돌 다섯 개, 그리고 물매만 들고 나갔습니다. 골리앗은 막대기를 든 소년을 보고 자기를 개로 여기느냐며 비웃었습니다(17장 43절). 다윗이 던진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고, 다윗은 쓰러진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 목을 베었습니다(17장 49~51절).

이 장면을 두고 미술사학자 마우리치오 마리니는 사무엘상 17장 57절로 읽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자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데려갔는데, 그의 손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는 대목입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그림은 다윗이 사울의 막사 입구에 서서 그 머리를 내보이는 순간이고, 화면 왼쪽 위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비스듬한 선들이 막사라는 것입니다. 보르게세 카탈로그는 또 다윗이 팔을 뻗은 동작이 고대 조각 〈아폭시오메노스〉에서 온 것이고,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카라바조의 〈살로메〉에서 처형인이 하는 동작과 같다고 적습니다. 마리니는 이 동작을 영웅답지 않은 몸짓으로 보았습니다.

카라바조 다윗과 골리앗, 두 얼굴에 담긴 자화상

골리앗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이라는 말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보르게세 카탈로그에 따르면 1650년 보르게세 별장의 소장품을 기록한 야코모 마닐리입니다. 마닐리는 카라바조가 거인의 얼굴에 「자기 자신을 그리고자 했다」고 썼습니다. 1672년 벨로리도 화가 열전에서 다윗이 머리채를 쥔 골리앗의 머리가 「그 자신의 초상」이라고 적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생김새는 그를 직접 알았던 화가 오타비오 레오니가 1621년 무렵 그린 초상 소묘로 전해지는데, 피렌체 마루첼리아나 도서관에 있는 이 소묘를 골리앗의 얼굴과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 골리앗은 이마에 상처를 입었고, 두 눈은 반쯤 뜬 채 초점이 어긋나 있으며, 입은 벌어져 윗니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마의 상처는 다윗이 던진 돌이 박힌 자리이고, 잘린 목 아래로는 아직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얼굴에 대해 마닐리가 남긴 말은 「그의 카라바지노」, 곧 작은 카라바조였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이름을 화가 토마소 도니니, 마오 살리니, 체코 델 카라바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각기 풀이해 왔고, 누구인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미술관이 소장한 카라바조의 〈세례 요한〉과 같은 모델이 다윗으로 등장한다는 지적도 있고, 마리니는 이 청년이 카라바조와 같은 롬바르디아의 마을 카라바조 출신으로 나폴리에서 화가와 가까이 지냈다고 보았습니다. 다윗은 처음 기록부터 화가 자신이 아니라 곁에 있던 다른 사람으로 적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흔히 화가가 두 번 등장하는 그림으로 읽힙니다. 이것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1974년 헤르바르트 뢰트겐은 이 그림을 벌을 내리는 도덕인 다윗과 벌을 청하는 죄인 골리앗 사이의 갈등으로 풀었고, 뒤에 그림을 사면을 청하는 선물로 보는 가설이 나오자 1989년 미술사학자 세르조 로시는 화가가 희생자와 처형자의 모습으로 두 번 그려졌다고 보았습니다. 보르게세 카탈로그는 사면 가설과 그 위에 선 이 심리적 읽기를 묶어 지금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라고 적으면서, 크리스토프 프롬멜의 동성애적 해석처럼 이와 맞서는 견해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다윗이 쥔 칼날에 적힌 H.AS O S 글자 부분 확대

다윗의 칼날에 적힌 글자. 보르게세 미술관은 「H.AS O S」로 옮겨 적습니다.

다윗의 칼날에 적힌 문구

다윗의 칼날에는 「H.AS O S」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1987년 마우리치오 마리니가, 이어 1989년 세르조 로시와 1990년 마우리치오 칼베시가 이것을 라틴어 「H[umilit]AS O[ccidit] S[uperbiam]」, 곧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의 약자로 읽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소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144편(라틴어 불가타 성경으로는 143편)을 풀이하며 이 시를 골리앗과 맞선 다윗의 노래로 읽었고, 다윗이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벤 일을 그리스도가 악마를 악마 자신의 무기로 이긴 일에 견주었습니다. 이 읽기가 맞다면 칼날의 글자는 교만을 벤 겸손, 곧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뜻을 한 줄로 적은 것이 됩니다. 1983년 하워드 히버드는 칼베시가 먼저 내놓은 해석을 이어받아, 성경 전통과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한 대로 다윗을 그리스도와 겹쳐 읽었습니다.

다른 읽기도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1958년 바그너는 이 글자를 화가의 서명인 「M. A. C. O.」, 곧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읽었고, 1964년 맥레이는 실제 칼에 찍혀 있던 제작자의 표식을 카라바조가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칼날 위의 글자 하나를 두고도 참회의 문구, 서명, 칼 장인의 표식이라는 세 가지 읽기가 맞서 있는 것입니다. 다만 보르게세 미술관이 작품 소개문에서 이 글자를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로 풀어 적듯, 오늘날 이 그림을 소개할 때 가장 널리 쓰이는 읽기는 첫 번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사면을 향한 항해와 죽음

이 그림이 교황 바오로 5세의 사면을 얻으려고 시피오네 보르게세에게 보낸 선물이었다는 해석은 1985년 마우리치오 칼베시가 처음 내놓았습니다. 잘린 머리에 화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청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설은 앞에서 본 심리적 읽기와 함께 지금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이지만, 이를 직접 증명하는 문서는 없고 회개를 적은 카라바조 자신의 편지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벨로리가 쓴 대로 시피오네가 직접 주문한 그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는데, 두 설명 모두 문서로 증명되지는 않았습니다. 보르게세 카탈로그는 제작 연대를 1606~07년으로 앞당겨도 이 해석은 성립한다고 봅니다. 사형 선고는 이미 1606년에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1610년 이 그림이 나폴리에 있었다는 것은 보르게세 카탈로그가 거의 의심할 수 없다고 보는 대목입니다. 그해 나폴리 부왕 레모스 백작이 화가 발다사레 알로이세, 곧 갈라니노에게 카라바조의 다윗을 베낀 그림 두 점을 주문한 문서가 남아 있고, 대다수 비평가는 갈라니노가 나폴리에서 그린 다윗의 원형이 이 보르게세 그림이라고 봅니다. 지금 알려진 이 그림의 복제본은 일곱 점으로, 다섯 점은 개인 소장이고 브라질 바이아의 역사박물관과 독일 카셀 회화관에 한 점씩 있습니다. 나폴리에 있던 그림이 어떤 경로로 1613년 로마의 시피오네에게 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카라바조가 1610년 7월 로마로 가는 배에 실은 그림들 가운데 이 그림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카세르타의 주교 디오다토 젠틸레의 편지에 따르면 카라바조는 여러 점의 그림을 가지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 항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르게세 카탈로그는 카라바조가 로마 북쪽의 팔로에서 여정을 멈추고 그림들과 떨어지게 된 사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팔로에서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붙잡혔고, 며칠 뒤 풀려났을 때 배는 그의 짐을 실은 채 나폴리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그는 해안을 따라 포르토 에르콜레까지 갔고, 1610년 7월 18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브리태니커는 18일 또는 19일로 적습니다). 서른여덟 살이었습니다. 그는 포르토 에르콜레의 작은 산세바스티아노 교회 묘지에, 다른 이백여 명과 함께 묘비 없이 묻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오랫동안 바닷가에서 말라리아로 쓰러졌다는 설, 매독 때문이라는 설, 원수에게 살해되었다는 설이 함께 떠돌았습니다. 동시대 전기 작가 발리오네는 그가 바닷가의 한 마을에 이르러 악성 열병으로 자리에 누웠고, 며칠 뒤 돌보는 사람 없이 숨졌다고 적었습니다. 2009년 포르토 에르콜레의 한 교회 납골당에서 카라바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수습되었고, 2010년 연구팀은 일 년에 걸친 탄소 연대 측정과 DNA 분석을 거쳐 이 유골이 카라바조일 가능성을 85퍼센트로 추정한다고 밝혔습니다. 유골에서는 높은 농도의 납이 검출되어, 물감을 다루며 쌓인 납 중독이 죽음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2018년 프랑스 마르세유의 연구팀은 학술지 〈랜싯 감염병〉에 이 유골의 치아 속 치수에서 황색포도상구균을 찾았다고 발표하고, 나폴리에서 입은 상처가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유골의 신원 자체가 확정된 것은 아니어서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카라바조가 밀어붙인 이 극단적인 명암은 17세기 초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통해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프랑스의 조르주 드 라 투르, 네덜란드의 헤릿 판 혼트호르스트와 헨드릭 테르브뤼헌,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 그 방식을 이어받았고, 브리태니커는 그의 작품이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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