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생애와 작품 – 카를로스 4세, 1808년 5월 3일, 검은 그림
한눈 요약
- 프란시스코 고야는 벨라스케스 이후 침체되었던 스페인 회화를 되살리고, 낭만주의와 표현주의의 씨앗을 뿌린 화가입니다.
- 궁정 화가 시절에는 카를로스 4세 왕실 초상화와 마하 연작을 통해 권력과 미를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 청력 상실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로스 카프리초스》, 《1808년 5월 3일》, 검은 그림 연작으로 인간 내면과 시대의 폭력을 기록했습니다.
- 이 글에서는 고야의 생애, 대표작 해설, 전쟁과 검은 그림, 그리고 연대기까지 한 번에 정리해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서 그의 위치를 살펴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화가는 스페인의 어둠과 빛,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연을 온몸으로 겪어낸 천재, 프란시스코 고야 이 루시엔테스(Francisco Goya)입니다.
화려한 궁정 화가였던 그는 왜 말년에 이르러 자식을 잡아먹는 괴물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고야는 후기 로코코의 우아함부터 시작해, 낭만주의의 심오한 절망과 20세기 표현주의의 씨앗까지 뿌린 예술적 혁명가로 불립니다.
고야의 생애를 통해 프라도 미술관의 걸작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해보겠습니다.
1. 프란시스코 고야의 생애: 궁정으로의 도약과 성공을 향한 야망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지방 푸엔데토도스에서 금속 도금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최고의 화가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출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인연을 맺어두려 했을 정도의 야심가였습니다.
초기에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 선발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고, 첫 번째 시험에서는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꼴찌 판정을 받기도 했지만, 궁정 화가였던 바이에우의 여동생과 결혼한 후 당대 최고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Mengs)를 만나며 인생의 전기를 맞습니다.
고야는 왕실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밑그림(카르톤)을 그리는 작업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으며,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후 1799년에는 화가로서의 최고 영예인 수석 궁정 화가(Primer Pintor de Cámara)로 임명되며 예술적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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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코 고야 자화상 안경을 쓴 모습,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
2. 고야의 대표작과 회화 세계: 왕실 초상화, 마하 연작, 권력 비판
수석 궁정 화가가 된 후 고야는 스페인 궁정 미술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담아냈습니다.
왕실 초상화와 풍자의 미학
고야의 궁정 화가로서의 능력이 정점에 달한 작품은 1800년부터 1801년 사이에 완성된 《카를로스 4세 가족》입니다.
- 배치와 권력의 암시: 이 대형 집단 초상화에는 14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고야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1년이라는 긴 제작 기간을 거쳤습니다. 고야는 왕실 가족들의 화려한 옷과 보석, 권위의 상징들을 밝은 빛을 활용하여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의 가운데에 왕비를 배치하고 국왕 카를로스 4세를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하여, 당시 스페인의 실질적인 통치가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그녀의 재상(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던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있었다는 점을 암시했습니다.
- 인물들의 표정: 인물들은 개별적으로 포즈를 취했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멍하거나 (ausente) 둔하고 우매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왕실 가족들에게 외형적으로는 만족을 주었으나, 그 이면에는 무능하고 부패한 내면을 엿볼 수 있도록 표현하여 고야의 비판 의식과 풍자가 교묘하게 감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초상화는 현재 프라도 미술관 32번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마하 연작의 기술적 혁신
《벌거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같은 누드화 및 초상화에서 고야의 기술적 숙련도가 두드러집니다.
- 용어의 의미: '마하(Maja)'는 당시 멋쟁이 젊은 여인을 뜻하는 말이며, 20대의 젊은 남녀를 지칭하는 사전적 의미를 가집니다.
- 회화 기법: 고야는 이 작품들에서 흰색 안료의 사용에 독특한 혁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흰색 안료(어두운, 중간, 밝은, 순수한 진한 흰색)를 단계적으로 덧칠 (글레이징 효과와 유사한 방식으로)하여, 멀리서 볼수록 빛을 반사해 그림이 반짝거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인물이 햇볕 아래 서 있는 것처럼 눈부신 효과를 연출하며, 후대의 인상주의보다 앞선 선구적인 실험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 작품들은 현재 프라도 미술관 38번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3. 청력 상실 이후의 전환: 로스 카프리초스, 전쟁, 검은 그림
고야의 생애와 예술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은 1793년 중병을 앓은 후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개인적인 비극은 고야를 외부의 영광을 쫓는 궁정 화가에서, 내면의 고통과 심연을 탐구하는 주관적인 예술가로 전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성의 잠과 전쟁의 참혹함
청력 상실 이후 고야는 이성적 질서와 계몽주의의 이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자, 고야는 계몽주의가 침략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고야의 비판 의식은 판화 연작인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1799년 발행)에서 폭발적으로 표출됩니다. 이 판화집은 스페인 사회의 관습, 미신, 귀족과 성직자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이성의 잠이 괴물을 낳는다》는 이성(理性)과 무의식(無意識)이 공조해야 한다는 그의 예술적 신조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스페인 독립 전쟁의 충격 속에서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1814년)를 그렸습니다.
- 역사적 증언: 이 작품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마드리드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처형된 사건을 기록했으며, 고야를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합니다. 고야는 전쟁의 비극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저널리즘적이고 윤리적인 예술의 선구적 형태를 확립했습니다.
- 구성: 고야는 처형되는 희생자들(흰옷을 입고 두 팔을 벌린 중앙 인물)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처럼 영웅화하는 동시에, 처형을 집행하는 프랑스 군인들을 뒷모습의 익명적이고 기계적인 살인자로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조적인 구도는 후대에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프라도 미술관 64번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검은 그림의 내면적 공포
1819년, 73세의 고야는 마드리드 외곽의 집, '귀머거리의 집(La Quinta del Sordo)'에 은둔했습니다. 그는 이 집의 벽에 14점의 유화 벽화, 즉 《검은 그림(Black Paintings)》 연작을 직접 그렸습니다.
- 주제와 색채: 이 그림들은 광기, 폭력성, 잔혹함 등 인간의 악한 본성을 검은색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으며, 마녀, 악마, 미신, 종교재판 등의 암울하고 기괴한 주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검은색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모두 흡수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고야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심리 상태: 이 연작은 고야가 다시 앓은 중병에 대한 죽음의 공포, 노년과 동반자의 젊음 사이의 갈등, 그리고 스페인 정국에 대한 회한과 체념 등으로 뒤섞인 그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대표작인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이 연작 중 가장 크고 유명한 작품이며, 권력의 세계를 풍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 기술적 역사: 이 벽화들은 캔버스가 아닌 벽에 유화로 직접 그려졌기 때문에, 1874년부터 1878년 사이 복원가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쿠벨스에 의해 캔버스로 옮겨지는(transfer)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며, 1889년부터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4. 프란시스코 고야 대표작 연대기
고야의 초기 태피스트리 밑그림부터 만년의 격정적인 벽화까지, 그의 예술적 궤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했습니다.
| 시기 | 작품명 (원제 및 종류) | 특징 및 의의 |
|---|---|---|
| 1771년 | 《처음으로 알프스에서 이탈리아를 바라보는 승리한 한니발》 | 로마 유학 중 아카데미 공모전에 제출한 역사화로, 젊은 고야의 야망과 고전주의적 구성을 보여주는 초기 대표작. |
| 1777년 | 《파라솔(日傘)》 (El Quitasol) | 초기 궁정 화가 시절의 태피스트리 밑그림으로, 로코코 양식과 밝은 색채, 스페인 일상 풍경이 조화를 이룬 작품 |
| 1784년 | 《돈 루이스 데 보르본 친왕의 가족》 | 《카를로스 4세 가족》에 선행하는 대규모 집단 초상화로, 왕족 인물 배치와 심리 표현 실험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 |
| 1793–1794년 | 《정신병원 안뜰》 (Yard with Lunatics) | 청력 상실 이후 제작된 초기 심리적 회화로, 사회적 주변부와 인간 내면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 선구적 작품 |
| 1799년 |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판화 연작) | 에칭과 애쿼틴트 기법을 활용한 판화집으로, 미신과 귀족·성직자의 타락을 풍자한 계몽 비판 시리즈 |
| 1800–1801년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La familia de Carlos IV) | 수석 궁정 화가 시절의 걸작 왕실 초상화로, 화려한 외양 속에 권력 구조와 풍자를 숨긴 대표작으로 프라도 미술관 에 소장되어 있음 |
| 1800–1805년 | 《마하 연작》 (벌거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 스페인 최초의 본격 누드화로 여겨지는 작품들로, 흰색 안료의 층을 활용한 빛 표현과 감각적인 인물 묘사가 돋보이는 대표 초상화 |
| 1814년 |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시민 학살을 다룬 역사화의 정점으로, 민중의 고통과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시각화한 전쟁 회화의 이정표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음 |
| 1819–1823년 | 《검은 그림(Black Paintings)》 (벽화 연작) | 마드리드 외곽 '귀머거리의 집'에 직접 그린 벽화 연작으로, 인간 존재의 광기와 공포, 죽음의 그림자를 표현한 고야 만년 양식의 결정판 |
| 1827년 | 《보르도의 우유 짜는 여인》 (La lechera de Burdeos) | 프랑스 망명지 보르도에서 제작된 후기 작품으로, 부드러운 색채와 밝은 분위기 속에 노년의 평온과 새로운 실험 정신이 공존 |
5. 에필로그: 시대를 초월한 영향력과 현대 미술의 선구자
고야는 무려 1,870점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현실을 풍자한 작품만도 900점에 이릅니다. 그는 당대의 역사적 격변과 개인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야는 모방이라는 신조를 거부하고, 학문적 지식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특수한 지식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가장 진보적인 예술 신조는 "모든 예술가는 공통된 규범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창작의 자유를 우선시한 것입니다.
- 현대 예술의 맹아: 고야는 이성과 무의식을 공조시켰고, 작품을 통해 관람자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고 '제시'하는 데 만족했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주관적인 표현 방식은 19세기 낭만주의, 사실주의는 물론, 20세기 표현주의 예술 경향의 씨앗을 뿌린 현대 예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합니다.
- 후대의 찬사: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가장 이상적인 양식이란 "미켈란젤로의 예술과 고야의 예술의 결합일 것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지혜의 교훈을 담고 있으며, 우리가 살기를 희망하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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