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The Duke and Duchess of Urbino)
• 작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7~1492)
• 제작: 1473~75년경(우피치 표기, 더 이른 제작설도 있음)
• 재료: 목판에 유채
• 크기: 각 패널 47×33cm(딥티크)
• 소장: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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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1473~75년경, 목판에 유채, 각 47×33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인벤토리 1890 nn. 1615, 3342. 페데리코의 콧대가 움푹 꺾인 자리와 두 사람 피부색의 차이를 보십시오. |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은 두 폭의 패널에 부부의 옆얼굴을 마주 보게 그린 이중 초상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7~1492)는 우르비노의 궁정화가는 아니었지만, 우피치 미술관의 설명대로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궁정을 여러 차례 찾은 손님이었습니다. 우피치는 그 궁정이 짧은 기간에 이탈리아의 주요 문화·예술 중심지가 되었다고 적습니다. 트레카니 백과는 피에로가 1460년 이후 우르비노 궁정과 긴밀히 이어져 있었다고 적습니다. 이 그림은 페데리코의 주문으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트레카니의 인명사전은 이 초상을 페데리코가 스스로를 보여 주고 싶었던 모습으로 읽습니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해설, 앞뒤로 그린 딥티크
이 작품은 두 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두 폭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딥티크(diptych)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향수 브랜드로 익숙한 이름이지만 원래는 미술 용어입니다.
두 패널은 지금 현대에 만든 금빛 액자에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패널 뒷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피치는 이 뒷면 그림을 근거로 두 패널이 원래부터 한 쌍의 딥티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원래는 두 패널을 경첩으로 이어 책처럼 접을 수 있었고, 접으면 바깥으로 뒷면 그림만 보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면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뒷면에서 두 사람의 개선 행렬을 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피치에서는 이 그림을 벽에 걸지 않고, 관람객이 앞뒷면을 함께 볼 수 있게 진열장에 세워 전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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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면. 지금의 금빛 액자는 현대에 만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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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면. 두 사람이 각자의 개선 마차를 타고 있습니다. |
재료는 목판에 유채입니다. 소장처 우피치는 유채로 적지만, 템페라로 소개하는 자료도 있습니다. 피에로는 1439년 피렌체에서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와 함께 벽화를 그리며 색과 빛 다루는 법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피치는 피에로가 피렌체에서 익힌 엄격한 원근법과, 플랑드르 회화 특유의 세밀한 자연 묘사를 이 그림에서 하나로 합쳤다고 설명합니다. 트레카니 백과에 따르면 피에로는 1450년 무렵 플랑드르 그림을 높이 치던 페라라 궁정에 머물렀고, 같은 무렵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그림도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티스타의 목걸이 진주 한 알 한 알과 배경의 강물에 떠 있는 작은 배들이 그 세밀함을 보여 줍니다.
제작 연대는 한 가지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피치는 1473~75년경으로 적습니다. 반면 옛 피렌체 주립미술관의 카탈로그는 두 그림이 1465년까지 그려졌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해 우르비노에 머물던 문인 페라보가 시에서 공작의 초상을 언급했다는 것이 근거인데, 이 시는 1905년에야 학계에 알려졌습니다. 다만 시 속의 초상이 이 그림이라는 것은 추론입니다. 두 패널을 같은 때 함께 그렸는지, 시차를 두고 짝을 맞췄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우르비노 공작은 왜 왼쪽을 바라볼까
앞면에는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1422~1482)와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1446~1472)가 있습니다. 바티스타는 왼쪽 패널에서 오른쪽을, 페데리코는 오른쪽 패널에서 왼쪽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페데리코의 왼쪽 얼굴만 보게 됩니다. 페데리코는 붉은 모자와 붉은 윗옷을 입었고, 바티스타는 진주 목걸이와 보석 머리 장식에 수놓은 소매 차림입니다. 뒤의 풍경은 우피치의 설명대로 두 사람이 다스린 마르케 지방의 땅이고, 인물에 비해 아주 멀고 작게 펼쳐져 있습니다. 지평선이 두 사람의 턱 아래로 낮게 깔려 있어, 인물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솟고 땅은 내려다보는 풍경이 됩니다. 먼 산일수록 푸르고 흐리게 칠해 거리를 나타냈는데, 이런 대기원근법은 플랑드르 풍경화에서 배운 것으로 풀이됩니다.
옆모습 자체는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우피치는 고대 주화의 도안에서 온 14세기의 옆모습 초상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옆모습은 얼굴의 닮음과 세부를 충실히 전하면서도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각도라, 두 사람은 어떤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마주 서 있습니다. 우피치는 페데리코의 구릿빛 피부와 바티스타의 창백한 피부가 이루는 대비도 짚습니다. 이런 옆모습 초상은 대개 오른쪽을 바라보게 그리는데, 이 그림의 페데리코는 아내를 향해 왼쪽을 보고 있다고 미술사학자들은 짚습니다.
우르비노 공작, 창끝이 남긴 얼굴
그런데 페데리코가 왼쪽 얼굴을 보이는 데는 전통 말고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인명사전 트레카니에 따르면 그는 1451년 봄, 떠나는 길을 기념하려던 마상 시합을 앞두고 연습하다가 상대의 창이 투구 면갑을 뚫고 들어와 오른쪽 눈과 콧대 윗부분을 잃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였고 몇 달 동안 자리에 누워 지냈습니다. 인명사전은 초상화들이 옆모습을 써서 이 상처를 비껴갔고, 피에로의 초상도 오른쪽 눈이 없는 것을 가리려고 왼쪽에서 본 옆모습으로 그렸다고 적습니다. 도판에서도 콧대 윗부분이 움푹 꺾여 들어간 자리가 보입니다.
그가 시야를 넓히려고 스스로 콧대를 베어 냈다는 이야기도 돌지만, 인명사전에는 창에 맞아 콧대를 잃었다는 기록만 있고 그런 수술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확인된 부상까지만 적습니다.
피에로는 상처를 감추면서도 얼굴을 미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뺨과 턱의 사마귀와 점, 늘어진 턱살이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인명사전은 이 초상 속 페데리코가 군 지휘관의 표지도 군주의 표지도 없는 인문주의자의 옷을 입고 있다고 봅니다. 용병대장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학식 있는 군주로 보이기를 택한 셈입니다.
페데리코는 1444년 이복형 오단토니오가 살해된 뒤 스물두 살에 우르비노를 이어받았습니다. 트레카니의 인명사전은 그때의 우르비노를 땅을 잃고 말라테스타 가문과 맞서느라 재정이 바닥난 작은 백작령으로 적습니다.
우르비노 공작 부인, 이미 세상에 없는 아내
첫 아내 젠틸레 브란칼레오니를 잃은 페데리코는 1459년 11월 페사로에서 혼약을 맺고 1460년 2월 8일, 페사로의 영주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딸로 당시 열네 살이던 바티스타와 결혼했습니다(트레카니의 페데리코 항목은 열세 살로 적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여섯 태어났고, 1472년 1월 24일 구비오에서 기다리던 아들 귀도발도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바티스타는 그해 7월 같은 구비오에서 스물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트레카니의 바티스타 항목은 7월 6일, 페데리코 항목은 7월 7일에 스물다섯으로 적습니다). 트레카니의 페데리코 항목은 잇단 임신과 힘든 출산으로 몸이 다했다고 적고, 바티스타 항목은 영지를 돌아보던 길에 구비오에서 병을 얻었는데 폐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습니다. 페데리코 항목은 또 그가 이후 재혼을 권하는 말에 다시는 아내를 들이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트레카니의 인명사전에 따르면 바티스타는 결혼 직후부터 남편이 원정을 떠날 때마다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1468년에는 우르비노 몬테 디 피에타(서민 금융 기관) 설립 문서에 직접 서명했습니다. 어려서 밀라노의 큰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궁정에서 사촌들과 함께 자란 그녀는 1458년 무렵 페사로의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에 힘썼고, 이소크라테스 연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긴 번역이 그녀의 것으로 전합니다. 당대의 글들은 그녀의 정치적 수완을 높이 샀고, 남편과 나라 일을 함께 의논한 동반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피치 연대대로라면 이 그림은 바티스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페데리코가 먼저 떠난 아내를 기리려고 그리게 한 추모 초상으로 보는 해설이 많습니다. 우피치는 바티스타의 창백한 피부가 르네상스 시대 미의 관례를 따른 것이면서, 1472년에 요절한 공작부인의 죽음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뒷면에서 보게 될 그녀의 명문이 과거형으로 시작한다는 점도 사후에 그려졌다는 근거로 거론됩니다.
바티스타의 이마는 넓게 드러나 있고, 머리는 땋아서 귀 뒤에 둥글게 감아 올린 뒤 흰 천과 끈, 보석 장식으로 감쌌습니다. 넓게 드러낸 이마는 이 시기 여성 초상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입니다. 높은 이마가 아름답다고 여겨져, 여성들이 이마 선의 머리털을 뽑아 이마를 넓혔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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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면 전체. 왼쪽 패널이 페데리코, 오른쪽 패널이 바티스타의 개선식입니다. |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뒷면의 개선식
뒷면에서는 두 사람이 각자 고대 로마의 개선 장군처럼 마차를 타고 서로를 향해 나아갑니다. 앞면에서는 바티스타가 왼쪽, 페데리코가 오른쪽에 있지만, 뒷면에서는 자리가 바뀌어 페데리코가 왼쪽, 바티스타가 오른쪽에 있습니다. 패널을 뒤집으면 좌우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피치의 설명대로 기독교의 덕목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마차에 함께 타고, 아래의 라틴어 명문이 두 사람의 도덕적 가치를 기립니다.
왼쪽 패널의 페데리코는 갑옷 차림으로 백마가 끄는 마차 위 의자에 앉아 있고, 뒤에서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웁니다. 흔히 월계관으로 풀이되는 관입니다. 마차 앞쪽에 앉은 네 여인은 흔히 정의, 신중함, 꿋꿋함, 절제의 네 덕목으로 풀이됩니다. 그중 정면을 보고 앉은 여인은 칼과 저울을 들고 있어 정의로 읽히고, 부러진 기둥을 든 여인은 꿋꿋함, 거울을 든 여인은 신중함, 등을 보이고 앉은 여인은 절제로 풀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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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데리코의 개선식. 백마가 끌고, 뒤에서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관을 씌웁니다. |
오른쪽 패널의 바티스타는 두 마리 유니콘이 끄는 마차에 앉아 흔히 기도서로 보는 책을 펼쳐 읽고 있습니다. 유니콘은 중세부터 순결의 상징으로 여겨진 동물입니다. 두 마차 모두 앞자리에는 날개 달린 작은 아이, 곧 아모리노가 서서 말과 유니콘을 몰고 있습니다. 함께 탄 여인들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기독교 덕목으로 풀이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성배와 성체를 들고 있어 믿음으로, 무릎에 펠리컨을 올린 여인은 사랑으로 읽힙니다. 그중 한 여인이 든 펠리컨은 제 가슴을 쪼아 낸 피로 새끼를 먹인다는 옛 이야기 때문에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표지로 쓰였습니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이 이야기를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에 견주어 읽기도 했습니다. 남편 쪽에는 통치자의 덕목이, 아내 쪽에는 신앙의 덕목이 놓여 두 사람이 서로를 채운다고 풀이하는 해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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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스타의 개선식. 뿔 달린 유니콘이 끌고, 아래 명문은 과거형으로 시작합니다. |
명문은 도판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페데리코 쪽은 「CLARVS INSIGNI VEHITVR TRIVMPHO」로 시작하는데, 대략 「이름난 그가 빛나는 개선 행렬 속에 실려 가니, 홀을 알맞게 쥔 그를 가장 뛰어난 장수들과 견줄 만하다고 덕의 영원한 명성이 기린다」는 뜻입니다. 바티스타 쪽은 「QVE MODVM REBVS TENVIT SECVNDIS」로 시작해, 대략 「순탄할 때에도 절도를 지켰던 그녀는, 위대한 남편의 공적을 기리는 찬사로 빛나 모든 사람의 입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뜻입니다. 「지켰던」에 해당하는 동사 TENVIT가 과거형입니다.
앞면의 두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지만, 뒷면은 행렬과 덕목과 찬사로 두 사람을 공개적으로 기립니다. 한쪽은 닮음을, 다른 쪽은 명성을 맡은 셈입니다. 바티스타의 명문마저 그녀를 남편의 공적으로 빛나는 사람으로 기린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페데리코는 우르비노 궁전 위층에 나무 상감으로 꾸민 작은 서재 스투디올로를 두었는데, 트레카니의 인명사전은 이를 초기 르네상스에서 가장 우아한 서재로 꼽습니다. 책은 궁전 아래층의 따로 마련한 도서관에 모았고, 그 목록은 엄청난 분량이었다고 트레카니는 적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장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필사본들은 1657년 통째로 로마로 옮겨져 바티칸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페데리코는 구비오 궁전에도 같은 방식의 서재를 하나 더 꾸몄는데, 이 방은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피에로도 원근법 논문 〈회화의 원근법에 대하여〉(De prospectiva pingendi)를 페데리코에게 바쳤습니다.
공작이 아니었던 공작부인
이 그림에는 흥미로운 반전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제목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은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이름이 아닙니다. 트레카니의 인명사전에 따르면 페데리코가 공작 칭호를 얻은 것은 1474년 3월이고, 그해 8월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그 칭호를 공식으로 수여했습니다. 바티스타는 그보다 앞선 147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공작부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제목은 그림이 그려지고 한참 뒤에 굳어진 관용적인 이름입니다. 그림 속 두 사람의 지위를 정확히 반영하지는 않지만, 페데리코가 곧 오르게 될 자리와 그 곁에 있어야 했던 사람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 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