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의 창가의 여인, 뒷모습에 담긴 고독과 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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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 전시에 작은 그림이 한 점 걸렸습니다. 나무 마루와 어두운 벽, 높은 창, 그리고 창가에 선 여인의 뒷모습이 전부인 그림입니다. 그해 빈의 한 미술 잡지는 이 그림을 두고 화가의 작업실을 특유의 단순함으로 그린 작은 그림인데, 프리드리히가 또다시 사람을 하필 뒤에서 그리는 버릇을 따르지만 않았다면 참되고 보기 좋은 그림이 되었을 것이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이 평은 잡지 원본이 아니라 뒷날 프리드리히 연구서에 옮겨 실린 인용으로 전해집니다. 반대로 시인 푸케는 돌아선 여인의 수수께끼에 이끌려 소네트를 한 편 썼다고, 그림을 소장한 베를린 구국립미술관은 적고 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자기 작업실의 창을 본 그대로 그렸을까요.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열린 창을 주제로 연 전시의 도록은 아니라고 봅니다. 창은 실제보다 크게, 강 위의 배는 실제보다 가깝게 그렸다는 것입니다. 그 조정을 알고 나면 화면 속 여인이 왜 창에 비해 그렇게 작은지, 창밖 돛대가 왜 창틀 바로 너머에 서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나무 벽과 마루로 된 방에서 녹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 등을 보인 채 창턱에 기대어 서 있고, 위쪽은 십자 창살로 나뉜 유리창, 아래쪽은 가운데가 트인 나무 덧문이며 그 너머로 연둣빛 포플러와 배의 돛대가 보이는 세로로 긴 유화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창가의 여인〉, 1822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45 × 가로 32.7 cm,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A I 918. 가로세로 직선뿐인 방 한가운데 선 여인의 곡선, 그리고 위는 유리창이고 아래는 나무 덧문인 창의 두 층을 먼저 보라.

창가에 선 사람, 카롤리네

창가의 여인은 화가의 아내 카롤리네입니다. 베를린 구국립미술관은 이 그림을 카롤리네가 화가의 작업실에서 건너편 엘베 강가를 내다보는 장면이라고 설명합니다. 프리드리히는 1818년 1월, 마흔세 살에 드레스덴 태생의 스물네 살 카롤리네 봄머와 결혼했습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결혼하고 4년 뒤인 1822년에 그린 작고 사적인 그림이라고 적습니다. 그사이 1819년 8월에 첫딸 엠마가 태어났고, 1820년에 가족은 엘베 강가의 더 넓은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 그림을 그린 1822년에 이 집의 아이는 1819년에 태어난 엠마 하나였습니다.

메트 도록은 결혼 뒤로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생각에 잠긴 여성들이 옆모습이나 뒷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적습니다. 화가의 고향 그라이프스발트가 정리한 연보도 카롤리네가 그의 여러 그림에 뒷모습으로 등장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물을 등 뒤에서 그리는 방식, 곧 뤼켄피구어(Rückenfigur, 등을 보이는 인물)가 관람자에게 어떤 자리를 내주는지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글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이 글은 그 인물이 마주 선 창 쪽을 봅니다.

작업실의 창

이 방은 거실이 아니라 화가의 작업실입니다. 가족이 1820년에 옮겨 간 집은 엘베 강변 33번지(An der Elbe 33)였고, 1822년의 전시평도 창밖으로 엘베 강과 맞은편 포플러가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미술관 해설은 이 방에 살림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씁니다. 보이는 것은 넓은 마룻널 한 토막, 어두운 벽, 그리고 높은 창입니다.

그래도 작업실이라는 단서는 화면에 있습니다. 창턱 오른쪽 끝을 보면 종이 위에 작은 갈색 병 두 개가 서 있습니다. 메트 도록은 액체가 든 이 병들을 작업실의 표시로 읽습니다. 창의 생김새도 그렇습니다. 위쪽은 가는 창살이 십자로 나눈 네 칸짜리 유리창이고, 아래쪽은 나무 덧문입니다. 덧문은 양옆이 닫혀 있고 가운데만 트여 있으며, 오른쪽 한 짝이 방 안쪽으로 열려 있습니다. 도록에 따르면 이것은 보통 집에 다는 창이 아니라, 직사광을 막으려고 아래에 나무 덧문을 단 커다란 여닫이창으로, 프리드리히가 1806년 이후 따로 맞춰 만든 것입니다. 창살을 가늘게 해서 작업에 거슬리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았다고 도록은 덧붙입니다.

이 창에는 이사 이야기가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1820년까지 같은 강변의 26번지에서 살며 일했습니다. 그 옛 작업실을 동료 화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이 1811년에 그려 두었는데, 그 그림에 똑같은 창이 나옵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프리드리히가 바로 이 창을 새 작업실로 옮겨 달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같은 창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1811년 그림 속 창과 1822년 그림 속 창의 크기를 서로 견주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보다 큰 창, 실제보다 가까운 배

먼저 케르스팅의 그림을 봅니다.

초록빛 벽의 텅 빈 방에서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나무 의자에 앉아 이젤 위 캔버스에 붓을 대고 있고, 왼쪽 벽의 창은 위쪽이 십자 창살 유리, 아래쪽이 나무 덧문이며 오른쪽 창은 판자로 막혀 벽에 팔레트와 삼각자가 걸린 유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작업실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811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54 × 가로 42 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의자에 앉은 화가의 머리와 왼쪽 창 덧문의 윗선이 거의 같은 높이에 있는 것을 보라.

초록빛 벽의 빈방에서 프리드리히가 의자에 앉아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왼쪽 창을 보면 위는 십자 창살로 나뉜 유리, 아래는 나무 덧문입니다. 1822년 그림의 창과 같은 구조입니다. 오른쪽 창은 판자로 통째 막혀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과 덧문을 견주어 봅니다. 의자에 앉은 화가의 머리 꼭대기가 덧문 윗선 바로 아래에 옵니다. 메트 도록은 이 그림을 두고, 프리드리히가 의자에서 일어서면 덧문보다 넉넉히 키가 클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이제 〈창가의 여인〉으로 돌아갑니다. 카롤리네는 서 있는데도 머리가 덧문 윗선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덧문 위로는 유리창이 덧문보다 더 높이 솟아 있습니다. 메트 도록은 이 차이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프리드리히가 창을 실제 크기보다 훨씬 크게 키웠고, 그렇게 커진 창이 카롤리네를 작아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배도 자리를 옮겼습니다. 실제로는 프리드리히의 집과 엘베 강 사이에 넓은 강둑이 있었습니다. 도록은 같은 창에서 강을 정면으로 내다본 다른 화가의 그림을 근거로 들며, 프리드리히가 그 강둑을 화면에서 지우고 배를 실제로 가능했을 것보다 창 가까이 가져다 놓았다고 봅니다. 창 부분을 확대해 보면 그 결과가 보입니다.

가는 창살이 십자로 나눈 유리창 오른쪽 아래 칸에 배의 돛대 끝이 솟아 있고, 그 아래 덧문 사이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의 뒷머리와 포플러 숲, 흐릿한 먼 돛대가 보이며 창턱 오른쪽 끝에 작은 갈색 병 두 개가 놓인 확대 화면
같은 그림의 부분. 여인의 머리 오른쪽 뒤로 먼 돛대가 흐리게 서 있고, 열린 덧문 바로 옆에서 가까운 돛대가 창살 가로줄 아래까지 솟아 있다. 창턱 오른쪽 끝에는 작은 병 두 개가 있다.

창밖에는 돛대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카롤리네의 머리 오른쪽 뒤, 포플러 앞에 가늘고 흐리게 선 먼 돛대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린 덧문 바로 옆에서 굵고 또렷하게 솟아 위쪽 유리창까지 올라가는 가까운 돛대입니다. 거기 매인 줄들이 비스듬히 유리를 가로지릅니다. 이 가까운 돛대는 강 한가운데가 아니라 창틀 바로 너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메트 도록도 두 척 가운데 하나는 멀리, 다른 하나는 창 바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방 안도 다시 봅니다. 미술관 해설은 프리드리히가 이 소박한 빈방을 일관되게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짰다고 적습니다. 마룻널, 벽의 띠, 창턱, 덧문, 창틀이 모두 가로 아니면 세로로 뻗어 있습니다. 그 직선들 한가운데에 곡선으로 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빗으로 틀어 올린 둥근 머리, 가슴 아래에서 모아 늘어뜨린 드레스 주름, 발밑의 타원형 그림자가 그렇습니다. 메트 도록은 그녀를 두고 온통 부드러운 곡선이라고 썼습니다.

여기까지가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창은 사람에 비해 크고, 가까운 돛대는 창틀 바로 밖에 걸려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작업실을 일부러 바꾼 결과라는 판단은 메트 도록의 것입니다. 다만 케르스팅의 그림과 나란히 놓으면 그 차이는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그 판단이 화면에서 충분히 지지된다고 봅니다.

십자 창살과 교회 첨탑 같은 돛대

이 창에 담긴 뜻을 물을 때 대표적인 답은 기독교적인 읽기입니다. 출발점은 화면의 형태입니다. 베를린 구국립미술관의 해설은 창 윗부분을 좁은 십자로 나뉜 유리로 묘사하고, 그 안에 나타난 돛대가 교회 탑의 가느다란 끝을 닮았다고 적습니다. 확대한 도판에서도 그 모양이 그대로 보입니다. 가는 창살 두 줄이 유리 한가운데에서 십자로 만나고, 그 오른쪽 아래 칸에 돛대 끝이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습니다.

이 형태에 뜻을 붙인 사람이 프리드리히의 전작 목록(카탈로그 레조네, 한 화가의 작품 전체를 정리한 목록)을 만든 독일의 미술사학자 헬무트 뵈르슈주판입니다. 메트 도록의 정리에 따르면, 어두워진 실내와 창살의 모양, 겨우 보이는 강 같은 수수께끼 같은 요소들이 기독교적 은유의 해석을 불러냈습니다. 뵈르슈주판은 이 그림을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어두운 속박과 그 너머의 세계, 죽음, 그리고 죽음을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 읽기에서 어두운 방은 이 세상의 삶이고, 밝은 창밖은 그 너머입니다. 십자로 만나는 창살은 그 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 읽기가 이 그림에 억지로 덧씌운 것이 아닌 이유는 프리드리히라는 화가에게 있습니다. 독일 인명사전의 프리드리히 항목은 그가 풍경에 십자가, 고딕 폐허, 배와 난파선 같은 상징적 기호를 즐겨 넣었다고 적습니다. 폐허 쪽은 엘데나 수도원 폐허 글에서 한 점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화가 전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그림의 창살이 십자가를 뜻한다고 프리드리히가 직접 적어 둔 글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십자 창살과 첨탑을 닮은 돛대는 화면에서 확인되는 형태로, 그 위의 기독교적 의미는 뵈르슈주판의 해석으로 나누어 적습니다.

같은 창살과 돛대를 다르게 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메트 도록은 미술사학자 옌센이 카롤리네에게서 집과 남편에게 매인 여성이 자유와 벗어남을 바라는 모습을 읽었다고 소개합니다. 도록을 쓴 사빈 레발트 자신은 돛대 두 개가 강 위의 항해를, 은유로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은 이 창 그림이 안과 밖, 가까움과 멂을 잇는 낭만주의의 동경 모티프를 이어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글의 제목에 있는 동경이라는 말은 이 설명에 기대고 있습니다.

무게를 재 보면 이렇습니다. 화면이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앞 절의 조정, 곧 커진 창과 가까워진 배입니다. 해석은 그 위에 얹힙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적 읽기는 화면의 요소를 가장 많이 한 방향으로 묶습니다. 어두운 방과 밝은 바깥, 십자로 만나는 창살, 첨탑을 닮은 돛대가 모두 그 안에서 제자리를 얻습니다. 자유를 바라는 여성이라는 읽기는 카롤리네의 마음을 먼저 전제해야 하는데, 얼굴이 없는 뒷모습만으로는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해석이지, 화가가 남긴 설명은 아닙니다.

이 그림을 화가의 교수직 좌절과 이어 설명하는 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비정원 교수(정해진 교수 자리 밖에서 임명된 교수)가 된 것은 1824년 1월이고, 그가 바라던 풍경화 교수 자리가 빈 것은 그해 12월입니다. 둘 다 이 그림이 전시된 1822년보다 뒤의 일입니다.

창 그림의 시작

프리드리히가 창을 그린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 아닙니다. 16년쯤 앞선 1805~1806년 무렵, 그는 옛 작업실의 두 창에서 내다본 풍경을 세피아(갈색 먹물)로 한 점씩 그렸습니다. 지금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는 두 점입니다. 아래는 그 가운데 오른쪽 창입니다. 〈창가의 여인〉의 밑그림이 아니라, 16년 전 옛 작업실의 다른 창을 그린 따로 된 작품입니다.

둥근 아치 벽감 안의 높은 여닫이창이 오른쪽으로 열려 있고, 창살로 나뉜 유리 너머로 강과 건너편 집들, 포플러, 강 위의 작은 배가 보이며 창 아래쪽에 돛대와 줄이 올라와 있는 갈색 단색 그림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화가의 작업실에서 본 풍경(오른쪽 창)〉, 1805~1806년경, 종이에 세피아, 세로 31.2 × 가로 23.7 cm, 빈 벨베데레 미술관, 1849. 창가에 사람이 없고, 창 바로 아래로 돛대와 줄만 올라와 있는 것을 보라.

창 너머로 강과 건너편 집들, 포플러가 보이고, 창 바로 아래로 돛배의 돛대와 줄만 올라와 있습니다. 메트 도록은 여기서도 화가가 효과를 위해 넓은 강둑을 지워 창이 강에 바로 면한 것처럼 만들었다고 봅니다. 배를 창에 바짝 붙이는 방식은 1822년보다 16년 앞서 이미 있었던 셈입니다.

메트 도록은 이 두 세피아가 낭만주의 회화에서 열린 창이라는 모티프를 열었다고 평가합니다. 달라진 것은 창가의 사람입니다. 세피아의 창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 서는 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입니다. 1822년 그림에서 프리드리히는 그 자리를 젊은 아내 카롤리네에게 내주었습니다. 도록의 표현으로는, 세피아에서 관람자가 맡았던 창가의 인물이라는 역할이 1822년에는 카롤리네에게 돌아갔습니다. 덧붙이면 〈창가의 여인〉을 위한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남은 드로잉은 따로 있습니다. 1818년 무렵 갈색 펜이나 붓으로 뒤돌아 선 여인의 전신을 그린 것으로, 베를린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림 앞에서 견주어 볼 것

다음에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케르스팅의 그림을 옆에 두고 한 가지만 견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1811년 그림에서 의자에 앉은 프리드리히의 머리가 닿는 높이와, 1822년 그림에서 서 있는 카롤리네의 머리가 닿는 높이를 덧문에 대어 보는 것입니다. 같은 창인데 사람의 크기가 다릅니다.

제목에 있는 동경이 어디서 오는지에는 해석마다 다른 답이 나옵니다. 기독교적 읽기는 창 너머의 세계에서, 다른 읽기는 카롤리네의 처지나 강 위의 여행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그러나 메트 도록의 판단대로 창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졌다면, 그 크기는 화가가 고른 것입니다. 그림 속 창은 프리드리히가 정한 만큼 크고, 카롤리네는 그 앞에서 그만큼 작습니다. 이 화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프리드리히의 생애와 작품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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