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 앞에 처음 선 사람들은 대부분 잠시 멈칫합니다. 두 신사 발 앞 바닥에 기묘하게 늘어진 흰 형체 때문입니다. 그냥 지나치려다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그것이 사람의 해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놀라운 이유는 해골 하나가 아닙니다. 화면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유난히 많습니다. 화가의 서명과 제작 연도가 적혀 있고, 두 사람의 나이가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선반 위 물건들에는 전부 이름이 있고, 펼쳐진 책은 어느 단원인지까지 보입니다. 끊어진 악기 줄은 몇 번째 줄인지 셀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은 그 읽히는 것들을 하나씩 짚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상한 사실 하나를 함께 보려 합니다. 이만큼 정확하게 읽히는 그림인데, 왜 이 두 사람을 함께 세웠고 선반의 물건들을 누가 왜 골랐는지는 당사자들이 남긴 기록이 없습니다.
| 한스 홀바인, 〈대사들 The Ambassadors〉, 1533년, 오크 패널에 유채, 207×209.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NG1314 |
단검에 적힌 29는 무엇을 세는 숫자인가
왼쪽 남자가 쥔 단검에는 라틴어로 AET. SVAE 29, 오른쪽 남자가 팔을 얹은 책에는 AETATIS SVAE 25가 적혀 있습니다. 화면에서 직접 읽을 수 있는 숫자입니다.
이 숫자가 나이를 적은 것은 맞습니다. 다만 우리가 쓰는 만 나이와 셈법이 다릅니다. 소장처인 내셔널 갤러리는 aetatis suae 25를 「그는 자기 스물다섯째 해에 있다(he is in his 25th year)」로 옮깁니다. 스물다섯 해째를 살고 있다는 뜻이고, 다 채운 나이로는 스물넷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단검의 29는 스물아홉째 해이고 다 채운 나이로는 스물여덟이 됩니다. 실제로 내셔널 갤러리는 두 사람을 28세와 24세로 적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해설에서 이 두 사람을 29세와 25세로 소개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화면의 숫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숫자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다 채운 나이가 아닐 뿐입니다. 「몇 번째 해」를 세는 방식은 우리에게도 낯선 셈법이 아닙니다. 다만 라틴어 표기는 생일이 지날 때 한 살이 오르고 우리가 오래 쓰던 셈법은 해가 바뀔 때 올랐으니,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과 같은 셈법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작은 차이로 보이지만 이 글의 나머지가 모두 같은 종류의 작업입니다. 화면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읽는 일입니다.
| 왼쪽 인물의 단검에 새겨진 AET. SVAE 29. 「그의 스물아홉째 해에」라는 뜻이다 |
| 오른쪽 인물이 팔을 얹은 책의 AETATIS SVAE 25. 만 나이로는 스물넷이다 |
홀바인은 왜 런던에 있었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년경~1543)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화가로 초상화의 대가였습니다.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은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측이 교회 안의 성화와 조각을 우상으로 규정하며 파괴하기 시작하자 홀바인이 받던 주문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그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의 추천장을 들고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머문 1530년대 런던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정치적 화약고였습니다.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교황청에 청원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캐서린의 조카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였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에서는 국왕 카를로스 1세로 불린 사람입니다. 결국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는 길로 갔고 그것이 영국 국교회의 출발이 됩니다. 이 상황을 중재하려 한 것이 가톨릭 국가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였고, 그가 보낸 외교 인물들이 이 그림의 두 주인공입니다.
두 사람은 누구인가
왼쪽은 장 드 댕트빌(Jean de Dinteville)입니다. 1533년 잉글랜드 주재 프랑스 대사였고 파리 남동쪽 폴리시(Polisy)의 영주였습니다. 붉은 실크에 검은 벨벳 상의, 길게 늘어진 모피 외투가 신분을 한눈에 알려줍니다. 목에는 성 미카엘 기사단의 펜던트를 걸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조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로 프랑스 남부 라보르(Lavaur)의 주교였습니다. 스물넷의 주교라는 점이 이미 예사롭지 않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그의 런던 방문을 1533년 5월로 적고 그 근거를 남아 있는 서한에서 찾습니다. 댕트빌보다 반걸음 뒤에 서 있고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습니다.
댕트빌은 런던 체류가 길어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그의 편지에는 피로와 우울, 병치레가 적혀 있습니다. 젊은 주교의 방문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뒤에 이 그림은 폴리시에 있던 그의 성에 걸렸습니다.
선반 위의 물건에는 전부 이름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단 선반이 있습니다. 이 선반을 「진귀한 물건들」로 뭉뚱그리면 그림의 절반을 지나치게 됩니다. 물건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고 무엇을 하는 도구인지도 정해져 있습니다.
상단: 시각과 고도와 별의 위치를 재는 도구들
위쪽 선반에는 터키산 양탄자 위에 기구들이 놓여 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이 물건들의 용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시각과 고도, 그리고 별과 천체의 위치를 재는 도구들입니다.
별과 별자리의 위치를 담은 천구의가 있고, 목동이 쓰던 간이 해시계인 목동의 해시계(shepherd’s dial),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를 기준으로 삼는 주야평분시 해시계(equinoctial dial), 천체의 고도를 재는 사분의(quadrant)가 놓여 있습니다. 면마다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다면 해시계도 있습니다. 그리고 받침 위에 놓인 황동 원반이 토르케툼(torquetum)입니다. 천체의 좌표를 재고 바꾸어 계산하는 데 쓰는, 당시로서는 가장 복잡한 기구에 속합니다.
하단: 세계와 숫자와 소리와 믿음
천구의에는 조금 더 들여다볼 대목이 있습니다. 이 천구의가 기준으로 삼은 위도를 북위 41도에서 42도 사이로 읽는 연구가 있습니다. 로마의 위도가 41.8도이니 로마에서 본 하늘을 옮긴 것이라는 읽기가 나옵니다. 천구 표면에 적힌 GALACIA는 은하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프랑스를 읽어내는 견해는 이 글자가 아니라 그 곁의 백조자리에 관한 것입니다. 백조를 백조가 아니라 암탉처럼 그렸다는 관찰이 있고, 수탉이 프랑스의 상징이니 화가가 주문자의 나라를 슬쩍 넣은 것이라는 읽기입니다. 다만 이런 판독들은 연구자의 것이고 소장처 카탈로그가 확인해 주는 항목은 아닙니다. 「그렇게 읽는 사람이 있다」까지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선입니다.
다면 해시계는 그 자체로 재미있는 물건입니다. 면이 여러 개이고 면마다 가리키는 시각이 다릅니다. 하나의 물건이 여러 답을 동시에 보여 주는 셈입니다. 시계를 하나만 두고 시각을 확인하던 시대의 물건이 아니라, 해의 높이와 계절과 위도를 함께 계산해야 시각이 나오던 시대의 물건입니다.
아래 선반의 물건은 조금 더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왼쪽에 지구의가 있고 그 표면에 POLISY가 적혀 있습니다. 댕트빌의 성이 있던 작은 마을입니다. 파리를 뜻하는 BARIS도 적혀 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폴리시가 구도를 위해 실제 위치에서 옮겨 그려졌다고 적습니다. 지도의 정확성보다 주문자의 자리를 먼저 놓은 것입니다.
그 곁에는 컴퍼스(dividers)와 직각자(set-square)가 있습니다. 직각자는 책 사이에 벌어진 채 끼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산술책과 류트, 피리가 든 통, 찬송가집이 놓여 있습니다.
| 지구의에 적힌 POLISY. 댕트빌의 성이 있던 마을이고, 구도를 위해 실제 위치에서 옮겨 그렸다 |
펼쳐진 책은 어느 쪽인가
이 그림에서 가장 놀라운 정밀함은 책에 있습니다. 홀바인은 책을 그냥 「책」으로 그리지 않고 실제로 있던 책의 특정한 면을 그렸습니다.
산술책은 페터 아피안이 1527년에 낸 상인용 계산 교본 『Eyn newe unnd wohlgegründte underweysung aller Kauffmanss Rechnung』입니다. 펼쳐진 면은 나눗셈을 다루는 단원입니다.
찬송가집은 종교개혁기 음악가 요한 발터가 엮은 『Geystliche Gesangbüchlein』입니다. 펼쳐진 두 곡도 확인됩니다. 「Komm heiliger Geyst」(성령이여 오소서)와 「Mensch wiltu leben seliglich」, 십계명을 노래로 옮긴 곡입니다.
악기는 류트입니다. 줄의 상태까지 셀 수 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의 기록으로는 왼쪽에 짧은 홑줄 하나와 겹줄 다섯 벌, 합쳐 여섯 코스이고 프렛은 여덟 개입니다. 그리고 끊어진 것은 여섯째 줄 하나입니다. 해설에 따라 「두 줄이 끊어졌다」고 적힌 것을 보게 되지만 소장처가 세는 것은 한 줄입니다.
여기까지가 화면에서 읽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석입니다. 끊어진 줄 하나와 나눗셈 단원, 그리고 루터교 찬송가집을 나란히 놓고 읽는 오래된 독법이 있습니다. 조화가 끊어지고 있고 시대가 나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남아 있다는 읽기입니다. 그 노래를 화해의 희망으로 볼 수도 있고 마지막 공통 기반마저 갈라지는 경고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독법은 물건의 배치에서 끌어낸 해석이고, 홀바인이 그렇게 의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 류트의 끊어진 줄. 소장처 카탈로그는 끊어진 것을 여섯째 줄 하나로 적는다 |
끊어진 류트 줄, 나눗셈 단원, 루터교 찬송가집을 함께 읽으면 1533년 유럽의 균열을 압축한 그림이 됩니다. 다만 앞의 세 가지는 화면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고, 그것을 하나의 메시지로 묶는 것은 뒤에 온 사람들의 읽기입니다. 이 글은 둘을 섞지 않으려 합니다.
십자가상, 그리고 해시계의 날짜라는 하나의 읽기
화면 왼쪽 위, 녹색 커튼 뒤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조각상이 반쯤 가려져 있습니다. 최첨단 기구와 값비싼 옷감으로 가득한 그림에서 신앙의 상징은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는 물감의 층으로 확인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십자가상과 그 주변 회색 배경의 물감이 녹색 커튼 물감 위에 얹혀 있다고 적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더해진 것일 수 있다고 씁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층의 순서까지입니다. 누가 언제 왜 더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녹색 커튼에 반쯤 가린 십자가상. 이 부분의 물감은 커튼 물감 위에 얹혀 있다 |
이 그림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는 날짜에 관한 것입니다. 과학사가 존 노스(John North)는 원통형 해시계의 그림자와 기구들의 각도를 계산해 이 화면의 시각을 1533년 4월 11일 오후로 읽었습니다. 그날은 성금요일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1500년이 되는 해의 성금요일이라는 점까지 이어집니다. 커튼 뒤의 십자가상과 겹쳐 놓으면 매혹적인 읽기입니다.
다만 이것은 한 연구자의 해독이고 소장처 카탈로그는 이를 확정된 사실로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긋나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가 서한을 근거로 적은 드 셀브의 런던 방문은 5월입니다. 화면의 날짜를 4월 11일로 읽으면 그날 런던에 있었다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두 사람 중 한 명뿐인 셈이 됩니다. 이 어긋남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해골은 보는 자리를 옮겨야 보인다
두 사람 발 앞의 흰 형체는 정면에서는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보는 자리를 이렇게 안내합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위를 향해 올려다볼 때 그 형체가 사람의 두개골로 제 모습을 찾습니다. 특정한 각도에서만 원래 형상이 드러나는 이 기법을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라고 합니다.
| 오른쪽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드러나는 해골 (출처: smarthistory.org) |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정면에는 부와 권력과 지식이 가득합니다. 그 화려함에 붙들려 그대로 서 있는 사람에게는 해골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을 옮기고 발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이 그림 앞에서 고개를 기울이는 행위 자체가 메멘토 모리를 몸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물론 이것도 읽기입니다. 홀바인이 남긴 설명은 없습니다.
덧붙이면 이 해골은 지금 원래 상태 그대로가 아닙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코뼈 부분에서 물감이 적잖이 떨어져 나갔다고 적습니다. 오백 년 가까이 지난 화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해골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댕트빌의 모자에 달린 작은 배지가 해골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았다는 신앙의 표현일 수도 있고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장식일 수도 있습니다.
| 왼쪽 인물의 모자에 달린 또 하나의 해골 배지 |
이만큼 읽히는데, 왜 그렸는지는 기록이 없다
바닥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밟고 선 무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성소의 코스마티 모자이크 바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바닥은 1268년 리처드 웨어 수도원장 때 깔린 것입니다. 다만 내셔널 갤러리는 여기서 한 구절을 조심스럽게 씁니다. 홀바인의 무늬는 그 바닥을 「닮았으나 같지는 않다」고 적습니다. 해설에서 「정확한 복사판」이라고 적힌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소장처의 판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명도 읽을 수 있습니다. IOANNES HOLBEIN PINGEBAT 1533, 「요하네스 홀바인이 그렸다」라는 글자가 왼쪽 인물 뒤 대리석 바닥에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제작 연도가 있습니다. 패널의 재료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발트해 연안의 참나무이고 크기는 207×209.5cm, 거의 정사각형입니다.
주문자는 알려져 있습니다. 17세기의 기록에 두 사람이 홀바인에게 이 그림을 맡겼다고 적혀 있고, 주문자는 장 드 댕트빌로 확인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 이 두 사람을 함께 세웠고, 선반의 물건들을 누가 골랐으며, 그 물건들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에 대해 홀바인도 댕트빌도 당대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해석들은 20세기 이후의 조사와 추론으로 세운 것입니다.
기록의 빈자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19세기의 사정이 잘 보여 줍니다. 그때는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시인 토머스 와이엇이라는 설이 있었고 링컨의 대부제 리처드 페이트라는 설도 있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그 후보들을 두고 「어느 것도 완전히 설득력이 있거나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적습니다. 화면의 숫자 29와 25는 그대로 적혀 있었는데도 그 숫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림이 영국에 남은 경위는 확인됩니다. 1890년 제5대 래드너 백작이 다른 두 점과 함께 55,000파운드에 매각했고 이 매입에 정부의 특별 교부금 25,000파운드와 10,000파운드씩의 기부 두 건이 보태졌습니다.
그 앞의 이백오십여 년은 이 그림이 프랑스에 있던 시간입니다. 1533년에 폴리시의 성에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1787년까지는 파리에 있었으며 늦어도 1792년에는 영국으로 건너와 있었습니다. 오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화면이 지나온 경로 가운데 확인되는 것은 몇 개의 지점뿐입니다.
이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가까이 대면 끊어진 줄의 번호까지 세어지고 책의 단원까지 읽힙니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나 「그래서 이 그림은 무엇인가」를 물으면 대답이 없습니다. 가장 많이 읽히는 그림이 가장 적게 설명된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 빈자리가 오백 년 동안 사람들을 이 화면 앞에 붙들어 둔 힘일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 앞에 설 기회가 생긴다면 오른쪽 아래로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시기를 권합니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