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키스(Der Kuss), 처음 제목은 연인들(Liebespaar)
•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 제작: 1907~1909년경(1908년 전시 뒤에도 손질을 이어감)
• 재료: 캔버스에 금박·은박·백금박·수지 유채, 배경은 황동 모조금
• 크기: 180×180cm(정사각형)
• 소장: 벨베데레 미술관(Belvedere), 빈, 인벤토리 912
• 서명: 오른쪽 아래 금빛 바탕에 GV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1908년 빈의 대형 전시 쿤스트샤우에 아직 다 그리지 않은 채로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그해 7월 10일, 빈의 현대 미술관인 모데르네 갈레리 위원회가 이 그림을 사기로 결정했고, 값은 25,000크로넨이었습니다. 벨베데레 미술관은 이것이 그때까지 모데르네 갈레리가 살아 있는 화가의 그림에 치른 가장 높은 값이었다고 적습니다.
이 글은 벨베데레 미술관의 소장품 기록과 보존 조사를 따라, 이 금빛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림 속 두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드레스의 붉은 원반을 적혈구로 읽는 2025년 논문이 실제로 무엇을 보였는지를 봅니다.
|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연인들)〉, 1907~1909년경, 캔버스에 금박·은박·백금박·수지 유채, 배경은 황동 모조금, 180×180cm,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상궁, 인벤토리 912. 두 사람의 입술이 닿지 않는 것과 배경의 네모난 금속박 자국을 보십시오. |
클림트 키스, 금빛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키스〉는 클림트가 금박을 두드러지게 쓴 이른바 황금 시기의 그림입니다. 벨베데레는 이 시기를 대략 1901년부터 1909년까지로 보고, 〈키스〉를 그 정점이자 끝점으로 봅니다. 벨베데레는 배경의 반짝임이 그림에 거의 영적인 차원을 더한다고 설명합니다. 클림트는 1903년 이탈리아를 두 차례 여행하며 라벤나와 베네치아에서 비잔틴 시대의 금빛 모자이크를 보았고, 클림트 재단은 이 경험이 이후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적습니다. 클림트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금 조각사(Goldgraveur)였습니다. 클림트가 금을 즐겨 쓴 배경으로 이 집안 내력을 꼽는 이야기도 흔히 전합니다. 클림트는 1876년부터 빈의 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에서 장식 화가로 교육받았고, 클림트 재단에 따르면 이곳에서 장식 소묘를 비롯한 여러 기법을 익혔습니다.
그 금빛을 실제로 어떻게 올렸는지는 벨베데레 보존부의 조사로 알 수 있습니다. 클림트는 밝게 바탕칠한 캔버스에 먼저 흑연으로 구도를 그렸습니다. 그다음 피부와 머리카락, 여자 옷의 알록달록한 꽃무늬, 풀밭을 뺀 나머지 면에 아주 얇은 황동박을 기름 접착제로 붙이고, 군데군데 금박과 백금박을 얹었습니다. 접착이 마르자 금속층 전체에 짙은 갈색의 수지 기름 칠을 덮고, 그 칠이 젖어 있는 동안 금과 백금과 황동의 작은 조각을 뿌렸습니다. 배경이 별이 흩어진 밤하늘처럼 보이는 것은 이 조각들 때문입니다.
| 부분: 남자는 여자의 입술이 아니라 뺨에 입을 맞춥니다. |
남자의 망토는 전체를 금박으로 덮은 뒤, 붓으로 접착용 기름을 두껍게 발라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금박을 올렸습니다. 금박이 붓 자국에만 붙어 무늬가 살짝 도드라져 보입니다. 여자의 옷은 황동박 위에 금박을 깔고 그 위에 여러 색으로 무늬를 그렸습니다. 붉은색 안료는 진사, 푸른색은 코발트로 확인되었습니다.
벨베데레는 이 금속박 기법의 가장 중요한 모범으로 일본의 금칠 공예를 꼽습니다. 젖은 칠 위에 금가루를 뿌리는 일본의 마키에 기법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클림트는 빈의 공예 미술관 소장품과 친구들의 수집품으로 일본 칠기를 많이 볼 수 있었고, 1901년 일본에 머물며 이 기법을 익힌 빈 분리파 동료 에밀 오를리크가 클림트에게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배경을 가까이서 보면 네모난 금속박의 가장자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벨베데레는 이 자국이 밤하늘 같은 인상을 조금 깨고, 손으로 붙여 만든 그림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사랑의 패턴, 남성과 여성은 어떻게 구별될까
두 사람은 하나의 금빛 덩어리처럼 붙어 있지만, 옷의 무늬는 다릅니다. 클림트 재단의 설명대로 남자의 망토에는 딱딱한 검은 직사각형이 늘어서 있고 머리에는 거친 담쟁이가 얹혀 있습니다. 여자의 옷은 둥근 무늬와 꽃무늬로 채워져 있고 머리에도 꽃이 꽂혀 있습니다. 재단은 이 대비를 남성의 단단함과 거친 자연의 힘, 그리고 여성의 부드러움으로 풀고, 두 옷과 배경을 하나로 잇는 것이 금이라고 설명합니다. 벨베데레는 두 사람을 감싼 이 금빛을 반짝이는 후광, 곧 아우레올이라고 부릅니다.
| 부분: 남자 망토의 검고 흰 사각형과 여자 옷의 둥근 꽃무늬. |
이 대비를 다르게 읽는 시각도 있습니다. 벨베데레가 소개하는 페미니즘 비평은 이 그림에서 여자의 모습이 문자 그대로 남자의 모습 안에 새겨져 있다고 보고, 남녀를 딱딱함과 부드러움으로 나누는 구도 자체가 당시의 성 고정관념을 되풀이한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무늬가 사랑의 결합으로도, 한쪽이 다른 쪽에 흡수되는 모습으로도 읽히는 셈입니다.
클림트 키스 해석, 꽃밭과 낭떠러지
두 사람은 온갖 색의 꽃이 흩어진 풀밭 위에 있고, 그 풀밭은 오른쪽 아래에서 갑자기 끊깁니다. 무릎을 꿇은 여자의 발은 그 가장자리를 넘어 금빛 바깥으로 나와 있습니다. 클림트 재단은 이 꽃밭을 절벽(Klippe)이라 부르고, 벨베데레도 그 가장자리를 풀밭의 낭떠러지로 적습니다. 이 장면을 사랑의 황홀함과 위험을 함께 담은 것으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벨베데레는 발 아래의 꽃들이 사랑의 행복을 상징적으로 곁들인다고 설명하고, 배경의 반짝이는 점들을 우주의 별먼지로 봅니다.
| 부분: 꽃밭이 끊기는 가장자리와 여자의 발. 종아리는 전시 뒤 몇 센티미터 늘려 그렸습니다. |
이 발의 위치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벨베데레에 따르면 클림트는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을 다시 손보면서 여자의 종아리를 몇 센티미터 늘렸고, 그 결과 다리가 금빛 테두리와 풀밭 끝의 물결 모양 경계선을 뚫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X선 사진에서 이 수정이 뚜렷이 보입니다. 보존 조사로 확인된 변경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남자는 처음에 수염이 있었고, 망토의 무늬도 달랐으며, 여자의 왼쪽 팔뚝은 원래 남자의 망토에 가려 있었습니다.
클림트 키스 속 여인은 누구일까
1908년 전시 때 이 그림의 제목은 〈연인들(Liebespaar)〉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클림트 자신이고 여자가 그의 평생 동반자 에밀리 플뢰게라는 추정이 자주 나옵니다. 클림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플뢰게와도 끝내 부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벨베데레는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다고 적습니다. 클림트는 자기 그림을 거의 설명하지 않았고, 1913년 화실을 찾은 방문객에게는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907년 금빛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의 주인공이 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를 모델로 꼽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관의 서술은 없습니다. 이 초상화는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이 그림을 되찾기까지의 소송을 그린 2015년 영화 〈우먼 인 골드〉의 중심 소재이기도 합니다.
|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
벨베데레가 드는 정황은 둘입니다. 하나는 수염입니다. 몇몇 준비 소묘와, 전시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 속 남자에게는 턱수염이 있었는데 클림트도 턱수염을 길렀습니다. 다른 하나는 브로치입니다. 클림트가 〈키스〉의 포옹을 조금 바꿔 작은 양피지에 그려 넣은 브로치 〈포옹〉이 남아 있는데, 거기 적힌 날짜 1908년 8월 30일은 에밀리 플뢰게의 서른네 번째 생일입니다. 둘 다 정황일 뿐 그림 속 여자가 플뢰게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클림트 소묘 연구자 알리체 슈트로블은 1984년, 클림트가 〈키스〉에 플뢰게와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담았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2025년 적혈구 논문도 플뢰게를 〈키스〉의 여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으로 적습니다.
연인을 실제 인물이 아니라 신화나 문학의 인물로 읽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 벨베데레는 쿠피도와 프시케, 단테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그리고 남자 머리의 담쟁이와 여자 머리의 꽃을 근거로 한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해석을 소개합니다. 여자가 눈을 감고 있는 것도 이런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밤마다 잠든 채 연인을 맞은 프시케, 낙소스섬에 잠든 채 남겨졌다가 디오니소스를 만난 아리아드네와 겹쳐 읽는 것입니다. 벨베데레 스스로는 이 그림을 실제 사건이 아니라 꿈 같은 세계의 시적 창안, 곧 사랑의 큰 알레고리로 봅니다.
〈키스〉가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 가운데 「온 세상에 보내는 이 입맞춤」이라는 구절에서 나왔다고 소개하는 글도 있습니다. 클림트 재단에 따르면 그 구절은 1901~02년에 그린 〈베토벤 프리즈〉 마지막 장면의 제목입니다. 꽃이 핀 풀밭에서 천국의 합창대가 서로 껴안은 남녀를 둘러싼 장면입니다. 클림트 재단은 클림트가 바로 이 장면의 입맞춤, 곧 남녀가 꼭 껴안은 모티프를 〈키스〉에서 이어서 발전시켰다고 설명합니다. 시구에서 곧바로 〈키스〉가 나왔다기보다 〈베토벤 프리즈〉를 거쳐 이어진 셈입니다. 클림트는 이 포옹을 브뤼셀 스토클레 저택 식당의 모자이크 벽화 가운데 〈성취〉 장면에서 한 번 더 썼고, 재단은 이 장면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키스〉의 구성을 되가져온 것이라고 봅니다.
드레스 속 붉은 원반, 적혈구 모티프
여자 옷에 박힌 붉은 도넛 모양의 원반을 적혈구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2019년 평론가 켈리 그로비어가 책에서 이미 혈구로 읽은 바 있고, 2025년 대한의학회의 영문 학술지 〈대한의학회지(JKMS)〉에 고려대 의대와 성균관대 미술학과 연구진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 부분: 여자 옷의 붉은 원반. 2025년 논문은 이것을 적혈구 모양으로 해석합니다. |
논문의 근거는 세 갈래입니다. 해부학자 에밀 추커칸들이 1903년 화가들을 위해 해부학 강연을 열고 환등기로 염색한 조직 표본을 보여 주었다는 점, 추커칸들이 가지고 있던 에른스트 헤켈의 저작을 클림트가 볼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헤켈의 1903년 책과 1902년 조직학 교과서에 실린 적혈구 그림이 드레스의 원반과 닮았다는 점입니다. 연구진은 또 관람객 300명에게 원본과 붉은 원반을 지운 그림을 보여 주고 인상을 물었는데, 감정과 색, 분위기에서 의미 있는 차이가 나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연구가 보여 준 것은 형태가 닮았다는 것과 그 원반이 보는 사람의 인상을 바꾼다는 것까지입니다. 클림트가 그것을 적혈구로 그리려 했다는 기록은 아닙니다. 논문은 여자의 팔꿈치가 가슴을 둘러 심장 모양을 이루고, 가슴께의 원반은 심장과 생명력을, 다리 사이의 원반은 월경과 생식력, 곧 「임신할 준비가 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클림트, 미완성 그림을 최고가에 산 미술관
1908년 6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열린 쿤스트샤우는 클림트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 등이 꾸린 전시였고, 클림트는 전시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이 전시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즉위 60주년 기념행사가 빈에서 열리던 때에 맞춰 문을 열었지만, 공식 기념행사에 초대받은 전시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림트 한 사람에게 방 하나가 주어졌고, 〈키스〉는 입구 맞은편 벽 한가운데, 그 방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걸렸습니다. 벨베데레에 따르면 클림트가 이 방에 건 그림 16점은 바로 앞 몇 해 사이에 새로 그린 것이었고, 〈물뱀〉 연작 두 점을 빼면 모두 빈에서 처음 공개하는 그림이었습니다. 〈키스〉는 전시에서 곧바로 눈길을 끈 그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구입 서류에는 「클림트 그림의 왼쪽 아래 모서리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메모가 남아 있고, 클림트는 휴가지 아터제에서 전시가 끝나는 대로 완성해 넘기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결정은 모데르네 갈레리 위원회가 내렸고 돈은 문화교육부가 댔습니다. 비슷한 때 프라하의 모데르네 갈레리 독일 분과도 이 그림을 사고 싶다는 뜻을 밝혀, 빈의 부처가 서둘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25,000크로넨은 큰돈이었습니다. 벨베데레는 그 두 배가 안 되는 돈으로 잘츠카머구트에서 가구까지 갖춘 별장 한 채를 살 수 있었고, 클림트의 여성 초상화는 1만 5천 크로넨, 풍경화는 많아야 9천 크로넨 선이었다고 적습니다. 그때까지 모데르네 갈레리에 있던 클림트 그림은 작은 것 세 점뿐이었습니다. 클림트는 1897년 보수적인 빈 미술가협회를 떠난 화가들이 만든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었습니다. 그가 빈 대학 강당 천장을 위해 그린 학부 그림은 거센 비난을 받았고, 〈의학〉에는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까지 나와 검찰이 불려 오고 의회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벨베데레는 이 과감한 구입을 클림트가 몇 해 전 빈 대학 천장화 사건으로 겪은 모욕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부처가 여겼을 수 있다고 봅니다. 클림트를 옹호해 온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은 구입 직후 신문에 관료 사회의 「클림트 공포」가 마침내 극복되었다고 썼습니다.
클림트는 1909년 6월 말까지 손질을 마쳤고, 모데르네 갈레리는 그해 7월 22일 그림을 넘겨받았습니다. 이때까지 제목은 여전히 〈연인들〉이었습니다. 〈키스〉라는 이름은 1909년 가을 무렵 나온 소장품 목록 보유편에 처음 등장하는데, 벨베데레는 그해 초대 관장이 된 프리드리히 되른회퍼가 이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을 듭니다. 실제로는 입술이 닿지 않고 남자가 뺨에 입 맞추는 그림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림이 마지막으로 빈 밖에 나간 것은 1997년, 로마에서 열린 일주일짜리 전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