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생애와 작품, 절규에 적힌 그 한 줄은 누가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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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의 왼쪽 위 구석, 붉은 하늘 자리에 아주 작은 연필 글씨가 한 줄 있습니다. 노르웨이어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씨는 육안으로도 보였지만 오랫동안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났던 관람객이 몰래 적어 놓은 낙서라는 설명이 가장 널리 통했습니다. 2021년에 노르웨이 국립박물관(Nasjonalmuseet)이 적외선 촬영으로 이 글씨를 배경에서 분리해 낸 뒤 뭉크의 일기와 편지에 남은 필적과 대조했습니다. 결론은 뭉크 본인이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눈에 보이는 장면 대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려 표현주의의 문을 연 노르웨이 화가
• 생몰: 1863년 12월 12일 로텐 출생, 1944년 1월 23일 오슬로 에켈리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노르웨이, 오슬로와 파리, 베를린
• 활동 분야: 상징주의에서 출발한 표현주의 회화와 판화
• 대표작: 〈절규〉(1893), 〈마돈나〉, 〈생의 춤〉, 〈병든 아이〉, 〈생의 프리즈〉 연작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다, 그 한 줄의 뜻

화가가 자기 그림 위에,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 비난에 대한 응답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다리 위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입을 벌린 인물, 뒤편에 두 사람이 걸어감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판지에 템페라와 유성 크레용, 91 x 73.5 cm,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화면 왼쪽 위 붉은 하늘 자리에 연필 글씨 한 줄이 있다.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의 큐레이터는 이 조사로 글씨의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끝났다고 밝혔습니다. 적외선 촬영으로 글자 모양을 선명하게 드러냈고, 그 필적이 뭉크의 자필 문서와 일치했습니다.

이 확인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림을 읽는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낙서가 관람객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이 그림이 받은 반응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화가 본인이 썼다면 그것은 반응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뭉크의 그림에 정신 상태를 문제 삼는 평은 1890년대에 거듭 나왔습니다. 화면이 거칠고 형태가 뒤틀렸으며 완성으로 인정받는 마무리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립박물관은 뭉크가 그런 비난을 둘러싼 토론 뒤에 이 글씨를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1895년 학생회 토론에서 당시 의대생이던 요한 샤르펜베르그가 그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는 말을 들은 뒤, 그해나 그 이후의 어느 때라는 것입니다. 자기 그림 위에, 자기를 겨눈 말을, 자기 손으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한 줄은 광기의 증거가 아니라 광기라는 오명에 대한 대응에 가깝습니다. 조롱을 지우지 않고 화면 안에 남겨 두는 선택입니다.

뭉크 생애, 죽음이 먼저 있었던 유년

뭉크가 어른이 되기 전에 집안에서 두 사람이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어머니 라우라는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는 한 살 위 누나 요한네 소피에가 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군의관이었고 엄격한 경건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아내를 잃은 뒤 신앙이 더 격해졌다고 전해집니다. 뭉크는 1907~1908년 무렵 쓴 편지 초안에서 아버지를 “엄격하게 종교적이고 신경이 예민했다”고 적었고, 다른 노트에는 태어날 때부터 불안과 슬픔과 죽음의 천사들이 곁에 서 있었다고 썼습니다. 집안의 병은 그 뒤에도 이어져, 누이동생 라우라는 오슬로의 가우스타 정신병원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뭉크 자신도 병약해 학교를 자주 쉬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그의 그림을 불행한 유년의 결과로 정리하는 서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결핵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은 무수히 많았고 그들이 모두 〈병든 아이〉를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경험을 다루기로 결정한 방식입니다. 스물둘, 스물셋 무렵의 〈병든 아이〉에서 그는 죽어 가는 소녀의 얼굴을 정확히 묘사하는 대신 화면을 긁고 문질러 형체가 녹아내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것을 그리다 만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1886년 가을 국가미술전람회에 이 그림은 〈습작〉이라는 제목으로 걸렸고, 실패작이라는 평에 더해 “낙태된 그림”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뭉크 자신은 훗날 이 그림을 사실주의와 작별한 작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평생에 걸쳐 다시 그려, 같은 주제의 판본이 여섯 점에 이릅니다.

베개에 기댄 창백한 소녀가 옆을 보고, 침대 곁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음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년,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소장품 번호 NG.M.00839. 소녀의 얼굴 윤곽이 긁히고 문질러져 배경으로 녹아드는 자리를 보라.

뭉크의 화풍은 언제 왜 바뀌었는가

그의 변화는 대상을 정확히 그리는 일을 포기하기로 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크리스티아니아의 자연주의 수업(1880년대 전반). 1880년 11월 어느 월요일, 그는 일기에 짧게 적었습니다. 기술학교를 다시 그만두었고, 이제 화가가 되기로 했다는 내용입니다. 건축가가 되려고 들어간 학교를 1년여 만에 떠난 결정이었습니다. 처음 그는 당시 노르웨이 화단의 표준이던 사실적인 화법을 배웠습니다. 이 시기 작품은 색이 차분하고 묘사가 성실합니다.

짙은 배경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젊은 남자의 상반신, 붓질이 차분하고 형태가 또렷함
에드바르 뭉크, 〈자화상〉, 1881~1882년, 뭉크 미술관, 소장품 번호 MM.M.01049. 뒤에 올 그림들과 달리 윤곽이 흐트러지지 않은 초기 화법이다.

보헤미안 그룹과의 만남(1880년대 후반). 작가 한스 예게르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 예술가 모임에 들어가면서 방향이 바뀝니다. 자유로운 사랑과 급진적인 자기표현을 내세운 모임이었고, 자기 삶을 쓰라는 것이 그 강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뭉크는 그것을 자기 마음의 상태를 그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1890년 무렵 했던 말이라며 훗날 수첩에 여러 번 옮겨 적은 문장이 이 전환을 잘 요약합니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본 것을 그린다.”

파리와 베를린(1889~1890년대). 1889년 가을 파리로 떠나던 날, 뭉크는 배가 세 시간 뒤에야 뜬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다시 인사했습니다. 이듬해 무렵 남긴 회상 노트에 따르면 아버지는 책상에서 안경 너머로 그를 보며 궂은 날씨가 온다니 집에 있으라고 했고, 뭉크는 하루도 더 이 도시에 있을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배 위에서 친구가 “저기 네 아버지가 간다”고 알려 주었고, 짐 더미 사이를 걷는 아버지를 본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 적었습니다. 뭉크 미술관은 이것이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고 정리합니다. 그해 11월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후기인상주의와 상징주의를 흡수하고, 베를린에서는 전시 자체가 사건이 됩니다. 1892년 베를린 전시는 격렬한 반발 끝에 일주일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이 소동은 그를 독일 미술계에서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화면에서 윤곽선이 물결처럼 흐르기 시작하고 색이 감정의 온도로 쓰이기 시작합니다.

〈절규〉가 그 정점에 있습니다. 1892년 1월 니스에서 쓴 일기에 그 장면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두 친구와 길을 걷다가 해가 지는데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졌고,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는 내용입니다. 화면에서 길의 난간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곧게 뻗어 나가는데, 그 직선을 따라가면 뒤쪽에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걷고 있습니다. 일기를 따르면 화면 안의 인물은 비명을 지르는 쪽이 아니라 그것을 듣고 반응하는 존재로 읽힙니다. 다만 화면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핏빛 하늘 아래 다리 위에 창백한 얼굴의 사람들이 정면을 향해 몰려 서 있음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년, 뭉크 미술관, 소장품 번호 MM.M.00515. 〈절규〉와 같은 길과 난간, 붉은 하늘인데, 혼자 있던 자리에 무리가 들어와 있다.

뭉크는 왜 절규를 여러 번 그렸는가

낱장의 작품이 아니라 이어지는 한 편의 구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뭉크는 자기 대표작들을 〈생의 프리즈〉라는 이름 아래 묶었습니다. 프리즈는 건물 벽면을 띠처럼 두르는 장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시작되고 불안이 오고 질투가 끼어들고 죽음에 이르는 흐름을 한 벽에 늘어놓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별 작품은 완결된 그림인 동시에 이 띠의 한 칸이었습니다.

달빛이 비치는 물가 풀밭에서 남녀가 춤추고, 왼쪽에 흰옷 여인과 오른쪽에 검은옷 여인이 서 있음
에드바르 뭉크, 〈생의 춤〉, 1899~1900년,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소장품 번호 NG.M.00941. 왼쪽 흰옷에서 가운데 붉은옷을 지나 오른쪽 검은옷으로 가는 가로 배열을 따라가 보라.
검은 물결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은 채 상체를 젖힌 여인
에드바르 뭉크, 〈마돈나〉, 1894년,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소장품 번호 NG.M.00841. 인물을 감싸고 도는 물결 모양의 선이 배경과 몸을 하나로 잇는다.

같은 주제를 반복해 그린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습니다. 전시마다 구성을 다시 짜려면 같은 그림이 여러 벌 필요했고, 판 뒤에 자기 보관용으로 다시 만든 것도 있으며, 같은 모티프를 다시 살펴보려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판화의 유통도 한몫했습니다. 그는 유화와 판화, 파스텔로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 만들었습니다. 〈절규〉가 여러 벌로 존재하는 것도 이 흐름 안에 있습니다.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같은 모티프를 다시 해석한 이본과 변주입니다. 회화와 파스텔로 다시 만든 것은 이본이라 부르고, 석판화의 각 종이는 인상이라 부릅니다.

검은 잉크로만 찍어 낸 절규, 다리와 인물과 하늘이 모두 선의 굵기로 구분됨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5년, 석판화. 색을 걷어 내고 선만 남겼는데도 화면의 구조가 그대로 서 있다.

판화는 그에게 부수적인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목판의 결을 그대로 살려 화면에 나뭇결이 드러나게 하거나, 판을 톱으로 잘라 색깔별로 찍어 내는 방식을 썼습니다. 회화에서 붓질로 하던 일을 판화에서는 재료 자체로 했습니다.

서로 얼굴을 맞댄 두 사람의 형체가 하나로 붙어 있고, 화면 전체에 세로 나뭇결이 드러남
에드바르 뭉크, 〈키스 IV〉, 1902년, 목판화. 인물 위로 지나가는 세로줄이 목판 자체의 나뭇결이다. 재료를 지우지 않고 그림의 일부로 쓴 자리다.

뭉크의 만년, 퇴폐미술로 지목되다

말년의 뭉크는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인 동시에 나치가 지운 화가였습니다.

만년에 이르기 전, 그의 삶을 흔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만난 툴라 라르센과의 관계가 1902년 9월 오스고르스트란의 집에서 다툼으로 끝났고, 그 와중에 권총이 발사되었습니다. 이튿날 크리스티아니아 국립병원의 기록에는 총알이 왼손 가운뎃손가락 밑동으로 들어가 넷째 손가락에 박혔고, 총알이 빠져나간 자리에 뼛조각이 보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뭉크 자신도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1908년 코펜하겐에서 그는 신경 쇠약과 알코올 문제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달을 보냅니다. 1909년 퇴원한 뒤에는 노르웨이 남부 해안의 크라게뢰에 자리를 잡았고, 1916년에는 오슬로 외곽 에켈리의 집을 사서 옮겨 갑니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며 작업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그림은 색이 밝아지고 노동과 자연을 다룬 화면이 늘어납니다.

괘종시계와 침대 사이 좁은 자리에 두 팔을 늘어뜨리고 선 노인, 뒤쪽 벽에 그림들이 걸려 있음
에드바르 뭉크,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1940~1943년, 캔버스에 유채, 뭉크 미술관. 뒤편 벽에 자기 그림이 걸린 방 안, 시계와 침대 사이 좁은 통로에 서 있다.

1937년 나치 독일은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독일 미술관에 있던 그의 작품을 떼어 내 시장에 팔았습니다. 그 수는 80여 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질병과 불안, 유전적 결함을 정면으로 다루는 그의 주제가 나치의 우생학과 배치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3년 뒤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 뭉크는 점령 당국과 거리를 둔 채 에켈리의 집에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1940년 점령 직후 그는 작품의 앞날을 걱정해 유언을 고쳤습니다.

1944년 1월에 그는 여든 살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작품 거의 전부가 오슬로시에 넘어갔습니다. 회화만 1,000점이 넘는 규모였습니다. 그가 평생 팔지 않고 곁에 둔 그림들이 그대로 미술관이 된 셈입니다. 그는 누이 잉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작품을 “내 아이들”이라 부르며, 그것들이 망가지거나 흩어지지 않게 지킬 의무가 있다고 썼습니다. 1940년 4월 18일 자 유언장은 그 의무를 문서로 매듭지은 셈입니다. 오슬로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1963년에 뭉크 미술관을 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절규〉는 몇 점인가요?

A. 색을 쓴 판본이 네 점 알려져 있습니다. 템페라 회화 두 점, 크레용 드로잉 한 점, 파스텔 드로잉 한 점이고, 그 밖에 석판화가 있습니다. 뭉크 미술관이 두 점,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이 한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한 점은 개인 소장입니다. 네 점은 재료와 색이 다르고, 연필 글씨가 있는 것은 국립박물관 소장본입니다.

Q. 그림 속 인물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건가요?

A. 일기를 따르면 비명은 자연에서 오고 있고 인물은 그것을 듣고 반응하는 존재로 읽힙니다. 제목도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소리 자체를 가리킵니다. 다만 화면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Q. 뭉크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오슬로에 두 곳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국립박물관과, 그가 유증한 작품을 보관하는 뭉크 미술관입니다. 두 곳을 함께 보면 같은 주제의 다른 판본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전시 구성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 글의 도판은 모두 위키미디어 커먼즈의 퍼블릭 도메인 파일입니다. 캡션에 재질이나 치수, 소장품 번호가 없는 작품은 소장기관 기록을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 구석의 글씨로

붉은 하늘 왼쪽 끝에 적힌 그 한 줄은 크기가 아주 작습니다. 미술관에서 실제로 보시면 설명을 듣기 전에는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 자신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면, 그 그림은 정신적 위기에 대한 기록이기 이전에, 무너졌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말을 자기 화면에 붙들어 둔 기록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 말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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