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파리 살롱을 충격에 빠뜨린 거대한 스캔들'
쿠르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낭의 매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르낭의 매장을 한 문단으로
오르낭의 매장은 귀스타브 쿠르베가 1849년부터 1850년까지 고향 오르낭에서 그린 캔버스 유채화로, 크기는 315 x 668cm이고 프랑스 국가 소장품으로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으며 소장 번호는 RF 325입니다. 영웅도 성인도 등장하지 않는 시골 마을의 장례식을 역사화의 규모로 그렸다는 점이 당시 화단의 규범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천사를 그릴 수 없다고 말한 화가
'사실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종교화나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은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그리려 했던 그의 예술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주제마다 크기가 정해져 있던 시대
쿠르베가 활동하던 당시, 화가들은 역사, 신화, 성경과 같은 고귀한 주제를 다루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정물화 등 그림의 주제별로 작품의 가치와 크기까지 정해져 있었지요. 특히 '죽음'을 다루려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이나 나라를 지킨 영웅의 죽음처럼 고귀한 교훈이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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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낭의 매장> 1849~1850년, 315x668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공식 기록으로 본 오르낭의 매장
소장 기록
- 제목: Un enterrement a Ornans (오르낭의 매장)
- 제작: 1849년~1850년, 제작 장소는 오르낭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세로 315cm, 가로 668cm
- 서명: 화면 왼쪽 아래에 G.Courbet
- 소장 번호: RF 325
- 법적 지위: 국가 소유, 기증(don manuel), 국립미술관 관리
- 취득: 1881년, 이전 소유자는 쥘리에트 쿠르베
- 출품: 1850~1851년 살롱, 출품 번호 661
- 보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본문 캡션에 적은 315 x 668cm는 국가 기록의 수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어권 자료 가운데는 가로를 660cm로 적은 것도 있는데, 프랑스 국립 데이터베이스의 값은 668cm입니다.
하지만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은 당시의 모든 규범을 깨뜨렸기에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쿠르베의 외종조부 장례식에 참석한 실제 오르낭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가로 길이가 약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캔버스에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직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그릴 때만 허용되던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림에는 영웅도, 역사적 중요성도, 도덕적 교훈도 없습니다. 그저 가난한 시골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장례식 장면일 뿐입니다.
7미터라는 크기가 문제였던 이유
이 그림의 가로 668cm가 왜 도발이었는지는 숫자를 몸으로 옮겨 보면 분명해집니다. 성인 남성이 팔을 벌린 길이가 대략 170cm 남짓이니, 이 캔버스는 그런 사람 네 명을 나란히 세워야 겨우 폭이 맞습니다. 세로 315cm는 일반적인 아파트 천장보다 높습니다. 전시장에서 이 그림 앞에 서면 화면이 시야를 벗어납니다.
앞 절에서 본 대로 당시에는 주제마다 허용되는 크기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크기는 왕의 대관식이나 전투 장면, 순교 장면에 쓰이던 규격이었습니다. 그러니 관람자는 화면 앞에 서는 순간 무언가 거대한 사건을 볼 준비를 하게 되고,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시골 마을 사람들이 구덩이 앞에 줄지어 선 장면입니다.
충격의 원인이 그림의 내용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같은 장면을 작은 화폭에 그렸다면 풍속화로 분류되어 조용히 지나갔을 것입니다.
기존의 장례식 그림처럼 천사가 내려와 망자의 영혼을 축복하는 경건한 분위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보입니다.
대단한 인물의 죽음이 아니라서 그런지, 성직자와 조문객들의 표정도 크게 슬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 앞쪽의 개 한 마리는 전통적으로 충성을 상징했지만, 이 개는 주인의 장례식에 무관심한 듯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쿠르베는 고귀해야 할 죽음이라는 주제를 '개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평범한 사건'으로 표현해 버린 것입니다.
화면 읽기, 주인공이 없는 가로 행렬
화면의 구조를 보면 이 그림이 무엇을 하지 않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인물들은 화면 가로를 따라 거의 한 줄로 늘어서 있고, 앞뒤로 깊이를 만드는 배치가 거의 없습니다. 뒤편은 오르낭의 석회암 절벽이 수평으로 가로막고 있어 시선이 멀리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역사화라면 화면 중앙이나 황금분할 지점에 주인공을 놓고 나머지 인물들의 시선과 몸짓이 그쪽을 향하게 만듭니다. 여기서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습니다. 화면 한가운데는 사제와 관을 든 사람들 사이의 빈 공간이고, 인물들의 시선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무엇을 봐야 할지 알려 주는 장치가 화면에서 제거된 셈입니다.
그래서 관람자는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씩 얼굴을 훑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이상화된 유형이 아니라 실제 인물의 초상입니다. 이 그림이 불편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누가 중요한지 정해 주지 않으면, 모두가 똑같이 중요해집니다.
그림에는 뚜렷한 주인공도, 명확한 중심 주제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역사화처럼 거창하게 그렸습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 <오르낭에서의 매장에 관한 역사적 그림>이었던 것을 보면, 쿠르베는 위대한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역사처럼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의 장례식이었나
매장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사실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적은 대로 쿠르베의 외종조부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고, 조부 우도의 장례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화면 속 몇몇 인물이 프루동 가문 사람들을 닮았다는 지적에서 출발한 다른 설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불확실성이 그림의 성격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면에는 관이 있고 구덩이가 있지만 정작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묘비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누가 묻히는지 그림 스스로 밝히지 않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이 특정한 개인의 장례라기보다 한 마을의 장례 그 자체를 그린 것에 가깝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은 해석이고, 모델이 된 사람들이 실제 오르낭 주민이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은 사실입니다.
또한 화려한 색채를 사용했던 당시 작품들과 달리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칙칙합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이 작품은 살롱전에서 엄청난 혹평을 받았고,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전시 자체를 거부당했습니다.
1850년 살롱, 출품 번호 661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온 자리는 1850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린 살롱이고, 출품 번호는 661번이었습니다. 국가가 주관하는 이 전시는 당시 화가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혹평의 내용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미술 자체에 관한 것으로, 저속한 소재를 거창한 형식에 담았다는 비난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1848년 혁명이 지나간 직후였고, 이름 없는 시골 사람들을 왕과 영웅의 규격으로 그린 화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장으로 읽혔습니다.
동시에 이 소동이 쿠르베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용히 지나갔다면 이 그림도 살롱에 걸린 수천 점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쿠르베는 행사장 길 건너편에 직접 땅을 빌려 '사실주의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는 유료로 입장료를 받으며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였는데, 이는 국가가 주도하는 살롱 시스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쿠르베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작품이 바로 <화가의 아틀리에>입니다.
1855년에 실제로 벌어진 일
1855년 만국박람회의 경위는 조금 더 자세히 적을 수 있습니다. 쿠르베가 낸 작품 가운데 열한 점은 심사를 통과했고,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아틀리에 두 점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쿠르베는 통과한 열한 점까지 전부 회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몽테뉴가 7번지에 자기 돈으로 목조 전시관을 세웠습니다. 여기에 약 40점을 걸었고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1프랑이었다가 뒤에 0.5프랑으로 내렸습니다.
이 행동이 왜 혁명적이었는지는 앞 절의 조건을 다시 떠올리면 알 수 있습니다. 살롱이 유일한 통로였던 체제에서, 심사에 떨어진 화가가 그 옆에 자기 전시장을 짓고 직접 관객에게 표를 판 것입니다. 화가가 심사위원을 건너뛰고 대중과 직접 거래한 최초의 사례에 가깝습니다. 뒷날 인상주의자들이 독립 전시를 조직한 방식도 이 선례 위에 있습니다. 인상, 해돋이가 걸린 1874년의 전시가 어떤 조건에서 가능했는지도 여기서부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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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의 아틀리에, 1855년, 361x598cm, 오르세 미술관 |
함께 걸린 그림, 화가의 아틀리에
전시관에 함께 걸린 화가의 아틀리에는 1854년 11월과 12월에 오르낭에서 시작해 1855년 초 넉 달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크기는 361 x 598cm입니다. 오르낭의 매장과 마찬가지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그림의 온전한 제목이 그의 의도를 그대로 밝힙니다. 화가의 아틀리에, 나의 예술적이고 도덕적인 삶 7년을 요약하는 실재하는 알레고리입니다. 실재하는 알레고리라는 모순된 표현을 일부러 붙였는데,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어떤 관념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살과 피를 가진 실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화면은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가운데에는 풍경을 그리는 화가 자신이 있고, 오른쪽에는 시인 보들레르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왼쪽에는 사제와 걸인 같은 당대 사회의 여러 부류가 놓입니다. 오르낭의 매장이 주인공을 지우는 방식으로 규범을 흔들었다면,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을 한가운데에 놓고 세상을 좌우로 배치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이 두 점을 함께 떨어뜨린 것이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파리 코뮌과 방돔 기념탑
쿠르베는 정치적인 신념 때문에 말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871년 그는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인 '파리 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예술가 연맹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코뮌 정부는 72일 만에 무너졌고, 쿠르베는 나폴레옹의 상징이었던 방돔 기념탑 철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투옥됩니다. 그는 막대한 복원 비용을 떠안게 되어 모든 재산과 작품을 압류당했습니다.
그 후 쿠르베는 1873년 스위스로 망명했고, 후원자의 도움으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망명 생활의 고통으로 항상 술에 취해 지내다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림이 국가 소장품이 되기까지
재산을 압류당하고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의 대표작이 지금 국가 소장품으로 남은 경로도 기록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81년에 쿠르베의 여동생 쥘리에트 쿠르베가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쿠르베가 세상을 떠난 지 네 해 뒤의 일입니다.
기증이라는 방식이 눈에 띕니다. 국가가 사들인 것이 아니라 유족이 내놓은 것입니다. 살롱에서 혹평받고 만국박람회에서 걸리지 못한 그림이, 화가가 죽은 뒤 그 국가의 소장품이 되어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한 전시실의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1919년, 그의 시신은 고향인 오르낭으로 돌아와 묻혔습니다. 그의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이 결국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오르낭의 매장은 어디에 있고 얼마나 큰가요?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으며 소장 번호는 RF 325입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315cm, 가로 668cm입니다.
Q. 이 그림은 왜 그렇게 비판받았나요?
시골 마을의 평범한 장례식을 왕의 대관식이나 전투 장면에나 쓰이던 크기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주제에 따라 허용되는 화폭의 크기가 사실상 정해져 있었고, 이 그림은 내용과 형식을 일부러 어긋나게 놓았습니다.
Q. 그림 속에서 매장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쿠르베의 외종조부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조부 우도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림 자체에도 묘비나 이름이 없어 죽은 사람의 신원을 밝히는 요소가 화면에 없습니다.
Q.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쿠르베가 낸 작품 중 열한 점은 통과했고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아틀리에 두 점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통과한 작품까지 모두 회수한 뒤 몽테뉴가 7번지에 자비로 전시관을 세워 약 40점을 걸고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Q. 이 그림은 어떻게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갔나요?
1881년에 쿠르베의 여동생 쥘리에트 쿠르베가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국가가 구입한 것이 아니라 유족이 내놓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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