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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파리 살롱을 충격에 빠뜨린 거대한 스캔들 — Art is long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파리 살롱을 충격에 빠뜨린 거대한 스캔들

  쿠르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낭의 매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실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종교화나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은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그리려 했던 그의 예술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쿠르베가 활동하던 당시, 화가들은 역사, 신화, 성경과 같은 고귀한 주제를 다루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정물화 등 그림의 주제별로 작품의 가치와 크기까지 정해져 있었지요. 특히 '죽음'을 다루려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이나 나라를 지킨 영웅의 죽음처럼 고귀한 교훈이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오르낭의 매장>을 보여주는 이미지
<오르낭의 매장> 1849~1850년, 315x668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하지만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은 당시의 모든 규범을 깨뜨렸기에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쿠르베의 외종조부 장례식에 참석한 실제 오르낭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가로 길이가 약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캔버스에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직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그릴 때만 허용되던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림에는 영웅도, 역사적 중요성도, 도덕적 교훈도 없습니다. 그저 가난한 시골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장례식 장면일 뿐입니다.

 

  기존의 장례식 그림처럼 천사가 내려와 망자의 영혼을 축복하는 경건한 분위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보입니다.

 

  대단한 인물의 죽음이 아니라서 그런지, 성직자와 조문객들의 표정도 크게 슬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 앞쪽의 개 한 마리는 전통적으로 충성을 상징했지만, 이 개는 주인의 장례식에 무관심한 듯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쿠르베는 고귀해야 할 죽음이라는 주제를 '개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평범한 사건'으로 표현해 버린 것입니다.

 

  그림에는 뚜렷한 주인공도, 명확한 중심 주제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역사화처럼 거창하게 그렸습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 <오르낭에서의 매장에 관한 역사적 그림>이었던 것을 보면, 쿠르베는 위대한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역사처럼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화려한 색채를 사용했던 당시 작품들과 달리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칙칙합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이 작품은 살롱전에서 엄청난 혹평을 받았고,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전시 자체를 거부당했습니다.

 

  그러자 쿠르베는 행사장 길 건너편에 직접 땅을 빌려 '사실주의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는 유료로 입장료를 받으며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였는데, 이는 국가가 주도하는 살롱 시스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쿠르베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작품이 바로 <화가의 아틀리에>입니다.

 

<화가의 아틀리에>라는 작품을 보여주는 이미지
화가의 아틀리에, 1855년, 361x598cm, 오르세 미술관


  쿠르베는 정치적인 신념 때문에 말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871년 그는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인 '파리 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예술가 연맹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코뮌 정부는 72일 만에 무너졌고, 쿠르베는 나폴레옹의 상징이었던 방돔 기념탑 철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투옥됩니다. 그는 막대한 복원 비용을 떠안게 되어 모든 재산과 작품을 압류당했습니다.

 

  그 후 쿠르베는 1873년 스위스로 망명했고, 후원자의 도움으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망명 생활의 고통으로 항상 술에 취해 지내다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919년, 그의 시신은 고향인 오르낭으로 돌아와 묻혔습니다. 그의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이 결국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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