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생애와 작품, 원통과 구와 원뿔이라는 말의 진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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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자연을 원통과 구와 원뿔로 다루라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대개 세잔이 사물을 기하학 도형으로 단순화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소개되고, 그래서 입체파의 예고편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로 적힌 곳은 1904년 4월 15일에 그가 엑상프로방스에서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네 장짜리 자필 편지가 지금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 남아 있는 세잔·베르나르 서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문장 뒤에는 원근과 중심점을 설명하는 구절이 더 이어집니다. 그 대목을 함께 읽으면 뜻이 달라집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인상주의에서 출발해 그것을 해체하고, 20세기 회화가 딛고 설 바닥을 만든 화가
• 생몰: 1839년 1월 19일 엑상프로방스 출생, 1906년 10월 22일 같은 도시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와 파리
• 활동 분야: 후기인상주의 회화, 정물과 풍경과 인물의 구조 탐구
• 대표작: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연작, 〈생트빅투아르 산〉 연작,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대수욕도〉

왜 거의 20년을 거절당했는가

그의 화면이 당시 심사위원들이 완성으로 인정하던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벗어진 이마와 짙은 수염의 남자가 정면에서 약간 비껴 앉아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화상
폴 세잔, 〈자화상〉, 1878~1880년. 붓 자국을 지우지 않는 마무리가 그의 화면 전체를 관통합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화가로 인정받는 통로는 국가가 주관하는 살롱이었습니다. 매끄럽게 다듬은 표면, 명확한 윤곽, 이야기가 분명한 주제가 기준이었습니다. 세잔의 그림은 어느 항목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붓 자국이 그대로 남았고 윤곽은 여러 겹으로 흔들렸으며 사과 몇 알을 놓은 정물에 역사화 같은 무게가 실려 있었습니다.

거절은 거의 해마다 반복되었습니다. 다만 전 기간 내내 떨어진 것은 아니어서, 1882년에는 화가 친구 앙토니 기유메의 도움으로 〈L’Événement지를 읽는 화가의 아버지〉가 살롱에 걸립니다. 생전에 살롱에 입선한 것은 이때 한 번뿐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가 계속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재능이나 의지만이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는 모자 사업으로 재산을 모아 은행가가 된 사람이었고,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생활비를 댔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물려받은 재산은 그를 시장의 평가에서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를 깎아내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조건입니다. 경제적 독립은 같은 대상을 오랫동안 반복해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1874년에 그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하고 1877년 제3회까지 두 번 함께한 뒤 그룹을 떠납니다. 그는 인상주의의 빛과 색을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에 견고함과 지속성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1895년에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연 개인전에서야 젊은 화가들이 그의 이름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는 쉰여섯이었습니다.

어법은 언제, 왜 바뀌었는가

그의 변화는 도시를 옮길 때가 아니라 그리는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바뀔 때 일어났습니다.

어두운 초기(1860년대). 두껍게 바른 물감과 어두운 색조로 격정적인 장면을 그리던 시기입니다.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밀어 올린 화면이 많고, 주제도 폭력적이거나 극적인 것이 많습니다. 이 시기 그림만 보면 훗날의 세잔을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어두운 들판에서 두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누르고 있는 격렬한 장면. 물감이 두껍게 발려 있다
폴 세잔, 〈살인〉, 1867~1870년경, 취리히 뷔를레 재단. 어두운 색조와 두꺼운 물감으로 극적인 장면을 그리던 시기다.

인상주의를 통과하며(1870년대). 카미유 피사로 곁에서 야외 작업을 배우면서 색이 밝아지고 화면이 열립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두운 물감 덩어리 대신 색을 나란히 놓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곧 인상주의의 목표에 의문을 갖습니다. 순간의 인상을 붙잡고 나면 그 순간이 지나간 뒤에 무엇이 남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언덕 비탈에 낮은 돌집들이 붙어 있고 그 사이로 길이 굽어 내려가는 마을 풍경
폴 세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매달린 사람의 집〉, 1873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피사로 곁에서 야외 작업을 배우던 무렵의 그림이고,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에 나온 작품이다.

구성의 시기(1880년대 이후). 여기서부터 우리가 아는 세잔이 나옵니다. 그는 색을 짧은 붓질의 면으로 쌓아 대상의 부피를 만들었습니다. 윤곽선을 한 줄로 확정하지 않고 여러 번 그어 남겨 두었는데, 이것은 미완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듯한 시점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연작에서 인물들이 조각처럼 무겁게 앉아 있는 것도 같은 방법의 결과입니다.

작은 탁자에 세 남자가 둘러앉아 카드를 하고, 뒤에 선 네 번째 남자가 이를 지켜본다
폴 세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1890~1892년경,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인물들이 조각처럼 무겁게 앉아 있다.

정물에서는 더 노골적입니다. 그의 식탁 그림을 보면 접시의 타원과 식탁보 아래 탁자의 선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듯한 시점이 한 화면에 공존하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사과가 굴러떨어질 것 같은데도 화면 전체는 오히려 단단합니다.

구겨진 흰 천 위에 사과와 오렌지가 접시와 물병과 함께 쌓여 있는 정물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파리 오르세 미술관. 과일이 굴러떨어질 것 같은데도 화면 전체는 단단합니다.

원통과 구와 원뿔, 그 문장의 진짜 뜻

도형으로 단순화하라는 말에 그치지 않고, 그 형태들을 원근 속에 놓아 깊이를 구성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래는 이 편지를 우리가 읽은 방식이고, 정설로 굳어진 해석은 아닙니다.

초록과 황토색 붓자국이 겹쳐 쌓인 들판 너머로 푸른 산이 솟아 있는 풍경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1902~1904년. 앞을 가리는 것 없이 색면이 겹치며 거리가 만들어집니다.
화면 앞쪽에 큰 소나무 가지가 드리우고 그 너머로 들판과 산이 단계적으로 물러나는 풍경
폴 세잔, 〈큰 소나무가 있는 생트빅투아르 산〉, 1887년경. 앞쪽 나무가 있어 거리가 단계적으로 물러납니다.

1904년 편지의 해당 대목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자연을 원통과 구와 원뿔로 다루되, 그 전체를 원근 안에 놓아 사물이나 면의 각 측면이 하나의 중심점을 향하게 하라. 흔히 인용되는 것은 앞부분뿐이고, 뒷부분은 잘려 나갑니다. 그런데 문장의 목적어는 뒷부분에 있습니다. 목표는 도형이 아니라 원근, 즉 깊이입니다.

같은 편지의 다음 문장들이 그 목표를 더 분명히 말해 줍니다. 수평선에 평행한 선은 넓이를 만들고, 그것에 수직인 선은 깊이를 만든다고 그는 적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자연은 표면보다 깊이에 더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도형의 이름이 아니라 넓이와 깊이가 그가 붙들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즉 그가 젊은 화가에게 알려 준 것은 형태를 줄이는 방법이 아니라, 평평한 캔버스 위에서 대상이 돌아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색면을 조금씩 다르게 놓아 표면이 물러나는 느낌을 만드는 일, 그것이 그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 앞에서 했던 작업입니다.

이 오독이 오래간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르나르가 이 문장을 공개한 것은 1907년이었고, 입체파의 족보를 설명하는 근거로 쓰이기 좋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잔의 말은 자연을 기하학 도형으로 환원하라는 지시로 축소되어 전해졌습니다.

왜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라 불리는가

그가 회화의 목적을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화에서는 일관된 원근과 매끄럽게 완성된 형태가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세잔은 옮기는 대신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화면에서 사과는 사과처럼 보이는 것보다 화면 안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색과 면과 무게가 서로 버티며 만드는 구조, 그것이 그림의 본체가 되었습니다.

이 전환이 다음 세대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대상을 정확히 닮게 그리는 것이 회화의 의무가 아니라면, 화면은 다른 것을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의 화가들이 세잔에게서 가져간 것은 특정한 양식이 아니라 이 허가였습니다.

나무들이 좌우에서 삼각형으로 기울어진 강가에 벌거벗은 인물들이 무리 지어 있는 큰 화면
폴 세잔, 〈대수욕도〉, 1900~1906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인물이 풍경의 구조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는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세잔 자신은 자연에서 멀어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대상을 앞에 두고 그렸고, 편지에서도 자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를 추상의 아버지로 부르는 서술은 그가 연 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를 말할 뿐, 그가 어디로 가려 했는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글의 도판은 모두 위키미디어 커먼즈의 퍼블릭 도메인 파일입니다. 캡션에 재질이나 치수, 소장품 번호가 없는 작품은 소장기관 기록을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세잔의 그림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주요 작품이 모여 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미술관, 런던 코톨드 갤러리에도 대표작이 있습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여러 판본이 각기 다른 소장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소장처와 전시 여부는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Q. 왜 같은 산을 그렇게 여러 번 그렸나요?

A. 생트빅투아르 산은 그에게 대상이 아니라 실험 조건에 가까웠습니다. 대상이 고정되어 있어야 화면을 짓는 방법의 변화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판본에서는 나무와 집이 앞에 놓여 거리가 단계적으로 물러나지만, 후기로 갈수록 색면이 서로 겹치며 거리가 만들어집니다.

Q. 사과 정물이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A. 더없이 평범한 대상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이야기가 없어서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오로지 형태와 색과 배치의 문제로 남습니다. 그가 정물을 반복해 그린 것도 그래서입니다.

마지막 산

1906년 10월, 그는 야외에서 작업하다 폭풍우를 만났고 그 뒤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며칠까지 그의 이젤에 놓여 있던 것은 정원사 발리에의 초상이었다고 전해지지만, 만년의 그를 가장 오래 붙든 대상은 이 산이었습니다. 살롱이 오래 외면했던 화가가 남긴 그림에는 이 산 연작만이 아니라 초기의 인물화와 극적인 장면까지 들어 있었고,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07년 파리의 젊은 화가들은 그 그림들 앞에서 새로운 회화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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