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가 아니어서 겪은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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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수도원의 옛 식당에서 〈최후의 만찬〉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입니다. 한 번에 들어가는 사람은 많아야 40명이고, 입구에서는 자동문이 번갈아 열리고 닫히며 바깥 공기를 한 번 걸러 냅니다. 모두 그림을 지키기 위한 규칙입니다.

그 15분 동안 보는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8년에 남긴 그림과 같은 그림일까요. 그림을 관리하는 체나콜로 비친차노 미술관(Museo del Cenacolo Vinciano)은 원래 그림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이 벽화는 프레스코가 아니었고, 완성한 지 스무 해도 안 되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수도사들은 문을 넓히려고 그림 아래를 잘라 냈고, 화가들이 두 번 덧칠했고, 군대가 식당을 마구간으로 썼고, 폭탄이 식당 지붕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글은 먼저 레오나르도가 화면에 세운 장치를 보고, 그다음 그 그림이 날짜마다 무엇을 겪었는지 따라갑니다.

작품 한눈에 보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494년(또는 1495년)부터 1498년 초 사이에 마른 벽에 템페라로 그린 벽화로,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의 옛 식당 북쪽 벽, 그려진 자리에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확인한 것은 셋입니다. 첫째, 레오나르도는 배신을 막 알린 순간을 골라 열두 사도를 셋씩 네 무리로 흔들어 놓고, 그리스도만 빛 속에 홀로 고요하게 두었습니다. 둘째, 젖은 회벽이 아니라 마른 벽에 그린 탓에 그림은 일찍 상했고, 문 공사와 두 번의 덧칠, 마구간, 1943년의 폭격을 차례로 겪었습니다. 셋째, 1977~1999년 복원 뒤 지금 보는 그림은 구도와 몸짓은 레오나르도의 것이고, 표면은 남은 원래 물감과 복원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

격자 천장과 양쪽 벽에 어두운 걸개가 걸린 긴 방. 흰 식탁보를 덮은 긴 탁자 뒤에 열세 사람이 한쪽으로 나란히 앉아 있고, 가운데 붉은 옷과 푸른 망토의 인물 뒤로 창 세 개가 열려 있다. 탁자 아래 가운데에는 아치 모양의 회색 면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4(또는 1495)~1498년, 마른 벽에 템페라, 460×880 c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옛 식당 북쪽 벽, 밀라노. 복원 후 상태다. 탁자 아래 가운데, 그리스도의 발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치 모양의 회색 면이 차지하고 있다.

밀라노 수도원 식당의 북쪽 벽

레오나르도는 1482년 밀라노에 왔습니다. 그림 솜씨뿐 아니라 군사 기술자와 건축가로서의 재주를 늘어놓은 긴 편지로 자신을 소개했고, 1499년까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서 일했습니다. 「일 모로(il Moro)」라 불린 루도비코는 그라치에 수도원을 자기 권력을 기리는 장소이자 가문의 묘소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성당 제단부의 개축은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수도원 식당의 장식은 레오나르도에게 맡겼다고 미술관은 설명합니다.

그림은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모여 식사하던 방의 북쪽 벽 전체를 차지합니다. 제작 시기를 미술관은 해설 본문에서 「1494년부터 1498년 초 사이」라고 적지만, 같은 기관의 작품 정보와 일부 도판 설명은 1495년에서 시작합니다. 끝나는 쪽은 비교적 단단합니다. 주세페 보시가 1810년에 펴낸 이 그림의 연구서에는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가 1498년 2월의 일을 적은 『신성 비례』 헌정 글이 옮겨져 있는데, 거기서 이 식당의 그림은 이미 레오나르도가 「그의 손으로 그린」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의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16세기 이야기 작가 마테오 반델로는 자기가 여러 번 보았다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침 일찍 와서 비계에 올랐는데, 그림이 바닥에서 꽤 높았기 때문입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먹고 마시는 것도 잊고 붓을 놓지 않다가, 그 뒤 이틀이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루 한두 시간씩 와서 그림을 바라보기만 했고, 어떤 날은 기마상 점토 모형을 만들던 작업장에서 한낮에 곧장 걸어와 비계에 올라 인물 하나에 한두 획만 긋고 바로 떠났다고 합니다.

배신을 알린 순간의 화면

그림은 예수가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을 먹다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복음서 장면입니다. 미술관은 레오나르도가 이 말이 막 끝난 바로 그 순간을 붙잡으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화면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열두 사도는 손을 들거나 몸을 일으키거나 서로 붙잡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글에서 갑작스러운 마음의 동요가 얼굴에 웃음, 울음, 외침, 분노, 기쁨, 슬픔, 두려움, 고통으로 드러난다고 적었는데, 미술관은 이 그림을 그가 「영혼의 움직임」이라 부른 것을 자세와 몸짓과 표정으로 그린 그림으로 소개합니다.

탁자는 화면 폭을 거의 다 가로지르고, 열세 사람은 모두 탁자 뒤 한쪽에 앉았습니다. 보는 사람 쪽의 긴 변은 통째로 비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좌우로 세 명씩 두 무리, 모두 네 무리로 나뉩니다. 전통적으로 불리는 이름으로 왼쪽 끝에서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맨 왼쪽 무리에서는 바르톨로메오가 탁자 끝에 서서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 몸을 앞으로 내밉니다. 옆얼굴을 보이는 소야고보가 안드레아의 팔에 손을 얹고, 늙은 안드레아는 두 손바닥을 가슴 높이로 펴 듭니다. 둘째 무리가 이 그림의 소란이 가장 빽빽한 곳입니다. 흰 수염의 베드로가 왼손으로 요한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몸을 기울이고, 허리께에 붙인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습니다. 그 칼날이 바로 앞에 몸을 숙인 사람의 등 뒤로 보입니다. 그가 유다입니다. 유다는 오른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오른손에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가장 가까운 요한은 눈을 내리감은 채 고개를 베드로 쪽으로 기울이고 두 손을 탁자 위에서 맞잡았습니다.

그리스도 오른쪽으로 건너가면 셋째 무리가 있습니다. 대야고보가 두 팔을 활짝 벌렸고, 그 뒤에서 도마가 검지 하나를 위로 세웠으며, 빌립보는 일어서서 두 손을 가슴에 댔습니다. 맨 오른쪽 넷째 무리에서는 일어선 마태오가 얼굴은 오른쪽 끝의 두 사람에게 돌린 채 두 팔을 그리스도 쪽으로 뻗고, 탁자 끝의 시몬은 두 손바닥을 위로 펴 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타대오가 있습니다. 세 사람은 방금 들은 말을 서로 확인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유다를 다시 보면 그의 얼굴만 유독 어둡습니다. 미술관은 유다가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얼굴이 밝은 쪽으로 드러나 있는데 유다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그 빛에서 비켜나 있습니다.

긴 머리의 남자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살짝 벌린 얼굴. 붉은 옷 위로 왼쪽 어깨에 푸른 망토가 걸쳐 있고, 머리 뒤로는 창밖의 흐린 하늘과 푸른 언덕이 보인다. 얼굴과 옷에 잔금과 물감이 떨어져 나간 반점이 퍼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부분(그리스도), 1494(또는 1495)~1498년, 마른 벽에 템페라,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옛 식당, 밀라노. 복원 후 상태다. 머리 뒤에 후광 대신 창밖의 밝은 하늘이 있고, 얼굴과 붉은 옷 곳곳에 물감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보인다.

소란의 한가운데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눈은 탁자 쪽으로 내리깔았고 입은 조금 벌어져 있어, 미술관의 말로는 방금 말을 마친 사람의 모습입니다. 좌우의 요한과 대야고보 사이로 빈틈이 열려 있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서도 혼자입니다. 머리와 탁자 위 두 손을 이으면 이등변삼각형이 됩니다. 머리 둘레에 후광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신 바로 뒤가 가운데 창이라, 창밖의 밝은 하늘이 머리의 윤곽을 둘러쌉니다. 미술관은 레오나르도가 후광을 그리지 않고 빛으로 머리를 감쌌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두 손을 보면 그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접시 쪽으로 다가가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고 탁자 위에 놓였습니다. 오른손이 다가가는 곳을 따라가면 탁자 건너편에서 유다의 왼손이 같은 자리로 다가와 있습니다. 미술관은 두 팔이 거울처럼 마주 움직여 둘 사이의 접시로 다가간다고 설명합니다. 주인공과 배신자의 손이 한 접시 위에서 만나기 직전인 셈입니다.

방도 그리스도를 향해 짜여 있습니다. 미술관에 따르면 원근의 소실점은 바닥에서 4미터 높이, 그리스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습니다. 반델로가 그림이 높아 비계에 올라야 했다고 한 말과도 맞는 높이입니다. 격자 천장의 선과 양쪽 벽에 네 장씩 걸린 어두운 걸개의 모서리를 안쪽으로 따라가면 시선이 가운데 창과 그 앞의 머리로 모입니다. 탁자는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윗면이 넓게 보이는데, 미술관은 레오나르도가 원근의 수학적 규칙을 조금 바꿔 탁자 면을 기울여 보이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보이는 탁자 위에는 둥근 빵이 흩어져 있고, 붉은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과 생선 토막을 담은 금속 접시가 놓였습니다. 빵 옆의 작은 주황빛 열매를 미술관은 어린이용 활동지에서 오렌지로 찾게 합니다. 미술사가 존 바리아노는 2008년 논문에서 1997년 세척 뒤 드러난 이 생선을 오렌지 조각을 곁들인 장어구이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앞의 큰 접시는 비어 있습니다.

빛에도 실제 방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림 속 오른쪽 벽은 희게 밝고 왼쪽 벽은 그늘져 있습니다. 미술관은 이 빛이 식당 왼쪽 벽에 실제로 나 있던 창, 지금은 막힌 그 창에서 들어오던 빛과 방향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수도사들이 식당 가장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벽 위의 방은 그들의 식당이 한 칸 더 이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창밖 풍경도 거리를 따라 색이 바뀝니다. 가까운 언덕은 초록이고 먼 언덕일수록 푸르다가 옅은 하늘색으로 사라집니다. 미술관은 레오나르도가 『회화론』에서 「공기 원근법」이라 부른 방법이 여기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따라가 보면 이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은 열두 사도이고, 고요는 가운데 한 사람에게만 남겨져 있습니다. 사도들의 팔과 손은 이웃 무리로 넘어가 서로 이어지는데 그리스도 좌우만 비어 있습니다. 배신을 말한 사람이 가장 조용하고, 그 말에 놀란 사람들이 가장 시끄럽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고른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으킨 반응입니다.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과 비교

같은 주제를 같은 시대의 수도원 식당 벽에 그린 그림과 나란히 놓으면 레오나르도의 선택이 더 잘 보입니다. 피렌체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1480년 오니산티 성당 식당에 그린 〈최후의 만찬〉입니다.

아치 두 개 아래 반원 벽에 나무와 날아가는 새들이 그려지고, 그 아래 긴 탁자 뒤에 후광을 쓴 사람들이 한 줄로 앉아 있다. 한 사람만 탁자 이쪽에 등을 보이고 홀로 앉아 있고, 가운데 인물 앞에는 한 젊은이가 탁자에 엎드려 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1480년, 프레스코, 오니산티 성당 옛 식당, 피렌체. 유다만 탁자 이쪽에 등을 보이고 앉았고, 탁자 뒤 인물들의 머리에는 후광이 둘려 있다.

기를란다요의 화면에서 유다는 찾기 쉽습니다. 혼자 탁자 이쪽으로 나와 보는 사람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앞에서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 있고, 탁자 뒤의 사람들은 머리마다 후광을 둘렀습니다. 인물들은 대체로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다른 사도들과 같은 쪽 같은 무리에 앉혔고, 누구에게도 후광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유다를 표시하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그늘진 얼굴, 손에 쥔 주머니, 그리스도의 손과 같은 접시로 다가가는 손입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유다를 한눈에 집어내지 못하고, 사도들 사이를 하나씩 훑어야 찾아냅니다. 화면 안의 사도들이 「누구냐」고 술렁이는 동안 보는 사람도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기를란다요가 몇 해 뒤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또 다른 〈최후의 만찬〉은 상징으로 가득한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프레스코가 아닌 마른 벽 그림

르네상스 벽화의 표준은 프레스코였습니다. 갓 바른 젖은 회벽에 물감을 칠해 회벽이 마르면서 물감이 벽과 함께 굳게 하는 방법입니다. 대신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날 바른 부분을 끝내야 하고, 마른 뒤에는 고칠 수 없습니다. 미술관은 이 방법이 천천히, 여러 겹으로 공들여 그리는 레오나르도의 방식에 맞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레오나르도는 벽을 고르고 매끈하게 만드는 흰 준비층을 바르고, 그 위에 물감을 올렸습니다. 마른 벽에 그리는 이 방법을 이탈리아어로 「아 세코(a secco)」라 합니다. 물감은 안료를 달걀노른자에 섞은 「기름진 템페라」였습니다. 미술관의 표현으로는 벽에 그리면서도 나무판에 그리듯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미 그린 곳을 고칠 수 있고, 화면 전체를 한꺼번에 오가며 작은 세부까지 다듬을 수 있습니다. 반델로가 본 모습, 며칠씩 손을 놓고 바라보다가 한두 획을 더하고 가는 작업은 이 방법이어서 가능했습니다.

대가는 곧 나타났습니다. 물감이 회벽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벽 위에 얹혀 있었기 때문에 프레스코보다 훨씬 약했습니다. 미술관은 이 기법과 좋지 않은 환경 탓에 완성 직후부터 안료가 떨어져 나갔다고 설명하고, 이른 증언 셋을 인용합니다. 1517년 참사회원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는 이 그림이 「상하기 시작했다」고 적었고, 1568년 조르조 바사리는 「이제는 흐릿한 얼룩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썼으며, 1625년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은 「떨어지는 물감 조각」을 말했습니다. 보시는 1810년 책에서 그 원인으로 벽의 위치를 들었습니다. 바깥과 맞닿은 북쪽 벽인 데다 부엌과 음식 다루는 방이 붙어 있어 수증기가 찼다는 것입니다. 앞의 그리스도 세부에서 얼굴과 옷에 번진 잔금과 반점이 그 결과입니다.

문, 덧칠, 마구간, 폭탄

본작 도판에서 탁자 아래를 보면 사도들의 발이 탁자 다리 사이로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그리스도의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위가 아치로 둥근 회색 면이 있습니다. 미술관은 17세기에 도미니코회가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넓힌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보시의 책은 이 일을 더 자세히 적습니다. 그림 아래의 낮고 좁은 문이 못마땅했던 수도사들이 더 번듯한 입구를 원해 그리스도와 몇몇 사도의 다리를 잘라 냈고, 보시는 그 시기를 앞선 연구자 피노를 따라 1652년 무렵으로 적었습니다. 보시는 문 공사 때 벽을 두드린 망치의 충격으로 이미 들뜬 물감이 많이 떨어졌을 것이라고도 썼습니다.

그다음은 덧칠이었습니다. 보시에 따르면 1726년 수도사들은 화가 미켈란젤로 벨로티에게 그림을 맡겼고, 벨로티는 칸막이로 가린 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칠했습니다. 1770년에는 피르미안 백작의 추천으로 화가 마차가 일을 맡았는데, 남아 있던 원래 물감 조각을 쇠붙이로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그렸습니다. 새로 온 수도원장 파올로 갈로니가 작업을 멈추게 해서 오른쪽 끝의 마태오, 타대오, 시몬 세 사도는 마차의 붓을 피했습니다. 다만 보시는 그래서 이 세 사람이 손대지 않은 원래 그대로라는 소문에 대해, 그보다 앞선 벨로티의 덧칠을 모르는 말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미술관은 18세기 초부터 복원 시도가 아홉 번 기록되어 있고, 그 시절의 복원은 빠진 부분을 다시 그려 채우는 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1796년에는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에 들어왔습니다. 흔히 「나폴레옹 군대가 이 식당을 마구간으로 썼다」고 한 줄로 전하지만, 보시의 기록은 조금 다릅니다. 젊은 장군 보나파르트는 이 그림을 보고 그곳을 존중하고 군 숙소로 쓰지 말라는 명령서를 말에 오르기 전 무릎 위에서 써 주었습니다. 그러나 곧 다른 장군이 그 명령을 비웃으며 문을 부수고 식당을 마구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보시는 이 이야기를 그 자리에 있던 포로(Porro) 신부에게서 들었다고 밝혀 두었습니다. 같은 책에 따르면 말들이 내뿜는 김이 그림을 새 곰팡이로 덮었고, 그 뒤로도 식당은 창고와 건초 창고로 쓰였으며, 인물들을 향해 던진 벽돌 자국이 보시가 책을 쓸 무렵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1943년 8월에는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미술관에 따르면 수도원의 「망자의 회랑」 한가운데서 터진 폭탄이 주랑과 수도실과 도서관을 가루로 만들고, 식당의 벽 하나와 볼트 천장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맞은편 벽의 몬토르파노 〈십자가 처형〉에 금이 갔고, 〈최후의 만찬〉 위의 반원형 장식 벽, 곧 루네트도 손상되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북쪽 벽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미술관은 1940년 이 그림 앞에 세운 방공 보호물 사진을 함께 남겨 두었습니다.

1977~1999년 복원과 지금의 그림

20세기에 들어 복원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미술관은 이때부터 복원이 빈 곳을 다시 그려 넣는 대신 남은 것을 고정하고 지키는 일로 좁혀졌다고 설명합니다. 1908년 루이지 카베나기의 복원, 전쟁 뒤 마우로 펠리치올리의 작업이 있었고, 마지막이 피닌 브람빌라 바르칠론의 복원이었습니다. 미술관은 그 기간을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스무 해 넘게로 적고, 일부 도판 설명에서는 1998년까지로 적습니다. 이 복원은 처음으로 덧칠에 가려진 레오나르도의 붓질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같은 최후의 만찬 장면이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과 녹색으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 천장과 벽의 색이 탁하고, 뒷벽 가운데 창 위쪽에 작은 흰 사각형이 보인다
복원 전의 〈최후의 만찬〉, 1975년경 촬영. 화면 전체가 짙은 갈색과 녹색으로 가라앉아 있다. 촬영 조건이 달라 복원 후 도판과 색을 그대로 견줄 수는 없다.

1975년 무렵의 사진을 본작 도판과 나란히 놓으면, 복원 전에는 천장과 왼쪽 벽이 짙은 갈색과 녹색으로 가라앉아 걸개와 벽의 경계가 흐립니다. 복원 뒤의 도판에서는 천장 격자와 왼쪽 벽의 걸개가 다시 하나씩 구별됩니다. 오른쪽 벽의 밝은 면과 탁자 아래의 아치는 두 사진에 똑같이 있습니다. 두 사진은 찍은 때와 조건이 달라 색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덧칠 아래에서 되찾은 것이 새 그림이 아니라 같은 자리, 같은 짜임이라는 점은 두 장을 겹쳐 보면 드러납니다.

복원이 끝난 1999년 이후 식당 안의 공기는 여과 장치로 관리되고, 습도와 먼지를 늘 재며, 들어가는 사람 수와 머무는 시간을 제한합니다.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면 습도와 먼지가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미술관은 설명합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적은 15분과 40명, 번갈아 열리는 자동문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금 보는 그림은 1498년의 그림과 같을까요. 미술관이 밝힌 범위에서 답하면 이렇습니다. 열세 사람의 자리와 무리, 몸짓, 빛의 방향과 원근의 짜임은 레오나르도가 정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 위의 물감은 남아 있는 원래 층과 복원이 함께 만든 표면이고, 미술관 스스로 원래 그림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처럼 벽째 사라진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 무게를 둘 곳은 물감의 색보다 배치와 몸짓이라고 생각합니다. 500년 동안 가장 덜 변한 것이 그것이고, 미술관이 이 그림을 「영혼의 움직임」을 그린 그림으로 소개할 때 가리키는 것도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사리가 전하는 이야기

화가 전기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판과 1568년판 모두에서 이 그림을 다룹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사도들의 머리에 위엄과 아름다움을 너무 많이 주어서, 그리스도의 머리에는 거기 필요한 하늘의 신성을 줄 수 없다고 여겨 미완으로 남겼다고 썼습니다. 사도들의 얼굴마다 사랑과 두려움과 분노가 보이고, 식탁보의 짜임까지 실제 천보다 낫게 그렸다고도 적었습니다.

푸른빛이 도는 종이에 가는 선으로 그린 수염 난 노인의 상반신. 이마에 주름을 잡고 눈썹을 찌푸린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무언가를 노려보고, 한쪽 팔을 앞으로 뻗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도 반신상〉, 1493~1495년, 푸른 바탕을 칠한 종이에 은필, 펜과 갈색 잉크, 알베르티나, 빈, inv. 17614. 찌푸린 이마와 돌린 고개, 앞으로 뻗은 팔이 몇 개의 선으로 잡혀 있다.

바사리가 말한 사도들의 머리가 어떤 준비를 거쳤는지는 남은 소묘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빈의 알베르티나가 가진 〈사도 반신상〉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던 무렵인 1493~1495년의 소묘로, 푸른 바탕을 칠한 종이 위에 은필과 펜으로 노인의 찌푸린 이마와 돌린 고개를 붙잡았습니다. 벽화 속 사도들이 저마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을 떠올리면, 이런 머리 하나하나가 그 소란을 이루는 낱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68년판에는 1550년판에 없던 일화가 하나 더 들어갑니다. 레오나르도가 반나절씩 생각만 하고 앉아 있자 수도원장이 공작에게 불평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공작에게, 그리스도와 유다의 머리 두 개가 남았는데 유다의 모델을 찾아보겠지만 끝내 더 나은 사람을 찾지 못하면 그 성가시고 눈치 없는 수도원장의 머리를 쓰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공작은 웃었고, 수도원장은 정원 일이나 재촉하며 물러났다고 바사리는 적습니다. 흔히 레오나르도가 정말로 유다 얼굴에 수도원장을 그려 넣었다고 전하지만, 바사리의 글은 「쓰겠다」는 말에서 멈춥니다.

이 일화는 반델로의 목격담과 겹쳐 읽히기도 합니다. 반델로가 본 것은 며칠씩 손을 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이었고, 바사리의 수도원장이 못마땅해한 것도 오래 생각만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두 기록이 같은 장면을 가리킨다는 증거는 없지만, 같은 사람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본 기록으로 나란히 놓을 수는 있습니다. 다만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1494년에야 밀라노에 왔다고 쓰는 등 연도에서 틀린 곳이 있고, 이 일화는 그가 처음 책을 낸 지 18년 뒤에야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 레오나르도의 작업 방식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전승으로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밀라노에서 다시 볼 때

15분은 짧습니다. 들어가면 먼저 탁자 아래 가운데의 아치를 보고, 그 위로 올라가 그리스도의 두 손이 손바닥을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를 향한 손과 아래를 향한 손을 하늘과 땅에 견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다음 오른손이 향하는 접시를 따라 유다의 손과 그늘진 얼굴로 건너가면, 식당 왼쪽에서 들어오도록 그린 빛이 그림 속 오른쪽 벽을 밝히고 있다는 것도 눈에 들어옵니다.

체나콜로 비친차노 미술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8시 15분부터 오후 7시까지 열고(마지막 입장 6시 45분), 월요일에는 정기 점검으로 문을 닫습니다. 무료 입장을 포함해 모든 표는 예약해야 하고, 표는 대략 석 달 앞서 분기마다 한꺼번에 풀립니다. 예약 시각 30분 전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습니다. 2026년 10월 확인한 요금은 25세 이상 15유로, 18~25세 2유로, 18세 미만 무료입니다. 식당 안에서는 플래시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생애 전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와 작품에서, 밀라노 시절의 다른 그림은 〈암굴의 성모〉 루브르와 런던 비교에서, 몇 해 뒤 피렌체에서 시작한 초상은 모나리자 해설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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